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가람의 질문에 웨이크는 탁자 위의 천 조각에 고깃기름이 묻은 손을 닦으며 대수롭잖다는 듯이 짧게 설명했다.
“예전, 하버샴이라는 남자 이야기입니다. 남쪽의 사막 국가 쿠잔 출신의 귀족인데 여행차 북쪽으로 왔다가 그녀와 만났었죠. 공주는 그 남자가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공주는 위풍당당하게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네었습니다.”
웨이크는 일부러 거기에서 말을 잠시 끊었다. 식사를 끝내고 음료를 마시며 웨이크의 이야기를 듣던 가람은 눈으로 이야기를 재촉했다. 무슨 말을 했기에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가람의 시선에 웨이크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박진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작게 외쳤다.
“나는 트라키아 크페타인이다! 거기 너, 지금부터 날 사랑해라!”
뮐러는 쿡쿡 웃기 시작했고 가람은 어처구니없어하다가 한마디 했다.
“연기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하버샴은 웬 미친 여자인가 하는 얼굴로 그 소리를 듣다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손익 계산을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상견례 자리에서 남쪽의 결혼 풍습대로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자신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했죠.”
“절대로 안 들어줬을 것 같은데요.”
“네. 그 말을 들은 트라키아 공주는 한바탕 시원하게 웃은 뒤 하버샴을 두 토막 내었다고 하더군요. 세 토막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 자리에 있던 시종의 입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라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졸지에 대가 끊긴 하버샴 가문에서 엄청나게 항의했지만, 바랄라인 제국에서는 북공의 손을 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가람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다가 조용히 결정했다.
“역시 앞으로 여기서 운동이나 하면서 조용히 지내는 게 좋겠어요. 웨이크, 내일부터 저 단련 좀 시켜 주세요.”
가람의 말에 웨이크는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미루지 마시고 지금부터 하시죠.”
방금 목욕했는데. 망설이던 가람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욕이나 땀 냄새 따윈 전혀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팔이 부러질 것 같아요.”
“안 부러집니다.”
혀를 빼어 물고 땀과 침, 그리고 그 외의 빼낼 수 있는 것을 모두 흘리며 가람이 호소했지만 웨이크는 단호하게 그 말을 잘랐다.
요 3일간 가람은 웨이크에 대한 평가를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무뚝뚝하지만 조금 귀여운 사람에서 무뚝뚝하고 귀신같은 사람으로.
이제 여러 개를 이어 할 기력이 없었기에, 가람이 세는 팔 굽혀 펴기의 개수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하나였다.
몸살이 나지 않는 게 놀라울 정도다. 파들파들 떨리는 팔을 흔들며 근육통이 너무 심하다고 호소하자 웨이크는 간단하게 ‘근육통은 근육을 써서 풀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틀린 말도 아닌 데다, 먼저 단련시켜 달라고 청한 터라 가람은 한숨을 삼키며 묵묵히 웨이크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하……나.”
가람이 다시 팔 굽혀 펴기를 하나 했다. 옷은 이미 꾹 짜면 땀이 좌르륵 쏟아질 만큼 흠뻑 젖어 있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코끝을 타고 바닥에 똑똑 떨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바닥의 땀자국을 응시하며 가람은 온몸의 근육에 집중했다.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는데요?”
침대에 엎드려 가람의 고생을 보고 있던 뮐러가 빙그레 웃었다. 칭찬임이 분명한데 도저히 칭찬으로 들리지 않아서, 가람은 대꾸도 하지 않고 어금니만 악물었다.
사실 대답할 기운도 없다.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건 순전히 악과 정신력이었다. 몸은 이미 예전에 끝났다.
“기초적인 체력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웨이크가 담담히 말하며 가람에게 다시 하나의 팔 굽혀 펴기를 지시했다.
‘다시.’라는 말이 들리자 가람은 팔 굽혀 펴기를 반 개 했다. 그리고 굽혀진 팔을 펴서 나머지 반 개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악을 썼다.
얼굴이 벌게지고 목구멍에 핏줄이 다 터지는 것 같다. 반쯤 펴진 팔이 후들후들 떨리기만 할 뿐 올라오지를 못했다.
결국 가람은 반 개의 팔 굽혀 펴기를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납작하게 퍼졌다. 웨이크는 짧게 휴식을 선언했다.
“조금 쉬도록 하죠.”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요즘 가람이 가장 기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저 말이 나올 일은 없겠지.
가람은 쌕쌕 숨만 몰아쉬며 간절한 눈으로 창밖의 해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게 바라본다고 해도 별 소용은 없었지만.
그때 두 번의 노크가 들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었으므로 순간 방 안의 세 사람은 동작을 멈췄다.
노크는 승무원의 것이 아니었다. 승무원의 것보다 좀 더 급박하고, 거칠었다. 낯선 노크였다.
가람은 노크 소리 하나로 그렇게나 생각할 수 있게 된 자신에게 놀랐지만 곧 두 번, 세 번째의 급박한 노크가 연이어 문을 두드리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침대 뒤로 돌아가 몸을 낮추고 숨었다.
문에 다가갈 것처럼 일어선 가람이 그대로 후다닥 숨자 뮐러와 웨이크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가람은 그 시선에 작게 변명했다.
“만약 트라키아 공주면 어떡해요. 아직 마주치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갑작스러운 거친 노크는 거의 잊어 가던 트라키아를 다시 상기시켰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찔리는 구석이 있는 가람은 그녀를 만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아니, 그런 류의 사람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웬만하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녀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다.
혹시 아는가? 다시 마주친 트라키아 공주가, ‘가만, 너 다시 보니 한 스물쯤 되어 보이는데?’ 하곤 하하 웃으며 자신을 두 토막 낼지.
“제가 나가죠.”
숨어 버리는 가람에 이어 침대에서 뒹굴대며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음을 온몸으로 피력하는 뮐러를 흘깃 바라본 웨이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문으로 다가섰다.
높은 수준의 치안이 유지되는 기차 안이었지만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해 검 자루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그리고 문을 아주 약간만 열었다.
손가락 한 마디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은 문틈으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으므로 웨이크는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재차 문을 두드리려던 여자는 그제야 웨이크를 알아채고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서른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애원했다.
“살려 주세요!”
잠시 웨이크는 자신이 검을 뽑아 들고 흉흉한 표정이라도 짓고 있었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뒤로 보이는 풍경에 그 말뜻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의 어깨 너머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남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들것에 누워 있었다.
방금까지 여자가 끌고 왔는지, 들것에는 바닥의 왁스와 먼지 따위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마 짧은 거리를 끌고 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질문하며 웨이크는 두 사람의 차림을 더 살폈다.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과 거기에 달린 은장식으로 보았을 때 돈이 없는 자들은 아니다.
여자는 놀라고 절박한 얼굴이긴 했지만 곱게 자란 티가 났다.
옷차림이 매우 얇은 것을 보니, 북부 출신이다. 이제 슬슬 서늘해져서 가람이 갑자기 추워졌다며 투덜거리는 날씨지만 북부 출신의 사람들에게는 한여름이나 다름없는 날씨겠지.
그래서 저렇게 옷차림이 가벼운 것일 테고. 하지만 체구를 보니 북부 토박이는 아니고, 준귀족 출신 상인인가?
“의무실의 침대가 꽉 차서, 이 방이 인원수에 비해 침대가 남는다고 들었어요. 사례는 할 테니 남는 침대를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몇 개의 침대, 어느 만큼의 사례 등 정확한 수치를 말하지 않는 두루뭉술한 화법은 상인 특유의 것이다.
마법 열차가 지어졌으니 거래를 터 볼까 해서 오가는 상인임이 분명했다.
웨이크는 생각에 확신을 실으며 이들이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팔과 다리가 부러졌군요. 남편입니까?”
남자의 오른팔과 오른 다리의 중간이 어색한 각도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부어오른 정도를 보니 꽤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네. 의무실에서도 부탁해 봤지만 침대가 다 차 있다고 해서요, 제발 부탁드려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웨이크는 문을 닫았다. 여자의 얼굴이 마지막까지 문틈을 비집고 간절한 시선을 보내었다.
웨이크의 등을 바라보며 무슨 대화를 하는지 귀만 쫑긋 세우고 있던 가람은 트라키아가 아니라는 것에 일단 안심했다.
그녀는 웨이크가 돌아서자마자 재빨리 질문했다.
“누구예요?”
“환자가 있는데 의무실의 침대가 다 차서 저희 방의 남는 침대를 빌릴 수 있겠냐고 하는군요.”
웨이크는 문가에 선 상태로 담담히 대답했다.
“환자요?”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팔과 다리가 각각 하나씩 부러진 남자입니다. 일단 물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말을 마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가람은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야 어차피 남아도는 침대를 하나 빼어 주고 싶긴 했지만, 뮐러나 웨이크가 불편해할지도 모르고 또 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라서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고민하던 가람은 차라리 두 사람에게 묻기로 했다. 뮐러는 즉각 괜찮을 것 같다고 동의했지만 웨이크는 잠시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