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동상(凍像)이 되어 버릴 날씨인데 길바닥에서 잠을 잔다니.
다음 날 아침이면 아주 신선한 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커다란 짐승의 일용할 양식이 되거나.
“만약 노숙을 해야 한다면 여기서 장비를 좀 구입해야 할 것 같군요.”
웨이크의 말에 가람은 자신의 세계로 가서 겨울 장비들을 챙겨 올까 했다. 가죽옷보다는 두터운 패딩 옷이 훨씬 가볍고 따듯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장비들을 두 사람에게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원래 있었다고 둘러대기에는 겨울용품들의 부피가 너무 컸다.
“음식 나왔습니다.”
고민하는 세 사람 앞에 주점 주인이 음식을 내어놓았다. 걸쭉한 고기 스튜와 단단한 빵이었다.
1골드짜리 식사치고는 굉장히 빈약했으나, 말을 하루 맡기는 데도 20실버나 받는 곳이니 가람은 그러려니 했다.
별로 손이 가는 모양새가 아니라, 가람은 술만 한 모금 머금었다.
“윽.”
알콜에 눈알이 불탈 것 같은 독한 술이었다. 술이라기보다 그냥 알코올에 가깝다.
소독약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가람은 삼키지도 못하고 쩔쩔매다가 간신히 목구멍으로 술을 넘겼다.
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화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 여운에 허겁지겁 스튜를 입에 넣자, 이번에는 노린내가 지독했다.
웨이크와 뮐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노린내가 진동하는 스튜를 떠먹었다.
곱게 말해서 노린내지, 그냥 암내가 나는 스튜였다. 한 몇 달 씻지 않은 누군가의 겨드랑이로 만든 게 아닐까?
“너무 추워서 술이 발효가 되지 않으니, 술도 수입합니다. 여긴 독한 술밖에 없어요. 도수가 낮은 과실주는 쉽게 변질되니까. 그리고 약한 술은 추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거든요.”
가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을 본 뮐러가 조용히 말했다. 뮐러의 말대로 한 모금을 마셨을 뿐인데도 속이 뜨끈해져 왔다.
더 마실 생각은 들지 않아서, 가람은 잔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고향도 아닌 베록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노린내가 너무 심하네요. 여기 후추 좀 뿌릴게요.”
뮐러와 웨이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가람은 가방에서 후추를 꺼내어 뿌렸다.
뽀삐가 짊어진 짐 외에 가람은 늘 작은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작게 분할된 후추와 소금, 그리고 고춧가루 같은 조미료와 생리대와 물티슈, 라이터, 거울, 총탄 등이 들어 있었다.
보석은 배에 두른 복대 안에 들어 있고, 돈주머니는 옷 안에 차고 있었다.
돈주머니를 보이게 차고 다니는 건 기척에 엄청나게 민감한 실력자나, 아무것도 모르는 얼간이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후추를 뿌리고 나니 그나마 먹을 만했다. 커다란 고깃덩이를 떠 우물거리며 가람은 다시 본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어떤 장비를 사야 할까요?”
말을 꺼내면서도 가람은 이곳에 장비를 판매하는 상점이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웨이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뒤에 앉은 사람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잠시 말 좀 묻겠습니다. 초행이라 그런데 노숙 장비를 살 수 있는 곳이 있습니까?”
갑자기 붙잡힌 남자는 눈을 끔벅이며 웨이크와 뮐러 등을 휘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가람에게 꽂히더니 곧 부드럽게 휘어졌다.
산 도적같이 생긴 남자가 윙크해 오자 가람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지만, 애써 어깨를 폈다.
“흠, 애도 있는데 이 날씨에 노숙은 무리요. 어디까지 가시오?”
‘애’라는 것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지만 가람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얼굴이 무서워서 그렇지 호의로 가득한 시선이었다.
가람이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 친절한 게 분명했다. 아이가 있는 일행이니 경계할 것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크페타인까지 갑니다.”
“크페타인까지 가는데 노숙까지 필요하겠소?”
“걸어서 3일은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뮐러의 말에 남자는 아 하고 짧게 소리 내었다.
“여기 자주 오가던 사람이 아니군? 걸어서 크페타인으로 가던 건 옛날 말이오. 기차가 생기고 나서부터 차콘다에서 크페타인까지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마차꾼이 생겼지. 그걸 타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소. 나도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사는데, 오늘 마차는 이미 출발했고 다음 마차는 내일 새벽 출발이오. 타겠소?”
가람과 웨이크, 뮐러는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모두 동의하자, 가람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좋아요.”
“한 사람당 30실버. 출발은 내일 동튼 후이니 늦지 않도록 조심하렴.”
마차꾼은 얼굴 표정을 바꾸어 상냥하게 말했다. 가람은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가람은 잠이 덜 깨어 멍한 와중에도 습관적으로 품 안의 권총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그다음 복대와 작은 가방을 더듬어 찾았다. 손은 제 몸의 물건들을, 눈은 바쁘게 주변을 훑었다.
동이 텄는지 어슴푸레한 풍경 사이로 쭈그려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자고 난 뒤 몸이 쑤시고 아픈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다.
이 세계의 침구는 기껏해야 짚을 문질러 천에 채워 넣은 것이나, 동물의 가죽 정도라 포근함 따위는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귀족들은 새털이나 비단 이불을 덮기도 하지만 하룻밤에 10실버짜리 여관을 전전하는 가람에게는 먼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오늘은 앉아서 잤기 때문에 몸이 더 아팠다.
테이블조차 구하지 못해 주점에 마냥 서 있던 사람들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가람이 숙소를 구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시점이었다.
1박에 50실버나 하는 돼먹지 못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모든 숙소는 차지한 주인이 있었다.
결국 가람은 한 사람당 5실버를 지불하고 복도 바닥에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라도 피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했지만, 2층으로 올라가 복도 가득 꾸역꾸역 붙어 있는 사람들을 보자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마다 봇짐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는 모양새가 무슨 피난민 수용소다.
가람 일행은 그 틈바구니에서 꽉 낀 채 가방을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차라리 몸이 고달픈 것이 낫다. 몸의 고달픔에 마음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니까.
무언가 찾고 있고, 집중해서 접근해 가고 있다는 충실감이 들었다. 잠깐 모르드레드와 산행을 했던 때가 생각났지만 곧 사라졌다.
이 추운 북쪽에 오고 나서 가람의 머릿속에는 오직 패스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닿고 싶었다.
바늘 끝이 약간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고, 가람은 북쪽으로 가는 것만 생각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찬 공기에도 불구하고 몸에 따듯한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고 웨이크가 눈을 떴다.
그저 눈을 감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졸음기라곤 없는 얼굴이었다.
찢어지게 하품을 하던 가람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합, 입을 다물었다.
“음. 잘 잤어요?”
“네.”
잠기운 없는 얼굴과 달리 목은 잠겨 있었다. 꺼끌한 목소리로 대답한 웨이크는 가람과 마찬가지로 허리춤의 검과 주변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깨어난 것은 뮐러였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마법을 사용했다. 물을 만들어 내는 것. 뮐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 덩이가 뭉쳐져 나타나는 것은 언제 보아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치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물방울 같았다. 그 물 덩이에 가방에서 꺼낸 천을 꺼내어 적시고 얼굴을 닦았다.
가글을 하고 나서 그 물은 그대로 삼켜 버렸다. 예전 같으면 찝찝하다며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만 이 정도는 별로 힘들지도 않다.
다만 화장실이 아닌 숲속에서 우거진 풀을 벽 삼아 재빨리 대소변을 처리하는 것이나, 월경의 흔적을 땅속에 묻어 처리하는 것은 아직도 익숙하지 못했다.
생리대가 일회용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빨아서 쓰는 물건이었다면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었을 거다.
“크페타인행! 크페타인행!”
사람들이 부스럭부스럭 깨어나기 시작하자 계단을 올라온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얼굴을 확인했으나 어제 보았던 그 남자는 아니었다.
난민처럼 앉아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그 부름에 일어나 나갔다. 잠시 기다리자 다음 사람이 와서 외쳤다. 어제 대화했던 마차꾼이었다.
“가요.”
계단을 내려가자 마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여관 앞이 북적였다.
그 틈에서 가람은 뽀삐를 찾아 등짐에서 먹을거리를 챙겼다 마차꾼에게 다가가니 마차를 타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어제 타겠다고 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와 마찬가지로 자리가 없을 뻔했다.
“오, 꼬마 아가씨.”
가람이 다가가자 남자가 알아보고 반갑게 웃었다. 잘 닦지 않아 누런 이빨이 가지런하다.
“안녕하세요.”
“그래, 어서 타. 추워.”
남자의 말대로 새벽의 칼바람에 코가 떨어져 나가도록 추웠다. 훤히 내어놓은 뺨은 이미 감각이 없을 정도다.
“저기, 말은 못 타죠?”
마차꾼의 마차는 컸다. 거의 버스의 절반만 한 크기였다. 하지만 말이 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하지. 이리 줘.”
“네?”
뭘 달라고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가람의 손에서 마차꾼이 고삐를 낚아채었다. 곰 같은 몸집과 달리 몹시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말은 앞에 같이 묶어서 가면 돼. 채찍질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자, 여기 거스름돈 10실버.”
1골드를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며 그렇게 말한 마차꾼은 뒷사람이 기다린다며 세 사람을 마차 안에 밀어 넣어 버렸다.
마차 내부에는 목제 상자가 마치 의자처럼 디귿 자 형태로 벽을 따라 붙어 있었다.
가람은 그중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고, 뮐러와 웨이크가 그 양옆에 앉았다. 뒤이어 들어온 사람들이 차곡차곡 앉고 나자 덜컹이며 마차가 출발했다.
자동차에 비하면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으나, 뛰는 것보다는 훨씬 빨랐다.
가람은 티 내지 않고 마차에 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다. 간혹 두터운 로브를 머리끝부터 뒤집어쓴 사람도 보였다.
가람까지 포함해서 모두 스물다섯 명이었다. 한 사람당 30실버라고 했으니 스무 명이면 한 번에 6골드다.
물가가 비싼 북부임을 감안해도 한 달이면 180골드. 1년만 바짝 하면 한 재산 벌어 중부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만한 벌이였다.
트리거가 말한 평민 한 달 수익 1골드라는 건, 최소 임금인 모양이었다.
마차를 끄는 말이 여섯 마리니, 북부에서 야채를 사서 먹이면 수익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겠지만, 그래도 큰 금액이었다.
아마 기차가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초반이라 이렇게나 버는 것이지 곧 입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마차꾼을 하기 시작하면 지금만큼 벌기는 힘들 것이다.
“꼬마 아가씨는 무슨 일로 크페타인에 가니?”
갑작스레 물어 온 것은 가람의 오른쪽 대각선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사십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대충 손질한 수염과 거친 피부, 덩치 탓에 마치 커다란 갈색 곰 같았다.
테디 베어 같은 귀여운 것이 아니다. 그와 눈이 마주친 가람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고 말았다.
최대한 상냥한 얼굴을 만들어 가람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이는 가람의 표정에 짧게 좌절했다.
그러나 남자는 굴하지 않고 가방을 뒤졌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던가?
“배고프니? 자, 이거 먹을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려던 가람은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갈등했다. 그것은 나무 그릇에 담긴 우유였다.
뽀삐의 등짐에서 간단한 먹을거리로 시리얼을 챙겼던 가람은 그 유혹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우유를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그래, 오늘 새벽에 짠 거란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뮐러와 웨이크에게도 한 그릇씩 우유를 대접했다. 가람의 우유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웨이크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대로 후루룩 마시려는 웨이크를 제지하며 가람은 뽀삐의 등짐에서 챙겨 왔던 시리얼을 꺼내었다.
어쩐지 시리얼을 챙기고 싶더라니 우유가 생기려고 그랬었나 보다.
제일 먼저 우유를 나누어 준 사람에게 시리얼을 부어 주고, 웨이크와 뮐러,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그릇에 시리얼을 가득 부었다.
아침 식사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이렇게 대충 흔들어 섞어서 같이 드시면 돼요. 우유에 적셔서요. 손으로 이렇게 좀 눌러서…….”
가람이 시범을 보이자 세 사람도 따라서 시리얼을 먹기 시작했다. 스푼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힘들었지만 마차가 크게 흔들리지 않아서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차가운 오트밀 같군요. 음, 좀 바삭바삭한. 감사합니다.”
웨이크가 짧게 감상을 말했다. 뮐러는 동의했고, 우유를 나누어 준 남자는 잘 먹겠다며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네어 왔다.
“먹으면 호랑이 기운이 솟아날 거예요.”
좀 먹으니 혈색이 도는 웨이크를 보며 가람이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웨이크는 깜짝 놀라서 진지하게 되물었다.
“이거 호랑이로 만든 겁니까?”
“아뇨……. 옥수수요.”
“그럼 옥수수의 기운이 솟아날 텐데 어째서 호랑입니까?”
웨이크는 정말로 진지하게 궁금해했다. 그걸 알려 주려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했기에 가람은 적당히 넘기기로 했다.
“그냥…… 먹어요.”
웨이크는 납득할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가람이 대답하지 않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시리얼만 씹었다.
호랑이와 옥수수의 상관관계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사냥꾼답게 그는 무엇이든 사려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좀처럼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웨이크가 동대륙에서는 호랑이가 옥수수를 키운다거나, 혹은 반대로 옥수수가 호랑이를 키운다거나, 동대륙의 호랑이는 옥수수를 먹는다거나, 아니면 옥수수가 호랑이를 먹고 자란다거나 하는 추측을 하는 사이 우유를 나누어 준 남자도 시리얼을 모두 먹어 치웠다.
“나는 팀팀이란다. 꼬마 아가씨는?”
가람의 다 먹은 그릇을 자연스레 거두어 가며 팀팀이 자신을 소개했다. 팀팀은 가져간 그릇을 꼬질꼬질한 천으로 대충 닦아 챙겨 넣었다.
뮐러 덕분에 그래도 설거지는 꼬박꼬박 할 수 있었던 가람에게는 익숙지 않은 모습이었다. 말라붙은 음식물 찌꺼기가 우유에 불어서 슥슥 닦여 나갔다.
“아, 전 가람이에요. 이쪽은 뮐러, 웨이크구요.”
팀팀의 마른 설거지를 보느라 가람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흘러나왔다.
“그래, 꼬마 아가씨는 무슨 일로 크페타인에 가니?”
“찾을 게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