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2화 (12/256)

12화

아침이 되자 가람의 몸은 앉아서 잠든 몸의 모범과도 같은 통증을 호소했다.

빗살무늬 창으로 흘러 들어온 아침의 소리에 잠이 깬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들려다가 눈에 눈물이 맺힐 만큼 놀랐다.

마치 팔을 밖으로 꺾는 것과 같은 통증이 목을 강타한 것이다. 가람의 아침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시작되었다.

천천히 뒷목을 주무르던 가람은 자신이 탁자에서 잠들었음에 어처구니없었고, 뒷목보다 심하지는 않지만 팔이나 다리가 몹시 저리고 아픈 것에 놀랐다.

가람은 무리하게 고개를 세우는 대신 뒷목을 주무르는 자세 그대로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 끄적인 수첩을 읽어 보았다.

처음 무기 부분은 그럭저럭 읽을 만은 했으나 잠이 깨고 나니 자신이 글씨를 적었는지, 글씨가 자신을 적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수첩을 집어 들고 침대에 가 옆으로 누웠다. 눕고 보니 역시 사람은 누워서 자야 한다는 실감이 들었다.

다시 침대에서 제대로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뜨악한 통증으로 잠이 화끈하게 깨어 버린 터라 그것도 여의치가 않다.

잠깐 잠을 청하던 가람은 창틈으로 들려오는 소음이 점점 강해지자 결국 잠드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항구 도시의 아침 활기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생선이 싸다느니, 루마닉행 범선 객실의 표가 있다느니 하는 호객꾼들의 목청이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자도 잔 것 같지가 않고, 뇌에 먼지가 낀 것처럼 기분이 멍했지만 가람은 수첩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이면 베이스캠프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예전처럼 이틀마다 들락날락할 것이 아니니 이번에 갈 때 필요한 것을 왕창 가져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막상 가면 생각이 안 나서 빠뜨리고 올지도 모르니 글로 적어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다.

다행히 차원 문은 한 번 열리면 가람이 통과할 때까지는 열려 있는 것 같았으니 짐이 많아도 짐부터 다 던져 넣고 자신이 통과하면 될 것 같았다.

돈과 무기는 그럭저럭 된 것 같았고 나머지는 여행용품이다. 가람은 어릴 때 잠시 참여했던 걸스카우트 기억을 되살려 준비물을 적었다.

치약과 칫솔, 세면도구를 추가로 적고 소독약과 진통제도 추가로 적었다.

다양한 약을 가져오고 싶었지만 가람은 약학 전공이 아니었고, 용도도 모른 채 집어 온 약은 크게 해가 될 수 있었다.

가람이 아는 약이라고 해 봐야 진통제와 변비약, 소독약, 감기약 정도가 전부였으니, 일단 약국으로 가서 그 용도가 제대로 적혀 있는 약만 챙겨 오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생리대를 적어 넣은 가람은 펜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다가 아래쪽 줄로 내려가 ‘식량’이라고 적었다.

이곳의 여행식이 어떤 것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에 제롬과 함께 다닐 때 먹었던 단단한 건빵 같은 것이라면 여행이 크게 고달파질 것이 분명했다.

가람은 일단 상온에서 보관이 가능한 캔 종류를 주욱 적었다. 그다음 밀봉된 과자와 에너지바를 적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캔 음료를 적어 넣은 가람은 야채가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했지만 과일은 이곳에서 조달할 생각으로 넘겨 버렸다.

사실 음식이야 가람이 이곳의 음식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크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쯤 적으면 대충 다 적은 것 같은데, 자꾸 무언가 빠뜨린 것 같은 느낌에 가람은 펜으로 수첩을 두드렸다.

앞으로 자주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무엇 하나라도 이참에 더 가져오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한참 고민하던 가람은 자신이 빠뜨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운송 수단이었다.

가람이 적어 넣은 것을 등짐으로 메고 산이나 들을 쏘다닌다면 그녀는 스무날도 지나지 않아 훌륭한 대한의 사나이가 되어 버리고 말 거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람은 무심코 ‘자동차’라고 적었다가 펜을 직직 그어 지워 버렸다.

만약 패스가 산에 있다면 차는 갓길에 버리고 가야 하니 전혀 소용이 없고, 그것 외에도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자신이 이곳의 시선으로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는 며칠 여기에 있지 않았던 가람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트리거의 이계인 마녀 운운하는 소리를 들어 보면, 최대한 눈에 뜨이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아직 물정도 잘 모르는데 괜히 유명해져 봐야 독이 될 뿐이다.

게다가 이곳의 도로는 차가 달릴 만큼 잘 포장되어 있지도 않았다. 주차장과 주유소는 어떡하고?

마구간에 차를 대어 둘 수도 없고, 도시에서 수상해 보이는 자동차를 들여보내 줄지도 의문이었다. 심하게는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옥에 갈지도 몰랐다.

고민하던 가람은 결국 옆에 ‘말’이라고 적었다. 말을 가져올 수는 없으니 여기서 구입하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가져와야 할 것 외에도 배워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글이야 자동으로 알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지만 이곳의 생활 상식은 심각하게 부족했다.

정확히는, 거의 없었다. 가람은 아래에 이곳에서 구입해야 할 것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의복과 말―많은 짐을 갖고 다니기에는 제롬의 수레가 적합했지만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는 단점으로 배제되었다―이곳의 과일 등이 적혔다.

무언가 더 써 내려갈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던 가람의 펜은 그곳에서 딱 멈췄다.

뭘 사려고 해도 뭐가 있는지 알아야 말이지. 가람이 난감함에 펜을 또깍, 눌러 들어가게 하는데 그 소리에 맞추기라도 했다는 듯 정갈한 노크가 두 번 울렸다.

“아침 식사예요. 일어나셨나요. 손님?”

쾌활한 목소리의 주인은 로아나였다. 가람은 자신이 긴장했었음을 깨닫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삐꺽이는 몸을 끌어 밤새 쌓아 둔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문을 조금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환한 미소를 지은 로아나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쟁반에 가람이 얼른 문을 열고 비켜서자 로아나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오늘 아침은 특제 거위 뒷다리 향초구이예요. 원래는 치즈 빵이 올 예정이었지만, 제가 치즈샌드위치로 바꿔 드렸어요. 후식은 계절 과일 샐러드고 음료는 오렌지주스예요.”

로아나는 별달리 생색을 내지 않았지만, 특제 거위 뒷다리 향초구이는 주방에서 가장 큰 것으로 집어 오느라 폴런 아저씨와 아침부터 입씨름을 해야 했었다.

승리는 결국 그 불쌍한 동양 아가씨를 들먹이며 폴런을 인정도 없는 메마른 사람으로 매도한 로아나의 것이었다.

로아나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침부터 주방 사람들을 먹먹하게 만드는 입담으로 야채와 베이컨이 듬뿍 들어간 치즈샌드위치까지 받아 챙겼다.

덕분에 지금 로아나가 가져온 아침은 보통의 양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웠다.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폴런은 잡화점 주인 폴른의 형제다.

“와, 아침이 엄청 푸짐하네요!”

어마어마한 양에 가람은 질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순순히 감탄했다. 감탄스러운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흐뭇하게 그 탄성을 듣던 로아나의 시선이 가람의 옷에 닿았다. 새하얀 면티는 아침 햇살을 받아 거의 빛을 내뿜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거위 뒷다리를 보며 군침을 삼키던 가람이 그 시선을 깨닫고 자신의 옷과 로아나의 옷을 흘긋 번갈아 보았다.

“정말 예쁜 천이네요. 분명 엄청 고급이죠?”

로아나가 왜 그런 시선으로 보는지 깨달은 가람이 낭패감에 빠져 있는데, 로아나가 사심 없는 감탄을 터뜨렸다.

가람의 의복 양식은 솔직히 로아나의 입장에서 그리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로아나는 그 천의 재질만을 칭찬했다.

칭찬을 듣던 가람은, 문득 아주 기막히게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저기, 로아나. 혹시 괜찮다면 나와 옷을 교환할래요?”

새로운 옷을 사러 나간다고 해도 이 옷을 입고 나가야 할 테니 시선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주목받는 것은 범죄의 대상이 됨을 첫날부터 깨달은 가람은 그 시선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어느 곳이나 이방인이 범죄 대상이 됨은 똑같다.

가람은 자신의 옷이 서울 한복판에서 ‘나는 바가지 씌우기 쉽고 잘 속는 외국인입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이 동양인이라 외국인임을 숨기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이곳 생활의 베테랑으로 보일 필요는 있었다.

이곳의 옷은 옷 가게에 가서 좀 더 구입할 생각이지만 그곳까지 가는 잠깐 사이에 이 도시의 나쁜 무리들에게 얼뜨기라 광고를 할 생각은 없었다.

가람의 말에 로아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옷 그대로 입을 수는 없고, 바느질을 따라 조각낸 후 다른 천과 함께 써야겠지만 저런 흰 천의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로아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1년을 번다고 해도 저와 같은 천을 한 마도 살 수 없으리라.

“진심이에요?”

“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건가요?”

로아나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의심하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로아나는 가람의 속내를 꿰뚫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복식의 양식을 보면 이곳의 옷이 아니다.

그렇다는 말은 고향에서부터 입고 왔다는 건데, 그런 소중한 옷을 바로 어제 본 자신에게 주겠다니?

그런 것을 생각 없이 덥석 받을 만큼 로아나는 어리지 않았다.

가람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로아나의 반응에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순순할 리가 있을까. 무어라 말해야 그녀가 의심 없이 받아들일까, 가람은 고민했다.

몇 가지 먹혀들 것 같은 변명이 떠오르긴 했지만 가람은 어쩐지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리고 자신은 거짓말에 능숙한 성격도 아니었다.

게다가 흑심이라곤 전혀 없는데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가람은 순순히 사실을 말했다.

“제 옷이 여기에서 너무 눈에 띄어서요. 그래서 어제 안 좋은 일도 당했거든요. 그 검은 로브의 분이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예요. 아, 그런데 제 쪽지는 잘 전해 드렸나요?”

“네. 바쁘게 떠나시느라 그 자리에서 읽지는 않으셨지만, 분명 챙겨 가셨어요.”

“고마워요.”

가람은 생긋 웃었다. 그 웃음에 로아나는 이 해맑은 아가씨에게 흑심이 있을 거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지만, 확실히 할 것은 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잖아요? 팔아 버린다거나.”

“그게, 입던 옷을 파는 것도 좀 그렇고 저는 흥정을 잘 못해서요.”

그 말을 하며 가람은 살짝 뺨을 붉혔다. 생활력 강해 보이는 로아나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가람의 태도에 로아나는 그쯤에서 의심을 접기로 했다.

사실, 가람이 흑심을 가진다고 해도 호락호락하게 당할 자신도 아니었거니와, 어쩐지 어린 그녀를 핍박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찜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람이 정말 선의로 그런 제안을 한 것이라면 이 이상 하는 건 지나친 처사였다.

“그렇군요. 의심한 건 미안해요. 이런 데서 일하면 별사람이 다 오거든요. 앗, 음식 식겠다. 어서 드세요.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드시면서 들어 주세요.”

“로아나 씨는 식사하셨어요?”

“로아나 씨는 무슨, 그냥 로아나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저희 가게 단골들은 로아나 누나, 로아나 언니라고 부른답니다. 전 일찍 먹었어요. 만들면서 먹거든요.”

가람은 문득 로아나의 나이가 신경 쓰였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나이를 따져 어색한 분위기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가람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가람이 슬쩍 넘어간 것은 로아나가 제의한 언니라는 호칭이 상하 관계를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호의 어린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제 옷과 교환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제가 너무 미안해요. 손님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하얀 천은 아주 비싸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도움을 좀 주고 싶어요. 뭔가 나한테 부탁할 게 없나요?”

가람은 거위 다리를 씹으며 이 세계의 음식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기본적으로 서양식이긴 하지만 이번에 가면서 꼬마 김치를 몇 개 집어 온다면 버티기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손님이 아니라, 가람이에요.”

“어머, 신기한 이름이네요. 뭔가 룬어 같아요. 동양인들의 이름은 다 뜻이 있다면서요? 전 로아나 꽃의 이름을 딴 로아나인데 가람의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말도 놓으라고 할까 망설이던 가람은 로아나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곳의 동양인들도 가람 세계의 동양인과 어느 정도 비슷한 풍습이 있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들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라는 뜻이에요.”

“그렇군요. 저 남쪽의 물이 부족한 사막 국가에서는 강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로아나 언니는 아는 게 참 많으시군요.”

“여관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주워듣는 것이 많아진답니다.”

가람은 로아나에게 상식을 좀 알려 줄 수 있느냐고 하려다가 더 급한 문제를 떠올렸다.

“저기, 부탁하고 싶은 게 있긴 한데…….”

“뭔가요?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 줘요. 이렇게 귀한 천을 그냥 받으면 내가 오히려 부담스럽거든요.”

“저와 같이 물건을 사러 가 주실 수 있으세요?”

“좋아요. 이거 먹고 있어요. 내가 옷 가져올 테니까. 오늘 여관 일은 잠깐 휴가 내야겠네요.”

가뿐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가람이 오히려 당황했다.

“아니, 한가하실 때 해 주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은 출항하는 날이라 손님이 많지도 않거든요. 입항하는 날이 제일 바쁘죠.”

로아나는 가람의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순식간에 꿰뚫었다.

저런 어린 소녀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상인들이 있다는 건 정말 이 도시 주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날래게 문밖으로 걸어 나가던 로아나가 후다닥 되돌아와 분주한 몸놀림에 덩달아 급히 샌드위치를 씹는 가람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요.”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황당함과 마음을 간질이는 훈훈함에 살짝 미소 짓던 가람은, 문득 자신의 손등을 발견했다.

충전 중이던 스물여 개 침 중 두 개가 사라져 있었다.

* * *

항구 도시 베록시의 낮은 압도될 것 같은 활기로 가득했다.

바글바글 끓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활기에, 가람은 압도당했다.

어깨에 생선과 나무 열매, 갓 구운 빵과 숫돌, 집에서 직접 짠 천, 수확한 곡물 등을 멘 상인들과 검을 차고, 곡괭이를 들고, 그물을 짊어 메고, 정체불명의 나무 상자를 이고 진 남자들이 상체를 훤히 드러낸 채 울끈불끈한 근육을 드러내며 땀내를 풍기고 다녔다.

주말의 명동에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다양함과 부산스러움은 명동을 훌쩍 넘어섰다.

여담이지만, 가람은 어제 이곳에 도착하고는 본래 자신이 향하던 베록시라는 데 놀랐었다.

패스를 찾느라 산을 이틀간 헤매고 다녔기에 설마 베록시가 이렇듯 가까운 거리에 자리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롬과 모르드레드에게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해서는 듣지도 못하고 묻지도 않았다.

어차피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궁금해하지 않기도 했다.

가람은 가판대에서 고기 꼬치를 구워 파는 사람을 물끄러미 보다가 제 앞을 휙 지나가는 구릿빛 근육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물러선 틈으로 금세 주먹만 한 나무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 긴 나무 막대 양 끝에 매단 남자가 소리치며 지나갔다.

“산포 사시오, 산포! 두 개에 10쿠퍼, 다섯 개에 30쿠퍼!”

“근해에서 잡힌 생선 팔아요! 방금 잡은 생선이에요!”

“조개 한 바구니에 30쿠퍼! 싱싱한 조개가 한 바구니에 30쿠퍼예요!”

“방금 구운 빵이 한 개에 10쿠퍼! 어른 머리만 한 빵이 10쿠퍼!”

가만히 들어 보니 물가가 그리 비싸지는 않다. 가람은 수중에 5실버를 갖고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배낭을 통째로 들고 나왔다.

만약 돈이 모자라면 배낭 안에 들어 있는 것들 중 수첩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전부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

배낭 안에는 여유분으로 가져온 볼펜 두 자루와 손전등, 모기향, 머리 끈 열 개, 하얀 수건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얀 천이 비싸게 팔린다고 하니 하얀 수건도 비싸게 팔리지 않을까 싶었다.

배낭을 포함해서 모조리 팔아 치운다면 돈이 꽤 되리라.

“휴가 내고 왔어요. 많이 기다렸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