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네? 설마 이미 파셨어요?”
“그래, 내가 이미 예약이 되어 있다고 했는데, 내일까지 아가씨가 나타나지 않으면 1천 골드를 줄 테니 팔라고 하지 뭔가.”
“저 나타났잖아요, 돈도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나도 상인인데 내 말이 보다 높은 가치를 매겨 주는 사람을 따라가길 바라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돌려 말하긴 했지만, 가람에게 550골드에 파는 것보다 그 사람에게 1천 골드에 파는 것이 더 이득이니 그 사람에게 팔고 싶다는 뜻이었다.
가람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지만 늦은 것은 자신이니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아직 팔지 않아 준 것이 고마웠다.
“돈 더 쳐드릴게요. 그 사람보다.”
“에엥, 얼마나?”
가람 대신 저 말을 사 가기로 한 사람은 여자 용병이었다. 거금을 내어놓는 것을 보면 칼 솜씨도 있어 보여서 톨란의 바람을 이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람의 짐말을 하기에는 너무 좋은 말이었기에 톨란은 가람이 가격을 더 쳐준다고 해도 여자 용병에게 팔고 싶었다. 그리고 올려 줘 봤자 얼마나 올려 주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 배, 3천 골드에 사겠어요.”
“팔게.”
팔게요, 팔게 해 주세요.
너무 다급한 나머지 톨란은 입보다 마음으로 외쳤다. 그는 말을 사랑하고 양심도 있는 좋은 상인이었지만, 거금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금액이면 일전에 너무 탐이 나지만 데려오지 못했던 흑마를 구입할 수 있을 만한 금액이었다.
가람은 주머니에서 네모반듯한 금화 세 개를 꺼내어 톨란에게 건네었다. 가람은 거액을 쓰면서도 스스로의 씀씀이를 자각하기 힘들었다.
첫째, 이곳의 돈이 모두 동전이라 고액권이라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고 둘째, 돈이 얼마든지 조달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아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3천 골드에 대한 가람의 체감상 느낌은 장난감 돈 3천만 원 정도의 감각이었다.
3천만 원이 아니라 1조라고 하더라도 아깝지 않으리라. 이곳의 돈은 어차피 얼마든지 늘릴 수 있는 것이니까.
“정확히 3천 골드. 이제 저 말은 아가씨 거야.”
톨란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의 거래를 지켜보던 말을 끌고 와 가람의 손에 고삐를 쥐여 주었다. 가까이서 본 말은 생각보다 상당히 컸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람이 고삐를 잡고 바로 옆에 서니 트리거보다도 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50센티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말의 키에 가람은 조금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삐를 잡아끌었다.
순하고 영리한 말은 가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말이 아가씨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그래, 이름은 지었나?”
“네.”
가람이 말과 시선을 마주하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래, 이름이 뭔가?”
남들이 흔히 읽는다는 판타지 소설이나 로맨스 소설을 이십 대 중반에서야 접한 것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가람의 문학적 소양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뛰어난 문학가는 뛰어난 작명가이기도 하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있겠지만 그 역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가람은 자신의 첫 말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뽀삐, 라고.
조금의 고민이나 재고도 없는 무자비한 결정이었다.
가람은 동물의 이름으로 썩 괜찮다고 생각했고, 말 또한 바람 소리처럼 가볍게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만족했다.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에게 그 이름은 ‘포피’라는 발음으로 들렸기에 그 이름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톨란조차도 말이다.
“좀 특이한 억양이군 그래. 동양식으로 지은 이름인가?”
“그런 셈이에요.”
* * *
가람이 뽀삐와 함께 여관으로 돌아오자 여관은 어제와 달리 북적이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가람이 처음 여관에 왔을 때와 똑같은 분위기였다.
흥청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관 밖까지 울려 퍼졌으며, 손님으로 온 배에 소속된 음악가가 연주하는 음악이 그 흥을 타고 흘러나왔다.
뽀삐의 고삐만 잡고 그런 여관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던 가람은 열심히 서빙을 하는 로아나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가람이 왜 여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저렇게 서 있는지 의아해하던 로아나는 가람의 뒤로 언뜻 보이는 말의 모습에 상황을 파악했다.
결국 그 비싼 말을 사고야 만 모양이다. 아마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로아나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로아나는 들고 있던 맥주들을 뿌리듯 서빙하곤 당황하고 있는 가람에게 다가섰다.
“결국 그 말로 사셨군요.”
로아나가 가람의 등 뒤에서 얌전을 떨고 있는 말을 보며 말했다.
“네. 뽀삐예요.”
가람이 뿌듯하게 소개하자 로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비싼 말을 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었다.
로아나는 말은 성격이 좋고 잘 걸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잔소리 대신, 지금 가람이 가장 원하는 말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저희 여관에는 마구간도 있어요. 저희 여관에 맡기실 건가요?”
바닷가의 여관에서 마구간을 겸하는 일은 잘 없다. 선원들은 말을 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베록이었고, 베록은 여행자가 가장 많이 지나는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런고로, 베록의 여관들은 주 고객이 선원들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들을 고려해 마구간을 갖춘 곳이 제법 많았다.
“네! 안 그래도 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가람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로아나가 가람을 발견하지 않았으면 계속 여관 문 밖에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고삐 이리 주세요, 제가 마구간지기에게 말해 둘게요. 말은 하루 맡기는 데 20쿠퍼고 여물까지 먹이면 5쿠퍼가 추가돼요. 좋은 여물을 먹이면 10쿠퍼고, 그 외에 별식을 먹이는 건 그때그때 달라요.”
돈 문제는 이제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가람의 주머니에는 넘칠 만큼 많은 돈이 있었다.
자신의 방 침대 밑에도 엄청난 금액이 있었고. 나올 때 자물쇠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왔으니 문을 부수거나 창문으로 도둑이 들지 않았다면 그대로 있을 터다.
가람은 고삐를 로아나에게 건네고 주머니에서 1골드 동전 두 개를 꺼내었다.
“이걸로 열흘 정도의 숙박비와 식비, 제 말의 마구간비와 여물값을 할게요. 열흘을 다 머물지 안 머물지는 모르겠지만, 남는 건 로아나의 팁으로 가져요.”
하루 숙식비가 10실버 90쿠퍼, 열흘이면 1골드 9실버, 50쿠퍼짜리 목욕을 매일 하고, 말이 최고급 당근으로 하루 세끼를 먹는다고 해도 팁으로 거의 50실버 넘게 떨어지는 거였다.
팁으로는 큰 금액이었지만, 대박을 올린 선원들이 가끔 던져 주기도 하는 금액이라 그리 과한 금액은 아니다.
“어머,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니에요. 로아나 덕분에 값을 잘 받은걸요.”
사실이었다. 가람이 50쿠퍼에 라이터를 팔아 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혼자서는 지금 있는 금액의 1,000분의 1도 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람의 말에 로아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금화를 받아 챙겼다.
“이거, 로아나표 스페셜 서비스를 해 드려야겠네요. 만약 다툼이 벌어지면 손님 편에 서 드릴게요! 술꾼들은 갑자기 거칠어지곤 하거든요. 호호, 고삐는 이리 주세요. 제가 마구간에 맡길게요. 자자, 손님은 안으로 들어가서 한잔하세요. 오늘 선원들은 유쾌한 사람들이 많아요.”
로아나가 가람의 등을 살짝 밀며 생글생글 웃었다. 가람은 뽀삐의 머리를 잠깐 안아 주고 쓰다듬어 준 후 눈인사를 했다.
로아나는 가람이 뽀삐에게 인사하는 동안 잠시 기다리다 인사가 끝나자 말을 끌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뽀삐는 영리한 말답게 순순히 로아나를 따라나섰다. 자신이 지금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 눈치였다.
“어, 왔군!”
뽀삐를 보낸 가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훈훈한 공기에 섞여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잡화점 주인, 라분이었다.
“라분 씨?”
익숙한 얼굴에 조금 놀랐던 가람은, 라분의 삶의 낙이 이곳에서 저녁마다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라분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기에 가람은 그대로 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자자, 이거 마셔. 자네 운이 좋군. 오늘은 황금바람호가 입항했어. 황금바람호의 모험담은 들을 게 많기로 유명하지.”
가람이 다가가자 재빨리 자리를 권한 라분은 맥주잔까지 쥐여 주었다. 얼결에 잔을 받아 든 가람은 나무잔 속의 튀튀한 액체를 바라보며 머뭇거리다 조금 맛을 보았다.
기포가 조금 빠진 흑맥주 같은 맛이었는데, 곡물 특유의 은은한 깊은 단맛이 나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가람은 흑맥주를 홀짝이며 여관 안을 둘러보았다.
여관 안은 술꾼들이 내뿜는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여기저기서 잔을 부딪쳐 대는 통에 술 방울이 끊임없이 튀어 올랐다.
껄껄껄 웃는 웃음소리와 ‘내가 황금바람호의 최고 칼잡이다아아!’ 하고 자기주장을 하는 고함 소리가 고래고래 울려 퍼졌다.
벌써 곯아떨어져 테이블 위에 고개를 박고 자는 사람도 있었고, 술잔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모험담을 떠드는 남자도 있었다.
라분은 그 틈에서 모험담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라분과 함께 한 남자의 바다 괴물 퇴치기를 들으며 맥주를 마시던 가람은, 문득 맥주잔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충전의 바늘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바늘의 개수는 열일곱 개였다. 하지만 지금은 열 개다.
하루에 하나씩 줄어드는 게 아닌가 하던 가람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하루에 하나씩 줄어들던 바늘은 갑자기 일곱 개나 줄어들었다.
가람은 오늘이 다른 날과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던가 하고 고민했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건을 팔고, 필요한 물건을 샀다.
사실 충전의 시기를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늘이 줄어드는 것에는 너무 많은 규칙이 있어서, 오히려 아무 규칙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변의 온도와 가람의 기분, 차원의 흔들림, 우주의 이변, 스쳐 지나간 영혼의 질, 오고 간 감정량 등 수많은 변수에 따라 충전기의 바늘은 줄어들었다.
많은 것을 한다고 빨리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안 한다고 늦게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고민하던 가람은 결국 이유를 알아내는 것을 포기했다. 충전이 생각보다 빨리 되고 있으니, 서둘러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이 배에서 괴물 퇴치 한번 안 해 본 사람 어디 있나. 이봐, 내 이야기를 들어 보라고!”
호기로운 목소리에 가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다리가 여섯 개에 불을 뿜는 눈알을 가진 괴물을 죽였다던 남자의 이야기는 어느새 끝이 나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다른 선원이 끼어들었다.
“수중 도시는 들어 봤나? 바닷속을 유영하는 황금으로 이루어진 수중 도시. 인어들이 살고 있다는 전설도 있지. 내가 그걸 봤다고!”
“정말인가?”
라분의 관심에 남자는 콧김까지 내뿜으며 흥분했다.
“그러엄! 아주 해가 쨍쨍한 날이었어. 어느 때처럼 망루에 서 있는데, 갑자기 배 아래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지나가더군. 나는 대륙 고래인가 해서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면 가까이에 그게 올라오지 뭔가.”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어느새 여관의 선원들은 떠드는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여관이 만족스러운지 남자는 흐뭇하게 웃으며 긴장감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절대로 그 광경을 잊지 못할 거야. 물속을 꿰뚫는 날카로운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데, 마치 황금의 바다 같았다고! 모조리 황금이었지. 바닥도, 집도, 모든 것이 황금이었어.”
“그건 분명 죽음의 바다 아래를 돌아다닌다는 전설의 황금 도시일 거야!”
누군가가 외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외쳤다.
마법사의 도시라느니, 드래곤의 유물이라느니, 신의 보물이라는 둥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가람은 죽은 듯이 앉아 선원들의 공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이 왔는데 수영해서 들어가 보지도 않았단 말이야?”
“그래! 말도 안 돼! 나라면 잠수해서 뭐가 있는지 다 둘러봤을 거다!”
갑자기 사내들은 일제히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들어가서 드래곤을 잡아 왔을 거라는 둥, 술이 들어간 남자의 허풍은 끝이 없었다.
급기야 그 도시를 배에 묶어 끌고 나왔을 거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허풍이 뒤섞여 왁자지껄해지자 그 소란 통에 누군가가 커다랗게 소리 질렀다.
“호! 헤이, 하!”
술에 취한 사람들은 사나운 미친개 같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유순한 양과도 같아서 누군가가 선동하면 선동하는 대로 이끌려 가는 성질이 있다.
남자가 지른 커다란 소리는 노래를 시작하자는 신호와도 같아서, 싸우던 사람들이 일제히 노랫말을 시작했다.
“우리와 술이나 한잔 하세!”
“돛 드레스를 두른 여왕님을 따라, 우리는 바다의 기사!”
“용기 한 줌으로 황금을 산다네!”
“암초는 부수고 폭풍은 휘두른다! 좋은 술 한 통이면 모두와 친구가 되지!”
“호, 헤이, 하!”
누군가가 조잡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노래는 더욱 빨라졌다. 모두가 가죽 신발로 박자를 맞추며 술이 적당히 취한 사람들은 테이블 위로 올라서 탭댄스를 추기도 했다.
여관 주인은 굳이 말리지 않았고, 선원이 아닌 사람들도 그 분위기를 즐겼다.
가람도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며 앞에 놓인 음식을 대충 집어 먹으며 건배를 권해 오는 아무나와 잔을 부딪쳤다.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이 분위기에는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모두가 행복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멋지다, 최고다 하며 건배를 했다.
술이 아니라 분위기에 취하는 것 같았다. 가람은 어느새 그 열기에 휘말리고 있었다.
몇 잔인지 모를 술을 들이켠 가람의 얼굴은 선원들의 시뻘건 얼굴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여기,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술 다 삽니다!”
그 말을 외친 가람은, 사람들이 와― 하고 환호하자 그제야 그 말을 자신이 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많이 취했나 하고 조금 당황했지만, 모두가 행복해하며 앞다투어 술을 마시고 뿌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가람은 술을 마셨다. 최후의 최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