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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14화 (14/256)

14화

더 살 것이 있다는 가람의 말에 직원이 한층 더 친절해졌다. 지역 명을 모르는 가람은 잠시 당황했다.

“어떤 지도가 있나요?”

“음, 베록시와 그 인근을 표시한 지도부터, 여기에 인접한 칼츠버그, 크페타인, 바랄라인 지도가 있죠.”

점원은 별 이상한 질문 다 듣는다는 듯 가람을 쳐다보았다.

“대륙 전도는 없나요?”

“있긴 합니다.”

점원은 흘긋 제 등 뒤를 눈짓했다. 커다란 땅덩이에 산맥과 도시의 위치가 간략하게 표시된 지도가 태피스트리처럼 창문에 걸려 있었다.

이 세계에는 아직 삼각 측량법 같은 측량법이 발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람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륙 전도와 이곳에 인접한 곳의 지도들을 모두 구입하기로 했다.

“그럼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대륙 전도 1골드, 나머지 지도는 20실버씩 80실버, 이쪽의 책들은, 특수 서적은 없군요. 권당 50실버씩입니다. 그러니까 음, 합쳐서…….”

가람은 점원보다 훨씬 빠르게 계산을 모두 끝마쳤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곳의 계산 방식으로 한참 동안 무언가 끄적이던 점원은 꽤 시간이 지난 후 고개를 들었다.

“7골드 30실버군요.”

가람은 주머니에서 10골드 동전 하나를 건네고 2골드 70실버를 거슬러 받았다.

그 계산에도 시간이 걸려서 가람은 그동안 구입한 책들을 배낭에 넣고 있었다. 수건이나 손전등이 상당한 가격이 나와서 배낭을 팔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책과 지도를 모두 챙긴 가람과 로아나는 미련 없이 서점을 나왔다. 어느새 시간이 좀 지났는지 배가 고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건 뭔가요?”

배고픈 가람의 시선이 길거리 음식에 향했다. 그곳은 각종 해산물을 각기 다양한 소스에 볶거나 굽든지 해서 파는 노점이었는데, 직화구이의 먹음직한 냄새가 아주 일품이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배고픔이 한계까지 치달았다. 굶주린 그녀들은 홀린 듯이 그 앞에 섰다.

가람은 이곳의 음식들이 의외로 눈에 익은 것들이 많아서 놀랐다. 조개나 생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새우가 있는 건 의외였다.

가만히 보니 게를 닮은 것도 있었다. 가람은 거의 랍스터만 한 새우에 시선을 빼앗겼다.

굵기가 어린아이 팔뚝만 한 그것은 붉은 소스를 칠하고 먹음직스럽게 누워 있었다. 껍질까지 다 까고 말이다.

“이거, 이거, 이거 주세요.”

가람의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챈 로아나가 새우라고 하기엔 너무 큰 새우 두 마리와 양념이 된 게,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방어를 닮은 생선을 골라 주문했다.

그 외에도 가람이 처음 보는 기이한 음식을 주문한 그녀는 가람이 계산하려는 것을 단호하게 저지하곤 재빨리 계산해 버렸다.

“이거라도 사게 해 주세요. 얼마 하지도 않으니까요. 으음, 길거리 음식은 오랜만인걸요? 매일 여관에서 일하니까.”

“그렇군요. 전 처음 보는 것도 많네요.”

가람과 로아나는 벌써 새우를 한 마리씩 입에 넣고 씹으며 말하고 있었다.

가람은 그것의 맛이 생김새답게 새우와 흡사함에 감탄했다. 겉에 발라진 붉은 소스도 매콤한 것이 아주 취향이었다.

로아나는 좀 매운지 반쯤 먹다가 옆에서 파는 주스를 사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가람에게도 한 잔 사서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람이 받아서 한 모금 맛을 보니 망고와 오렌지를 섞은 것 같은 맛이 났다. 이곳의 음료는 전체적으로 달고 걸쭉한 경향이 있다.

항구 도시라서 그런지 식재료는 수산물이 많아 보였다.

“가람의 나라에서는 이런 걸 안 먹나요?”

“비슷한 게 있긴 한데 아무래도, 바다가 다르니까요.”

사실 가람은 이곳의 동양 해역에 무슨 수산물이 사는지 몰랐다. 하지만 로아나 또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대충 납득했다.

그러곤 커다란 게를 집어 들어. 뽀작뽀작 소리 내어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새우를 다 먹어 치운 가람은 이번에는 방어를 닮은 생선을 집어 들었다.

입과 꼬리를 관통하는 긴 막대에 꿰어진 그것은 노릇노릇하게 잘 익어서, 한 입 베어 물자 연한 살이 사르륵 녹아들었다.

살은 약간 달큰할 정도로 고소했는데, 상당한 별미라 그녀는 순식간에 한 마리를 모두 먹어 치웠다.

마지막으로 손바닥만 한 커다란 조개를 추가로 주문하여 하나씩 먹어 치워 허기를 채운 두 사람은 주스를 단번에 들이켠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배가 완전히 찬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저기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자 떡대 좋은 사내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땀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덥다며 상의를 탈의한 상태라, 함께 부대끼며 음식을 먹기에는 조금 민망한 감이 있었다.

“몸 좋았죠?”

묵묵히 걷던 로아나가 느닷없이 툭 물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가람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은 그녀들은 갑자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람도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 내가 고른 로맨스 소설도 맘에 들 거예요.”

로아나의 말에 가람은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웃었음을 깨달았다. 새삼스러운 기분에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던 가람은 다시 로아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은 커다란 4층 목조 건물 앞에 도착했다.

별다른 이름 없이 ‘베록 포목점’이라는 심플한 간판을 건 그 건물은 제법 유명한 포목점인지 오가는 사람이 꽤 많았다.

“베록 영주 성에 옷을 대는 곳이에요. 이 영지에서는 아마 최고일 거예요.”

로아나의 말대로 가게는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적당한 선에서 인사하는 직원들은 교육을 잘 받은 느낌이 들었고 옷이 진열된 곳마다 가격이 적힌 판넬이 붙어 있어 바가지를 쓰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층은 대부분 남녀의 평상복이었다. 여성복은 거의 원피스나 투피스로 된 옷이었고 튜닉과 커프스를 강조한 셔츠도 있었다.

드레스는 가장 꼭대기인 4층에 있었는데, 바로 2층에 여행자용 가죽옷과 리넨 셔츠가 있었기에 위쪽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었지만, 가람은 최대한 많은 것을 보아 둔다는 생각으로 4층으로 올라섰다.

드레스란 귀족과 부의 상징이었다. 드레스를 입고서는 결코 육체노동을 할 수 없었기에, 몸으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계층만이 드레스를 입었다.

4층에 있는 드레스는 가람의 생각보다 그리 화려하지 않았는데, 예술적이고 이름 높은 드레스는 모두 귀족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문화와 예술은 모두 귀족들의 것이었다. 귀족들은 개인 도서관과 개인 미술관, 재능 있는 예술가를 후원했으며 그 예술가에는 드레스 디자이너도 포함이 되었다.

그런고로, 이곳에 있는 드레스는 서민이 특별한 날에 입을 수 있도록 고안된 저가형 드레스였다.

고급 드레스는 수도의 이름난 숍에 대귀족이나 황제의 인가를 받은 문장을 걸고 가게를 연다. 당연히 주 고객층은 귀족들이었다.

“음, 드레스는 잘 봤어요.”

이곳의 드레스는 생각보다 다양한 양식이었다.

치마를 둥글게 부풀린 것, 가로로 부풀린 것, 엉덩이 부분만 부풀린 것과 소매가 긴 것, 어깨를 드러내는 것, 장식이 많은 것, 장식이 적은 것, 색이 화려한 것, 자수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등 마치 서양사의 시대별로 유행했던 드레스를 모조리 모아다가 때려 넣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저가형이라서 그런지 가람의 눈에는 그리 차지 않았다.

드레스라는 것이 천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자연히 질이 떨어지는 천을 사용해 단가를 낮췄기 때문이다.

“여행복은 2층에 있었죠?”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던 로아나가 가람의 말에 아쉬운 얼굴로 옷을 내려놓았다. 가람은 3층의 손수건이나 장갑 같은 의류 잡화를 파는 곳을 그대로 지나쳐 2층으로 내려섰다.

2층의 고객들은 대부분 바람직한 여행자의 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가람은 옷을 고르는 데 있어서 그들의 옷차림을 많이 참고했다.

속에는 무엇을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여성 여행자는 천으로 된 어두운 색의 바지와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튜닉을 걸쳤다.

허리에는 검대를 차고 검을 메고 있거나, 혹은 등에 활을 멘 사람도 있었다.

신발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 무릎까지 오는 가죽 부츠였는데, 기름을 먹여 반들반들하거나 오래되어 너덜너덜하거나 다리에 짜악 달라붙는 얇은 것이거나 생김은 다르지만 모두 가죽이었다.

간혹 그 위에 두껍고 투박한 가죽 갑옷을 걸친 사람도 있었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양식에 가람은 안도했다. 중세의 의복은 복잡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귀족들의 양식이 복잡한 것이지 서민의 의복 양식은 오히려 현대의 의복보다 훨씬 간소했다.

평민 여성은 투피스 치마나 원피스, 긴 튜닉이나 바지, 혹은 조끼로 끝이었고 남성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람은 만져 봐서 안감이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바지를 두 벌, 위에 걸칠 튜닉을 두 벌, 망토를 하나, 로브를 한 벌 샀다.

모두 29골드가 들었는데, 그 가격에 역시 고급 의류점은 다르다며 로아나가 혀를 내둘렀다.

마지막으로 구입한 로브는 가람이 동양인인 것을 염려해 로아나가 극구 추천한 것이다.

바지와 튜닉은 아주 고급품이라 모두 4골드가 들었고, 망토는 약하지만 열을 내는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 20골드나 했다.

로브 또한 답답할 것을 고려해 통풍은 잘 되지만 투광성은 낮은 고급으로 구입했기에 5골드나 들었다.

그 무시무시한 가격에 가람도 내심 놀랐으나 자신의 물건들이 마법 물품이라는 이름하에 얼마나 비싸게 팔렸는지 생각하곤 납득했다. 고급과 저급의 가격 차이는 정말로 크다.

“말 시장은 이쪽이에요.”

로아나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을수록 무언가 묘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 냄새는 걸을수록 더 강해졌는데, 가람은 말 시장에 도착해서야 그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로 말똥 냄새였다. 코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말똥 냄새가 말 시장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가람은 발밑에 구르는 말똥을 피해 걸으며 최대한 숨을 아꼈다.

말 시장은 도시의 외곽 쪽에 있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 있었는데, 그 바로 근처는 대장간인지 쇠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편자를 박은 말이 날뛰는 소리, 요란한 쇳소리와 가격을 흥정하는 사내들의 고함이 뒤섞인 데다 구릿한 말 똥내까지 풍기는 바람에 가람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람의 눈이 고삐를 매고 얌전히 서 있는 백마, 흑마를 살피다 침을 튀기며 자신이 파는 말의 자랑을 하는 말 상인을 향했다가 다시 키 작은 조랑말들로 향했다.

누가 사는 사람이고 누가 파는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가는 그 분위기 속에서 로아나는 신기할 정도로 망설임 없이 걸었다.

한참 동안 말 시장을 헤치고 들어간 로아나는 따분한 얼굴로 앉아 멍하니 지나는 행인을 쳐다보는 말 상인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톨란 아저씨.”

“어, 로아나가 여기 웬일이야?”

지겨운 표정밖에 지을 줄 모를 것 같던 남자의 얼굴에 순식간에 반가움이 덧씌워졌다.

가람은 로아나의 넓은 인맥에 감탄하며 그녀가 이 도시에 있는 사람 모두와 친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 친구가 말을 좀 사려구요.”

로아나의 말에 톨란이 가람을 훑어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가람이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톨란은 이런 동양 아가씨가 타고 다닐 만한 말을 파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주로 기사들이나 검사, 혹독한 사막이나 설산, 일주일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강한 말을 주로 팔았다.

그가 파는 말은 좋은 말이긴 했지만 가격도 그만큼 비쌌고, 톨란의 눈에 이 동양 아가씨는 그만한 돈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어쩌지? 날 찾아와 줘서 고맙긴 한데, 내가 파는 말들은 이 아가씨가 타기 힘든 말뿐이라서. 대신, 어떤 말을 원하는지 말해 주면 내가 적당한 말을 파는 곳을 알려 주마. 어떠냐?”

가람은 톨란의 말을 들으며 그의 뒤에 서 있던 말을 살펴보고 있었다. 모두 빛깔이 좋고 덩치가 크며 눈빛이 맑은 말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곳까지 걸어오며 보았던 말들과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가람은 아쉬웠지만 일단 전문가의 말을 듣기로 했다.

“좋아요.”

“그래, 귀여운 아가씨가 찾는 건 어떤 말이지? 예쁜 백 당나귀? 아니면 잘생긴 흑 당나귀? 아니면 귀여운 갈색 당나귀?”

추천해 주긴 하는데 어째 전부 당나귀이다. 가람은 의아해서 질문했다.

“왜 다 당나귀인가요?”

“초보자가 다루기 쉽거든.”

동물은 개밖에 접해 보지 못한 가람은 그 말을 쉽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덩치가 큰 말이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동물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말이 사나운 동물도 아니지 않은가?

가람은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조용히 요구 사항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가람의 눈은 톨란 뒤의 멋진 흑갈색 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산이나 가파른 곳을 잘 갈 수 있어야 하고, 사막이든 설산이든 버틸 수 있어야 해요. 수영도 할 수 있으면 좋고, 등에 제 체중의 두 배 되는 짐을 지고도 달릴 수 있어야 해요. 약간의 말이나 상황은 살필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해야 하고, 달리는 속도는 당연히 빨라야 하구요.”

“그만 그만, 그런 말이 있으면 내가 사고 싶군. 아가씨, 말 처음 사 보는 거지?”

사실이었기에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말 가격은 알고 있어?”

“아니요.”

“조랑말이라고 해도 좋은 놈은 20골드가 넘어, 하지만 당나귀나 조랑말은 사막이나 설산을 오르기엔 무리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말로 사야겠는데, 그냥 등에 짐을 메고 괜찮게 달릴 수 있으면서 산과 사막을 오가는 말이 120골드야. 별로 똑똑하지는 않지만 속도는 빠른 놈이 그 정도지. 내가 가진 놈 중에 제일 머리가 좋고 잘난 말이 바로 저거야. 저기, 봐 봐. 벌써 눈치가 빨라서 아가씨가 뭐 하러 온 건지 알고 쳐다보고 있지?”

톨란이 가리킨 말은 가람이 내내 쳐다보며 눈을 마주치고 있던 흑갈색 말이었다.

말은 톨란이 돌아보자 짧게 히힝 하고 울고는 가람에게 귀를 쫑긋 세웠다. 깜빡이는 맑고 검은 눈이 호기심을 담고 가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말은 얼마예요?”

“550골드.”

“엑! 좀 깎아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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