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줄을 설 필요도 없어서 가람은 빈 창구로 다가섰다. 지루한 얼굴로 창구에 앉아 있던 은행원은 가람을 흘긋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창구 옆에 난 작은 문을 열어서 그녀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두 사람은 은행원이 열어 준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창구 안쪽은 밖에서 보았던 것과 그리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은행원은 트리거와 가람을 이끌고 창구와 겹겹이 쌓인 상자, 다른 마법사와 서류 뭉치를 돌아 커다란 쇠문 앞에 멈춰 섰다.
기이한 문양이 보랏빛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문이었다.
딱 보기에도 금고처럼 보이는 문 앞에 멈춰 선 은행원은 그 옆에 서 있던 다른 은행원에게 가람을 인계했다.
“저는 금고 전담 직원이 아니라 여기까지만 안내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이 친구가 도와줄 겁니다.”
마법사이자 은행원인 직원은 성의 없이 설명하곤 제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무심히 떠나갔다.
가람의 세계에서와 달리 이곳의 은행원들은 모두 마법사였다. 최하급 마법사라고 해도 마법사는 마법사인지라 대우도 월등하고 그 자부심도 굉장하다.
은행원으로 일을 하는 마법사들은 보통 평민 출신으로, 대부분 비싼 연구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한다.
귀족 출신의 마법사나 운 좋게 후원자를 얻은 마법사는 일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더욱 높은 마법력을 얻기 위해 정진한다.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 일반인일 뿐인 고객에게 불친절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금고 담당 미네랄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직원은 드물게도 여자였다. 갈색에 가까운 금발이 몹시 푸석푸석하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하다.
약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그녀는 앞의 그 남자 마법사보다는 훨씬 친절했다. 그렇다곤 해도 가람의 세계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 네. 만나서 반가워요.”
“네. 보관하실 물건은 저것인가요?”
미네랄이 트리거가 든 가방을 눈짓하며 질문했다.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11번 금고 정도는 되어야겠네요. 10번으로는 조금 모자란 감이 있는걸요? 1년 대여료는 200골드예요. 그렇게 하시겠어요?”
“네. 그걸로 해 주세요. 저기, 그리고 전에 듣기로는 다른 도시에서도 마법으로 물건을 찾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미네랄은 조금 놀랐다. 그리 부자처럼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나 흔쾌히 거액의 금고를 사용하겠다니.
어쨌거나 그녀가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미네랄의 태도가 조금 더 친절해졌다.
운이 좋다면 부자에게 후원을 받을 수도 있으니 마법사들은 어쩔 수 없이 부자들에게 친절했다.
아무리 괴팍하다고 해도 연구비 앞에서는 작아지는 인물이 그들이었다.
“물론이죠. 최저 10골드부터 시작하고 거리와 물건의 크기에 따라 가격이 변한답니다.”
마법 중 공간을 다루는 마법은 치료 마법과 함께 최고위 마법에 속한다. 마법이란 사용하려는 힘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불이나 바람, 물의 원리를 깨달아 알고 그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라지는지 이해하는 것이 원소 마법의 기초이다.
하지만 공간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마법사는 매우 드물었다. 물의 마법사는 물 계열의 마법만, 불의 마법사는 불 계열의 마법만 다루는 것이 보통이다.
간혹 천재적인 마법사가 두 계열 이상의 마법을 다루기도 하지만 하나의 원리만 이해하기도 벅찬데 그 둘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든다.
그리고 한 계열의 마법에만 매진한 마법사에 비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깊이도 얕았다.
따라서 공간 계열의 마법사는 짧은 거리의 워프를 시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높은 대우를 받았다.
자연히 그에 관련된 마법의 가격은 매우 비싸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간 마법의 가격에 비해 물이나 바람 계열의 마법은 가격이 꽤 저렴하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금고를 보여 주세요.”
가람의 말에 미네랄은 금고 보관실의 문을 열었다. 기이한 보랏빛 문양이 겹겹이 중첩되며 알 수 없는 배열로 움직이더니 곧 문이 열렸다.
문 안에는 사각이 아닌 오각형의 복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벽의 빼곡한 보랏빛 문양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셋은 그 복도를 걸어 곧 단단해 보이는 다른 철문 앞에 도착했다.
“11번 금고들이 보관되는 곳이에요. 금고를 개설하시고 인식 마법을 거신 후 짐을 보관하고 계산하시면 돼요.”
“인식이요?”
“네. 보통 목소리로 인식을 하세요. 그럼 물품을 찾을 때에는 반드시 본인이 와서 목소리로 인증을 해야 하죠.”
“나중에 다른 인식 방법으로 바꿀 수 있나요?”
“수수료가 들긴 하지만, 네.”
미네랄은 담백하게 대답하고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따라 들어서니 가람이 웅크리면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강철 금고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놓여 있었다.
별로 커 보이지 않던 은행의 지하가 이렇게 광활하다니.
게다가 금고 하나하나에 모두 빼곡한 문양이 그려져 있어서 실내는 별다른 조명이 없어도 그것들이 뿜어내는 빛으로 꽤 밝았다.
“사용하실 금고는 이쪽 것으로 개설해 드릴게요.”
미네랄이 금고 하나를 열자 트리거가 재빨리 그 안으로 짐을 챙겨 넣었다.
“이제 목소리를 내 주세요. 보통은 본인의 이름을 말하죠.”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람’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던 금고 위로 그 보랏빛의 문양이 파이더니 곧 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앗 하는 순간 금고는 순식간에 문양으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끝났어요.”
은행에서의 모든 일을 마친 가람은 불친절한 창구의 직원에게 금고비 200골드를 지불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제 한시름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신경이 꽤 쓰였었다. 도둑맞아도 다시 가져오면 되지만, 그래도 속은 좀 쓰렸을 거다.
이제 은행에 맡겼으니 짐도 줄었고 도둑맞을 걱정도 없어졌다.
“이제, 말을 타는 법을 가르쳐 주마.”
가람의 옆에서 묵묵히 걷던 트리거가 말했다. 그것이 고생의 시작이었다.
* * *
“웩, 우웨엑!”
가람은 대충 먹었던 샌드위치 하나가 통째로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격렬하게 토악질했다.
말의 승마감이 너무 나빠서 속이 메슥거렸다.
트리거는 한숨을 내쉬며 가람의 등을 두드렸다. 한쪽에서는 뽀삐가 안절부절못하며 토하는 가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로로 큰 덩치가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에 맞춰 부산스럽게 오갔다.
“말은 포기하는 게 좋겠다.”
트리거는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그는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다섯 시간 전 상황을 떠올렸다.
“안장은 이렇게 매고, 허리를 꼿꼿하게. 허벅지에는 힘을 빼고, 몸 전체가 리듬을 타는 것처럼. 그리고 말이 독풀을 먹지 않도록 조심해. 독풀에는 어떤 것이 있냐면…….”
트리거는 한참 동안 말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았다. 동물이 동물에 대해 설명을 하니 그 자세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대부분이 말을 깊게 이해하고 배려한 것이었지만 가람은 그 설명들의 알맹이를 거의 알아먹지 못했다.
“이해했어?”
사실 이해를 하는 게 더 신기한 일이다. 설명한 것들이 머릿속을 마구 어지럽힐 뿐 제대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가람은 대답했다. 일단 해 보면 좀 알겠지.
“네. 이해했어요.”
그러나 결과는 대답과는 상관없는 형태였다. 트리거는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가람도 답답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허벅지에 힘을 빼면 허리도 힘이 빠지고, 허리에 힘을 주면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는 데다, 다리에 힘을 빼면 말에서 떨어질 것 같고 말이 걸으면 절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는데 어떡하라는 건가.
“그게 말을 타고 있는 거면 빵 접시 위의 빵도 접시를 타고 있는 거일 거다. 그냥 올려져 있으면 다가 아니야. 말에 맞춰서, 몸을 적절히…….”
가람도 트리거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타고 보니 말의 높이가 너무 높았고, 낙마의 불안은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몸은 트리거가 시키는 대로 부드럽고 유연하게 말이 걸을 때 주는 충격을 분산시키지 못했다.
타고 걷는 것까지는 어떻게 되더라도, 타고 뛰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끈질긴 인내심으로 그녀에게 승마를 가르치던 트리거가 슬슬 포기할 마음을 먹은 것은 승마를 가르친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승마가 어렵긴 했지만 이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가람은 그동안 대체 뭘 타고 다녔는지 말 위에 혼자 올라가는 것도 힘겨워했다.
그러나 동물이라곤 옆집에서 키우는 개, 앞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초등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 정도를 접해 봤을 뿐인 그녀에게 거대한 말은 챙겨 줘야 할 것도 너무 많았고, 손도 많이 갔다. 그러니 힘겨울 수밖에.
그럼에도 두 시간 가까이 더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쳤으나 여전히 가람은 제대로 된 자세를 취하지 못했다.
“보통 세 시간 정도 하면 아무리 서툰 사람이라도 혼자 타고 가볍게 달릴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트리거의 씁쓸한 말에 가람은 토악질을 하면서 우울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이제 토할 것도 없어서 그냥 헛구역질만 난다. 배 속의 내장이 모조리 자리를 바꾼 것 같은 울렁거림이었다.
한 10분 정도 탈 때는 괜찮았는데, 다섯 시간이나 위아래로 흔들리고 나니 차라리 걷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멀미가 심해졌다.
버스에서도 멀미를 했었는데 그보다 더 흔들리는 말 위에서야 더 할 말이 있겠는가?
“우욱! 그냥, 우욱! 고삐를 잡고 걷는 게 낫겠어요.”
가람이 입가의 위액을 닦으며 말했다. 게워 내고 나니 좀 나아졌는지 보라색이던 안색이 새파란 수준으로까지 회복되어 있었다.
트리거는 혀를 차고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한편에 서 있던 뽀삐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하루에 타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 가며 오랜 시간을 들여 익숙해지지 않는 이상 답이 없어 보였다.
“잘 생각했다. 그나저나, 다음 목적지는 어디냐?”
트리거의 말에 가람은 대충 입을 물로 헹궈 내고 손등을 살폈다. 바늘은 이제 단 두 개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바늘이 하나만 남게 되면 아마 그게 충전이 완료된 상태이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바늘이 패스를 가리키게 될 것이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가람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깨달았다.
“아직 정해지진 않았어요.”
“그렇군.”
트리거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인데 작별의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가람이 어디로 가는지나 보고 헤어지면 좋을 텐데, 자신이 야수들판을 비울 수 있는 시간은 하루가 한계였다. 그것이 안타까워 트리거는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녁 먹을 거예요? 아, 뭔가 할 말 있으세요?”
트리거의 망설이는 기색을 읽어 낸 가람이 이제 좀 가라앉은 속을 갈무리하며 질문했다. 승마를 위해 빌린 이곳 공터는 여관의 뒤에 위치하니 가까워서 좋았다.
하지만 그 장점은 가람이 모든 식사를 게워 내며 도저히 무언가 먹을 상태가 되지 않자 별로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다만 트리거라도 저녁을 먹겠다고 한다면 그 장점을 살릴 수 있으리라.
“아니, 나는 이제 곧 가 봐야 해.”
가람은 깜짝 놀랐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오실 거죠?”
“아니. 아마 못 올 것 같다. 나는 야수들판에서 멀리 벗어나면 안 돼.”
단호한 대답에 가람이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래도 다시 볼 수 있겠죠?”
“네가 야수들판으로 올 일이 생긴다면. 나는 늘 거기에 있을 거다.”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담백한 태도에 트리거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람이 위액 섞인 침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한다고 해도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떨쳐 낼 각오까지 했었다.
솔직히, 이 세계에 의지하고 믿을 만한 존재가 자신 외에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을 간단히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알았어요. 나중에 올 수 있으면 올게요.”
“……그래. 혼자 다니면 위험할 테니 조심하고.”
“네. 안 그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 용병을 고용하려고 해요.”
가람의 묘한 태연함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용병이라. 나쁜 생각은 아니다.
그리고 보통 경험 없고 돈 많은 사람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람에게는 적절하지 않았다.
“용병보다는 노예가 나을 거야.”
“노예요?”
뜬금없는 말에 가람이 깜짝 놀라 트리거를 바라보았다. 옅은 비난의 감정까지 묻어나는 그 시선에 트리거는 조금 의아해졌지만 하던 말을 끝내기로 했다.
“그래. 용병은 계약 내용도 확실히 명시해야 하고 여러모로 번거로운 것도 많은 데다, 마지막으로 한탕만 하고 그만두자는 녀석들도 있거든. 용병에게 해를 당해서 용병 길드에 신고하면, 다음에 그 용병이 의뢰를 받으러 올 때 제약이 가해지지. 하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의뢰인에게 해를 끼치고 숨어 버리면 어떻게 할 수도 없어.”
“그런 일이 흔한가요?”
“흔하지는 않지만 너처럼 어수룩해 보이는 만만한 사람은 좋은 먹잇감이거든. 그리고 그 바늘이 정확히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지도 모르니 호위 용병을 고용한다고 해도 목적지를 정할 수가 없잖아?”
“목적지를 안 정하면 안 되나요?”
“그래도 되긴 한데,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올라가지. 의뢰인이 어떤 위험한 지역을 가더라도 따라가야 하니까. 엄청나게 위험한 의뢰로 취급돼. 음? 왜 그런 표정이야?”
가람은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인신매매당한 사람을 구입하라니. 그를 구해 줘도 모자랄진대 그 불쌍한 사람을 사서 이용하라니.
웬만하면 이곳의 법을 따르고 싶었지만, 지금처럼 자신이 살아왔던 곳의 도덕 기준에 정면으로 반하는 상황은 정말로 거북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뽀삐를 데려다주러 가죠.”
가람은 거북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뽀삐의 고삐를 쥐었다. 어깨에 얼굴을 부벼 오는 뽀삐의 콧잔등을 쓰다듬은 뒤 말을 끌고 마구간 쪽으로 향했다.
트리거는 갑자기 가람의 기분이 저조해진 이유를 혼자 유추했지만 도저히 알 수 없자, 직접 묻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말해 봐.”
가람은 뽀삐의 고삐를 마구간지기에게 넘긴 후 1실버 동전 하나로 팁을 해결했다. 트리거는 인내심 있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람은 최대한 말을 골랐다. ‘사람을 거래하는 당신들은 미개해요!’라는 어조로 말이 나가지 않도록.
“사람을 잡아서 그렇게 거래하고, 탄압하는 게 익숙하지 않거든요. 저희 세계에서는 굉장히 나쁜 일로 취급받아서. 트리거는 인간들끼리 서로를 잡아서 거래하고 그러는 게 좀 싫지 않아요?”
“그런 걸 신경 썼다면 나는 일단 말들부터 그냥 두지 못했을 거다. 따지고 보면 제 종족도 아닌 말을 잡아다가 거래하는 게 더 나쁜 거지. 거기다가 맘대로 새끼까지 치게 하고.”
그렇게 말한 트리거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람은 새삼 트리거가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는 것을 되새겼다.
트리거는 가람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생각처럼 불법적으로 잡혀 온 노예도 있지만 제가 감당하지 못할 빚을 지고 팔려 온 녀석도 있고, 노예 녀석들의 사연도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아마 노예들이 학대당하거나 하는 것을 상상하나 본데, 노예를 죽여도 살인은 살인이다. 저 남쪽의 사막 국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래. 노예라고 해도 적당히 알아서 저들 삶을 살아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아직 거부감이 들면 그냥 용병을 고용해도 상관없다.”
고민하던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선입견만 가지고 있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트리거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한번 고려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만약 노예가 저를 해치고 도망가려고 하면 어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