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5화 (5/256)

5화

“차원을 산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너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한마디로 네가 갈 수 있는 차원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이야기야. 지금은 베이스캠프와 여기밖에 오갈 수 없지만 차원을 하나 더 사면 거기도 갈 수 있지. 엄청나게 비싸긴 하지만 말이야. 이 차원을 포기하고 다른 차원으로 바꾸는 것도 있는데, 그건 조금 싸. 나는 거의 300년을 살았지만 다른 차원을 살 정도로 패스를 모은 사람은 본 적이 없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가람은 300년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문양이 다 차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는 조금 흘려듣고 있었기 때문에 반응이 조금 늦었다.

가람은 저도 모르게 모르드레드를 가리키고 말을 더듬었다.

“사, 삼, 삼백?”

모르드레드는 조금 불만스레 자신을 가리킨 가람의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너 정말 예의 없는 손가락을 갖고 있구나?”

가람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저 말을 어디서 또 들었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가람은 재빨리 손가락을 갈무리했다. 모르드레드는 끝까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가람을 보다가 픽 웃었다.

“왜? 삼백 살이니 할아버지 같아?”

“네.”

“……너 진짜 대답 시원하게 한다.”

집에도 돌아갈 수 있고, 별다른 노력이 없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가람은 이제 제법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불안과 초조로 빳빳하게 긴장하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모르드레드는 그 변화가 놀라웠다.

“어차피 패스파인더들은 수명이 없어. 패스를 찾아서 몸을 바꾸니까.”

“전 그냥 집에 돌아갈 건데요?”

“아니, 넌 반드시 패스를 찾으려고 할 거야. 그건 모든 패스파인더들의 본능이자 숙명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모르드레드는 조금 엄숙해 보였다. 가람은 무거워진 분위기가 기껍지 않아서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패스파인더예요? 무슨 신의 선택을 받아서?”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영혼의 태생이 다르기 때문이지. 전에 패스로 패스파인더에 관한 지식을 샀을 때 알게 된 거야.”

“그런 것도 살 수 있구나.”

“말했잖아? 뭐든 살 수 있어. 네가 생각하는 무엇이든 말이야. 설사 목록에 없는 것이라도 네가 그걸 바란다면 새롭게 가격이 매겨져서 나오지. 그리고 우리는 그걸 사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어.”

모르드레드는 기이하게 아름다운 녹색 눈으로 가람을 바라보며 다시 확신을 담아 말했다.

“너도 그렇게 될 거야.”

그 후 모르드레드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마른 풀과 흔치 않은 고목을 찾아 불을 피울 때가 되자 모르드레드는 슬쩍 가람에게 와서 혹시 패스를 찾을 생각이라면 도와주겠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러나 가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는 가족이 있고 생활이 있었다.

그에게서 들은 패스파인더의 삶은 분명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매력적인 만큼 그가 말하지 않은 단점도 반드시 존재할 것이었다.

가람이 거절하자 모르드레드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래, 가람 양은 아버지를 찾아가고 있다고?”

“네에.”

가람은 제롬이 건넨 마른 빵을 먹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단단하기가 마치 벽돌 같아서 안간힘을 써서 이를 박으려고 드는데도 빵은 흠집 하나 나지 않고 있었다.

가람은 갑자기 어제 트리거와 먹었던 고기나무의 열매가 몹시 그리워졌다.

“저런. 나도 가람만 한 딸이 있는데.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겠어.”

“네에. 정말요.”

가람은 빵에 박힌 이빨을 빼고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드레드가 그런 가람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가람은 그 기척을 느끼고 모르드레드를 노려보았다가 다시 빵에 이를 박았다. 어차피 하루만 있으면 이 동네도 떠난다.

내일 밤 자정이면 가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문을 열 수 있게 될 터였다.

가람은 문신이 얼마나 차올랐는지 확인했다. 아까부터 틈만 나면 손등을 보고 있었다. 차오르는 문양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었다.

일단 돌아가기만 하면 따뜻한 밥에 스팸과 반찬으로 포식을 할 거다. 이런 딱딱한 빵 따위!

“그런데 제롬 씨 따님은 어디에 계세요?”

가람은 결국 빵 먹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아작아작 잘도 이 단단한 빵을 먹고 있는 제롬을 신기한 눈으로 관찰했다. 제롬은 이빨이 무슨 무쇠라도 되는지 별 어려움 없이 빵을 베어 먹고 있었다.

한참 빵을 먹던 제롬은 가람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잘 웃는 아저씨라고 가람은 멀뚱히 생각했다.

“에이, 내가 귀족도 아닌데 무슨 제롬 씨야. 그냥 제롬 아저씨라고 불러. 뭣하면 제롬 오빠도 좋고. 허허헛. 이건 내가 좀 꼴불견인가? 농담일세.”

“그냥 제롬 아저씨라고 부를게요.”

“그려, 그러게. 내 딸은 고향 벨바리아에 있지. 이 포도주는 벨바리아 특산품인데 우리 집에서 담근 거야. 우리는 매년 이렇게 담근 포도주를 도시에 팔아 먹고산다네. 집에서 딸이 선물을 사 오길 기다리고 있을 텐데. 딸이 정말 보고 싶구먼.”

말을 마친 제롬은 울적해진 얼굴로 다시 빵을 베어 물었다. 가람은 그런 제롬에 자신의 아버지를 겹쳐 보았다. 집에 돌아가면 먼저 아빠를 꼭 안아 주고, 엄마에게도 사과해야지.

분명 어제 아빠가 집에 일찍 돌아오신 건 자신의 생일을 위해서였을 터였다.

매일매일 야근하시면서도 가람의 아버지는 반드시 가람의 생일에만은 일찍 들어오셨다. 상사에게 어떤 꾸지람을 들으시더라도 말이다.

가람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을 떠난 지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도 가족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자신이 패스파인더라니. 패스를 찾아 여행하게 될 거라니. 모르드레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이었다.

“그래, 아버지는 베록에 계신가?”

마음을 좀 진정시킨 제롬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린 아가씨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한 제롬의 뺨이 미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네.”

“그래, 무슨 일을 하시나?”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아버지와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라서…….”

“그렇구먼. 동양인이라면 대부분 무역상에서 일하지. 칼츠버그 공작가가 운영하는 에르비에르만 상단이 아마 세계에서 가장 큰 무역상일 거야.”

“그 무역상은 어디에 있는데요?”

“그야 칼츠버그 영지에 있지. 칼츠버그는 나도 아직 못 가 봤는데, 항구를 끼고 있어서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더군. 거기 집들은 모두 바닷가의 백사로 지어져서 새하얗다는데.”

“베록시는요?”

가람의 말에 제롬이 당황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칼츠버그 영지를 상상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제롬은 갑자기 옆구리를 찔린 기분이었다.

“베록시에는 큰 무역상 없어요?”

“으, 응? 베록시에도 있지. 그래! 베록시에 있는 무역 상단도 좋은 곳이야.”

제롬은 가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둘러댔다. 가람은 일부러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롬을 바라보았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모르드레드가 헛웃음 소리를 냈다.

가람도 저 착한 아저씨에게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하루는 더 이곳에 있어야 한다.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의심할 여지는 미리 없애 두는 게 좋았다.

“내가 무식해서 이름은 잘 모르지만, 베록시에 있는 무역 상단도 좋은 상단이라고 들었어. 하하. 자, 빵 다 먹었나? 이크, 왜 그것밖에 안 먹었어?”

가람이 이로 조금 갉다 만 빵을 보고 제롬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아빠 걱정에 밥이 목으로 안 넘어가는 게 분명해.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몸이 버티는데.

“그냥 오늘은 별로 입맛이 없네요. 일부러 주셨는데 죄송해요.”

“아니, 아냐. 괜찮아. 물에 적시면 먹기 쉬우니까 그렇게라도 먹어. 자, 여기 내 물통 있네.”

언제 마실 물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길에서 물은 식량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가람은 그저 감사 인사를 하고 물을 받아 들어 빵을 적셨다.

제롬의 말대로 빵은 물에 젖자 언제 단단했었냐는 듯 곧 먹기 좋게 풀어졌다. 빵은 건빵보다도 별맛이 없었지만 가람은 배를 채우기 위해 우물우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 잘 먹는구먼.”

제롬은 흐뭇하게 가람이 빵을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르드레드는 가람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곧 바닥에 모포를 깔고 몸을 뉘었다.

맨몸으로 방을 나온 가람은 모포는커녕 신문지 하나 없었기에, 제롬의 수레를 덮는 천을 빌려 깔고 누웠다.

세 사람은 별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아래에 나란히 잠에 빠져들었다.

각자 다른 꿈을 꾸며.

* * *

다음 날 아침 제롬 일행은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섰다. 밤새 충분히 쉰 말을 쓰다듬으며 제롬이 마차를 정비하는 사이 가람은 재빨리 수레 뒤로 올라탔다.

제롬이 그런 가람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모르드레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곤 제롬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모르드레드를 보고 제롬은 불쌍한 아가씨 또 하나 상처받는다며 혀를 찼지만 정작 가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실 가람은 오늘 자정만 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설렘의 공간 속에 있었다.

그런 가람의 별빛이 일렁이는 듯한 눈망울을 어찌 해석했는지, 제롬의 시선이 측은해졌다. 저 나쁜 모르드레드 놈이 또 귀여운 아가씨 하나 상사병 걸리게 만들었군.

“자, 가람 양, 이거 받아.”

가람은 잠도 덜 깬 상태로 제롬이 내민 것을 넙죽 받아 들었다. 받아 들고 보니 어제 먹다가 이가 부러질 뻔했던 딱딱한 빵이었다.

가람의 표정이 굳자 제롬이 가람의 손을 꼬옥 붙잡고 격려했다.

“힘내. 세상에 남자가 저놈만 있는 게 아니야.”

뒤늦게 그 말뜻을 알아들은 가람은 항의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오늘 저녁이면 한여름 밤의 꿈으로 사라질 세상이다.

제롬은 그런 가람의 손에 물통까지 들려 주곤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탄 마차는 천천히, 그러나 느리지 않은 속도로 부지런히 길을 달려갔다.

‘트리거는 돌아갔겠지?’

본래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그 커다란 호랑이는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만남부터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고기나무 열매의 고기를 구워 먹는 호랑이라니. 그 정도 되면 말을 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불도마뱀은 어떻고.

가람이 그렇게 혼자 비실비실 웃고 있는데,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몹시 급하게 멈췄기에 가람은 옆의 포도주 통에 호되게 뒤통수를 박고 말았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가람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아직도 별이 튀는 시야로 마부석에 빠끔히 고개를 내밀자 모르드레드가 낮게 경고했다.

“적이다. 머리 숙여.”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었다. 온통 키 작은 풀뿐이라 몸을 숨기기도 여의치 않을 텐데, 적들은 잘도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가람은 허둥지둥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거의 동시에 가람의 머리 바로 위로 화살이 날아들어 포도주 통에 깊게 박혔다.

머리 위에서 울린 섬뜩한 소리에 가람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이마에 화살로 피어싱을 하게 되었을 거다.

그런 가람을 본 모르드레드는 혀를 차고는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만들어 냈다. 예의 가람이 보았던 새파란 불꽃이다. 그러곤 그대로 허공을 가로로 그었다.

모르드레드의 푸른 불꽃은 그가 그은 허공의 궤적을 따라 화르륵 불이 붙더니 곧 그것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갔다.

어찌나 열기가 강한지 땅의 돌까지 지글지글 익어 내렸다. 가람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조차 하기 전에 적들은 모조리 타서 재가 되어 버렸다.

어마어마한 고온에 형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람과 제롬이 입에서 침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경악하는 동안 모르드레드가 불러낸 마법의 불꽃은 딱 그가 원하는 범위만을 잿더미로 만들고 사라졌다.

“자, 자네 엄청난 마법사였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제롬이 더듬더듬 말했다. 스펠이나 준비도 없이 이만한 마법을 발동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능력이었지만, 제롬은 마법에 무지하기에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이 마법의 무지막지한 위력에 놀랄 따름이었다.

모르드레드는 감흥 없는 얼굴로 그의 말을 듣다가 곧 가람에게 과시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이 명백히 의미하는 것에 가람은 눈을 피했다.

조금 멋있긴 하지만 집에 돌아가는 게 최고야. 머리 위로 화살이 지나갔던 방금 전을 떠올린 가람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적들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출발하죠.”

모르드레드는 긴 다리로 마부석에 앉았다. 제롬이 멍하니 잿빛으로 산화한 벌판을 보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그 옆자리에 앉았다. 마치 제롬이 모르드레드의 마부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모르드레드의 엄청난 마법에 놀란 제롬은 간간이 화살이 박힌 포도주 통의 안위를 걱정했을 뿐,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받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마차는 야수들판의 오솔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사실 제롬은 모르드레드가 마법사라고 말을 했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이 젊은 청년이 마법을 써 봐야 얼마나 쓰겠나 싶었던 것이 제롬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외양상 모르드레드만 한 나이의 마법사들은 돌멩이 하나를 허공에 띄우거나 컵 한 잔 정도의 물을 생성해 내거나, 간신히 장작에 불을 붙일 정도의 불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제롬이 모르드레드와 계속 동행한 것은 능력을 믿어서라기보단 걷고 있던 그가 너무 안돼 보여서였다.

그런데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길을 대책 없이 걷고만 있던 딱한 청년이 실로 이런 엄청난 마법사였다니.

불편한 침묵 속에 가람이 그토록 고대하던 저녁이 왔다.

예의 그 단단하고 아무 맛이 없는 빵으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가람은 모포에 누워 손등만 보고 있었다. 저런 빵으로 삼시 세끼를 먹다간 곧 영양실조에 걸리고 말 거다.

가람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어서 빨리 문양이 다 차기를 뜬눈으로 기다렸다. 문양이 다 차면 베이스캠프인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드디어 문양이 다 차는 순간, 문양은 약하게 신호처럼 빛을 뿜어내고 사그라졌다.

가람은 제롬과 모르드레드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일어나 거목 뒤에 섰다. 둘 다 자고 있었지만, 은밀한 장소를 고른 것은 가람의 본능이었다.

가람은 베이스캠프의 집을 떠올리고 문이 열리기를 바랐다. 모르드레드의 말에 따르면 그것만으로 문은 열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올 때도 가람은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않나.

그런 가람의 바람대로 곧 문이 생겨났다. 이곳에 올 때도 한 번 보았던 낯설지 않은 문이었다.

“가는 건가?”

조용히 떠나려는 가람의 등 뒤로 모르드레드가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가람은 그가 모르드레드임을 깨닫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놀랐잖아요.”

“제롬이 깰까 봐 조용히 올 수밖에 없었어. 그나저나, 결국 가는군. 탐나지 않나? 아까 낮에 봤던 그 힘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전혀 흥미 없어요.”

가람의 단호한 거절에 모르드레드는 양손을 들고 깨끗이 물러났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드레드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가람은 그 미소가 싫었다. 어쩐지 매우 불길하고 기분이 나빴다.

“작별 인사는 할 수 있겠네요. 잘 있어요, 모르드레드. 여러 가지 말해 줘서 고마웠어요.”

가람의 작별 인사에 모르드레드는 화답 대신 얼굴의 미소만 더욱 진하게 띨 뿐이었다.

어차피 결국 만날 테니 작별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가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곤 이 세계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뒤 그대로 구멍으로 들어섰다.

“다음에 올 땐 신발 챙겨 신고 와!”

그녀의 등 뒤로 모르드레드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뒤따르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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