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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25화 (25/256)

25화

“대련용이다.”

“아가씨는?”

“호위요.”

노예는 잠시 생각하다가 가람을 선택했다.

옆의 남자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는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가람은 떠나는 패배자의 등을 바라보다가 노예에게 질문했다.

“호위보다 대련이 더 편하지 않아요? 제가 어디를 돌아다닐 줄 알고…….”

“귀족 주인이 다치지 않도록 하며 대련한다는 건 일방적으로 구타당하게 되는 게 보통입니다. 그리고 저 남자보다는 당신이 제가 더 필요해 보이는군요.”

남자는 몹시 무뚝뚝해 보였지만 그래도 가람이 앞으로 2년간 자신의 주인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남자의 드러난 성격을 봐서는 ‘알 것 없습니다.’ 정도로 일축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렇군요.”

가람이 납득하자 두 사람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마법사가 테이블 위로 양도서를 펼치며 말했다.

“22만 6천500골드입니다.”

미스릴 주화로는 좀 부족해서, 가람은 반지를 하나 꺼내어 감정사에게 맡겼다.

그다음 양도서를 훑어보았다. 양도서를 읽느라 가람은 감정사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가람을 잠시 넘겨다보고는 곧 다시 알이 굵은 에메랄드 반지에 집중했다.

양도서는 대부분 별것 아닌 항목이었다. 간략하게 ‘양도서’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세 노예의 기간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글씨를 구불거리는 정체불명의 문양이 빼곡하게 감싸고 있었다. 문양은 각도를 바꿀 때마다 반사되어 일렁였다.

“마법적인 문서다. 계산이 끝난 후 네가 찢으면, 노예들의 구속구가 너에게 귀속되는 거지.”

문서치고는 몹시 허술한 그 모양새에 가람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트리거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던 가람은 문득 지금 시간에 생각이 미쳤다. 하루 종일 너무 바쁘게 다녀서 쓰러질 지경이다.

모르긴 해도 저녁 시간은 지나간 지 오래이리라.

“그런데 트리거는 아까 빨리 가 봐야 한다고 했잖아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 뭐, 괜찮겠지.”

“미안해요.”

“아냐, 어차피 그렇게 헤어졌으면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거야.”

트리거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람은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미소만 지었다. 해 준 것도 없는데 이 호랑이는 언제나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생물이 이 호랑이라는 건 정말로 행운이었다.

그렇게 미소를 주고받던 가람은 문득 자신을 향한 시선을 깨달았다. 동양 아가씨였다.

그녀는 쉴 새 없이 가람을 흘끔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곤 우물쭈물하며 주춤주춤 고개를 들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시선을 피한다. 가람은 먼저 인사하기로 결정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람이에요.”

“뮐러입니다.”

가람의 인사를 받은 것은 동양인 여자 노예의 옆에 앉아 있던 물 마법사였다.

가람보다 네 살은 많다고 들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차분하고 상냥한 눈동자만이 그의 나이가 외양에 비해 어리지 않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는 생긋 웃었고 가람은 얼떨결에 마주 웃었다.

“저는 하늘 운화예요.”

가까이서 본 운화는 아가씨라기보다 소녀라는 말이 어울렸다.

가람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 작은 키와 발그레한 뺨,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게 흔들리는 눈이 마치 초식 동물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딱딱하게 굳은 어깨와 핏기가 다 가시도록 꽉 쥔 주먹에서 가람은 그간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람의 세계로 따지자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뿐인데, 이런 타향에서 노예의 신분이 되어 얼마나 놀랐을지.

“하늘의 구름 꽃? 예쁜 이름이네요.”

가람은 오늘 낮부터 불량배를 만나고, 트리거에게 덮쳐지고, 말을 타며 토하느라 몹시 피곤했지만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얼굴로 웃어 주었다.

운화는 귀까지 빨갛게 물들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웨이크.”

운화의 감사 인사 뒤로 와이번 슬레이어의 짧은 이름이 따라붙었다.

그는 원래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닌지 가람이 이름을 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더 이상 흥미 없다는 듯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눈을 감아 버렸다.

가람은 그가 몹시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사연이 많아 보이는 남자다. 하긴,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감정이 끝났습니다.”

감정사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순간 방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익숙한 일인지 그는 개의치 않고 조심스레 감정가를 제시했다.

“감정가는, 60만 골드입니다.”

보석의 알이 굵어서 그런 걸까. 감정가가 생각보다 높았다. 20만 골드 정도를 예상했던 가람은 조금 놀랐다.

그러나 트리거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너무 후려치는 거 아닌가? 로얄 경매에 넘기면 100만 골드도 넘을 텐데.”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그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경매가가 아닌 적정 가격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가람이 좋다고 하려는 순간 트리거가 나서서 외쳤다.

“80만 골드. 60만은 터무니없어. 이만한 질의 반지가 자주 나오는 품목도 아니고, 이건 로얄 경매의 하이라이트감은 된다고. 황제도 이만한 것은 가지고 있지 못할걸!”

당당한 트리거의 말에 가람은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트리거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눈을 찡긋하고 곧 감정사와 언쟁을 시작했다.

호랑이가 아니라 보석 세공사인가 싶을 만큼 풍부한 지식에 가람은 혀를 내둘렀다.

빠르게 주고받는 그 대화에 전문 용어가 섞이기 시작하자 가람은 이해하기를 반쯤 포기했다.

“이 컷팅은 에벨록의 10번째보다 뛰어나다. 눈이 있으면 보이겠지?”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름값도 없는데.”

감정사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트리거는 결국 최후의 패를 꺼내 들었다.

“그럼, 그냥 현금으로 결제하겠어.”

트리거가 꺼내 든 것은 미스릴 주화였다. 그 앞에 10만 골드라고 적힌 것이 똑똑히 보였다. 숫자를 확인한 감정사는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지불하실 금액은 22만 6천500골드입니다. 좀 모자라는군요.”

그러나 그의 여유는 가람이 미스릴 주화를 꺼내자 곧 사라져 버렸다.

가람은 18만 골드의 미스릴 주화를 꺼내어 감정사의 눈에 잘 보이도록 내밀었다.

“합쳐서 28만 골드니까 충분하군?”

감정사는 트리거의 웃는 얼굴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는 반드시 반지를 팔아야 노예의 값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가람이 조금 불리했다.

어쨌거나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팔지 않아도 된다면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80만 골드가 아니라 100만 골드에 구입한다고 해도 경매에 붙이면 더 비싸게 팔 수 있으니 구입하는 것이 더 나았다.

“어쩔 수 없군요. 80만 골드에 매입하겠습니다.”

“거스름돈 3천500골드는 500골드 주화로 주세요. 나머지는 입금해 주시구요.”

트리거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 가람은 잠시 피곤함도 잊고 생글생글 웃으며 요청했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더 말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가람의 미스릴 주화에 노예의 값을 제외한 57만 골드를 입금했다. 그사이 감정사는 3천500골드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준비했다.

가람은 주머니를 받아 들고 일곱 개의 500골드 주화를 확인한 후 마지막 목적을 꺼냈다.

“그런데 영구 노예를 해방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가람의 질문에 운화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기대와 애원이 뒤섞인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직접 손으로 저 족쇄를 풀어 주시면 됩니다. 일단 양도서를 찢어서 권리를 가진 다음에요.”

“계산이 끝났으니 이제 양도서를 찢어도 되죠?”

“네.”

감정사가 반지를 세심하게 챙겨 넣으며 답변했다.

가람이 양도서를 찢자 빛줄기가 새어 나와 가람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빛은 마치 팔찌처럼 세 개의 고리를 이루며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가람은 손목을 쓰다듬어 보았으나 자리 잡은 고리는 마치 문신처럼 피부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이리저리 쓸려 이지러지는 문신은 가람의 손등에 새겨져 있는 문양과도 비슷했다.

문득 손등을 바라본 가람은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충전 중이라 남아 있던 두 개의 지침이 하나로 줄어든 것이다. 그 침은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그래?”

묘한 기색의 가람이 걱정이 된 트리거가 가람의 시선을 따라 손등을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 저곳에서 빛이 나는 문양을 보았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트리거의 눈에 가람은 그냥 맨손등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향이 정해진 것뿐.”

가람은 서둘러 대답하고 운화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옥죄고 있는 팔찌를 풀어내었다. 보라색 빛이 섬광처럼 번쩍인 후 팔찌는 힘을 잃어버렸다.

운화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가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가람은 웃어 주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이 아직 아기 같은 느낌이 난다.

“저, 저, 저기…….”

차마 말을 잊지 못하는 그녀에게 가람은 차분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아가씨를 산 거예요. 그러니까…….”

운화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가람을 끌어안았다. 으허엉 하고 터져 나온 울음은 콧물과 침에 뒤섞여 엉망이 되었다.

가람은 몹시 당황해서 그녀의 등만 토닥이며 이제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운화는 가람이 자신을 구입해서 풀어 주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가람과 함께 다니면 언젠가 가람이 동대륙으로 돌아갈 때 묻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되팔지만 않아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을 텐데, 아무 대가도 없이 풀어 주다니!

운화는 꺼이꺼이 울며 그간의 이야기를 훌쩍임과 섞어 털어놓았다.

오라버니와 이 대륙에 도착했는데, 환전을 하러 가서 사기를 당했다고.

당시에는 이 대륙의 돈 가치를 잘 몰랐기에 보석 팔찌를 10실버에 팔고도 사기인 줄 몰랐다고 한다.

그렇게 환전을 하고 돌아오니 숙소에서 정보를 알아본다던 오라버니는 온데간데없고, 결국 돈이 없는 상태로 이곳저곳을 전전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얼마 없던 돈은 완전히 바닥이 나 버렸고 동대륙으로 가는 배라도 숨어 탈 생각으로 밀항을 시도했다는 거였다.

범죄라는 건 알았지만 너무 돌아가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며 그녀는 아이처럼 울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집에 가게 해 줄게요.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좀 자요.”

가람은 시큰해지는 코끝을 문지르며 운화를 어르고 달래었다. 간신히 울음을 멈춘 운화와 뮐러, 웨이크를 데리고 가람은 경매장을 빠져나왔다.

여관을 향해 걸으며 운화는 두런두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오라버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걱정이 된다며 혹시 집에 먼저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라고 했다.

가람은 여동생을 내버려 두고 먼저 돌아갔을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운화를 달래기 위해 그럴 거라며 맞장구쳤다.

“음, 나는 이만 가야겠다.”

여관에 도착하자 트리거가 말했다. 가람은 트리거를 꽉 안아 주었다.

호랑이의 모습이라면 분명 당황하며 귀를 탁탁 털었을 표정으로 그는 어색하게 가람을 마주 안아 주었다.

“꼭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그래. 잘 지내라.”

“다음에 봐요.”

가람은 마지막으로 트리거를 힘주어 안은 후 홀가분한 얼굴로 그에게 웃어 주었다.

트리거는 커다란 손으로 가람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헝클어뜨렸다.

“그래, 어서 들어가서 자. 엄청나게 피곤해 보인다.”

가람의 눈은 달빛 아래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최대한 피곤한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가람은 멋쩍게 웃었다.

트리거는 가람을 먼저 여관 안으로 들여보내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람에게서 여전히 맛있는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식욕이 일지는 않았다. 그녀와 함께 가고 싶은 생각도 들 정도다.

만약 자신이 야수들판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가람과 떠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지켜야 할 영역이 있었다. 돌봐야 할 영역의 생명들이 있었다.

“모든 길은 이어져 있으니, 다시 만나겠지.”

트리거의 아쉬운 말은 밤바람에 묻혀 곧 사라졌다. 그 말의 흔적이 사라질 무렵, 여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뮐러 29세, 잘 안 나가는 물 마법사.

어제부터 그의 주인이 된 작은 동양 아가씨는 무엇 하나 수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여자였다.

그 수상함이 타국의 첩자나, 서대륙 전복을 노린 음모론적인 수상함은 아니었다. 다만 통상적인 ‘보통’에서 너무나 많이 벗어나 있었다.

일단, 그녀는 돈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배포가 너무나 컸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돈이 나오는지 씀씀이가 웬만한 영지의 귀족 영애 저리 가라 할 정도다.

10만 골드를 주고 산 노예를 아무 대가 없이 풀어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녀에게 노잣돈을 쥐여 준다거나, 그 노잣돈의 금액이 물경 500골드라는 것.

그런 거금을 쥐여 주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자신이 직접 배의 선장에게 수고비를 줘 가며 잘 부탁한다고 뒤를 봐 달라고 하는 것까지.

아는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단지 딱한 처지의 같은 대륙인이라는 것만으로 거금을 준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양인은 원래 전부 저런가?’

뮐러는 사실 이렇게 동양인과 밀접한 인간관계를 맺어 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가람이 만지작거리는 옥 장신구를 잠시 바라보았다. 새벽에 배를 타고 떠난 운화가 가람의 손에 정표라며 쥐여 준 것이다.

동대륙으로 돌아오면 반드시 ‘하늘 가(家)’를 찾아 달라며 신신당부한 그녀는 하룻밤 만에 친언니보다 더 각별해진 가람의 뺨에 입 맞추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그렇게 운화를 떠나보낸 가람은 몹시 피곤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배가 완전히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부두를 떠나지 않았다.

저 어린 아가씨가 무사히 대해를 지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가람의 갈색 눈에 가득 차 있었다.

“잘 갔으면 좋겠네요.”

가람 몰래 그녀를 힐끔거리던 뮐러는 ‘네, 그러네요.’ 하고 습관처럼 대답했다.

가람은 그가 자신을 힐끔거리고 있었던 것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묻고 싶은 게 많겠지. 트리거는 어디로 갔는지, 자신은 대체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하지만 가람은 셋 다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른 척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피곤하시죠? 오늘 하루 더 도시에서 묵고, 내일 떠날 생각이에요.”

사실 그렇게 말하는 가람이 가장 피곤해 보였다.

가람의 몸 상태는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말을 타면서 충격을 버텨 내던 허리가 구겨진 것처럼 쑤신다.

하지만 움직일 수 있었기에 가람은 움직이기로 했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오늘 준비를 끝내야 내일 떠날 수 있다.

패스가 다 충전된 지금, 마음은 이미 광속으로 패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몸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부두를 떠난 가람은 제일 먼저 마구간으로 가 뽀삐를 챙겼다. 당근을 충분히 먹이고 트리거가 알려 준 대로 마구도 씌웠다.

말의 양옆에 짐을 챙겨 넣는 것은 뮐러가 거들었다. 그는 가람을 도와 여행길에 필요한 짐을 챙기고 그 짐을 간소화하는 것을 도왔다.

절인 고기와 말린 식재료 대신 스팸과 통조림을 챙기고, 조미료는 소금과 후추, 다시다만 챙겼다.

처음 보는 새로운 음식과 조미료에 뮐러가 묘한 눈으로 가람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입을 여는 경솔함을 보이진 않았다. 가람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인원이 늘어난 탓에 두 사람이 쓸 침낭과 식기를 구입하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싸매자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용도로 쓸 단검만 사면 되겠네요.”

가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한 말에 따라, 셋은 무기점으로 향했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세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했다.

노예와 주인이라는 민망한 관계 때문에 가람은 그 특유의 넉살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뮐러는 그나마 말을 붙이기가 좀 편했지만 웨이크는 가람이 말을 걸 때마다 대놓고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무기점에 도착한 가람은 차라리 혼자 오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등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두 남자는 든든한 만큼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 남자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아직 낯선 사람일 경우 부담은 두 배로 증가한다.

두 사람은 가람이 말을 걸기 전에는 절대 먼저 입을 여는 경우가 없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흠.”

가람은 등 뒤의 남자 둘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눈앞의 단검들에 집중했다.

최대한 식칼과 닮은 것을 고르려고 했지만 무기점에서는 식칼을 팔지 않는다. 식칼은 잡화점이나 주방 용품점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다.

그렇다고 아예 식칼을 구입하자니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될 경우를 배제할 수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 경험 많은 여행가는 자신에게 맞는 단검을 고른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도 단검을 고르러 온 것이다.

하지만 앞에 놓인 단검들은 어떻게 봐도 빛깔이 흐린 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단검들 앞에 서서 약 15분간 고민에 빠져 있자 점점 무기점 주인의 눈길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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