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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21화 (21/256)

21화

뽀삐가 투레질을 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트리거는 말을 살살 달래고는 뒷다리를 들어 편자가 박혀 있는지 확인했다. 편자는 거의 새것이었다.

안장을 씌우고 등자의 높이를 조절한 후, 몸통의 양옆에 늘어뜨리도록 되어 있는 짐 주머니도 달았다. 커다란 배낭이 말의 양옆에 매달린 것 같은 모양이었다.

갑갑한지 계속 투레질을 하는 뽀삐에게 트리거가 언제 챙겨 왔는지 모를 강아지 당근을 내밀었다.

허리에 찬 작은 가방에서 나온 강아지 당근은 검지 두 개 정도 사이즈로 한 입 거리였지만, 매우 맛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걸 받아먹은 뽀삐는 순식간에 트리거에 대한 호감을 내비쳤다. 이 호랑이, 보기보다 꽤 좋은 놈인데?

“여기 양쪽에 달린 짐 주머니에 짐을 넣으면 돼.”

트리거의 말에 가람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준비한 짐이 들어가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공간이었다.

고민에 빠진 가람의 표정을 알아차린 트리거가 묻자 가람이 순순히 고민거리를 실토했다.

“얼마나 짐이 많기에?”

“한번 보실래요? 어차피 트리거한테 줄 선물도 가져왔어요.”

“좋아.”

가람은 트리거를 이끌고 재빨리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로아나는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 둘의 모습을 본 다른 종업원들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애인이라고 보기에는 끈적한 무언가가 없고, 가족이라고 보기에는 외형이 너무나 다르다.

가람은 그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주곤 재빨리 트리거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람은 스스로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주친다고 해도 이곳에서 사귄 친구라고 했으면 될 텐데,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려 어색하게 행동하고 만 것이다.

잠시 문에 머리를 박고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을 반성한 가람은 기다리고 있던 트리거에게 자신의 산더미 같은 짐을 보여 주었다.

“이거예요.”

방 한편에 쌓여 있는 짐은 거의 높이가 트리거의 허리까지 올 정도였다. 절대로 말이 싣고 갈 만한 양이 아니다.

말의 등판이 마치 거북이처럼 넓적하면 모를까, 마차가 없으면 이만한 짐은 절대로 옮길 수 없었다.

트리거는 혀를 차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이건 뭐냐?”

짐의 대부분은 가람의 세계에서 가져온 식량이었다. 트리거가 정체불명의 종이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안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내용물이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가볍긴 했지만 이 부피는 말도 안 된다.

“과자예요.”

트리거는 잠시 물끄러미 짐 덩이를 보다가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가람을 돌아보고 한마디 했다.

“내가 말이면 널 후려치고 싶었을 거다.”

만약 가람과 함께 다니며 그녀를 태우고 다녔다면, 분명 저 짐을 운반하는 것은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 시선에 가람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역시 그렇죠?”

가람은 역시 과자는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굳이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나눠 주거나 하면 되겠지.

“트리거가 가져갈래요? 이거 맛있는데.”

“재료가 뭔데?”

이계의 먹을거리라는 말에 트리거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음, 주로 굽거나 튀긴 쿠키와 곡류예요.”

그 말에 트리거는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 없어.”

“응? 왜요? 맛있는데.”

“호랑이는 육식 동물이야.”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난 날에도 고기나무 열매니 뭐니 하는 이상한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열매라고 해서 고기 맛이 나는 채소인가 했는데 고기였단 말인가. 그러나 가람은 괜히 아쉬움에 조금 더 권해 보았다.

“그래도 야채도 먹을 수 있잖아요. 먹는다고 죽진 않으니까…….”

“너희도 똥 먹어도 죽진 않는데 왜 똥 안 먹고 사냐.”

트리거의 말에 가람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확고한 표정을 보니 고기가 아닌 다른 것은 사양인 모양이었다.

나중에 캔이나 소시지를 좀 챙겨 주거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람은 챙겨 온 선물을 내밀었다.

“이건 트리거 주려고 일부러 챙겨 온 선물이에요.”

“오, 어디 보자.”

반색하고 달려든 트리거는 곧 실망했다. 가람이 선물이라며 챙겨 온 것들은 처음 보는 것들이긴 했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구미가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람이 가져온 것은 바로, 고양이 물품이었다. 마트의 펫 용품점을 지나며 떠오른 트리거 생각에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 온 것이다.

대부분은 고양이용 장난감이나 털실이었고, 간간이 간식과 정체불명의 무언가도 집어 왔다.

트리거는 간식이라는 말에 잠시 코를 박았다가 지독한 방부제 냄새에 질린 얼굴로 이마를 찌푸렸다.

“내가 태어난 지 일주일쯤 되었다면 좋아했을지도 모르겠구나.”

확실히 트리거가 생각이 나서 챙겨 오긴 했지만, 트리거가 이것들을 갖고 놀지는 않을 것 같다. 가람은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트리거는 그래도 성의가 고맙다며 선물을 챙겨 들었다. 이계의 물건들이니 그래도 신기한 맛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건 뭐냐?”

“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안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트리거와 가람이 집어 든 것은 작은 흰색 통이었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통은 몹시 가벼웠다.

고양이를 키워 본 적이 없는 가람은 통을 잠시 흔들어 보다가 겉표지를 읽어 보았다.

딱히 설명이랄 것도 없이 간단하게 이름과 가격만 적혀 있었다. 캣닢.

“간식인가? 열어 볼게요.”

통은 꽤 짜증 나는 구조였다. 돌려서 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회용 플라스틱 통처럼 손톱을 틈으로 넣어 벗겨 내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도 잘 열리는 것이 아니라 낑낑 힘을 줘야 간신히 열 수 있을 정도다.

용을 쓰는 가람의 표정에 트리거가 자신이 열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팡 소리와 함께 통이 공중으로 비산하며 내용물이 흩어졌다.

가람은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통 안의 내용물을 고스란히 덮어썼다.

“윽, 뭐야?”

다행히 물기가 있는 게 아니라 옷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라긴 했다. 내용물은 마른 풀을 갈아 놓은 것이었다.

가람은 옷 사이에 낀 잎을 탁탁 털어 내다가 문득 트리거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멍하게 풀린 표정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가람의 옷을 함께 털어 줄 엄두도 나지 않는지, 트리거는 텅 빈 눈으로 가람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낀 가람이 손을 뻗는 순간, 트리거가 가람을 그대로 덮쳐눌렀다.

“트리거? 왜……. 으왓!”

다행히 침대가 바로 뒤에 있어 머리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충격은 존재했다.

혀를 깨물 뻔했던 가람이 이 황당한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동안, 트리거는 가람의 몸에 코를 박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당황하던 가람도 곧 트리거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냄새를 맡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향기로운 냄새가 있을 수 있다니! 트리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람의 옷 틈에 낀, 옷 속에 들어간 캣닢이 그 매혹적인 향을 풀풀 풍겨 올렸다. 옷 틈과 옷 속에 마구 코를 처박고 싶을 지경이었다.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것 같으면서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 같은 흥분이 아찔했다.

가람의 외침을 들은 것도 거의 기적이었다.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었다. 오직 미쳐 날뛰는 후각만이 있었다.

“뭐, 뭐예요! 트리거, 정신 차려요! 짐승도 아니고!”

가람의 경악성에 트리거는 멍한 정신으로 대답했다.

“나 짐승이야.”

트리거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말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몸의 여기저기가 들썩들썩 부풀더니 곧 꼬리가 길게 튀어나오고 털이 스르륵 자라 나왔다.

매끈한 팔뚝이 털로 뒤덮이고 손바닥이 둥글넓적하게 변모한 것은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앗, 하는 찰나에 가람은 거대한 호랑이 아래에 깔리고 말았다.

거의 몇 백 킬로그램이 넘는 육중한 몸무게에 가람의 뼈마디가 죽는다고 우드득우드득 비명을 질렀다.

“욱……. 트리거…….”

가람이 트리거의 몸통을 팡팡 치며 용을 썼지만 집채만 한 호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람을 앞발로 꾹 누르고 옷 주름의 캣닢 냄새를 맡기 바빴다.

그런 트리거를 알아챈 가람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상의를 벗어 저 멀리로 휙 던져 버렸다.

매듭으로 묶여 벗기 쉽게 되어 있는 이 세계의 옷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후드 티셔츠 같은 것이었다면 절대 벗지 못했으리라.

트리거의 고개가 가람이 던진 옷을 따라 홱 돌아갔다. 트리거는 가람의 위에서 내려와 정신없이 옷의 냄새를 맡고 그 위에 뒹굴고 비벼 대었다.

마치 엄청나게 커다란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가람은 이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다가 예전에 우연히 보았던 TV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고양이과의 동물들이라면 모두 좋아하는 캣닢. 그 프로에서도 위엄 넘치는 호랑이가 순식간에 캣닢을 뿌린 나무토막에 애정 공세를 펼쳤었지.

그나저나 트리거가 크긴 정말로 컸다. 가람 침대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몸집이었다.

이 모습을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가람은 재빨리 문을 걸어 잠갔다.

트리거는 가람이 그렇게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 수십 분 뒤에야 간신히 캣닢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위엄을 되찾은 호랑이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며 무덤덤하게 찢어진 자신의 옷에서 쑥을 꺼내어 삼켰다.

“흠,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변신이 풀렸군.”

코끝을 문지르며 트리거가 멋쩍게 말했다. 쑥을 먹은 트리거가 인간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인간에서 호랑이로 변신하던 모습을 되감기 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털이 모공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몸집이 쪼그라들었다.

가람은 신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새 옷을 꺼내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 캣닢투성이로 바닥에 뒹구는 옷은 대충 뭉쳐 빨래 통 안에 던져 넣었다. 트리거의 침과 캣닢이 뭉쳐 도저히 입을 만한 상태가 못 되었던 것이다.

트리거는 아쉬운 눈으로 그 옷을 바라보다가 곧 가람과 눈을 마주친 뒤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추태를 보였구나. 그나저나 그 풀은 대체 뭐냐?”

“캣닢이에요. 저희 세계 고양이과 동물들이 좋아하는 건데, 트리거도 마음에 드나 봐요.”

“냄새는 기가 막히다만, 별로 가까이하고 싶진 않군. 꼴이 말이 아니다.”

말을 마친 트리거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옷을 입은 상태로 야수화 된 덕분에 트리거의 옷은 좋게 말해도 걸레라는 표현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결국 가람은 난감해하는 트리거에게 자신의 새로 산 옷 중 체구에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것을 주었다.

“바지가 길어서 다행이네요.”

“그렇군. 너에겐 좀 큰 것 아니냐?”

“어차피 여기 옷은 대부분 저한테 다 큰걸요.”

여행자복은 대부분 가람에게 컸다. 가람이 한국에서는 그래도 큰 편이었는데 이곳에는 여자도 드물지 않게 180에 육박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옷의 평균 크기가 가람의 세계보다 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트리거가 입은 옷도 사고 보니 너무 커서 어떻게 할까 하던 중이었다.

“고맙다.”

옷을 받아 든 트리거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몸에 걸친 넝마를 훌렁훌렁 벗고 갈아입었다.

입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태의 옷은 그가 힘을 주어 당기자 그대로 찢어졌다.

벗는다기보다 찢는 것에 가깝게 옷을 제거한 트리거는 재빨리 알몸에 옷을 걸쳤다. 다행히 사이즈가 맞았다.

“음, 이것들은 다 어떡하죠?”

“글쎄. 희귀한 먹을 것이면 근처 상단에라도 가서 팔아 버리는 게 어떠냐? 동양의 신비한 먹을거리라고 하면 좋아하며 살 텐데.”

“돈은 충분해서…….”

가람은 그렇게 말하며 침대 아래에서 보석 꾸러미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반지 몇 개를 빼내어 팔아 치운 게 전부라서 가방 안의 내용물은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트리거는 가람의 몸통만 한 가방 두 개에 가득 차 있는 귀금속을 보고 깜짝 놀랐다.

투명한 광채는 분명 드워프의 물건 중에서도 특등품 중 특등품들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워낙 돈에 무심한 성격이라 트리거는 그것들을 보고도 욕심이 생기기보다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이걸 누군가가 발견하면 가람을 해치고서라도 가져가지 않을까.

“강도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어차피 다시 가져오면 되는걸요.”

“그런 게 아니라, 네 목숨 말이다. 널 죽이고 가져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사실 오늘 마구를 사고 나서 은행에 맡기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럼 지금 가는 게 좋겠다. 내가 들어 주마.”

트리거는 기다릴 것도 없이 보석 가방을 하나 집어 들었다. 자신이 낑낑대며 들고 왔던 그것을 무슨 공깃돌 들듯 가볍게 집어 드는 모습에 가람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아, 잠깐만요!”

트리거가 나머지 가방도 집어 들려고 하자 그녀가 재빨리 제지하고 가방 안에서 가장 알이 굵고 값이 나가 보이는 반지를 되는대로 챙겨 배에 차고 있는 복대 주머니에 넣었다.

복대에는 미스릴 주화와 100골드 금화 아홉 개가 들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혹시 몰라 반지를 더 챙긴 것이다.

“이제 다 됐어요.”

가람이 열 개 정도의 반지를 챙기고 물러나자 트리거가 바닥의 남은 가방을 마저 집어 들었다.

그렇게 여관을 나온 둘은 금방 은행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은행은 꽤 한산했다.

가람이 있던 세계에선 점심시간이 가장 붐비는 시간이었지만 이곳은 은행을 사용할 정도의 인물은 주로 부자밖에 없었기에 가람의 세계와는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은행은 이자 따위는 주지 않는다. 은행이라기보다 보관 창고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안전하게 보관해 주고, 보관비를 받는다.

“금고를 계약하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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