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객차 안에서 그 고마운 어린애를 찾아보던 가람은 여자의 시선이 똑바르게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어린애? 스물다섯인데 어린애라고?
가람이 자신의 뒤와 주변을 살피며 자신을 향한 그 시선을 부정하는 동안 여자는 본인이 멱살을 잡아 던져 버렸던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남자의 일행은 그녀의 기세가 흉흉하긴 하지만 살인을 할 생각은 없다는 그녀의 말을 믿기로 한 건지 주춤주춤 물러서 주었다.
“야, 이 새! 흠.”
남자의 복부를 퍽 걷어차자 남자가 파득 경련했다. 반질반질한 가죽 부츠는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엄청나게 단단해서 내장이 다 터질 것만 같았다.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으려던 여자가 아직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가람을 흘긋 바라보곤 무릎을 접어 쭈그려 앉았다.
남자의 얼굴 앞에 가까이 다가서서 소곤소곤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람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그 곁에 가까이 앉아 있던 죄 없는 승객은 고스란히 그 말을 귀로 넣었다.
“내가 오늘은 그냥 보내 주는데,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배를 쫙 갈라서 내장으로 목을 매달아 주겠다. 산 채로 머리 뚜껑 따이고 싶지 않으면 그 손모가지 조심해라. 아니, 이참에 확 잘라 줄까?”
협박이 아니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진정성이 절절히 우러났다.
여자의 목소리에 섞인 광기는 정말로 다음에 만나면 남자의 내장이 교수대의 밧줄을 대신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여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라면 저 말이 가감 없는 사실임을 알리라.
“꺼져.”
여자가 마지막으로 은혜를 베풀듯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울컥 피를 토해 낸 남자는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동료들의 부축을 받았다. 갈비뼈든 뭐든 하나가 부서진 것이 틀림없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으깨어 주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자고로 소매치기들은 손을 잘라 줘야 제맛인데.”
히끅! 갑자기 그녀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히끅 히끅 딸꾹질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여자의 가늘게 뜬 붉은 눈과 마주친 후 큽 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숨 쉬어. 숨. 음,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게 되었네.”
상냥하게도 남자의 등을 도닥여 준 여자는 좌중을 둘러보며 머쓱하게 사과의 말을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일일이 정해서 베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소매치기 외에 대검의 궤도 안에 있는 모든 승객을 베어 버리려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승무원은 사태가 일단락되었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으나, 어쩌겠는가. 상대는 북공의 따님인데. 아디나크 크페타인의 딸, 트라키아 크페타인.
“무슨 일입니까. 트라키아 공주님?”
“아, 소매치기야.”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한 그녀는 이제 관심 없다는 듯 바로 가서 술 한 잔을 사 들고 창가에 섰다. 방금까지 딸꾹질을 하던 남자가 서 있던 자리였다.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곧 여기저기서 소곤거림이 흘러나오더니 곧 예전의 소란함을 되찾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가람도 곧 얼떨떨하게 승무원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방에 가 있으면 알려 줘요?’, ‘아니요. 여기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냥 목욕을 그만둘까. 가람은 몹시 갈등했다. 당장이라도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상황도 종료되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람을 유혹했다. 방금 일로 식은땀을 흘려서 몸도 다시 찝찝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가람은 여자와 최대한 떨어진 대각선 반대편에서 자신의 목욕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가람이 자리를 잡자 시기적절하게도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한 남자 세 명이 객차에 들어서 테이블을 붙잡았다. 그리고 승무원이 빤히 보는 앞에서 도박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각자 주 종목으로 보이는 카드, 주사위, 컵 등으로 게임을 벌였는데, 딱히 도박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없는지 승무원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돈 놓고 돈 먹기! 맞추면 두 배! 맞추면 두 배! 1쿠퍼가 어디 있는지 봐요, 봐요. 중간 왼쪽 오른쪽 어디로 갔을까?”
딱히 구경거리가 없었기에 가람도 어느새 그 도박판으로 다가섰다.
큰 숫자가 나오면 이기는 주사위 게임과 카드 게임도 있었지만 컵으로 동전을 숨기고 이리저리 옮기는 것이 가장 현란했기에 가람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구리 동전의 색이 테이블과 흡사해서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중간에 1실버!”
“그러면 나는 오른쪽에 5실버야!”
돈을 따는 사람도 있고, 잃는 사람도 있었다. 점점 흥에 겨워 판돈이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경만 하며 속으로 동전이 있는 곳을 맞추어 보던 가람은 자신의 예상이 꽤 들어맞자 직접 돈을 걸어 보기로 했다.
“중간에 50실버요!”
가람이 갑자기 거금으로 끼어들자 도박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꼬마 아가씨가 아주 통이 크시네.”
꼬마 아니거든. 가람은 조금 울컥했으나 한숨을 내쉬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덩치가 장난이 아니라 체구도 작고 골격도 작은 가람은 언뜻 보면 아이로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맞추면 두 배랬지? 중간에 들어가는 걸 똑똑히 봤다. 1골드 벌었네. 돈은 많았지만 그래도 맞춘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가람은 그가 가운데 컵을 열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충분히 돈이 걸렸다고 생각되자 컵을 열었다. 동전은 오른쪽 컵에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잘못 봤나?’
활짝 웃으며 50실버를 챙겨 가는 남자를 보며 가람은 미간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 10실버를 걸었다.
방금 맞추지 못한 탓에 자신감을 잃고 금액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틀렸다.
“가운데, 10실버요!”
“어이쿠, 아가씨 운이 없네.”
“오른쪽! 10실버요!”
“이런, 아까웠어.”
“왼쪽! 10실버요!”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연속 다섯 번을 내리 지고 나자 슬슬 오기가 생겼다. 생각보다 꽤 재미도 있다. 목욕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이 게임이나 해야겠다.
어차피 푼돈이라 부담도 없었다. 이러다가 한 번 이기고 목욕하러 가면 기분이 엄청 좋겠지?
“중간, 50실버요!”
이제 목욕 차례가 슬슬 돌아오지 않았을까 해서 돈을 좀 올렸다. 오오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으나 가람은 긴장된 얼굴로 컵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진짜 봤다. 정말로 봤다.
가람 외의 사람들이 충분히 돈을 걸자 남자가 천천히 중간의 컵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빨리 컵을 잡은 사람이 있었다.
“여는 건 아무나 열어도 상관없겠지?”
가람은 자신의 얼굴 바로 옆에서 쑥 뻗어 나온 하얗고 긴 팔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기겁했다.
등에 대검을 메고 있던 여자! 그녀는 말릴 새도 없이 바로 중간의 컵을 까 버렸다. 그리고 구리 동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맞았다!”
가람은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도박사는 얼굴을 구기고는 똥 씹은 얼굴로 가람의 손에 1골드를 쥐여 주었다.
그러면서도 붉은 머리칼의 여자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그 시선을 당당히 받더니 되레 도박사를 위협했다.
“그 눈깔은 뭐냐? 마지막에 뭔가 수작이라도 부린 건 아니겠지? 이 꼬마 아가씨한테 사기를 치려고 했다거나, 응?”
“아, 아닙니다.”
여자의 어깨 너머로 대검의 칼자루를 확인한 도박사가 황급히 눈을 피했다. 트라키아 크페타인! 북쪽의 미친년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그럼 계속해.”
트라키아는 코웃음 치고 가람의 어깨를 감싸 안아 그 도박장에서 빠져나왔다.
가람은 그녀가 다가온 순간부터 바짝 얼어 버렸기에 거부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 나왔다.
트라키아는 끌고 나온 가람의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어 헝클어뜨린 뒤 대뜸 질문했다.
“우쭈쭈, 엄마는 어디 있니? 쪼그만 게 벌써 저런 데서 놀면 못써.”
가람은 몹시 황당했다. 185가 훌쩍 넘어 보이는 이 커다란 여자에 비해서 자신이 작긴 하지만, 꼬마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여자가 너무 큰 것이다. 가람은 쭉쭉빵빵한 여자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저는 아이가 아닙니다.”
“그래그래.”
어린애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식의 어르는 말투다. 그녀가 별달리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가람은 조금 더 용기를 얻었다.
“저는 스물다섯입니다.”
여자의 분위기가 대번에 바뀌었다. 순식간에 눈이 휘까닥 돌아간다.
“날 속이는 거냐?”
미친 여자다!
대번 안면을 바꾸고 음산하게 물어 오는 목소리에 가람은 도저히 ‘내가 언제?!’라고 따질 수가 없었다. 박력에서 밀려 버린 것이다. 가람은 결국 더듬더듬 변명했다.
“사실 다섯 살이에요.”
엉겁결에 ‘스물’을 삼켜 버렸다. 아차 했으나 말은 이미 입 밖으로 나갔다.
“음? 다섯 살치곤 좀 큰데. 한 열 살은 되어 보인다. 하하.”
말을 한 후 가람은 혀를 깨물고 싶었다. 다섯 살이라니! 다섯 살이라니! 먹힐 말을 해야지! 잔뜩 긴장한 가람과 달리 여자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반응으로 훗훗 웃었다.
열 살? 가람은 여자가 진담으로 하는 말인지 농담으로 건네는 말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가람을 구해 준 것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승무원이었다. 승무원은 가람에게 목욕 차례가 다 되었노라고 알렸다.
가람은 그 핑계로 도망치듯 그 여자를 피했다. 어딘가 좀 이상한 여자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가람을 여자가 불러 세웠다.
“잠깐, 이거.”
마음이 바뀌었다. 너를 채 썰어 보자! 할까 봐 잔뜩 쫄아 붙어 있던 가람은 여자가 내미는 의외의 물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는 가람의 손에 그것을 꼭 쥐여 주고 머리를 두어 번 더 쓰다듬었다.
“혼자 목욕도 하고, 착하다.”
가람은 멍하니 여자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만큼은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 성격이 어떻든 말이다.
승무원은 멍한 얼굴의 그녀를 잡아끌었다. 가람은 주춤주춤 걸으며 끝까지 그 붉은 머리칼의 여자를 돌아보았다.
따끈한 물이 채워진 욕조 앞에 도착한 그녀는 손안에 쥐어진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쥐여 준 것은 보기에도 알록달록 영롱한 사탕이었기 때문이다.
황당한 얼굴로 그 사탕을 내려다보던 가람은 입 안에 홀랑 사탕을 넣어 버리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먹어 버리고 잊어버리자. 없어, 없던 일이야.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나니 매우 허기가 졌다. 방에 돌아오니 마침 두 사람도 무언가를 먹고 있기에 가람은 의자를 끌어다가 테이블에 다가앉았다.
두 사람이 먹고 있던 것은 마치 돼지처럼 몸체가 동글동글한 작은 짐승을 내장을 빼고 통째로 구운 것이었는데, 느끼하긴 했지만 채소와 함께 쌈을 싸서 먹으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마치 배추처럼 적당히 두께가 있는 잎사귀는 멜론과 배를 섞어 둔 것 같은 맛이 났는데, 꽤 흔한 채소인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탁자 한 귀퉁이에 저 채소가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가람은 채소에 고기를 올려 싸며 아래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붉은 머리칼에 대검을 쓰는 여자가 자신을 열 살짜리 아이 취급했다고.
“아마, 트라키아 공주일 겁니다.”
뮐러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대답했다. 웨이크는 먹을 때는 말이 없어서 식사 때 대화는 늘 가람과 뮐러가 주인공이었다.
가람은 주먹만 한 쌈을 와구 먹고 있는 웨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쌈에서 고기를 좀 덜어 내 크기를 줄였다.
“공주요?”
“예. 공왕이기도 한 크페타인 공작의 따님이죠. 트라키아 크페타인, 나이는 스물둘에 북부 제일의 패검이라고도 불립니다. 또 다른 별칭이 있긴 한데, 남쪽에서만 불리는 호칭입니다만 그…… 북쪽의 미친년이라고도 부릅니다.”
확실히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가람은 그 말을 납득했다. 자신을 보고 열 살이라니.
하지만 그 이유로 미친년이라는 공주로서 따내기 힘든 호칭을 획득한 건 아닌 것 같다. 아마 네 명의 소매치기에게 저지르려고 했던 짓 때문일 테지.
가람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납득하자 뮐러가 재빨리 덧붙였다.
“대체로 북쪽은 척박한 곳이라, 그쪽 사람들은 투박하고 억센 성정으로 유명하죠. 여성이라고 해도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런 문화적 차이 덕분에 남쪽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왜 저를 열 살 취급한 걸까요?”
“음, 크페타인 공작가는 대대로 거구로 알려져 있지요. 트라키아 공주가 열 살 때 가람보다 조금 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북부의 아이들은 일찍 몸이 큽니다. 그렇게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거든요.”
가람도 작은 키는 아니었다. 165센티인 가람보다 크려면 170은 되어야 할 텐데. 확실히 크긴 했지만, 이미 열 살 때 키가 170이었단 말인가?
“그렇군요.”
그녀의 키가 열 살이 아니라 일곱 살 때 170을 넘어섰다고 해도 가람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라 그녀는 곧 트라키아의 체구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다.
말하는 호랑이도 있고, 날아다니는 기차도 있는데 새삼 키가 좀 큰 사람 정도로 놀랄 가람이 아니었다. 가람은 좀 더 현실적인 것에 주목했다.
“그런데 북쪽이 그렇게 척박한가요?”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걱정이 묻어났다. 가람은 사실 ‘척박하다.’라는 말의 뜻을 잘 몰랐다.
어디 먼 곳의 눈물을 짜내는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감성적인 묘사라고 생각했을 뿐 실제로 ‘척박한’ 곳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현실적으로 등장한 그 단어에 대한 화제는 가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글쎄요, 북쪽은 워낙 다니는 사람만 다녀서요. 굉장히 춥고, 털색이 흰 동물이 많이 산다는 것 외에는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차라리 사냥꾼이었던 웨이크 씨가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요?”
갑자기 돌아온 화살에 웨이크는 입 안의 고기만 우물거렸다.
서둘러 고기를 삼킨 웨이크는 흠, 하고 생각을 가다듬더니 두 쌍의 눈동자를 번갈아 마주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도 사냥꾼 길드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크페타인의 북쪽 끝 너머는 그곳의 토박이라도 웬만큼 노련한 사람이 아니면 다니지 못하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북쪽 출신의 사냥꾼들은 뛰어난 무력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추위 속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웨이크는 잠시 애매한 얼굴로 말을 끊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긴 했는데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난감했다. 망설이던 그는 그냥 되는대로 대충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눈집을 지어서 그 위에 물을 뿌리면 불 없이도 안쪽이 따듯해진다는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음, 식량도 부족하고 추위도 극심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열에 아홉은 100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100일 후에나 이름을 지어 준다고 하더군요.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시 열 살 전에 열에 다섯은 죽습니다. 아이를 보기가 정말 힘들죠.
북부의 주민들은 대부분 외지인이고, 그나마도 가죽을 모아 한 밑천 잡으면 떠날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덕분에 아이에게는 정말로 친절하다고 하더군요.”
가만히 듣던 뮐러가 장난스럽게 제안했다.
“가람이 어린아이인 척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꽤 예쁨 받을지도 모르는데요.”
“말도 안 돼요. 어차피 동양인이라 어려 보이는 거 다 알걸요.”
가람이 딱 자르자 의외로 웨이크가 진지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북쪽으로 가는 동양인은 없습니다. 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나쁜 생각은 아니군요. 그쪽의 토박이들은 외지인에게 배타적이니, 그렇게라도 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람은 입을 딱 벌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정말로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웬만하면 그러고 싶지 않네요. 만약 속였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가람은 자신을 속이는 거냐며 번들거리던 트라키아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지간하면 외출도 삼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가람은 질린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런 가람을 뮐러가 부드러운 어조로 안심시켰다.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거친 인물은 아닙니다. 잘 이야기하면 아마 이해해 줄 겁니다.”
그러나 웨이크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단호히 뮐러의 말을 잘랐다.
“하버샴 사건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하버샴 사건이요?”
말을 끊겼던 뮐러조차 웨이크의 말에 ‘하긴.’ 하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