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6화 (26/256)

26화

가람이 눈치가 보여서 대충 고르고 나갈까 하는 순간, 웨이크가 손을 뻗었다. 등 뒤에서 긴 팔이 뻗어 나오자 가람이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웨이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감정한 눈으로 그런 가람을 짧게 내려다본 뒤 손에 집어 든 것을 내밀었다. 단검이었다.

“이게 좋을 겁니다.”

네, 아니오를 제외하고 웨이크가 가람에게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가람은 얼떨떨하게 단검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단검은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어서 어느 방향으로든 쓰기가 편했다. 제법 고급품이었다.

“검을 보는 눈이 없다면 손에 들어 보고 결정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아……. 고마워요.”

웨이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람은 불편함이 아주 조금 가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했을 뿐, 제대로 대화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편함은 바로 그것에 기인한 것이었던 것이다. 서로에 대해 좀 알게 된다면 불편이 가시리라.

그렇게 마음먹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점점 나아져 가고 있었다.

“1골드.”

무기 상인은 짧게 말했다. 가람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바가지를 씌우려고 들 때마다 돈보다 감정이 상했다.

1, 2골드쯤 바가지 쓰는 건 아깝지도 않았다. 하지만 속는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쁜 것이다.

“정말로요?”

가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가 막힌다는 어조로 물었다. 무기 상인은 조금 당황하다가 단호하게 못 박기로 결정했는지 재차 반복했다. 1골드.

어차피 어수룩한 외지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건 여행지의 명물 같은 것이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두 바가지를 씌운다.

그리고 뒤에 호위를 둘이나 달고 다니는 가람은 한눈에 보기에도 돈깨나 있어 보였던 것이다.

“진짜 1골드, 100실버라는 말이죠? 이 단검 하나가요.”

사실 가람은 검이 보통 얼마 정도 하는지 모른다. 그저 한번 떠보는 것뿐이었다. 가람은 무기 상인의 당황을 섬세하게 잡아내었다. 바가지 씌우고 있군.

“1골드야. 정말로.”

가람에게는 1골드에 팔 생각이니 1골드가 맞긴 하다. 무기 상인은 생각보다 끈질긴 가람을 털어 내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가람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정말로 양심과, 상인의 자부심에 걸고 1골드라는 거죠? 정말, 정말, 정말로요.”

포인트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천연덕스러운 집요함이다. 무기 상인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뻘뻘 땀을 흘리다가 결국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15실버.”

가람은 씨익 웃곤 1골드 주화를 꺼내어 건네었다. 그리고 거스름돈을 내주려는 상인을 내버려 두고 등을 돌렸다.

“어, 잠깐! 거스름돈은?”

“됐어요.”

무기 상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손안의 금화를 내려다보다가 경쾌하게 닫히는 문을 보며 헛웃음 지었다.

어쩐지 조금 민망하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는 괜히 벗겨지고 있는 뒤통수를 긁으며 금화를 갈무리했다.

사실 애초부터 가람은 흥정할 생각이 없었다. 돈이야 넘쳐 나는데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하겠는가?

그저 연습 삼아 한번 시도해 본 것뿐이었다. 흥정에서 이겨 기분이 좋으니 그걸로 됐다.

무기점을 나오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눈에 익은 이 도시의 해 지는 풍경에 가람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당장 깔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절망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황스러웠는데 하루하루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결국 삶이란 이런 식이다. 그러나 가람은 미래의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부모님과 식탁에 둘러앉은 화목한 저녁 식사. 가람이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가람의 목표였다.

그러나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 풍경은 미래인지 과거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가람은 눈을 질끈 감으며 상념을 지워 버렸다. 다시 눈을 뜬 가람의 얼굴에는 애써 덧칠한 발랄함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뭔가 따로 볼일이 있으신가요?”

가람의 질문에 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의식주 모두 가람이 책임지고 있었기에 딱히 챙길 것이 없었다.

가람은 두 사람을 위해 침낭 외에 남성용 옷도 두어 벌 샀다. 그들은 정말로 몸만 달랑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웨이크는 사정이 좀 나았지만, 뮐러는 정말로 두 손을 달랑달랑 흔들며 걷는 맨몸이었다.

“생각보다 과자를 많이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가람은 남겨 둔 과자를 모두 로아나에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챙겨 온 과자 중 질소로 채워진 부피가 큰 과자는 모두 남겨지고 가람이 챙긴 것은 캔디나 초코바, 초콜릿, 젤리류의 부피가 작은 것들이었다.

그 외의 식량은 대부분 인스턴트 캔 음식들이다.

요즘은 어찌나 캔이 잘 나오는지, 캔 반찬과 과일 조림, 캔에 담긴 죽까지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그것들을 넣은 배낭을 메지 않았다면 그중 절반 이상은 버려야 했을 것이다.

“더 볼일이 없으시면, 오늘은 저녁 먹고 일찍 자요. 내일 일찌감치 떠나야 하니까요.”

가람은 피곤한 안색으로 말했다. 두 남자는 동의했다.

웨이크는 묘한 시선으로 앞서 걷는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도 가람은 새로운 타입이었다.

그는 하루 동안 뮐러보다 좀 더 세밀한 것들을 관찰했다. 가람의 서대륙어는 매우 수준급이었다. 거의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갖고 있는 물건이나 지식은 언어 능력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막 이곳에 도착한 수준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그런 유창한 언어 능력을 가지려면 최소한 3년은 살아야 한다.

그러나 가람의 지식은 책을 좀 읽은 3개월짜리 동양인 같았다.

넉살이 좋은가 하면 지나치게 소심한 경향도 있었다. 귀하게 자랐다고 보기에는 고생에 무던했다.

만약 가람이 귀하게 자란 집 자식이었다면 말이 아니라 호화로운 마차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남자 못지않게 가람의 태도는 매우 담백했다.

친절하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마치 자로 잰 것 같은 친절은 따듯하긴 했지만 몹시 건조하고 선을 그은 것이었다.

어떤 ‘친절’이라는 매뉴얼이 있다면 그곳에 적혀 있을 것 같은 교과서적인 친절이다.

웨이크의 감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낯설기 짝이 없는 두 남자를 대하는 가람의 행동은 단편적인 사회생활과 교육으로 습득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인정을 느끼기란 힘들 것이다.

“우리는 내일 새벽에 북쪽으로 떠날 거예요.”

두 남자는 그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북쪽 어디?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Chapter 3

패스의 바늘은 아주 길어서 원을 거의 꿰뚫을 것 같았다. 갈 길이 아주 멀어 보였기에 가람은 뽀삐의 고삐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뽀삐는 기특하게도 고삐를 잡지 않아도 가람의 그림자를 따라 따각따각 단정하게 걸었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새벽이었기에 세 사람과 말 한 마리의 그림자는 몹시 길었다.

“이대로 계속 북쪽으로만 걷는 건 아니겠죠?”

뮐러의 질문에 가람은 소리 내어 짧게 웃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뮐러는 갑자기 그녀가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은 대충 웃고는 뽀삐의 가방에서 초코바 세 개를 꺼내어 각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뮐러는 그제야 웃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얼버무린 거구나.

뮐러의 질문은 가람이 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람도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걸은 지 거의 한 시간은 된 것 같은데 지침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가람은 한숨을 쉬는 대신 초코바를 베어 물었다. 입 안으로 단맛이 퍼지자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초코바를 우물거리던 가람은 등 뒤에서 초코바의 껍질을 벗긴다면 당연히 나야 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자, 예상대로 두 남자는 그저 초코바를 손에 들고 걷고 있었다.

“이렇게 먹는 거예요.”

가람은 직접 웨이크의 초코바 껍질을 벗겨 내었다. 뮐러는 옆에서 그것을 보고 껍질을 찢어 냈다.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금세 두 남자는 어색하게 그 검은 덩어리를 입 안에 물었다.

가람을 따라 한 입 베어 물고 입을 우물거린 둘의 표정이 순식간에 엇갈렸다.

와작 소리가 날 정도로 표정을 구긴 것은 의외로 뮐러였다. 웨이크는 우물거리며 초코바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이라 가람은 웨이크 대신 입 안에 든 것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뮐러에게 다가섰다.

“괜찮아요?”

“으……. 달아요.”

초코바니까 당연히 달다. 아무래도 뮐러는 단것을 잘 먹지 못하는 입맛인 것 같았다.

뮐러는 불쌍한 나무의 나뭇잎을 한 장 강탈하더니 그 안에 씹던 것을 뱉고 수통의 물로 입 안을 헹구었다.

뮐러. 단것을 싫어하는구나. 가람은 그 사실을 머릿속에 메모했다.

“동양의 먹을거리인가요?”

뮐러가 입을 움썩움썩 움직이며 초코바를 베어 먹는 웨이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질문했다.

“어, 음,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대부분 다 단것인데.”

“동양의 간식은 모두 단것뿐입니까?”

“그렇진 않지만 이런 게 보관하기가 쉬워서 이런 것만 챙겼어요. 단거 잘 못 드시나 봐요.”

뮐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맛을 다셨다. 그사이 웨이크는 초코바를 다 먹어 치웠다. 단것이라곤 입에 대지도 못할 것 같은 얼굴로 꽤 잘 먹는다.

“웨이크 씨는 잘 드시네요. 좀 더 드시겠어요?”

“괜찮습니다.”

가람은 처음으로 웨이크의 감정을 읽었다. 거절하는 말과는 달리 웨이크의 눈은 생기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굉장히 마음에 든 게 분명하다. 생각보다 꽤 귀여운 성격이네. 가람은 조금 웃으며 초코바를 하나 더 꺼내었다.

“하나 더 드세요. 몸을 쓰시는 분이니까 하나로는 부족할 거예요.”

예상대로 웨이크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초코바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워 버렸다.

그 빠른 속도는 가람도 감탄할 정도였다. ‘웨이크. 단것을 좋아함.’ 가람은 다시 머릿속에 메모했다.

“그런데 북쪽이면, 크페타인까지 가는 겁니까?”

크페타인은 얼어붙은 북쪽 대지가 시작되는 도시였다. 때문에 동토의 문이라고도 불리는 이 도시는, 그 배타적인 기후 탓에 인간의 손이 거의 닿지 않았다.

덕분에 짐승이 많기로 유명했고, 그 지역의 특성상 짐승들의 털가죽은 귀부인들을 홀리기에 충분한 새하얌을 갖고 있었다.

희귀한 은여우와 흰곰이 다람쥐만큼 많은 탓에 크페타인은 사냥꾼들과 범죄자의 성지가 되었다.

크페타인 너머에는 그 혹한의 날씨 탓에 도시라고 불릴 만한 땅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부락 수준의 작은 마을들이었고 주민의 대부분은 도망친 범죄자들이다.

그 탓에 크페타인 너머의 북쪽은 무법 지대나 마찬가지였다.

북공이라고 불리우는 아디나크 크페타인 공작조차 자신의 영지임에도 불구하고 크페타인 너머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아마도요.”

운이 좋다면 그 전에 멈추겠지만, 가람은 일단 그렇게 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