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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29화 (29/256)

29화

노크의 주인공은 거위만 한 염소를 통째로 구운 것과 이름 모를 커다란 과일을 해산물과 함께 조리한 것, 그리고 건더기가 많은 걸쭉한 국물 음식과 술병을 든 세 명의 승무원이었다.

얼마나 양이 많았던지 테이블의 치즈와 빵, 꽃병 따위를 모두 다른 곳에 치우고 나서야 간신히 요리를 올려놓을 수 있었다.

“세 분이서 드시는 겁니까?”

승무원은 돼지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양이 올 줄 몰랐던 터라 가람은 자신이 주문을 잘못 한 건가 해서 메뉴판을 펼쳤다.

그리고 깨알같이 작게 써져 있는 요리의 가격이 1인분에 10실버에 육박한다는 것에 조금 놀라고, 아래쪽에 ‘별도의 말이 없을 시 자동으로 주문하신 승객이 묵고 있는 객실의 인원수만큼 양이 정해집니다.’라고 작게 적힌 글씨도 뒤늦게 발견했다.

가람이 묵고 있는 객실이 여섯 명이 묵을 수 있는 곳이니, 저 음식들 한 접시가 6인분, 합쳐서 18인분이라는 뜻이다. 음식값만 거의 2골드다.

“1인분만 오는 줄 알았는데, 주문을 잘못 했네요. 어쩔 수 없죠.”

주문을 잘못 했다는 말에 승무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람은 2골드를 건네고 나머지는 팁으로 주었다.

거의 고스란히 남길 것 같지만, 웨이크가 힘을 내어 주기를 바랄 수밖에.

돈이야 무의미할 정도로 많지만 무언가를 낭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달갑지는 않았다. 김을 모락모락 내는 이 음식은 이곳의 주방장이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일 텐데.

가람의 떨떠름한 얼굴에 뮐러가 가볍게 웃으며 식기를 집어 들었다.

“승무원들이 배가 터지겠군요.”

“승무원이요?”

“모르셨습니까? 승무원은 승객이 남긴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고 하더군요.”

뮐러의 말에 가람의 굳은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 버려지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굉장히 호화로운데요? 남쪽에서만 볼 수 있는 염소구이에 북쪽 얼음딸기로 만든 과실주, 동쪽 끝에서만 난다는 해산물과 서쪽 산의 명물 약초로 끓인 걸쭉한 수프까지. 절대로 한 자리에서 볼 수 없는 요리들이 다 모였군요.”

뮐러는 정말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으며 음식을 덜어 가람과 웨이크의 손에 들려 주었다.

두세 입 먹고 마셔 보니 음식은 매우 맛있었고, 술도 아주 훌륭했다. 가람을 배려했는지 술은 향기로웠으나 독하지 않았다.

“좋은데요? 아,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음식이 들어가서 그런지 가람의 목소리는 조금 노곤했다. 염소의 넓적다리를 베어 먹던 웨이크는 씹던 것을 급히 삼키고 대답했다.

“독룡 다라즈녹 말입니까?”

“네, 그 용이라는 거요. 어떤 동물이에요?”

가람도 용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도 나오고 가람의 세계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었으니까.

용은 항상 사악하거나, 아니면 매우 착해서 주인공을 도와주거나 하는 역할이다.

이곳에 오기 전 읽었던 유일한 판타지 소설에서도 용이 주인공을 소환해서 이리저리 도와주지 않던가.

하지만 웨이크가 말하는 용은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포악하고, 사납습니다. 강한 놈은 하루아침에 도시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죠. 지성을 가진 자연재해라고 보시면 됩니다.”

웨이크는 용에게 깊은 악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여간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단단한 얼굴이 경멸과 증오로 설핏 일그러졌다.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어금니가 갈리도록 지르물었다.

하루아침에 생의 터전을 빼앗겼으니 그 분노가 어디 얕으랴. 힘만 있다면 다라즈녹을 도마뱀구이로 만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다.

거의 10년을 바쳐 발굴하고 개척해 두었던 사냥터를 고스란히 잃었으니. 그러나 뮐러가 무슨 생각인지 웨이크의 말에 반박했다.

“나쁜 용만 있는 건 아닙니다. 착하고 선량한 용도 많아요. 워낙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서 용들이 사회 활동을 할 때 여파가 큰 것뿐, 특별히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건 아닙니다. 뭐, 인간들이나 작고 연약한 짐승들의 입장에서는 그것들이 자연재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선 동의합니다.”

“그럼 좋은 용도 있다는 거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뮐러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웨이크가 드물게 그 말을 낚아채었다.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주웠을 때, 그 금화가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주워지기 위해 그곳에서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쥐가 곡식 창고를 갉아먹는 것이 창고의 주인에게 악의를 갖고 하는 짓이 아니듯 용의 호의와 패악은 그런 종류의 것입니다. 가끔 건국을 도와주거나 보물을 선물했다는 용의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변덕이 심한 동물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웨이크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뮐러도 그 화제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남자가 동시에 침묵하자 다시 대화가 끊겼다.

가람은 과실주를 들이켜며 화젯거리를 하나, 둘 떠올려 보았다. 모두 시답잖은 것들이다. 술기운을 타고 노곤하게 흐르던 사고의 흐름이 문득 웨이크가 했던 말을 끌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돈을 마련해야 한다고 하셨죠?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혹시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면 제가 좀 도와주고 싶어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돈은, 제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라즈녹이 베녹사스에 자리를 잡자 베녹사스 아래의 영주는 눈도장을 찍어 둬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산 제물을 뽑기 시작했고, 제 여동생도 거기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여동생을 빼내기 위해 뇌물을 먹이고, 신분을 다시 만들고, 그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급히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럼 이제 안전한 거예요?”

“그렇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 두었으니 괜찮을 겁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가람은 이미 음식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고 웨이크만이 여전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웨이크가 두 개째의 염소 다리를 뜯어내는 것을 바라보며 과실주만 홀짝이는데 뮐러가 질문했다.

“그런데, 그 찾으시는 게 뭡니까?”

가람은 잠시 망설이다가 진실을 적당히 섞어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패스라는 거예요. 일반인의 눈에는 안 보이고 제 일족들의 눈에만 보이는 어떤 것이죠. 어디에든 있을 수 있는데, 저는 그걸 찾아야 해요. 아주 많이요. 위치를 알 수 있는 수단이 있는데 그 수단이 지금 북쪽으로 가라고 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가는 중이에요.”

“위험합니까?”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단 한 개밖에 못 봤었는데 그리 위험한 장소에 있지는 않았어요. 산 중턱 풀숲에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상한 벌레 인간들을 만났는데, 트리거가 아니었으면 잡아먹혔을 거예요. 제 몸을 지킬 수단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뮐러와 웨이크는 제각각 고민에 빠져들었다. 가람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때문인지 피로가 더욱 묵직하게 와닿았다.

“저 먼저 잘게요. 내일 봐요.”

가람은 답인사를 받지도 않고 그대로 가죽 커튼 너머의 아름다운 꿈의 입구로 몸을 뉘었다.

몸과 침대가 착 달라붙는 것 같았다. 잠을 청할 것도 없이 가람은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남은 두 남자는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어느새 잠에 빠져든 가람이 몹시 피곤했는지 작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고롱고롱하는 숨소리를 배경으로 뮐러가 작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비밀스러운 사연이 있는 아가씨군요.”

웨이크는 과실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독한 술을 즐기는 그에게 이 술은 거의 음료수나 다름없었다.

“길 위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한 웨이크는 고급스럽게도 옆에 구비된 수건에 손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로 향하던 웨이크가 툭 내뱉듯 말했다.

“그래도 나는 이 아가씨가 그리 나쁘지 않소.”

말을 던지자마자 그가 재빨리 커튼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뮐러의 대답은 속으로만 울렸다. 동감입니다.

* * *

세 사람 다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방 안은 고요했다.

아침나절 식사하며 잠깐 대화를 하긴 했지만 말이 많을 줄 알았던 뮐러조차 화제의 부족함을 느끼고 조용히 빵을 씹기 시작했다.

혼자 떠들기도 뭣해서 가람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곧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 사람은 각자 할 일을 하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가람은 책을 읽기로 했다.

밝지도 않은 방 안에서 책을 읽었더니 눈이 쑤셨다. 게다가 책이 그리 재미있지도 않은 내용이라 좀도 쑤셨다.

가람이 읽던 책은 ‘동양인’에 관한 책이었다. 흥미로울 법도 했지만 피부로 닿아 오지 않는 내용이라 별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짜 신분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보들이었기에 가람은 대충 기계적으로 정보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충분히 수집했다고 생각되자 미련 없이 책을 덮었다.

다른 사람들은 뭘 하나 봤더니 뮐러는 책을 읽고 있었고, 웨이크는 침대에서 내려와 한 팔의 엄지나 검지만으로 몸을 지탱한 채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얇은 리넨 셔츠가 땀에 젖어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기에 가람은 민망하고 어색해서 애써 객실에 딸린 작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 밖은 신록이었다. 가람은 읽던 책을 내려놓고 그 푸름을 즐겼다.

열차는 떨림도 없고 흔들림도 없었기에 이 열차가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은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밖에 없었다.

어제는 밀밭, 오늘은 어느 숲이다. 키 작은 나무 위를 날고 있는지 지평선 너머까지 녹색 나무들이 보였다.

커다란 고사리 같은 기이한 형태의 나무들이다. 콩 줄기 같기도 한 그 묘한 나무들은 잎사귀도 없이 그저 매끈했다. 그 낯설음에 가람의 눈이 가라앉았다.

벌써 저쪽으로 가지 않은 지 스무 날이 지났다. 아니, 그 이상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이틀도 기다리기 힘들었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이 세계에 적응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괴상한 냄새들에 코가 적응했고, 처음 보는 음식을 대충 입 안에 밀어 넣은 뒤 ‘괜찮다.’라고 평을 내리는 데도 익숙해졌다.

하루 종일 걷는 것과, 동전이나 금속밖에 없는 이곳의 화폐에도, 그리고 어딜 가든 광활한 풍경에도 적응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람의 그리움을 삭여 주지는 못했다. 그것들은 가람이 조금 더 인내하고 이 상황을 견딜 수 있게는 만들어 주었지만 상황을 변하게 하지는 못했다.

이곳에 적응할수록 예전의 그 세계가 그리웠다.

두 달이 채 되지 않는 이 세계의 시간은 가람의 주관대로 흘러서 마치 1년이나 5년 정도 된 것 같았다.

적응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아서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될수록, 그리고 시간이 실제로 지날수록 패스파인더가 되기 전의 기억은 아름답게 덧칠되었다.

이 세계의 좋은 것을 보면 무조건 그 전의 것이 더 좋았다고 추억하게 되었다.

계약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가람을 지켜야 하는 웨이크나 뮐러보다 뱃살이 나오고 실없이 웃던 아빠가 더욱 절대적이고 강하게 느껴졌다.

열 평이 넘는 이곳의 여관방보다 세 평도 되지 않던 그녀의 방이 훨씬 좋다고 생각되었다.

통째로 구운 이곳의 염소나 짐승의 고기 요리보다 가족들과 먹던 소박한 라면 하나가 더 진미였다.

그 기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것보다 아름답게 미화되어 덧칠될 것이다.

저쪽 세계에서 가장 나빴던 기억조차 이곳에서의 가장 좋았던 기억을 이길 수 없었다.

이 기억의 콩깍지는 절대적이었다. 이것보다 절대적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아직은 잡화점보다는 편의점이, 가죽옷보다는 티셔츠가, 깃펜보다는 볼펜이 더 익숙했다. 더 편리했다. 그것이 가람의 유일한 안도가 되었다.

반드시 돌아간다. 꼭 원래대로 되돌린다. 그 때를 위해 가람은 저쪽 세계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저쪽의 감각도 잃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잊는 순간 놓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차원의 문으로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여전히 평화롭게 살았을 그 시간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25년. 그동안 나름대로 미래도 계획했고 노력도 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좌절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은 궤도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가람은 뜯어내어 집어 던져 버렸다. 차원의 문을 열어 버림으로써. 별 계획도, 의지도 없던 충동적인 기분 하나만으로.

그래, 10분도 가지 않을 그 기분만으로 말이다.

고작 25년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은 가람의 평생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서 그 시간이 평생이 아니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면 다른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기 위해 가람은 필사적으로 기억하고 추억하려 노력했다.

그와 같은 노력 속에서 가람의 이전 세계에 대한 기억은 꿈보다 더 꿈같고 별빛이 일렁이는 천국으로 성역화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억울하기도 했다. 단 한 번의 실수와 일탈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불합리할 정도로 크다.

한 번도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 ‘기회’라며 슬쩍 다가왔다. 무엇에 대한 기회인지 가람은 알 수가 없었다.

평생 열심히 살아왔던 인생을 내팽개치게 해 줄 기회? 그런 건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해질지도 몰랐던 사람들의 인생을 모조리 빼앗지 않고서도 독한 세제를 마시는 정도로 그 ‘기회’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상황에 대한 짜증과 분노, 그리움, 후회와 굳은 의지, 열망과 슬픔 같은 감정이 뒤섞이고 자리를 바꾸며 떠올랐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감정은 모두 하나의 땅 위에 피어올랐다. 죄책감이라는 검은 웅덩이가 끝없이 스스로를 비난했다.

가람은 기차의 창문에서 신록이 아닌 추억을 덧씌워 보고 있었다.

추억은 때때로 모습을 바꾸어 가람을 비난하고,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를 보여 주기도 했다.

패스로 세계를 되찾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풍경을.

불현듯 염려 섞인 의문이 하나 찾아들었다.

만약 여기를 떠나면 이곳도 베이스캠프처럼 멈춰 버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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