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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4화 (4/256)

4화

등을 틀어 가람을 떨어뜨린 트리거는 지금 오고 있는 두 남자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몸을 뺐다.

가람은 멀미를 하려는 몸을 가누며 트리거의 속사포처럼 빠른 말을 듣다가, 훌쩍 등을 돌리고 순식간에 점이 되어 멀어지는 트리거를 황당한 눈으로 보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 등에 대고 길게 ‘고― 마― 워― 요―’ 하고 외쳐 주었다. 아마 귀가 밝은 트리거이니 들었을 거다.

가람의 생각대로 트리거는 별 무리 없이 그 말을 들었다. 끝까지 재미있는 아가씨다.

가람은 트리거가 자신이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데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며 신기해했지만, 트리거야말로 가람이 자신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서 놀랐다.

트리거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피어올랐다.

“잘 가라고, 가람.”

가람이 듣지 못한 인사가 바람에 묻혀 순식간에 사라졌다.

트리거가 작별 인사를 한 줄은 꿈에도 모르는 가람은 트리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입맛을 다시며 근처의 돌에 앉았다. 정말 쿨한 호랑이네.

돌에 앉고 보니 확실히 가람의 앞에 놓인 길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며 발로 밟아 만든 길이었다.

허리를 꺾고 누워 있는 불쌍한 풀들은 몸을 펼 새도 없이 밟혀서 길이 되었으리라.

조금 기다리자 트리거의 말대로 길 끝에서 마차가 나타났다. 가람은 바위에 걸터앉아 마차가 가까워지길 기다렸다. 그러면서 둘러댈 말을 준비했다.

일단 발목을 가볍게 삐었다고 말하고 지금은 다 나았다고 한 뒤, 어디로 가냐고 먼저 묻고 같은 방향이니 태워 달라고 해야겠다.

반드시 가람이 먼저 어디로 가는지 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조금 복잡해질 수 있었다.

마차는 가람을 발견했는지 천천히 속도를 줄여 가람의 앞에 멈춰 섰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짐마차였는데, 수레에 말을 매단 것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마부석에 앉은 두 남자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가람을 발견한 후 말을 멈추었다.

마차가 멈추기가 무섭게 가람은 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인사를 건네받기도 전에 냉큼 물었다.

“어디 가세요?”

인사를 건네려던 남자는 머쓱한 얼굴로 들어 올리던 손을 내려놓았다. 이제 사십 대 중반에 들어선 밝은 갈색 머리칼의 그는 통통한 배와 발그스름한 뺨이 제법 사랑스러운 아저씨였다.

그 옆에 앉은 남자는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대단한 미남이라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아마 보이는 것보다 더 먹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가람은 초조한 속을 감추고 대답을 기다렸다. 저 아저씨가 그러는 아가씨는? 하고 되물으면 일이 힘들어진다.

그러나 가람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두 남자 중 누구도 되묻지 않았다.

“베록시로 가오. 아가씨는?”

인사도 전에 목적지를 묻는 가람의 태도는 제법 무례한 것이었지만, 남자는 성격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아! 저도요! 저도 베록시로 가요! 저 발목을 삐어서 그런데 좀 태워 주실 수 있나요?”

“하하, 성격 급한 아가씨군그래. 보다시피 마부석은 다 찼고, 저 뒤에 포도주 통에 끼어서 타야 하는데 괜찮겠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가람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당연하죠!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 어서 뒤에 타요. 갈 길이 바쁘니.”

수레가 꽤 높아 오르기 쉽지 않았으나 가람은 간신히 마차에 올라탔다. 가람이 탄 것을 확인한 남자는 천천히 다시 말을 몰았다.

마차가 출발하자 가람은 그제야 해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일단 한 고비는 넘긴 것이다. 이대로 도시로 가 정보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아가씨 이름은 뭐요? 나는 제롬이고 이 옆에 말수 없는 남자는 모르드레드라는군. 이름이 참 특이하지?”

밉지 않게 옆 사람의 소개까지 대신 마친 제롬은 빙그레 웃었다.

가람은 본명을 말할까 말까 하다가 여차하면 동양인이라 그렇다고 우기면 된다는 생각에 진짜 이름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딱히 생각해 둔 가짜 이름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제 이름은 가람이에요.”

가람의 말에 모르드레드라는 남자가 처음으로 가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친숙한 기분. 출처를 알 수 없는 친근감이 무턱대고 솟아올랐다.

그의 잘생긴 외모 탓이라고 생각하기엔 호감이 너무 짙었다.

그 사람을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그라면 믿고 따라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처음 겪는 감정에 가람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어? 벌써 둘 사이에 아저씨는 끼어들면 안 되는 감정이 싹트고 있는 건가?”

실없는 제롬의 말에 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정신없이 모르드레드를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모르드레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가람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제롬이 특유의 여유로운 어조로 가람을 달래기 시작했다.

“저 친구가 원래 좀 저래. 잘생겼지? 허허, 남자인 내가 봐도 잘생겼다니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저 친구도 자기 잘생긴 거 아는지 엄청 도도하다니까. 저 친구랑 같이 온 지 벌써 2일짼데 처음 인사 외에 목소리 들어 본 게 열 번도 안 된다는 거 아닌가. 그래도 가람에게는 웃어 줬잖아? 나보다 훨씬 낫구먼. 아저씨는 서러워. 허허.”

말을 마친 제롬은 잠시 소변을 보고 오겠다며 마차를 세웠다. 갑자기 모르드레드와 단둘이 남게 된 가람의 손가락이 긴장으로 굳어 갔다.

모르드레드는 제롬이 아주 멀찍이 가 나무 뒤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윽 고개를 빼어 가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특유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곳에서 패스파인더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만나서 반가워.”

갑작스러운 말에 가람은 이 남자가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모르드레드를 바라보았다. 가람의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태도에 모르드레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가람의 손등을 뚫어져라 쳐다본 모르드레드는 괜히 가람이 의식해 손등을 가리자 다시 물었다.

“너 이계인 아냐?”

가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전 모르겠스서쉅, 습니다.”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가람의 입에서 이상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모르드레드는 재미있다는 눈으로 가람을 보다가 아 하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떠올리고 보니 가람의 태도가 그에 꽤 맞아떨어진다.

“너 혹시 첫 차원 이동이야?”

“네? 그런데요?”

대답한 가람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마녀로 몰려서 죽는 일만 남았나 하고 전전긍긍하던 가람에게 모르드레드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패스파인더니까.”

“패스파인더요?”

“나도 차원 이동 했다고.”

가람은 믿을 수 없는 우연에 입을 딱 벌렸다. 이건 꿈이 확실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모르드레드는 가람이 이것이 꿈인 이유를 논리적으로 꼽는 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직 때 묻지 않고 순수해 보이는 파인더가 그를 추억으로 이끌었다.

잠시 추억에 젖었던 모르드레드는 바지춤을 챙기며 걸어오는 제롬을 발견하고 마부석에서 내려와 수레로 옮겨 탔다.

가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큰 체구 탓에 포도주 통에 끼어 앉기가 쉽지 않아서, 그는 아예 포도주 통 위에 걸터앉았다.

“저, 저기, 왜 여기에 앉으세요?”

“듣고 싶은 게 많겠지? 저기 앉아 있으면 둘만 들리는 대화를 하는 건 힘들거든. 내가 아직 거기까지 마법을 잘 쓰진 못해서 말이야. 좀 있다가 결계를 칠 건데, 그 안에서 하는 이야기는 결계 안에 있는 사람밖에 못 들어. 저 착한 아저씨는 못 듣는다는 거지. 사실 우리가 하는 대화가 크게 떠들 만한 건 아니잖아?”

“네? 저기, 지금 마법이라고 하셨어요?”

가람의 말에 대답한 것은 모르드레드가 아니라 제롬이었다.

“그렇다네. 벌써 꽤 친해졌군. 저 청년은 뛰어난 마법사야. 베록까지 태워 주는 대신 나를 지켜 주기로 했지. 아가씨는 그냥 있기만 해도 돼. 아름다운 아가씨는 언제나 행복을 주는 존재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며 제롬은 밉지 않게 가람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모르드레드는 제롬이 마차를 출발시킬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의 관심이 완전히 멀어졌을 때를 기다려 재빨리 결계를 쳤다.

보이지도 않는 은밀한 막이 두 사람을 덮었다. 그 막에 가람은 마치 몸 위에 거추장스러운 무언가를 입은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기지개라도 켜려는 가람을 모르드레드가 재빨리 말렸다.

“조심해, 얇게 친 결계라 쉽게 부서질 수도 있어.”

“죄송해요.”

가람이 손을 거두고 앉자 모르드레드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물어봐.”

모르드레드가 궁금한 건 뭐든 알려 주겠다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얼른 질문하지 못했다. 궁금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였다.

그런 가람을 모르드레드는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기다려 주었다.

“저는 돌아갈 수 있나요?”

“응.”

너무 태연한 대답에 가람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모르드레드를 보았다.

“언제요?”

“음, 너 손등에 문신 있지?”

“네, 여기요!”

가람은 재빨리 손등을 내밀었지만 모르드레드를 흘긋 쳐다보기만 할 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나한테 보여 줘도 소용없어. 그건 너한테만 보이는 거니까. 각성한 후 잠깐 동안은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이는 모양이지만, 보통은 네 눈에만 보이지.”

그래서 트리거가 손등의 빛나는 문양 어쩌고 했던 모양이다. 가람은 어젯밤의 기억을 잠시 떠올리다가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아까는 제 손등 보셨잖아요?”

“아, 그건 본 게 아니라 기운을 느낀 거야. 거기에 뭐든 좋으니까 변하는 문신 있어?”

“네, 있어요. 48등분 되어 있는데, 지금 13등분까지 차 있네요. 어제는 3등분이 전부였는데.”

“그게 다 차면 집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어.”

“어떻게요? 어떻게 채워요? 어떻게 돌아가요?”

“한 시간마다 하나씩 찰 거야. 다 차면 돌아가는 문을 열 수 있지. 그리고 거기서 이쪽으로 올 때는 아무 때나 열 수 있어. 베이스캠프는 원래 그러니까. 그 문신은 나침반인데, 그걸로 패스를 찾을 수 있지.”

시간만 지나면 된다는 말에 가람은 안심했다. 꿈치고는 개연성이 너무 뛰어나서 불안하던 참이었는데, 돌아갈 수 있다고 하니 그저 돌아가서 참 이상한 경험이었다, 하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게 안도하는 가람을 잠시 바라보던 모르드레드는 다시 물었다.

“더 궁금한 건 없어?”

“아까 패스파인더라고 하셨는데, 그게 뭐예요?”

“아, 그거? 너나 나 같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거야. 차원을 넘나들며 패스를 모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은가요?”

가람의 질문에 모르드레드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뭐? 어떻게 그런 질문을……. 너 대체 언제 차원 이동 했어?”

“어제요.”

“그래, 어제 했으면……. 뭐? 어제?”

“네.”

가람은 대답하고도 뭐가 잘못되었나 싶어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모르드레드는 혀를 찼다. 이건 새싹 정도가 아니라 아주 씨앗이었다. 이제 간신히 이슬 좀 받은 씨앗.

“그럼 이렇게 아무것도 모를 만도 하군. 어제가 생일이었지?”

“정확히는 오늘이 생일이에요. 오늘 자정에 여기로 왔으니까…….”

“그렇군. 일단 질문에 대답부터 해 줄게. 패스파인더가 많은지 적은지는 나도 대답할 수 없어. 네가 내가 만난 두 번째 패스파인더거든. 패스파인더가 차원을 넘나드는 건 알지? 차원의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두 패스파인더가 한 차원 안에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

“이해는 잘 안 가지만, 그렇군요. 그런데 패스가 뭐예요?”

“아, 그거? 일종의 화폐야. 패스파인더들의 화폐.”

“뭘 살 수 있는데요?”

“값만 맞는다면 뭐든 살 수 있지. 능력이든, 육체든, 다른 차원이든.”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엄청 좋아 보이는데, 그거 어떻게 찾는 거예요?”

“문신에 시곗바늘 같은 게 있지? 그게 가리키는 곳에 있어. 그 차원에 패스가 없으면 그냥 동그란 점으로 나오지. 패스가 있으면 그곳을 가리키는데, 한번 패스를 찾고 나면 다음 패스를 찾기까지 시간이 좀 걸려.”

어제 본 시계 침 같은 바늘의 용도가 방향 지침이었던 모양이다.

패스는 일종의 보물이고 문신은 그걸 찾는 나침반이라는 거지. 가람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지금까지 들었던 내용을 정리했다.

“저는 이틀에 한 번 차원을 열 수 있고, 문신의 바늘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면 패스가 있고, 그걸로 여러 가지를 살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 산다는 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말 그대로야. 봐, 이 마법.”

모르드레드가 손을 펼치자 그 위로 온도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새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실제로 마법을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라 가람이 탄성을 터뜨렸다.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마법도 무엇도 쓸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어. 하지만 패스를 모아서 능력을 샀지. 너도 패스를 찾으면 능력부터 갖추는 게 좋을 거야. 능력이 있어야 뭐든 쉽거든. 내가 산 능력도 그리 강한 건 아니지만. 괜히 다른 차원을 사겠다고 하다간 진짜 죽도록 개고생 하고 나서야 정신 차릴걸.”

“구입은 어디서 해요?”

“모든 건 나침반으로 할 수 있어. 아마 본능적으로 패스가 어느 정도 모이면 그걸로 뭘 살 수 있다는 느낌이 올 거야. 무엇이든 살 수 있어. 패스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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