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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23화 (23/256)

23화

“노예는 절대로 그럴 수 없어. 그래서 노예가 비싸지.

모든 노예들은 노예 목걸이를 하게 되는데, 뭐 굳이 목걸이가 아니더라도 팔찌나 발찌를 하기도 해.

그리고 그 팔찌는 주인이 명령하거나, 노예가 명령을 어길 경우 노예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작동해.

영구 노예들은 영원히 그 팔찌를 끼고 살지만, 계약 노예들은 일정 기한이 지나면 팔찌의 효력이 사라지기도 해.

일단 노예가 되면 무척 몸값이 비싸지기 때문에 일부러 한 1년 정도 자신을 노예로 묶어서 파는 기간 노예도 있어. 위험도가 높긴 하지만 한몫 잡기엔 좋거든.”

마치 손오공과 삼장 법사 같군. 가람은 이곳의 노예 제도를 깔끔하게 품평했다.

“계약 노예들은 자신이 팔려 가고 싶은 주인을 스스로 고를 수도 있어. 낙찰자 상위 세 명 중에 고를 수 있지. 딱 보기에 정신이 좀 나간 놈이면 안 되잖아? 절벽 같은 데서 뛰어내리라고 명령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최대한 위험해 보이지 않는 주인을 고를 자격을 갖지. 보통 급하게 큰돈이 필요한 용병들이 자주 하는 일이야.”

돈 앞에서 인권이 약해지는 건 이곳도 마찬가지인가. 가람은 문득 트리거와 자신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트리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알아채는 게 늦어졌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요?”

“노예 경매장. 밤이니까 곧 열 시간이야.”

“잠깐만요, 전 아직 노예를 살 생각이 없어요.”

“일단 한번 가기만 해 봐. 한 번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경험 삼아.”

“그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어요.”

“그럼 지금 어서 해. 도착했으니까.”

두 사람이 멈춰 선 곳은 거대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커다란 건물이었다.

꽤 외곽에 있는 이 건물은 밤에만 영업을 하는 특성 탓에 그동안 가람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가람이 안전을 위해 해가 떨어지면 여관 밖을 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커다란 조명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하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무슨 공연장 같은 모습이었다.

“구경만 하러 오는 사람도 있어. 자, 우리도 어서 들어가자.”

트리거는 가람이 뭔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를 끌고 입구로 다가섰다.

줄을 서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으려는데 트리거는 금화 두 개를 입구의 사람에게 건네었다.

뇌물인가? 트리거, 이 타락한 호랑이! 하고 생각하는 순간 입구의 남자가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받아 들고 보니 ‘특석’이라고 커다랗게 적혀 있고 좌석 번호가 작게 기재되어 있었다.

“특석을 사면 줄을 설 필요가 없지. 간단한 먹을거리도 살 수 있으니까 먹으면서 참여하면 될 거다.”

트리거는 그렇게 말하곤 능숙하게 가람을 잡아끌었다. 사실 트리거는 이 도시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영역인 야수들판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니까 당연한 일이다. 이곳에 있는 주거지를 제외한 모든 건물에 한 번 이상은 들어가 본지라 그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저기가 우리 자리군.”

가람은 트리거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노예 경매장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마치 야구장과 극장을 반씩 섞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고급스러운 의자가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고 스크린이 있을 자리에 단상이 있었다.

단상 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법으로 만든 것 같은 불빛이 아무것도 없는 단상의 중앙을 비추고 있었다.

극장과 달리 이곳의 사람들은 소란스러웠다. 저마다 무슨 노예를 사야 하겠느니, 돈은 얼마나 갖고 왔다느니 매우 시끄러웠다.

그런 사람들이 앉은 의자 사이로 먹을 것을 파는 상인들이 빽빽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생각보다…… 건전한 느낌이네요?”

“뭘 생각한 거야?”

“그냥, 좀 불법적이고 어둡고 음침하고 그런 거요.”

가람과 트리거의 좌석은 거의 정중앙이었다. 먼저 자리 잡은 거칠어 보이던 사람들은 꽤 매너 있게 두 사람이 지나가도록 다리와 몸을 치워 주었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 가람은 노예 경매장에 갖고 있던 대부분의 나쁜 편견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좀 멋쩍은 기분에 가람은 뒤통수만 긁적였다.

“자유가 없긴 하지만 노예들이 비참한 삶만 사는 건 아냐. 뭐, 주인을 잘 골라야 하긴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좌석에 착석한 트리거는 익숙한 손짓으로 상인을 불러 먹을거리를 구입했다.

상인은 마치 엿장수의 것 같은 가판대를 목에 걸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음료와 처음 보는 음식들이 손바닥만 한 크기로 포장되어 놓여 있었다.

“이거랑 이거. 얼마요?”

“3실버입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이라고 생각하며 가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관광지 같은 분위기였다. 노예 경매장이라는 음침한 이름이 주는 느낌과는 달리 간간이 어린아이도 보였다.

귀족임이 분명한 그 아이들의 곁에는 기사처럼 보이는 무거운 갑옷을 입은 남자들이 시립해 있었다.

사실 가람은 귀족을 처음 본다. 괜히 신기한 기분에 그녀는 꼼꼼히 아이를 살펴보았다.

거리가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귀족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공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아이들의 몸짓은 느렸다. 우아하다고 하면 우아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입은 옷은 마치 실크처럼 부드러워 보였고 광택이 난다. 복잡한 장식과 탁한 빛깔의 보석 단추가 세공되어 달려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심플한 것이 없어서 전체적으로 매우 화려했다. 범인이 저런 옷을 입는다면 옷이 사람을 입는 모양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은 아이에게 잘 어울렸다. 아이가 눈에 확 뜨일 만큼 미형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처럼 보이는 몇몇의 아이들은 모두 그 아이처럼 미형이었다. 곱게 자란 피부는 멀리서도 마치 찰떡처럼 보드라워 보였다.

“놀이 친구를 구하러 온 귀족이군. 평민 아이들이 인형을 사는 것처럼 노예를 구입하는 거지. 저 파란 머리 꼬마는 여기 영주의 조카 아들이야. 이름이 뭐라더라. 여하튼, 아버지가 꽤 괜찮은 마법사라고 들었다.”

트리거가 커다란 방어에 붉은 양념을 발라 구운 것을 한 입 깨물며 말했다.

가람은 그의 턱이 움썩움썩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가 방어를 들이밀며 무언으로 권하자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아직 속이 편하지가 않다. 지금 먹으면 분명 체하고 말 것이다.

“그럼, 저 사람들은요?”

가람이 가리킨 사람은 꽤 떨어진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의 참가자들은 다들 돈깨나 있는 티를 내며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들만 유독 헐벗다시피 하고 있었다.

건장한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은 노예를 사러 온 것이 아니라 노예로 팔리러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선원인가? 잘 모르겠군. 간혹 배에서 쓸 잡부를 사러 오기도 해.”

“그럼 저쪽은요?”

가람의 손끝에 트리거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가벼운 가죽 갑옷을 걸친 남자들이 대여섯 명 모여 있었다.

그들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 경매에 오는 것도 일의 일환이라는 듯 흥분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검투사를 구하러 온 사람이군.”

“검투사요?”

“응. 꽤 재미있지. 내기를 걸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 도시에는 검투사가 없어. 아마 노예 경매장이 없는 다른 도시에서 사러 온 모양이군. 아하른인가?”

“아하른이요?”

가람은 질문함과 동시에 책 대륙 여행기에서 본 아하른의 대목을 기억해 냈다.

아하른은 베록에서 남쪽의 사막 부근에 붙어 있는 영지였다. 베록과 달리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하고 물가도 비싸다.

베록을 드나드는 사람의 대부분이 상인인 것과 달리 아하른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칼잡이와 대장장이들이었다.

검투의 도시 아하른은 신발 가게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검투장이 있다고 한다.

검투 노예들의 화끈한 전투와 내기를 즐기는 도박꾼이라면 천국이 아쉽지 않은 도시라고들 한다.

가람이 머무는 베록은 대부분의 항구 도시가 그러하듯 풍족한 영지였다.

여행자와 관광객, 오가는 물자에서 떼어 내는 세금과 바다에서 나는 먹을거리들은 시민들의 굶주림을 해소해 주었다.

그러나 항구 도시가 아닌 아하른은 척박한 돌산과 매년 산을 끼고 내려오는 태풍으로 농사를 짓기도, 산열매를 따기도 불가능한 곳이다.

그나마 돌산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광물로 대장 기술이 발달하긴 했지만 쇠를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라도 돈을 벌어 베록에서 식량을 사 들여오는 것이다.

“응. 표정을 보니 아는 모양이군. 저런 거에 걸리면 끝장이지. 보통 험하게 구르다가 죽어 나가거든. 귀족가에 팔려 가는 게 제일 낫지. 첩자를 경계하는 귀족가에서는 보통 노예를 사서 일손을 채워. 절대 복종하는 노예니까 첩자일 리가 없지. 아, 시작한다.”

죽어 나간다는 말에 놀라 아하른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던 가람은 이어진 트리거의 말에 재깍 앞으로 고개가 돌아왔다. 가람은 트리거의 시선을 따라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 있던 단상 위,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중앙에서 하얀 셔츠와 조끼를 입은 남자가 과장된 몸놀림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밤의 경매를 진행할 루미논입니다. 늦은 시간이라 다들 저녁은 챙겨 드셨는지 걱정이군요. 사실 제가 안 먹어서 그렇습니다. 혹시 제게 식사를 사 주고 싶으신 분은 쪽지를 남겨 주세요. 아, 레이디만 받습니다.”

진행자의 농담에 여기저기서 소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도 안 먹었어요!’ 하고 누군가가 외치자 진행자는 깔끔한 어조로 ‘남자시군요. 저기 음식을 판매하는 상인이 있으니 스스로 구입해서 드시기 바랍니다.’ 하고 대답했다. 다시 웃음이 흘렀다.

“입찰하실 분은 옆의 번호가 적힌 흰 나무판을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첫 상품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자가 손짓하자 어색한 걸음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진행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다시 말을 이었다.

“기간 노예 2년, 26세, 남자입니다. 별다른 능력은 없고 술을 아주 잘 마신다는군요. 잡부로 쓰기에 좋은 남자입니다. 외모는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100골드부터 시작합니다. 경매 단위는 10골드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났음에도 아무도 패널을 들지 않았다. 노예로 나온 남자는 그야말로 평범한 남자였다.

갈색 머리칼에 주근깨가 박힌 보통 체격의 보통 남자. 진행자는 잠시 기다리다가 노예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오늘의 손님들은 눈이 높으시군요. 예. 겉만 봐서는 저도 별로 안 사고 싶게 생겼네요. 하하, 그럼 좀 더 보여 드리도록 할까요?”

사회자의 손짓에 남자는 머뭇머뭇 옷을 벗어 던졌다. 드러난 몸이 꽤 건장해서 몇몇 여자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남자는 수줍은 얼굴의 아가씨에게 120골드에 팔려 갔다. 팔려 가는 남자도, 구입한 여성도 행복한 얼굴이었다.

가람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다음 상품의 등장에 다시 무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트리거는 재밌다는 얼굴로 그런 가람을 보고 있었다. 꺼림칙해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게 꽤 귀여웠다.

가람은 노예 경매가 진행될수록 빠져들어 갔다. 사회자의 입담과 다양한 사람들이 좋은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그렇게 열 명의 노예가 팔려 나가는 것을 보고 나자 가람의 머릿속에서 노예에 대한 거부감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상, 열 명의 일반 노예의 판매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특별 노예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특별 노예란 능력과 외모가 뛰어난 노예를 말하죠. 이번 상품은 계약 노예입니다. 3년. 중급 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법사 노예라, 희귀한 편은 아니죠? 연구비를 버는 목적으로 꽤 자주 나오는 품목이죠.

하지만 물 마법사는 여행길의 최고의 동반자입니다. 어디서나 물을 뽑아낼 수 있으니까요.”

소개된 노예는 덤덤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단정한 용모에 차분해 보이는 갈색 눈이 인상적이었다.

“특별 노예이니만큼 시작가는 500골드, 단위는 100골드입니다.”

앞의 일반 노예 판매 때와는 달리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패널을 들었다.

‘네, 500골드 나왔습니다.’ 500골드 입찰자의 패널이 내려가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가 패널을 들었다.

600골드, 700골드, 800골드 등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 특별 노예는 8천 골드에 한 남자에게 팔려 갔다.

“다음은, 놀라지 마십시오. 희귀한 여자 동양인 노예입니다! 그것도 기간 노예가 아닌, 정식 노예입니다. 어제 밀항을 하려다가 잡혔다고 하는군요. 가엾게도 돌아갈 뱃삯이 없는 모양입니다. 불쌍하긴 하지만 범죄는 범죄죠? 어제 따끈따끈하게 노예가 된 이 동양인, 시작가 3천 골드, 단위는 500골드입니다!”

가람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려다가 트리거가 재빨리 붙잡는 바람에 엉덩이만 들썩였다. 물론 가람은 이곳의 동양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그 노예는 지금까지 나왔던 계약 노예들과 달리 절망적인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노예로 팔리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요원해지고 만다.

가격은 순식간에 1만 골드를 넘어서서 2만 골드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 돈을 다 갚기 전에는 노예에서 풀려날 수 없으니, 들끓는 경매장을 바라보는 노예의 눈에는 체념이 어른거렸다.

그 체념이 가람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외형적인 모습도 자신과 비슷해서 마치 스스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여자 동양인 노예로군. 드문 일은 아니다. 노예로 형을 받으면 어쩔 수 없지. 판매 수익은 영지와 피해자, 이 경우엔 저 노예가 밀항하려고 했던 배의 선장에게 돌아간다.”

“그럼 저 노예는요?”

“구입한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거지. 보통 구입한 금액을 노예가 돈으로 갚으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긴 한데, 노예의 몸으론 돈을 벌 수가 없으니.”

노예는 어려 보였다. 거의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눈망울이 공포와 절망에 젖어 있는 모습은 그리 유쾌한 광경이 아니었다.

그녀와 같은 대륙에서 나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외형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가람은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절망과 체념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람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패널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사회자가 가람의 번호를 부른 후였다.

“88번 손님! 3만 2천 골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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