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언젠가와 같은 상황이다. 노을이 살라 먹은 하늘은 이제 끝부터 거뭇거뭇하게 물들고 있었다. 그 노을의 끝자락 아래에서 가람은 트리거를 꼭 안아 주었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가슴팍에 코를 박게 된 트리거가 조금 당황했지만 가람은 신경 쓰지 않고 그를 힘주어 안았다가 놓았다.
“꼭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어서 가, 해 지면 위험해.”
가람의 말에 트리거는 웃으며 콧등으로 그녀의 등을 밀었다.
가람은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고, 트리거는 처음 가람을 길 위에 놓아둘 때와는 달리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람이 아주 멀어져 거대한 고목의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감출 때까지.
Chapter 2
호주머니의 은전 두 개를 만지작거리며 가람은 잡화상을 나섰다.
이 돈이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 알 수 없으나, 잡화상 주인에게서 더 높은 금액을 받아 낼 자신이 없었기에 그저 여관비로 충분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트리거의 괜한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 없었더라도 가람에게는 이미 잡화상인과 실랑이를 할 기운이 없었다.
여관비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가람이 흥정을 한다는 건 사막에서만 살던 사람이 어부와 생선에 대해 토론하는 것과 비슷했다.
패배가 정해진 싸움이라는 뜻이다.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라는 점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500원 정도의 가치면 어떡하지.
잡화상을 나온 가람은 조금 난감해졌다. 잡화상은 그 특성상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기 때문인지 도시 초입에 자리해 있어 그나마 나았지만, 다음 목적지인 여관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에는 문맹이 많은지 간판은 거의 그림이었다. 그런 그림 간판에 익숙하지 않은 가람이 잡화상을 찾은 것도 거의 순전히 운이었다.
대체 길 끝에 상자와 주머니가 그려져 있는 간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람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가람은 여관이 무슨 간판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렴풋이 침대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오던 길에 침대 가구점의 간판이 침대였음을 상기한 가람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지친 가람은 지금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잡화상 앞을 지나치는 행인들의 대부분은 가람에게 한 번씩 눈길을 주고 있었다.
하얀 면 티와 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산악 배낭을 메고 있는 가람은 그야말로 눈에 띄는 존재였다.
물레를 돌려 짜고 화학적인 표백을 거치지 않은 이곳의 천들은 아무리 희다고 해도 밝은 베이지색을 벗어나지 못했다.
새하얀 천이 없진 않지만 그런 것은 이런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산등성이에 걸쳐 있던 해가 순식간에 사라진 덕분에 저녁이 되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시선 정도로 끝나지 않았으리라.
잡화상을 드나드는 사람을 피해 한편으로 비켜 있던 가람은, 일단 걷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보이는 모든 간판들을 둘러보았지만 여관으로 추정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맥주 조끼나 검, 접시에 담긴 음식, 책처럼 알아보기 편한 간판도 있었으나 대체 무엇을 조각했는지 알 수 없는 간판도 많았다.
비슷비슷하게 지어진 목조 주택과 무질서하게 뻗은 돌길 덕분에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금세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왔던 길을 생각하랴, 간판을 추리하랴, 피곤한 몸을 추스르랴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가로등의 개념이 없는 모양인지, 해가 지고 나자 나무 창문 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외에는 빛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달이 세 개나 되는 덕분에 한국처럼 그렇게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지만, 드문드문 튀어나온 돌부리 때문에 몇 번이나 발목을 접지를 뻔했다.
초조했지만 조금만 더 걸으면 여관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계속해서 걷고 있던 가람은 해가 완전히 져 버린 후에도 좀처럼 여관으로 보이는 가게가 나타나지 않자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오기를 부릴 기력도 없었기에, 지나는 행인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일단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해가 졌기 때문인지 길을 오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노을이 질 때까지만 해도 제법 사람이 있었는데, 해가 지기가 무섭게 통행량이 확 줄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더 줄어들 것이다. 머뭇거리던 가람은 근처를 지나는 한 사람을 붙잡았다.
“저기.”
소년과 청년 사이의 남자였다. 마른 몸과 골격이 그리 풍족한 형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소년은 가람이 붙잡자 귀찮은 듯 돌아보았다.
그 퉁명스러운 시선에 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지만, 가람은 마음을 다잡았다.
“뭐요?”
“저, 여관을 찾고 있는데요.”
“그래서?”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 가람은 당혹스러워졌다.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았지만 이 남자와 같은 반응은 처음이었다.
차갑다 못해 뾰족한 그 태도에 가람은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평소 가람의 성격이라면 주눅까지 들 상황은 아니었지만,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은 작은 한마디에도 움츠러들 만큼 지쳐 있었다.
“아니에요.”
결국 가람은 남자의 시선에 못 이겨 길 묻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 남자를 보내고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팔짱까지 낀 채 삐딱하게 서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 놓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갑자기 터져 나온 큰 목소리에 지나던 행인들이 흘끔흘끔 가람과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이 도시에서 제법 이름난 난봉꾼이었다.
난봉꾼치고는 칼 솜씨도 있고 강자에게는 굽힐 줄 아는 약삭빠름도 갖고 있어서 이 도시에 좀 살았다 하는 사람들은 슬금슬금 피해 다니기 바쁜 인물이 바로 그였다.
행인들은 잘못 걸린 이 가엾은 동양 아가씨에게 동정을 던졌지만 수군거리며 혀를 찰 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물은 없었다.
“저기, 그게 아니라…….”
“그래, 여관? 여관을 찾는다는 거지? 내가 길 안내꾼으로 보여? 뭐, 좋아. 대가만 충분하면 해 줄 수도 있지.”
“대가요?”
“그래. 그럼 날로 사람을 부려 먹으려고 했어? 길 안내비 말야. 길 안내비. 영 눈치가 느리네?”
가람은 지나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도움의 시선을 보냈지만 행인들은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바삐 할 뿐이었다.
이 순간, 가람은 트리거가 간절히 보고 싶었다. 하필 골라도 저런 사람을 고르다니!
그녀가 탄식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강퍅한 얼굴의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그녀를 험악하게 내려다보았다.
가람의 새하얀 옷을 눈치챈 그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나이를 헛으로 먹은 게 아닌 가람은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좋아요. 당신은 여기 오래 산 것 같은데, 그럼 좋은 여관도 알고 계실 거라 믿어요.”
마음 같아서는 길 묻는 데도 돈을 받냐며 한껏 비아냥거리고 싶었지만, 가람은 다년간의 서비스업으로 만들어진 인내심을 발휘했다.
실상은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모습이었지만, 가람의 묘하게 당당한 모습에 남자는 당황했다. 뒷배가 있나?
“뭐, 그, 그렇지. 그래서 얼마 줄 거야?”
가람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 어느 정도의 금액이 적정선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고민이 깊어질 무렵, 한쪽에서 이 실랑이를 지켜보던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 놈에게 돈 줄 필요 없습니다. 아가씨.”
실로 새카만 사람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덮어쓰고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언뜻 쇠로 만들어진 부츠가 사이로 보였다.
새카만 로브는 가슴에 금빛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는 것만 제외하면 아무 무늬가 없는 심플한 것이었다.
다만 그 재질은 가죽 같기도 하고 천 같기도 한 기이한 것이었는데, 두께가 상당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걸을 때마다 휘날리듯 물결쳤다.
“뭐? 그런 놈?”
난봉꾼은 갑자기 끼어든 이 남자의 행색이 범상치 않아 보이자 꽁무니를 빼려고 했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막말에 울컥하는 성정을 버리지 못하고 허리춤의 칼을 빼 들었다.
발검 자세나 검을 뽑은 후의 자세 중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지만, 가람은 갑자기 험악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괜찮아요. 아가씨.”
그가 덮어쓴 새카만 후드 아래로 드러난 얇은 입술이 움직였다. 가람은 코끝과 입술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이 남자가, 왠지 상당한 미남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낮지만 상냥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나 결코 서두르지 않는 차분한 어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가 괜찮은 여관을 알고 있으니 안내해 드리죠.”
남자는 난봉꾼이 칼이 아니라 바게트 빵을 뽑아 들고 있는 것마냥 태연하게 말했다.
일방적으로 무시당하는 상황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난봉꾼은 본때를 보여 줄 생각으로 검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돌진했다.
“이야아―!”
난봉꾼이 돌진할 때까지 검은 후드의 남자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검 끝이 그 남자를 찌를 것 같았다.
가람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지만, 짧은 비명이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흘리는 사람은 검을 들고 돌진한 난봉꾼이었다.
“으아아아! 아이고, 으아! 내, 내 손!”
단 한 번이었다. 검은 후드의 남자가 손을 떨친 것은 단 한 번. 그것이 전부였다.
가람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보지도 못했다. 어마어마하게 빠른 동작이었다.
가람은 얼떨떨한 시선을 내려 바닥에 뒹구는 난봉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꿰뚫고 있는 단검을 발견했다.
가람은 미처 못 봤지만 검은 로브의 남자는 짧은 시간 동안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어 난봉꾼의 검을 막고 도리어 역습까지 했던 것이다.
검은 로브의 남자는 난봉꾼의 발광이 어느 정도 멈추자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벅, 저벅, 묵직하게 울리는 강철 부츠의 소리에 난봉꾼이 공포로 몸을 움츠렸다. 공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제 손을 감추는 그를, 검은 로브의 남자는 발로 걷어찼다.
난봉꾼은 꽥 하는 단말마를 지르고는 널브러졌다. 토악질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남자는 무덤덤히 다가가 그의 손에 박힌 단검을 회수했다.
단검을 비틀어 빼는 그 과정에서 난봉꾼의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래, 가실까요?”
가람은 바닥에 마치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난봉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검은 후드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둘을 번갈아 보던 가람은 망설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봉꾼 남자가 쓴맛을 보게 된 것은 통쾌한 일이었으나 검은 로브 남자의 손속이 너무 잔인했던 것이다.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람은 거절했다가 그 잔인한 손속이 자신에게도 미칠지 모른다는 게 두려웠다.
가람의 염려와는 달리, 남자는 외진 곳으로 가람을 끌고 가지도 않았고, 길 안내비로 거액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자는 친절한 편에 속했다.
방금 전 사람 손을 다트 판처럼 구멍 내 버린 일에 가람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을 눈치챈 남자는 이런저런 말을 하며 그녀의 경계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묵고 있는 여관이긴 하지만, 제법 괜찮은 곳입니다. 아가씨도 마음에 들 거예요.”
“네에.”
“그나저나, 아까 그 근처에도 여관이 있었는데 너무 저렴한 곳은 역시 여자 혼자 묵기 좀 그렇죠?”
“근처에요? 정말요? 사실, 아직 간판을 잘 못 읽어서…….”
“이쪽에 온 지 얼마 안 됐나 보군요. 처음에는 좀 힘들어하죠. 그래도 아가씨가 묵으려는 고급 여관은 간판에 글씨가 써져 있어요. 저렴한 곳은 애초에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묵는 곳이니 글씨로 적어 두지를 않죠. 온 지 얼마 안 됐다니, 글씨도 모르겠군요. 말은 잘 하는데, 공부를 많이 했나요?”
가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와서 글씨라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없지만, 말은 어떻게 한다고 해도 글은 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씨가 써져 있다는 그 여관에 도착한 순간, 가람은 자신의 생각이 착오였음을 깨달았다.
가람을 데리고 한참 걸은 남자는 항구 근처에 있는 ‘휴식의 요정’이라는 여관 앞에 멈춰 섰다.
기묘하게 구불렁거리는 간판 글씨를 가람은 대충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아주 예전에 배웠던 언어를 떠올리는 것처럼 아득하긴 했으나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영어를 한 30년 한 다음 다시 한국어를 쓰라고 하면 이런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왜 아는지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눈앞의 글씨를 알고 있긴 했다.
“들어가죠.”
가람은 바짝 긴장해 그의 뒤를 따랐다. 불빛이 새어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훈기가 확 끼쳐 왔다. 조용하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밖과 달리 여관 안은 아주 따듯했다.
술 취한 사람들이 호쾌히 맥주잔을 부딪치고 음식이 내뿜은 온기와 술꾼이 뿜어내는 열기로 아주 훈훈하다.
양초를 켠 노란 램프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는데, 그 색감 덕분에 여관 안의 훈훈함이 더해졌다.
“저기, 여기 여관 아니에요?”
가람의 말에 대답한 것은 검은 로브의 남자가 아니었다. 입구 옆 카운터에 서 있던 소녀였는데, 그녀는 싹싹한 태도로 미소 지었다.
“당연히 여관이죠! 보통 여관은 음식점을 겸하니까요. 음식을 팔다 보니 술도 팔고, 그러다 보니 음식도 팔고 그러는 거죠. 여기 이 손님은 묵으시는 분이군요. 이분은 처음 보는 분인데. 어머, 어머, 호객해 오신 거예요? 여관비 깎아 드려야겠네! 호호호!”
높은 톤으로 쾌활하게 말한 그녀는 까르륵 웃었다. 그녀의 말에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거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누구 마음대로 여관비를 깎아! 밥이나 많이 줄 테니 그거나 먹으라고 해!”
주방의 외침에 여자 점원은 ‘그렇다네요.’라며 빙긋 웃었다. 가람은 왁자지껄한 1층과 점원의 빠른 말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가람은 여자 점원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음을 깨닫고 허둥지둥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점원이 더 빨랐다.
“동양인이시네. 어머, 귀여워! 머리카락 정말 매끌매끌하다. 동양인들은 모두 동안이라는데, 아가씨도 보기보다 나이 많으시죠? 앗, 이거 실례인가? 혹시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음, 아차차, 아직 접객도 제대로 안 했네. 호홋, 제가 좀 이래요. 그래도 부지런한 것으로는 이 여관 제일이니, 불편한 일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시면 돼요! 절대로 팁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물론, 팁은 주시면 좋지만요 호홋, 묵으실 건가요? 식사?”
가람은 이번에도 그녀의 수다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뒤늦게야 정신을 차렸다.
이 가게 안의 온온한 온도 때문인지, 술 취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평화로움 때문인지 뒤늦게 풀린 긴장에 몸이 흐늘흐늘 녹아드는 것 같았다.
“둘 다 하려구요. 얼마예요?”
가람은 문득 돈이 모자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루 묵는 데 10실버예요. 다른 데보다 좀 비싸긴 하지만, 묵으시면 식사를 반값만 받아요.
음식은, 매일매일 나오는 정식을 드시면 25쿠퍼고 주문해서 드시면 추가금이 붙죠. 술값은 맥주가 5쿠퍼, 와인이 10쿠퍼, 고급술은 20쿠퍼예요. 한 잔당 가격이구요. 주스류도 파는데, 그건 5쿠퍼예요.
다른 도시보다 밥값이 매우 저렴하죠? 세탁 같은 다른 서비스도 해 드리는데, 음, 전부 말하려면 너무 오래 걸리네요.
방 청소나 심부름, 세탁 같은 것도 하니까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세탁물의 양에 따라 가격도 달라지거든요.”
하루 세끼 주스까지 챙겨 먹는 데 약 11실버 정도 든다는 이야기였다.
가람은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50실버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이걸로, 4일 치 숙박비와 식사비, 그리고 팁을 할 수 있을까요? 식사는 정식과 주스 한 잔으로요.”
“물론이죠! 그러면, 음, 계산이…….”
“하루에 10실버 90쿠퍼니까, 43실버 60쿠퍼, 나머지는 팁이에요.”
30쿠퍼짜리 식사가 열두 끼, 방값이 40실버니까 계산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점원은 가람의 말에 갸웃하더니 직접 손으로 셈을 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잡화점부터 느꼈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셈이 참 느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가람은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팁을 줄 형편은 아니었지만, 물건이야 이틀 후 가서 또 가져오면 그만이니 눈앞의 아가씨가 팁만큼 친절하게 굴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럼, 일단 짐 푸실 거죠? 아참, 목욕하실래요? 팁 많이 주셨으니 목욕은 제가 무료로 준비해 드릴게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가람은 그 말에 크게 기뻐했다. 연달아 꼬이는 일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바퀴벌레 인간들에게 습격당해 뒹굴고 한바탕 울어 댄 탓에 목욕 생각이 간절하던 차였다.
“네!”
“후후, 목욕이 정말 하고 싶으셨나 보네요. 그럼, 이리로 오세요.”
그녀를 따라나서려던 가람은 흠칫했다. 등 뒤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검은 로브의 남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