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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20화 (20/256)

20화

“대, 대박이다. 18만 골드!”

“뭐? 진짜?”

가람은 불량배들의 관심이 주머니에 쏠린 틈을 타 총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불량배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가람의 손목을 잡은 남자는 절대로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가람이 악을 쓰는 게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노예로 팔고, 돈은 우리가 갖자.”

“팔기 전에 우리가 한번 해도 되겠는데?”

불량배 하나의 말에 다른 불량배들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넌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 에이 뭘. 하는 칭찬과 겸손이 오갔다.

가람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그 꼴을 보고 있었다. 아니, 보통 돈을 주면 그냥 가잖아? 백주 대낮에 날 어떻게 하겠다고?

어쨌거나, 그들이 돈에 만족하고 떠나지 않는 이상 가람은 더 이상 타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명을 질렀다. 대로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누구 한 명이라도 와 주겠지.

“아아악! 사람 살려! 깡패야! 강도야! 불이야! 으아아악!”

가람이 발광하자 깜짝 놀란 불량배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가람은 그 손을 깨물려고 했지만 불량배의 요령이 너무 좋아서 잘 되지 않았다.

“조용히 해! 죽고 싶어?”

“읍, 읍!”

불량배의 손은 어찌나 씻지 않았는지 고약한 냄새가 났다. 가람은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으며 손만 자유롭게 되면 이놈들을 모두 가만두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놔, 놓으라고! 개자식들아! 돈을 주면 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올 줄이야.

사실 인신매매의 루트가 제법 양성화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강도 짓을 하고 강도당한 사람을 팔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치안이 좋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나라에서 자란 가람이 그런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나저나, 진짜 어쩌지. 가람은 고민했지만 그다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죽고 싶은 건 너희들이겠지.”

“네놈은 누구!”

가람이 짧게 외쳤던 그 발악을 그래도 들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골목 끝에서 한 줄기 서광처럼 나타난 남자의 목소리에 불량배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 말을 외친 불량배는 말을 제대로 끝마칠 수 없었다. 남자가 그대로 달려들어 불량배의 턱을 발로 까 버렸기 때문이다.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턱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다지 화려하지도 않은 모션이었는데, 남자가 주먹과 발을 휘두를 때마다 빡 빡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와 고기 다져지는 소리가 찰떡 지게 울렸다.

허둥지둥 총을 꺼내 쥔 가람은 남자가 너무나 신명 나게 불량배들을 두드리고 있어 그냥 조준만 한 상태로 몸을 추슬렀다.

혹시나 이 남자도 나쁜 놈일지도 모르니 총을 내리진 않았다.

“누구라고 말하면 아냐? 묻긴 왜 물어? 진짜 이상한 인간들이야. 말해도 모르면서 그딴 건 왜 물어?”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모조리 요리한 남자가 가람의 돈주머니를 집어 들며 말했다.

결 좋은 은발 머리가 그가 고개를 숙이자 사르륵 흩어진다. 은발의 사이사이에 마치 브릿지처럼 검은 머리칼이 한 꼬집씩 섞여 있었다.

190센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체구에 단단한 몸은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몸에 착 핏이 되는 베이지색 셔츠에 진갈색 조끼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커다란 문이 앞을 막고 있는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누, 누구야.”

남자가 앞에 한 말을 들었지만, 가람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불량배? 가람의 의심 어린 시선에 남자는 소탈하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야.”

이건 또 무슨 종류의 사기꾼인가. 나야 나 사기? 방금 친구인 척 웃으라며 불량배들에게 골목으로 끌려온 가람에게는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가람은 남자의 허벅다리를 조준한 채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트리거야.”

“뭐?”

“음, 역시 못 믿겠나 보네. 이계인 가람, 패스파인더이고 모르드레드라는 남자에게 뒤통수를 맞음. 그리고 패스가 충전되는 동안 머물기 위해 이 도시에 옴. 음, 나랑 야수들판에서 고기나무 열매도 구워 먹었었지.”

“진짜, 트리거?”

“뭔가 더 말해 줄까? 음. 뭐가 더 있을까.”

자신을 트리거라고 말한 남자는 그 외에도 가람의 비밀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가람은 도저히 그 호랑이가 이 남자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가람은 자신이 트리거의 꼬리로 눈물 콧물을 닦았던 것까지 듣고 나서야 그를 인정했다.

“오랜만이에요. 어, 음. 트리거.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래. 거의 방금 이 도시에 들어왔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뛰어왔지. 너는 늘 위험에 처해 있군.”

“트리거는 늘 구해 주고요.”

“뭐, 그렇게 되는군.”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된 거예요? 이 동네는 동물이 사람으로도 변하고 그래요? 아니면 트리거 원래 호랑이가 아니었어요?”

“아, 이거 덕분이야. 오래는 못 변해 있어.”

그렇게 말하며 트리거가 꺼내어 든 것은 가람에게도 꽤 익숙한 식물이었다. 독특한 향과 친숙한 형태. 바로, 쑥이었다.

“이거, 쑥이잖아요?”

가람은 모 설화를 떠올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늘도 먹는 건가? 100일간 먹어야 하나? 곰도 있는 건 아니겠지.

“어, 알아? 맛이 고약하고 구하기가 어렵긴 한데, 먹으면 한 하루 이틀 정도 사람으로 만들어 줘.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잠깐 도시에 와 봤지.”

“제가 마트 가서 쑥 잔뜩 사다 주면 내 옆에 계속 사람으로 변해 있을 수 있어요?”

“그건 좀. 이거 정말 맛없거든.”

“음, 그렇군요. 아쉽네요.”

맛이 정말 고약한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트리거에게 차마 가람은 강요하지 못했다. 사람이 되어서 그런지 표정이 더 풍부해졌다.

가람은 제법 미남이 되어 버린 이 호랑이가 어쩐지 어색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던 길이야?”

“아. 마구 좀 사러 가려구요.”

“말 샀어?”

“네.”

“뭐 사야 하는지는 알아?”

“아뇨.”

“승마는 할 줄 알아?”

“아뇨.”

트리거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 * *

두 사람은 다시 대로로 나와 마구점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은발과 흑발이 뒤섞인 기묘한 머리의 남자와 동양 여자란 꽤 눈에 띄는 조합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몹시 따가웠다.

그러나 두 사람 중 그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너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트리거의 말에 가람은 옷깃을 젖혀 권총을 보여 주었다.

“그건 뭐야?”

트리거는 심드렁한 눈으로 권총을 바라보았다. 검도 아니고, 별달리 마법적인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먹만 한 쇳덩어리는 마치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게 대체 뭐가 어떻다는 건지 트리거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권총이에요.”

가람은 혼잡한 거리의 인파를 헤치며 작게 대답했다. 거리의 소음에 묻힐 것같이 작은 목소리였지만 트리거는 용케 그 말을 알아들었다.

가람은 아직 총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가 거북했다. 사실 권총을 보여 주긴 했지만 정말로 그것을 불량배들에게 사용했을지는 의문스러웠다.

잠시 고민하던 가람은 결론을 내렸다. 사용했을 것 같다. 아마도.

“권총? 그게 뭐야?”

“여긴 총이 없나요?”

“응. 그런 건 처음 보는데.”

“그럼, 원거리 무기는 뭐가 있어요? 활?”

“그래, 활이 있지.”

“활이랑 비슷한 거예요.”

“시위는 어디 있어? 화살은?”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탄약이 어떻고를 설명하기에는 가람 자신도 총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기에, 그녀는 대충 그렇게 얼버무렸다.

트리거는 그 설명에 만족하고 더 이상 그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언젠가 보여 준다니 된 일이고, 가람이 총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그녀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만약 가람이 평범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다면 이런 험한 것을 만질 일은 거의 없었을 거다.

가람은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덩달아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들로 몹시 우울해졌다.

“여기군.”

마구 상점은 말 시장 근처의 대장간과 거의 붙어 있었는데, 쉼 없이 편자를 두드리는 소리로 몹시 시끄러웠다. 말 시장과 붙어 있는 덕분에 말똥 냄새도 지독했다.

마구라고 해도 고삐와 발걸이, 그리고 말의 등에 씌우는 것 정도만 알고 있던 가람은 마구 상점에 들어서자마자 그 규모와 물건의 다양함에 깜짝 놀랐다.

말 머리에 씌우는 마치 유니콘의 뿔 같은 말 투구, 말의 엉덩이 갑옷, 무릎 보호대, 정체불명의 체인과 도무지 어디에 쓰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가죽과 쇠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상점에 들어선 손님들은 흥정도 필요 없이 재빨리 암호 같은 것을 말하고 무언가를 받아 들어 나가 버렸다.

눈 돌아가게 빠른 손님의 오고 감은 마치 상인들의 새벽 시장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약속된 베테랑들의 거래 장면에 가람은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그사이 마구를 주욱 둘러보던 트리거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구들이 꽤 괜찮았다.

“말은 어떤 말이야?”

“그냥 큰 말이에요.”

가람의 대답에 트리거는 눈썹을 모았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가람은 뭔가 더 말해 주고 싶었지만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랑말은 아니고, 작은 말도 아니고, 큰 말이니까. 게다가 말의 품종 따위 알 리가 없다.

자신의 세계 말 품종도 모르는데 이곳의 말 품종을 알 턱이 있나.

“군마라도 돼?”

“3천 골드 정도 주고 사 온 말인데, 아주 좋은 말이라고 하던데요.”

트리거는 입을 따악 벌렸다. 사기당한 건가? 아니, 그보다 3천 골드는 어디서 난 거지?

트리거가 알기로 가람은 빈털터리였다. 가람과 만나지 않은 지 겨우 일주일 남짓인데 3천 골드라니?

황당한 얼굴의 트리거에게 가람은 그간의 일을 짧게 설명했다.

“돈이 부족하지 않은 건 다행이군.”

“트리거,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요! 내가 사 줄게요.”

싱글싱글 웃으며 호기를 부리는 가람에게 트리거는 피식 웃어 보였다.

헤어질 때만 해도 울상이어서 가슴 한쪽을 자꾸 찌르더니, 방금 전에 강도를 당할 뻔했는데도 어느새 기운을 차렸다.

그게 기특해서 트리거는 가람의 머리를 삭삭 쓰다듬어 주었다.

가람은 깜짝 놀라서 얌전히 그 쓰다듬을 받다가 슬그머니 질문했다.

“트리거, 그 쑥 말이에요. 제가 계속 사 줄 테니 계속 사람 모습으로 있으면 안 돼요?”

“안 돼.”

“왜요? 맛이 그렇게 없어요? 조금만 참으면 안 돼요? 저희 세계에서는 그걸로 요리도 많이 해 먹는데, 제가 요리해서 드릴게요. 요리하면 맛있어요!”

가람은 스스로가 떼를 쓰고 있음을 알았지만 괜히 졸라 보았다. 맛이 문제라면 사탕이나 단것 안에 숨겨서 먹을 수도 있을 터다.

이곳에서 거의 유일하게 의지할 존재인 트리거가 다시 자신과 떨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안 돼. 나한테는 그게 거의 인간이 똥을 먹는 것만큼이나 역겹게 느껴진다고. 만약 네가 똥을 먹는다면 생각해 보지.”

그 말에 가람이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을 보고 트리거는 혀를 찼다. 그렇게 자신이 사람으로서 곁에 있어 줬으면 했던가.

순간적으로 친구와 생활, 가족 등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었으니 그 상실감과 외로움이 작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 한편이 짠해져 괜히 가람의 이마를 툭 쳤다.

“생각한다고 했지 한다고는 안 했다. 나는 어차피 여길 못 떠나. 네가 패스인지 뭔지를 찾으러 간다고 해도 나는 그쪽으로 같이 못 가.”

“왜요?”

“내가 호랑이긴 하지만 나한테도 나의 삶이란 게 있잖냐. 난 야수들판에서 멀리 벗어나면 안 돼.”

트리거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가람은 깜짝 놀랐다. 호랑이가 된다고 해도 계속 함께 가 줄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가람이 놀라서 멍하니 서 있는 동안 트리거는 언제 마구를 골랐는지 상점 주인에게서 무언가를 잔뜩 사 왔다.

뒤늦게 그 모습을 본 가람이 돈을 내려고 하자 트리거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 버렸다. 마구의 무게가 장난이 아닐 텐데도 걸음은 몹시 가벼웠다.

“저기, 돈! 얼마였어요?”

“얼마 안 해. 숙소는 어느 방향이냐?”

가람은 얼떨결에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트리거는 다시 성큼성큼 걸었다.

“저기, 정말 안 사 주셔도 돼요. 저 돈도 많은데.”

“돈 많은 거 알고 있어. 그냥 사 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트리거는 가람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같이 가 줄 수 없어서 미안했다.

낯설 것이 분명한 이 세계에서 이 아가씨가 자신을 얼마나 의지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마치 알에서 깨어난 새끼 오리처럼 따르지 않는가?

원래 사람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자신이지만 이렇게 졸졸 따르면 어여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트리거는 이렇게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단호한 트리거의 얼굴에 가람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지금은 인간의 모습이지만 송곳니까지 꾹 다문 고집 어린 호랑이의 얼굴이 그 얼굴에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알았어요.”

“흠.”

괜히 목을 가다듬은 트리거는 마구를 들고 여관으로 향했다. 가람은 꽤 괜찮은 여관에 묵고 있었다.

자신이 말한 그대로 너무 비싸지도, 너무 질이 떨어지지도 않는 적당한 여관이다.

게다가 말도 3천 골드 정도의 값어치는 안 돼 보였지만, 꽤 괜찮은 말이었다.

자신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고 까만 눈을 반짝이는 것이 꽤 똘똘해 보인다. 더욱이 뒷다리도 육즙이 풍부하고 탄력이 넘쳐 보였다.

“트리거? 무슨 생각 해요?”

“음, 아니다. 말이 참 맛, 멋있게 생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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