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니, 그러지는 않을 거다. 모르드레드에게 들었던 베이스캠프에 대한 설명은 패스파인더가 각성한 세계를 말하는 거였다.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면 알 껍질만 남아 버리는 것처럼. 지금의 세계야 본래 그녀의 것이 아니니 이전 세계로 돌아간다고 해서 별반 달라질 것도 없을 터였다.
가람의 일렁이던 눈은 눈꺼풀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눈을 질끈 감아 그것들을 내리눌렀다.
강하게 닫히는 속눈썹이 모든 것을 꾹꾹 눌러 깊숙한 어딘가로 쑤셔 박았다.
가람은 소리 없이 심호흡하고 상념을 털어 버렸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이렇다.
이렇게 자주 감정에 사로잡히는 건 좋지 않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여정인데, 벌써부터 자신을 소모하는 건 그리 좋은 전략이 아니었다.
“몇 개째예요?”
가람의 질문에 웨이크가 팔 굽혀 펴기를 하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가람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과 옷은 이미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턱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땀이 왁스를 먹어 반질반질한 바닥에 얼룩을 만들고 있다.
다시 한 개의 팔 굽혀 펴기를 하는 웨이크의 등 근육이 꿈틀거리자 가람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 싶어졌다.
“딱히 세지 않습니다.”
아침에 밥을 먹고 잠시 쉰 뒤 계속 저러고 있으니 한 천 개는 되지 않을까. 가람은 분당 개수로 계산해 보려다가 그만두고 본론을 꺼냈다.
“저도 체력을 좀 쌓아 두고 싶은데, 그냥 하면 되는 거예요?”
사실 가람이 가진 책은 ‘동양인’이 유일했다.
나머지 책들은 다 읽었으므로 로아나에게 고스란히 선물했고, 하루 종일 걸으면 읽을 시간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일부러 챙기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동양인을 질리도록 읽고 또 읽고 있었는데, 이곳의 책이라는 것이 그렇게 두껍지가 않아서 벌써 세 번이나 읽어 버렸다. 앞부분은 외울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웨이크가 운동하는 것을 보니 자신도 체력을 좀 단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기간 동안 얼마나 체력을 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차에서 하릴없이 몸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자세를 봐 드리겠습니다.”
웨이크가 몸을 일으키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 앞에 엎드려 보라는 태도라, 가람은 쭈뼛쭈뼛 가서 어색하게 자세를 잡았다.
웨이크는 가람의 허리를 좀 더 높게, 팔은 직각으로, 속도는 더 천천히, 구부러질 때는 어느 곳에 힘을 주라는 등의 세세한 지시를 한 후 팔짱을 끼고 섰다.
책을 읽던 뮐러도 어느새 가람의 팔 굽혀 펴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까지는 했다. 하지만 여섯 개째에서 도무지 올라오지 못하는 가람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거다. 무릎을 대지 않고 정식으로 하는 팔 굽혀 펴기는 보통 성인 여성을 기준으로 한 개도 못 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평소 책보다 무거운 것을 드는 일이 없으니 팔의 근육이 발달할 리도 없는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의 가람이라면 다섯 개는커녕 두 개도 하지 못했을 거다.
악을 쓰는 가람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웨이크가 할 때는 쉬워 보였는데 직접 하려니 장난이 아니다.
위에서 웨이크의 한심하다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가람은 낑낑대다가 간신히 여섯 개째를 한 후 그대로 퍼져 버렸다.
“아, 한심하죠?”
가람이 헥헥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기운이 다 빠진 듯 무릎에 손을 걸치고 웨이크를 올려다보자 의외로 웨이크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평범한 수준입니다. 저는 검을 다뤄 팔 근육을 많이 쓰지만 보통은 그 정도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하죠.”
웨이크가 말한 ‘조금’은 정말로 ‘조금’이었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하시죠.’ 하는 눈으로 가람을 내려다보았다.
5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쉰 것도 쉰 거냐며 항의하고 싶었지만, 가람은 순순히 엎드렸다.
“힘내요. 가람.”
흘긋 보니 뮐러는 아예 읽던 책도 내려놓고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람은 한숨을 쉰 뒤 천천히 웨이크의 충고를 되새기며 집중했다. 하나, 둘, 세엣, 세에엣, 세에에엣, 세에에에…….
“조금만, 더, 쉴게요.”
가람은 결국 다시 앉아 버렸다. 코와 입으로 숨을 빨아들이던 가람은 뮐러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뮐러도 같이 해요.”
“전 마법삽니다.”
가람의 퉁명스러운 권유에 뮐러는 매끄럽게 거절했다. 뮐러도 몇 개 못 할 것 같은데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고 웃다니!
“마법사라도 체력을 단련해 둬야죠. 어서 여기 옆에 엎드려요.”
적극적으로 옆자리를 비워 주기까지 하자 그제야 뮐러는 마지못해 옆에 와서 엎드렸다.
웨이크는 그가 와서 엎드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세의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시죠.”
이번에는 좀 오래 쉰 덕분인지 가람은 다섯 개까지 했다. 여섯 개째에서 올라오지 못하고 다시 낑낑거리고 있는데 옆에 엎드린 뮐러는 너무나 수월하게 휙휙 해치우고 있었다.
여섯 개째를 성공시킬 생각도 못 한 채 멍하니 그걸 보고 있었더니 백 개를 깔끔하게 끝낸 뮐러가 씨익 웃는다.
“제가 이겼군요?”
옷 때문에 약해 보였는데, 그래도 남자란 건가. 가람은 입맛을 다시고 끄덕였다. 그리고 제 몫의 팔 굽혀 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열 개를 채우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열 개를 채우고 나니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제 것이 아닌 것 같다.
“아, 더 이상 못 하겠어요. 수고하셨어요.”
가람의 말에 웨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이크나 자신이나 땀에 절어서 엉망이었다.
이곳이 산이라면 그냥 무시했겠지만 호사는 누릴 수 있을 때 누려 두는 것이 좋은 법이다.
가람은 침댓가의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낸 뒤 작은 주머니에 나누어 담아 뮐러와 웨이크에게 건네었다.
“앞으로 제 여정에 함께하면서 들 경비는 이걸로 계산하세요. 다 같이 먹는 식량 같은 건 제가 사겠지만 개인 물품은 본인이 구입해야 하니까요. 저랑 다니느라 드는 돈인데 자비를 내어 구입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일단 전 좀 씻고 올게요.”
뮐러와 웨이크가 주머니를 받아 들고 열어 보니 500골드 금화 하나와 1골드, 5골드 등의 소액 금화가 섞여 들어 있었다.
새삼 느끼지만 정말 배포가 크다. 뮐러나 웨이크에게 있어서 이 금액이 어마어마하게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뜻 건넬 만큼 작은 금액도 아니었다.
게다가 노예에게 용돈을 주는 주인이라니?
“목욕하려면 나가서 어느 쪽이었죠?”
“왼쪽입니다. 왼쪽으로 가서 계단을 내려간 뒤 1층 담당 승무원에게 말하면 됩니다.”
마법 열차라 그런지 정말로 있을 건 다 있다. 의료실과 주점, 목욕탕까지 없는 게 없었다.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 조금 흠이었지만 가람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땀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웨이크에게도 목욕을 권했지만 그는 좀 더 몸을 움직인 뒤 씻고 싶다며 거절했다. 결국 그녀는 혼자 객실을 나섰다.
방을 나오자 바로 앞에 달린 커다란 창문으로 풍경이 세차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조금 어지러울 정도였다.
잠깐 멍하니 서 있던 가람은 지나던 통행인에게 두어 번 가볍게 부딪힌 후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걷기 시작했다. 왼쪽이랬지?
열차의 복도는 호텔같이 밝고 오가는 통행인도 꽤 있었다. 안전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가람은 작은 권총을 겨드랑이 밑에 차고 나오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언제나 준비하는 것이 준비하지 않는 것보다 나은 법이다. 사용하든 하지 않든 갖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믿는 것이 있으면 당당할 수 있었고, 당당하면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도 대폭 줄어들었다.
두 남자에게 같이 가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런 것까지 부탁하긴 좀 껄끄러웠다.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목욕하는 걸 기다려 달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건 부끄러운 일이다.
어느새 노예니 뭐니 하는 건 새카맣게 잊어버린 가람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계약으로 묶인 나를 도와주는 사람.’ 정도가 가람이 두 사람에 대해 느끼고 있는 관계였다.
1층으로 내려오니 3층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마치 카페테리아 같은 느낌으로, 스탠딩 테이블이 여러 곳에 있었고 사람들은 대낮부터 술로 보이는 것을 들고 서 있었다. 간간이 담배를 피우는지 매캐한 냄새도 났다.
활기차고 소란스러운 그 틈바구니에서 가람은 어렵지 않게 승무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람이 두리번거리자 승무원이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기 때문이다. 말하기도 새삼스럽지만, 가람은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뭔가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목욕을 좀 하고 싶어서요.”
어제 봤던 승무원과는 또 다른 사람이다. 1층을 담당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마법 열차의 객차는 가람 세계의 열차보다 훨씬 컸다.
길이로 보나 넓이로 보나 네 배는 큰 것 같았다. 3층에는 방과 복도만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렇게 터놓고 보니 기차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크다.
“이쪽입니다. 그런데 사용하시려면 좀 기다리셔야겠습니다.”
목욕탕의 입구는 원형 계단의 뒤쪽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계단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알고 보니 작은 문 위에 ‘목욕’이라고 적혀 있고 옆에는 가격표까지 붙어 있었다. 3실버였다.
세수와 양치는 아침마다 배달되는 따듯한 물로 해결했으니 그리 찝찝하지 않은 데다 이제 땀이 다 말라 버려서 기다리면서까지 목욕을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도 내려왔는데 그냥 올라갈 수는 없어서 가람은 일단 대기표에 이름을 올리기로 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죠?”
“길어도 한 시간이면 될 겁니다.”
가람은 승무원이 들고 있는 대기표를 훔쳐보았다. 가람의 위에는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한 시간이라니. 아마 안에 있는 사람이 나가야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인 모양이다.
대중탕을 떠올렸던 가람의 생각과는 달리 개인 욕실이었던 것이다. 한 시간이라, 여기서 기다리긴 좀 그런데.
“이름을 등록하고 방으로 가 있으면 불러 주나요?”
질문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승무원은 가람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가람의 등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페테리아 같던 객차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가람은 커다란 여자가 거의 비슷한 키로 보이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여자는 잘만 하면 간이침대로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 큼지막한 검을 검집도 없이 등에 메고 있었다.
‘싸움인가?’
멀리서 보기에도 분위기가 흉흉했다. 여자는 남자를 한 팔로 집어 들고 있었다.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자들이 여차하면 뛰어들 기색으로 몸을 낮추고 있었다.
새빨간 머리카락에 진한 적갈색 눈동자의 여자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들고 있던 남자를 집어 던져 버렸다. 남자의 일행 중 한 명에게 말이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멱살이 잡혔던 남자는 일행을 덮치고도 두어 걸음 더 쿠당탕 굴러갔다.
그 틈을 타 남은 일행이 여자에게 덤벼들었다. 성가시다는 듯 사납게 미간을 모은 그녀는 등의 검을 잡았다. 그대로 뽑을 기색이었다.
가람이 침대로도 쓸 수 있을 만큼 큰 검을 단 한 손으로 말이다.
“멈추세요! 열차에서 살인은 금지입니다!”
굳이 열차가 아니라도 금지 아닌가? 가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친절해 보이던 승무원이 후다닥 그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승무원은 마법사였지만 마법사가 아닌 그 누구라 해도 그 여자가 다음에 할 행동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검을 뽑으며 그 힘 그대로 주변 사람들의 목을 날려 버릴 셈이었다.
그 외침에 잠시 멈칫했던 여자는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날이 달린 방패라고 해도 좋을 만한 그 대검을 바로 세워 자신을 찔러 들어오는 짧은 단검들을 막아 내었다.
카캉―! 하고 쇠가 짧게 울었다. 단검을 막아 낸 대검 뒤에서 여자의 적갈색 눈동자가 새빨갛게 타올랐다.
가람은 멀찍이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승무원도 모두 다 보았다.
여자의 팔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순간, 모두가 긴장에 휩싸였다. 단검을 내질렀던 남자들도 죽음을 각오했다.
가람은 시체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렸다. 여자의 저 큰 검과 괴력이 그대로 사람을 가로로 반 토막 칠지도 모른다.
그 순간, 객차의 승객 대부분을 범위에 넣고 쓸어 보던 여자의 눈과 가람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목욕하러 왔을 뿐인데! 가람의 절규가 눈동자를 통해 절절히 배어 나왔다.
“쳇, 그만하련다.”
금방이라도 검을 휘두르려던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대로 검을 등에 메었다.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염라대왕 바로 앞까지 날아갔다 온 네 남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엉거주춤 뒤로 기는 자세로 아직 살아 있는지 제 몸을 더듬는 것에 흘긋 시선을 준 그녀는 가람을 보며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생긋이라기보다 씨익에 어울리는 호방한 웃음이었다.
“어린애 앞에서 살인을 할 수는 없지.”
어린애? 누구? 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