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어린아이인 척 안 한다면서요?”
뮐러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가람은 해탈한 얼굴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살면서 실익을 위해 자신을 감춰야 할 때도 있는 법이죠.”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스물다섯이라고 주장해 봤자 통할 리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방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스물다섯이라고 밝히면 아까 그 남자처럼 쫓겨날지도 몰랐다.
방을 안내해 준 여관 주인은 서둘러 시키지도 않은 스튜를 세 그릇 가져왔다. 아니, 세 대야를 가져왔다.
세수를 하고도 충분히 남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양을 ‘선물’이라며, 선물이니까 반드시 다 먹어야 한다는 무서운 말을 남기고 여주인은 사라졌다.
먹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 싶다는 집념이 눈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지만 그녀가 홀을 비우면 여관 일을 돌볼 사람이 없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좋군요.”
대야에 담긴 스튜를 보며 웨이크가 조용히 말했다.
“일단 먹죠.”
배가 고픈 것은 가람뿐만이 아니어서 뮐러가 재촉했다. 1인용 침대 두 개가 들어가면 딱 맞을 정도로 작은 방에는 달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은 결국 스튜 그릇을 들고 침대를 의자 삼아 앉았다.
스튜는 차콘다에서 먹었던 것과 달리 노린내가 거의 나지 않았다. 여주인의 솜씨가 매우 좋은 모양이었다.
가람은 커다란 고깃덩이 하나를 먹고 끈끈한 국물을 삼켰다. 차갑게 얼어 있던 몸에 뜨거운 것이 들어가자 노곤하게 녹아 풀어지는 것 같았다.
스튜를 다 비울 때까지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여주인의 성의를 생각해 가람은 대야의 음식을 모두 먹어 치우는 데 성공했다.
평소라면 절대로 다 먹지 못했겠지만 이틀간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던 터라 가람은 스튜를 달게 먹었다.
그 모습에 무언가 기대하고 있던 웨이크가 아쉬운 입맛을 다셨지만 가람은 보지 못했다.
“어? 어디 가니?”
다 먹은 그릇을 들고 방을 나오자 양손에 술잔을 세 개씩 든 여주인이 의아해서는 말을 걸었다.
그녀는 짧게 빈 그릇에 시선을 준 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미소는 의아한 표정에 가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일 북쪽으로 가야 해서, 장비를 좀 사러 가려고요.”
패스는 아직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도 길이가 짧아진 것으로 보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다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가 진정한 고비임을 가람은 알고 있었다.
북쪽 산은 멀리서 보기에도 험악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어서, 가람은 사실 몹시 걱정이 되었다.
“북쪽? 무슨 일로? 크페타인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 게 좋아.”
단호한 대답에 가람은 난감해졌다. 그런 가람 뒤에서 뮐러가 불쑥 말했다.
“개인 사정입니다.”
“개인 사정? 당신이 이 애 보호자인가?”
여주인이 여전히 술잔을 든 손을 위협적으로 내밀며 말했다. 주점의 누군가가 ‘빨리 술 줘!’ 하고 외쳤다. 아마 그녀가 든 술을 기다리는 사람인 듯했다.
“보호는 제 담당이 아니라, 여기 이 사람입니다.”
여주인의 팔뚝은 가람의 허벅지만 했고, 허리는 나무둥치처럼 두껍고 강인했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자 뮐러가 슬쩍 웨이크를 앞으로 밀며 뒤로 빠졌다.
갑자기 지목당한 웨이크가 조금 놀라더니 덤덤하게 앞으로 나섰다.
“일단, 보호 담당입니다.”
보호 담당? 여주인은 웨이크의 말이 조금 이상한지 입 안으로 굴려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애랑은 무슨 사이야? 아빠? 삼촌?”
“이분의 노예입니다.”
여주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가람과 웨이크, 뮐러를 한 번씩 도장이라도 찍듯 바라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해 보이는군. 뭐 내 알 바 아니지. 장비라면 멀리 갈 것 없어. 어차피 지금 가도 문 닫았을 테니까. 가게 주인들이 다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추운데 나갈 것 없이 여기서 구해 봐.”
그렇게 말한 여주인은 가람에게 잠시 측은한 시선을 던진 뒤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술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외쳤다.
“여기 손님 있다! 연장꾼들 나와서 손님 받아!”
테이블 사이에서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여주인이 턱짓하자 그들은 마시던 술잔을 들고 가람에게 다가왔다.
가람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한 명이 자리를 권했고, 가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정신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몇 살?”
“꼬마 아가씨 사탕 좋아하니?”
“곰 발바닥 좋아하니?”
“곰 발바닥이라니! 그런 흉측한 걸 이런 귀여운 아가씨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래, 우리 아가씨가 뭘 사려고 하는 걸까? 이번에 흰 담비 가죽 망토가 들어왔는데 까만 머리 아가씨한테 딱 어울릴 것 같은걸?”
그렇게 말한 남자는 가람의 가장 오른쪽에 선 남자였다. 사실 전부 흉악하게 생긴 데다, 너 나 할 것 없이 대충 만든 가죽옷을 입고 있어서 가람은 남자들이 모두 비슷하게 보였다.
두서없는 질문에 무엇부터 대답해야 할지 곤란해하자 뮐러가 남자들의 질문을 모두 걷어 내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북쪽 산으로 가려고 하는데 장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맞아요.”
‘이건 뭐야?’ 하고 뮐러를 돌아보는 표정에 가람이 재빨리 동의했다. 남자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질문했다. 아까와 달리 차분한 어조였다.
“음, 산에서는 얼마나 있을 건가?”
“잘 모르겠어요. 하루 이상은 있을 것 같아요.”
“초행이라면 일주일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거야. 산에서 자야 한다면 침낭이 필요하겠군. 기름을 먹인 두꺼운 가죽 침낭. 털모자는 있니?”
기차에서 받은 것이 있긴 하지만 멋내기용이라 얇고 작은 것이었다. 가람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초행이에요. 가격대는 얼마라도 상관없으니 좋은 것으로 구입하고 싶어요.”
남자들은 자신들끼리 상의한 뒤 알려 주겠다며 잠시 기다릴 것을 요청했다.
겹치는 업종이 있었는지 ‘네 가죽은 너무 저질이야!’ 하며 투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투닥임 후에는 여지없이 몇 명의 남자들이 떨어져 나갔다.
가람이 최종적으로 구입한 것은 자루까지 철로 된 작은 쇄빙 도끼와 곰 가죽 부츠, 귀를 가리는 털모자, 목과 가슴께까지 늘어지는 양털 넥워머, 약한 발열 마법이 걸린 망토, 튼튼한 줄과 피켈, 담비 가죽 장갑과 덧장갑이었다.
쇄빙 도끼와 망토를 제외한 나머지 물건들은 모두 세 개씩 구입했다. 가람의 망토에는 이미 약한 발열 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름이나 말린 고기도 추천했지만 가람은 구입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뽀삐의 등짐에서 고체 연료와 코펠, 캔과 마른 음식을 챙겼다.
혹시 몰라 비상용 약품과 손전등까지 챙기고 나자 가방 하나로는 너무 모자라서 결국 세 사람은 짐을 나누어 들었다.
웨이크가 가장 큰 짐을 들고, 가람이 가작 작은 배낭을 메긴 했지만 워낙 힘이 모자라서 걷는 내내 무릎이 꺾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만약 배낭 중 하나를 잃어버릴 때를 대비해서 모든 가방에는 약과 식량, 연료가 조금씩 나누어져 담겼다.
거기에 가죽 침낭까지 챙기자 가장 작은 가방이 가람의 몸통만 한 크기가 되었다.
가장 작은 가방인 가람의 가방 무게가 15kg이 넘어서, 산의 초입까지 걸었을 뿐인데도 땀이 줄줄 흘렀다.
“아직은 초반이라 그런지 갈 만하군요.”
앞서가던 웨이크가 차분하게 말했다. 숨이 찬 기색도 없었다.
목에서 단내가 나도록 숨을 몰아쉬던 가람은 그 체력에 감탄했다. 대답할 힘도 없던 그녀는 고개만 짧게 끄덕여 주었다.
“그나저나 대단한걸요? 80골드가 60골드가 되다니. 처음에 부른 가격도 그렇게 비싼 값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가람이 뒤를 돌아보자 군밤 모자와 넥워머 사이로 뮐러의 눈이 슬쩍 휘어졌다.
“제 희생의 대가죠 뭐.”
어제 장비를 구입할 때, 가람은 일부러 흥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알아서 값을 깎아 주었다.
괜히 양심에 찔린 가람이 한사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남자들은 괜찮다며 허허 웃었다. 심지어 로프는 공짜로 받기까지 했다.
“내리막입니다.”
웨이크가 갑자기 멈추며 돌아보았다. 가람은 서로를 연결한 로프가 엉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장갑을 걷어 방향을 확인했다.
산을 오른 지 한나절. 아직까지는 웨이크의 말대로 오를 만했다. 바람 소리가 심하고 추워서 그렇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람이 자주 다니며 길을 내었는지 얼음층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길도 형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계속 사람이 다니는 길로만 방향을 가리키면 좋을 텐데. 가람의 생각에 바늘은 대답했다. 싫어.
“이쪽이네요.”
가람이 가리킨 ‘이쪽’을 보고 웨이크는 잠시 말을 잃었다. 길의 왼편에 난 얼음층이었다. 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
그나마 위쪽에 다시 다닐 만한 길이 있어 보였지만, 그 아래는 길이가 10미터에 달하는 작은 빙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아가면 안 됩니까?”
“그게,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잘 모르는 데다 지나치면 계속 빙빙 돌아야 해서요……. 갈 수 있다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는 게 제일 좋아서요…….”
죄송해요……. 가람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자 웨이크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람은 항상 덤덤한 그와 뮐러에게 몹시 미안하고 고마웠다. 노예라고 해도 사람과 사람이다.
별다른 불만의 기색 없이 따라와 주는 것은 고마워해야 할 만한 일이었다.
바닥의 흙을 퍼서 최대한 얼음층에 뿌린 웨이크는 검 옆에 찬 쇄빙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 손에 피켈을 든 채 얼음을 부수어 잡을 곳을 만들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웨이크가 올라가며 구멍을 만들면, 그 구멍을 이용해 가람이 뒤를 이었다. 마지막으로 뮐러가 그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경사가 진 아이스 링크를 네 발로 걸어 올라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등에 진 가방은 자꾸만 아래로 몸을 잡아당겼고, 5미터쯤 올라가자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람이 아래를 보려고 하자 뮐러가 재빨리 경고했다. 아래를 보지 마세요.
이를 악물고 가람은 얼음을 올랐다. 올라갈수록 점점 바람이 강해졌다. 구멍에서 다음 구멍으로 발을 옮기려고 하면 바람에 다리가 팔랑팔랑 흔들리려고 들었다.
아래를 볼 수 없으니 구멍을 찾는 것은 순전히 감이었다.
강풍이 부는 경사진 얼음 위에서 발 하나를 떼어 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무서웠다.
아차 해서 나머지 버팀 발이 무너지면 그대로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아래에 있는 뮐러가 다칠지도 모른다.
패스를 찾는 일은 언제나 유년기에 했던 보물찾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난이도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차이가 났지만, 방식이 비슷한 것도 사실이었다.
가람은 선생님이 어디에 숨겼을지 추리해서 생각했기 때문에 동년배 아이들 중에서도 제법 보물찾기에 재능이 있는 편이었고 꽤 즐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람은 이제 보물찾기가 싫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때의 보물찾기와 지금의 보물찾기는 강제성과 난이도, 그 모든 것이 달랐지만 유일하게 같은 것이 있었다.
보물을 찾으면 곧 그 보물쪽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르드레드가 말한 ‘구입’이 어떤 건지도, 자신의 베이스캠프를 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양의 패스를 찾아야 하는지도, 능력을 어떻게 얻는지도.
“조심하십시오. 바람이 많이 붑니다.”
끝에 도착한 웨이크가 가람의 가방을 잡고 들어 올려 올라오기 쉽게 해 주었다. 같은 방식으로 뮐러까지 끌어 올린 그는 조금 이르게 선언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날이라 준비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요. 그리고 여기만큼 적절한 야영지도 찾기 힘들어 보입니다.”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있어 보였지만 여기 같은 평지는 없었다.
가람은 동의했고, 웨이크는 망설임 없이 커다란 바위 아래의 눈을 피켈로 퍼내었다. 피켈 뒤에 달린 작은 삽은 이런 일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매우 유용했다.
그가 잠자리를 파내자 가람은 가방을 내려놓고 먹을 것을 꺼내었다.
뮐러가 코펠에 물을 채우자 그것을 고체 연료 위에 올렸다. 연료에 불을 붙였지만 강풍으로 자꾸만 꺼졌다.
가람은 결국 포기하고, 웨이크가 파낸 눈으로 잠자리 위쪽에 바람막이 벽을 쌓기 시작했다. 뮐러도 그것을 도우며 틈틈이 벽 사이에 물을 끼얹어 굳게 만들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손발이 척척 맞았다.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 세 사람은 밤이 깊기 전에 조금 어설픈 형태의 이글루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입구는 일부러 아주 좁게 만들어서, 기어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했다.
가람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제법 아늑했다. 다리를 펴고 잘 수는 없겠지만, 새우처럼 몸을 말고 잔다면 누워서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는 조금 더 크게 파야겠군요.”
한껏 몸을 구기고 들어온 웨이크가 벽에 어정쩡하게 달라붙으며 말했다. 뒤이어 뮐러가 들어오고, 세 사람의 짐이 들어오자 작은 이글루는 꽉 차 버렸다.
가람은 누워서 잘 수 있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그래도 침낭에 들어가서 앉아서 자면 될 것 같았다.
가람은 얼음덩어리처럼 생긴 고체 연료를 꺼내었다. 작은 덩어리가 하나씩 포장된 이것은 가스보다 보관이 간편하고 위험도도 낮아서 쓰기에 아주 편리했다.
두 사람은 가람이 갑자기 돼지기름 같은 허연 덩어리를 꺼내서 쇠 대 아래에 놓고 라이터를 딱딱거리자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이 붙어 맹렬하게 타오르자 조금 놀랐다.
그 위에 코펠을 올린 후, 라면과 캔을 꺼내었다. 잠시 기다리자 제법 훈훈해졌다.
가람은 넥워머를 풀고 뮐러에게 물 한 잔을 청했다. 뮐러는 짧게 충고하며 코펠 잔에 물을 담아 건넸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십시오.”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으나 가람도 아는 사실이었다. 소변을 자주 보면 체온을 잃는다.
일부러 소변을 보지 않기 위해 소금을 섭취하는 사냥꾼도 있다고 팀팀이 이야기했었다. 북부의 사냥꾼에게 갈증과 고산병은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직업병이다.
지금 세 사람이 능숙하게 이글루를 만드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팀팀의 이야기에서 배워 온 노하우 덕분이었다.
“뽀삐는 잘 지내고 있겠죠?”
코펠 안에 라면 두 개를 쪼개 넣으며 가람이 말했다. 두 남자는 끄덕였다.
제법 큰 코펠로 가져왔는데도 작아서 한 번에 끓일 수 있는 라면은 두 개가 전부였다. 스프를 풀고 나자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돌기 시작했다.
조금 맵고 톡 쏘는 냄새에 웨이크는 덤덤했지만 뮐러는 금세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어, 뮐러, 괜찮아요?”
“향신료 냄새에 익숙지가 않아서……. 고향 음식입니까?”
“네.”
“매워 보이네요. 가람의 고향은 맵거나 단 음식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런 편이죠. 여기에 떡을 넣고 달게 조리면 라볶이가 되는데,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뮐러는 이런 것 잘 못 드세요?”
“네. 제가 자란 피마르프는 이곳만큼은 아니지만 추운 곳이라서 그런 향신료는 돈 많은 집 사람들이나 먹을 수 있었죠. 저는 익숙하지가 않아서 잘 못 먹겠더군요.”
구석에서 뮐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웨이크는 손을 뻗어 라면 봉지를 만져 보았다.
처음 보는 재질이었다. 물에 젖지도 않고, 매우 가벼우며, 얇은데도 튼튼하다. 그는 그것을 잘 갈무리해서 챙겼다. 어디든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가람은 그 모습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뮐러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좀 더 이야기해 주세요.”
뮐러는 잘게 끓는 코펠에 시선을 두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억을 더듬는 시선이 아련하게 풀려 갔다.
“피마르프는 작은 산골 마을입니다. 사람들은 착하고, 순박하지만, 가난하죠. 그래도 언제나 마음은 풍요로웠습니다. 열두 살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꽤 야망이 큰 꼬맹이였어요. 언제나 도시로 가고 싶었죠. 어릴 때부터 똘똘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삼촌을 따라 도시로 왔고, 우여곡절 끝에 마법사가 되었죠.”
가람은 라면을 휘저어 그릇에 나누어 담고, 다시 물을 채워 끓였다. 라면을 받아 드느라 뮐러의 말이 잠깐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마법사는 돈이 많이 드는 직업입니다. 집에서 원조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든 다 했죠. 그러는 사이 우습게도 저는 마법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당연한 거죠. 하루 종일 마법을 연구하던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요.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마법 대신 잡다한 경험만 많은 마법사가 되어 있더군요.”
뮐러는 씁쓸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마법사를 해서는 안 되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는 그럴 리가 없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마법은 있는 자들의 것이었어요.”
분위기가 가라앉자 뮐러는 과장되게 라면을 후루룩 빨아들였다. 맵다며 너스레를 떠는 뮐러에게 가람은 빙긋 웃으며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2년 뒤, 만약 원한다면 제가 후견인이 되어 드릴게요. 저 돈 많은 거 아시죠?”
“괜찮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는데요. 빚을 다 갚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나 지을까 합니다. 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가뭄이 들 일은 없겠지요.”
“그래도 마음이 바뀌면 얼마든지 말해요.”
뮐러는 대답 대신 맵다던 라면만 묵묵히 먹었다. 그리고 잠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가람과 남자 두 명은 점점 산행에 익숙해져 갔다. 날씨가 그리 나쁘지 않아서 행운이었다.
만약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다면 하루 만에 산행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빙산이 막고, 절벽이 앞을 가로막아도 가람은 꾸준히 그 방향으로 향했다.
궂은 길을 마다하지 않고 움직인 덕분에 바늘은 걷는 만큼 줄어들어 갔다.
“이제 멀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걸었던 거리를 가늠해 보면 반경 200미터 안에 패스가 있었다.
길에서 벗어난 지 오래라, 한 발짝 한 발짝이 큰 모험이다. 천천히 이동하던 세 사람은 동굴 앞에서 멈춰 섰다.
“이쪽입니까?”
바늘은 동굴의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굴은 빛도 없이 새카매서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