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모르드레드는 가람의 불안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자신도 처음엔 저랬을까. 저렇게 약하게 떨며 흐느꼈을까.
가람의 눈동자는 모르드레드의 해묵은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그는 기묘한 기분에 젖어 자신에게 매달리는 작은 가람을 내려다보았다.
약하고, 어리다. 이 패스파인더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이 삶에 익숙해지리라. 모르드레드가 그랬던 것처럼.
“저기요? 모르드레드 씨?”
대답을 기다리던 가람은 모르드레드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참지 못하고 다시 불렀다. 숨기지 않은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나 흘러넘치고 있었다.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사람들이 어디에 갔는지는 나도 몰라. 다만, 왜 그런지는 설명해 줄 수 있지. 좀 길어질 테니, 앉지.”
모르드레드는 옆의 키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람은 그 옆의 더 작은 바위에 앉았다. 가람이 들을 준비가 끝났음을 확인한 모르드레드는 설명을 시작했다.
“패스파인더는 패스로 구입하지 않는 이상 하나의 차원을 가지지.”
“저는 두 개인데요?”
“더 들어. 가진다는 말은 단순히 문을 연다는 뜻이 아니야. 그 차원이 활성화된다는 걸 말하는 거야. 시간이 움직이고 사물이 작용하며 발전도 하는 그런 것 말이야. 해도 뜨고 달도 뜨고 그러는 것.”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람의 세계는 멈춰 있었다. 그것이 활성화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패스파인더가 처음 차원 이동을 했을 때, 기존의 차원은 베이스캠프가 돼. 패스파인더가 떠난 그 시점 그대로 고정되는 거지. 사람들이 왜 사라지는지는 나도 몰라.”
“모르드레드 씨도 베이스캠프가 있으세요?”
“물론이지.”
“저기, 그럼 시간이 멈췄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조금 달라. 말 그대로 고정되었다는 뜻이야. 네가 만약 베이스캠프의 물건을 부수거나 베이스캠프에 무언가를 건축해도 네가 차원 이동을 했다가 귀환하면 늘 처음 그 상태, 고정된 상태로 돌아가지.”
“그럼 만약에 가스 불이나 그런 게 켜져 있는 상태면 어떡해요? 폭발하거나?”
“가스 불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 계속 켜 두면 위험해질 수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모닥불 같은 걸 켜 둔 상태로 사라졌다면 모닥불이 산불로 번질 수도 있잖아요.”
“그런 일은 없어. 네 차원의 활성화는 너의 손에서, 네 시야 안에서만 이루어지니까.”
“제가 보지 못하는 곳은 멈춰져 있다는 건가요?”
“이해가 빠르군.”
가람은 더 이상 이 상황이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꿈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몇 번이나 자고 깨어나도 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세상의 어떤 꿈보다 깊고 긴 꿈이리라.
“아직 완전히 이해가 된 건 아니에요.”
“단순히 생각해.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하나 생긴 거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 네 것이지. 너는 거기 물건들이나 지식을 이용해서 패스를 찾으면 돼.”
“패스요?”
“그래. 패스.”
“갑자기 무슨 패스예요?”
모르드레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그럼 너 뭘 할 생각이었냐?”
“그건 아직…… 생각 안 해 봤어요. 좀 기다려요! 아직 다 정리가 되지 않았단 말이에요.”
가람은 모르드레드의 말을 종합해 머릿속을 정리했다.
모르드레드는 그동안 혀를 차며 발끝으로 작은 돌멩이를 굴리는 발장난을 했다. 잠시 후, 가람은 머쓱하게 말했다.
“정리됐어요.”
“그래, 그럼 지금부터 패스를 찾을 거지?”
“패스를 찾아서 뭘 하려고요?”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구나? 가족을 찾아야지.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지 않아?”
모르드레드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가람은 달큰하게 웃는 모르드레드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어딘가 마력적인 그 미소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패스를 찾아서 그걸로 네 가족들을 사야지.”
가람은 모르드레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가람이 원하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가족을 산다고? 혐오스럽게 뇌까린 가람은 그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패스를 찾겠어요. 그리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겠어요.”
모르드레드가 손을 뻗어 가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 잘 생각했어. 내가 찾는 걸 도와주지.”
* * *
“제롬 씨는 어디로 간 거예요?”
길을 걷기 시작한 지 한참 만에 가람이 물었다. 둘은 가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가람은 생각할 것이 많았고, 모르드레드도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기에 둘 사이에 말소리가 난 것은 길을 떠난 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먼저 갔어. 난 너 기다리느라 남았지.”
“아…….”
“햇병아리 패스파인더를 어디 혼자 두고 갈 수 있어야지. 얼마 안 가서 눈물 펑펑 쏟으며 돌아올 줄 알았거든.”
“눈물 펑펑 쏟진 않았거든요.”
톡 쏘는 가람의 말에 모르드레드가 이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불안으로 바들바들 떨기에 꽤 오랫동안 정신 못 차리고 땅 파며 지내는 것 아닌가 했는데, 그녀는 의외로 회복이 빨랐다.
아마 속까지 완전히 회복이 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경이적이다. 모르드레드는 그녀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해 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그런데 모르드레드 씨도 베이스캠프를 원래대로 만들고 싶어서 패스를 찾으시는 거예요?”
가람은 걱정스러웠다. 모르드레드가 300년 동안이나 패스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르드레드는 가람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요?”
“몰라. 잊어버렸어.”
그렇게 말하는 모르드레드의 얼굴은 마른 모래같이 메말라 보였다.
잠시 꺼끌꺼끌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람은 왜 잊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가람은 모르드레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그가 300년을 살았음을 실감했다.
그 얼굴은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어 무거워 보이기도 했고, 텅 비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300년이란 짧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원래대로 돌리는 건 많이 비싼가요?”
둘은 가람의 나침반을 따라 길에서 벗어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모르드레드는 가람이 패스를 찾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고, 가람은 감사히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잃은 가람에게 모르드레드에게서 솟아오르는 정체불명의 친근감은 우물 안에 드리워진 동아줄이었다. 가람은 그 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지금 찾는 패스 하나로 살 수 없는 건 분명하지.”
가람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모르드레드는 흘긋 그 얼굴을 들여다보곤 다시 정면을 살폈다.
“이쪽이 맞나?”
가람은 팔을 들어 바늘을 살폈다. 바늘은 둘이 걸어가는 방향과 정확히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의 10초에 한 번씩 확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다시 살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만큼 가람은 절박했다.
“네, 맞아요.”
가람은 바늘이 시작되는 점과, 그 밖의 원, 그리고 그것을 감싼 48등분 된 원을 바라보았다.
그 외에 다른 원들이 연한 색으로 마구 겹쳐져 그려져 있긴 했지만, 중요해 보이는 원은 그 두 개가 전부였다.
안쪽의 것이 패스를 찾는 원, 밖의 것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이 차오르는 원.
“바늘이 길수록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야. 바늘 길이 어때? 걸으면서 얼마나 줄어드는지 보고 거리를 가늠해.”
“제 새끼손톱만 한 길이예요.”
“역시, 가깝군.”
“그럼 곧 찾을 수 있어요?”
가람은 반색했다. 모르드레드는 오랜만에 진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아마 늦어도 이틀 뒤에는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빨리요?”
“싫어?”
“아뇨, 좋아서요.”
다시 이곳으로 온 후 처음으로 가람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이틀이라니, 고대 유적이나 괴물이 도사린 장소를 생각하며 가람이 다진 각오가 허무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산을 뒤지고 있으니 패스파인더가 아니라 무슨 심마니가 된 기분이었지만, 가람은 그저 웃었다.
“좋으냐? 원래 첫 패스는 찾기 쉬워.”
“왜요?”
“몰라, 선물인가?”
모르드레드는 문득, 자신이 첫 패스를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이제 너무 오래되어 빛바랜 기억 탓에 그때의 감정이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첫 패스로 무엇을 구입했는지는 기억이 났다.
모든 것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낯선 삶에 내동댕이쳐져 힘없는 이방인으로서 받은 온갖 부조리한 수모를 단번에 갚아 주던 순간, 모르드레드는 그 짜릿함의 이정표를 따라 걷기로 결정했었다.
“선물이요?”
되묻던 가람은, 순간 발밑의 돌조각을 밟아 미끄러지고 말았다.
모르드레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여 가람의 손을 낚아채었다. 아름답지만 강한 손이 가람의 가느다란 손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괜찮은가?”
“아, 네.”
“그러게 제대로 된 신발을 신지 그랬어? 다행히 이번엔 맨발은 아니군.”
모르드레드의 핀잔에 가람이 방금 미끄러질 뻔했던 것도 잊고 얼굴을 구겼다.
“이거 운동화인데요.”
“그게 뭐야?”
“그러니까 운동할 때 신는…….”
모르드레드의 눈에 가람의 신발은 천과 괴상한 철을 덧대어 만든 이상한 물건으로 보였다.
좋은 가죽으로 만드는 신발이 곧 좋은 신발이라는 그의 철학을, 저 천으로 만든 신발은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모르드레드는 가람의 설명을 듣지도 않고 힘주어 단숨에 높은 돌을 밟아 올랐다. 가람은 그가 듣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모르드레드가 돌 위에서 늘어뜨린 한쪽 손에 의지해 산을 올랐다.
가람은 부루퉁하게 나온 입술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통풍 잘 되는 기능성 신발도 모르는 미개인 같으니라고, 이게 얼마나 큰맘 먹고 산 신발인데.
“도시로 가면 제대로 된 가죽 신발을 사. 그 천으로 된 것 말고.”
가람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실제로 여행에는 운동화보다는 방수가 되는 가죽 신발이 좋았다. 진창을 걷게 되는 일도 많거니와 자주 빨아 줄 필요도 없었다.
그 두 가지가 여행길에서 얼마나 큰 메리트인지 말로 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물론, 가람 같은 특수한 여행자는 조금 다르겠지만.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해야겠어.”
높은 돌 위의 평평한 평지를 둘러보며 모르드레드가 말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요?”
가람의 말대로 해가 지기는커녕 노을도 깔리지 않은 상태였다. 거의 낮이라고 해도 좋을 시간이라, 가람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곧 해가 질 거야. 산에서는 노을이 진다 싶으면 순식간에 해가 지니까, 노을이 질 때부터 야영 준비를 하면 늦어. 그리고 이런 평평한 곳은 찾기 힘드니까, 노을이 지기 전에 괜찮은 야영지를 찾으면 거기서 야영을 하는 게 좋아.”
모르드레드가 이야기하는 것은 버릴 것 하나 없이 가람의 뼈와 살이 되고 있었다.
행동이 조금 밉상이긴 하지만 친절한 설명을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가람은 생각했다.
사실 그는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모르드레드가 없었다면 가람은 아마 아직도 뭘 해야 하는지, 패스의 바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넋이 나가 있었을 거다. 그것에 관련에서는 그의 친절에 감사해야 함이 마땅했다.
가람이 잔가지를 모으고 모르드레드가 그것에 불을 붙였다. 가람이 배낭에서 코펠을 꺼내자 모르드레드는 물을 채웠다.
물이 끓는 동안 모르드레드는 등짐에서 모포를 꺼내어 잠자리를 만들었고, 가람은 오랜만에 침낭을 풀었다. 침낭은 한때 등산이 취미였던 아버지의 것이었다.
역시 주말에는 쉬어야겠다며 허허 웃어 버린 아버지 덕분에, 침낭은 단 두 번밖에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새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주 주말부터는 등산을 하겠다며, 등산용품을 가득 사다가 소풍 가는 아이처럼 자랑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 가람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가람아, 아빠 이제 몸짱 될 거야.’ 웃음 섞인 그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따스한 공기와 웃음, 얼마나 가나 보자며 오가던 장난 어린 내기와 웃음, 그리고 웃음. 이제는 없는 웃음.
“뭐 해?”
멍하니 침낭을 쓰다듬는 가람의 뒤로 모르드레드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네?”
“이건 뭐야?”
“침낭이에요. 안에 들어가서 자는 거.”
모르드레드는 희한하다는 얼굴로 침낭을 살펴보았다. 이 세계의 침낭은 기껏해야 좋은 털가죽을 주머니 모양으로 말아 꿰맨 정도가 전부였다.
좀 좋은 것은 더욱 질 좋은 털가죽을 사용했지만 기본적인 틀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물 끓어. 난 안 먹어도 되는 몸이지만, 넌 뭐 먹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고 보니 가람은 벌써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음식을 먹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람이 뒤늦게 그 사실을 기억해 내자 배 속이 기다렸다는 듯 불평했다. 꾸르륵, 꾸르륵.
“라면이라도 끓여야겠네요. 모르드레드 씨도 같이 먹어요.”
그렇게 말한 가람은 배낭에서 라면 두 개를 꺼내어 끓는 물속에 던져 넣었다. 곧 산속 가득 라면 냄새가 진하게 퍼졌다.
혀를 찬 모르드레드는 말없이 결계를 펼쳐 냄새가 멀리 퍼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라면이 익는 동안 가람은 초코바를 두 개 꺼내 모르드레드에게 하나를 건넸다.
“단걸 싫어하시면 잘 못 드시겠지만, 저는 좋아하는 건데 드셔 보세요.”
어색하게 초코바를 받아 든 모르드레드는 가람이 하는 양을 보고 조심스레 초코바의 껍질을 벗겨 내었다.
거무튀튀하고 딱딱해 보이는 돌멩이 같은 것이, 별로 맛은 없어 보였지만 가람의 성의를 생각해 그녀를 따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이에 자꾸 들러붙는 것만 빼면 꽤 나쁘지 않은 맛이라고 생각하며 모르드레드는 초코바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모르드레드 씨의 베이스캠프는 어떤 곳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