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재수 없으면 곰을 만날지도 몰랐다. 가람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웨이크가 동굴 안으로 살짝 들어갔다.
“바람이 통하는군요. 막힌 동굴이 아닙니다.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부는 걸 보니 그렇게 길지는 않군요.”
막히지 않았다는 것은 곰 굴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꺼림칙했다.
하지만 안 갈 수도 없어서, 가람은 손전등을 켜 웨이크에게 건네었다.
“이거.”
말없이 손전등을 받아 든 웨이크가 자세를 낮추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긴장이 묻어났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 소리 때문에 긴장감은 더욱 높아 갔다.
침묵 속에서 걸음을 옮기던 가람은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에 입을 열었다.
“뮐러, 얼음도 물인데 얼음을 다룰 수는 없나요?”
“없습니다. 다만, 느낄 수는 있습니다.”
“느끼다뇨?”
“예를 들면, 우리가 들어온 이 동굴 천장이 수천 미터의 얼음층으로 되어 있다거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죠.”
가람은 덜컥 불안해졌다.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겠죠?”
뮐러는 말이 없었고, 대신 웨이크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그렇게 길지 않다던 동굴은 그리 짧지도 않았고, 출구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져서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람은 서둘러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에 잠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하얀 달빛 아래에 수정나무 숲이 있었다. 그리 넓은 지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은 숲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넓이는 되었다.
하얗게 반짝이는 나무들은 마치 하나하나가 장인이 솜씨를 다해 만든 보석 같았다.
수정 같은 얼음나무들 사이로 세 개의 달이 빛나는 풍경.
가느다란 가지와 투명한 둥치가 달이 구름에 가릴 때마다 각도를 달리하며 반짝였다.
하늘에는 별이 열렸고, 나무에도 별이 열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말라비틀어진 하얀 자작나무가 갇혀 있었다.
극심한 추위와 얼음에 덮인 나무는 가늘게 말라서 뒤틀린 채로 사라지고, 얼음만 그 위에 켜켜이 쌓여 오랜 세월 동안 견고히 남았다.
숲은 죽은 나무의 영혼처럼 빛나고 있었다.
“정말 멋진데요.”
뒤늦게 굴을 빠져나온 뮐러도 감탄했다. 웨이크조차 반짝이는 숲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 사람은 잠시 모든 것을 잊고 눈앞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취했다.
배고픔도 잊고, 지친 몸도 잊었다. 시간이 많이 늦어서 야영지를 만들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잠깐.”
갑자기 웨이크가 긴장했다. 가장 앞에 나와 있던 가람이 귀를 덮은 모자를 접어 올렸다. 무언가 들린 것 같았는데.
“방금 무슨 소리 안 났…….”
순간 나무가 박살 났다. 산산이 비산하는 얼음 조각 사이로 나타난 것은 4미터도 넘어 보이는 하얀 곰이었다.
길게 자란 누런 엄니 사이로 침이 질질 흘렀다. 낮게 울리는 그르렁거림에 오금이 저렸다.
곰은 눈을 크게 뜨고 얼어붙은 가람에게 그대로 앞발을 휘둘렀다.
가장 가까이 있던 뮐러가 밀치지 않았으면 가람은 죽었다. 바닥에 쓰러진 가람의 머리 위로 곰의 앞발이 공기를 갈랐다.
후웅 하는 소리에 가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혼비백산해서 기듯이 도망쳤다. 괴물, 괴물이다.
기어가는 가람의 등 뒤로 곰이 발톱을 찍어 내렸다. 뮐러가 가람을 일으켜 세우려고 끌어냈지만 속도가 너무 차이가 났다. 닿지 않는다.
곰의 발톱은 30센티가 넘었다. 꿰인다면 살아남기 힘들리라. 그러나 다행히도 믿기 힘든 속도로 다가온 웨이크가 그 일격을 막아 내었다.
“크윽!”
등 뒤에서 와작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곰의 일격을 막은 웨이크의 왼팔이 그대로 덜렁 늘어졌다. 빠지거나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그대로 주르륵 밀려난 웨이크는 간신히 나동그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서식지가 달라 부딪히지는 않지만 저만한 크기의 곰은 악명 높은 크페타인 은호도 슬금슬금 피해 가는 괴물이었다.
함정도, 준비도 없이 갑자기 마주쳐서 잡을 만한 상대가 아니다.
“도망쳐요!”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몸을 일으킨 가람은 그 소리를 듣자 반사적으로 앞으로 내달렸다. 그냥 앞으로 달렸다.
달리는 가람의 머릿속에는 오직 자신의 머리통 정도는 우습게 씹어 삼킬 것 같던 곰의 커다란 입만이 가득 찼다.
방향을 정하지 않았기에 뿔뿔이 흩어질 뻔했지만 웨이크와 뮐러는 가람이 달린 방향으로 뒤늦게 따라갔다. 하지만 곰이 더 빨랐다.
가장 약한 것부터 사냥하는 본능답게 곰은 가람을 쫓았다.
가람은 뒤를 돌아볼 수 없어서 곰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자신의 숨소리만이 귀가 터질 것처럼 울렸다.
금방이라도 뒷덜미가 잡아채일 것 같았다. 청각이, 후각이, 모조리 뒤를 향했다.
함정 같은 나무에 부딪히지 않도록 가파른 비탈을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달렸다.
잡힌다, 잡힌다. 죽는다. 숨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이 자신의 숨소리인지 곰의 숨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가람을 잡아챘다. 앞으로 달려가고 있던 터라 반탄력으로 몸이 뒤로 훅 끌려갔다.
가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팔다리를 휘둘렀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만 쿵 떨어져서 죽을 것처럼 뛰어 댔다.
“으, 으아!”
얼어붙은 비명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가람을 잡은 것은 곰의 발톱이 아니라 나뭇가지였다.
아직 얼어붙지 않은 나무가 가람의 로브를 꿰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로브를 마구 잡아당기던 가람의 눈에 나무 뒤로 맹렬하게 달려오는 곰이 보였다.
가람은 생각할 것도 없이 총을 뽑아 들었다. 이어서 다급한 총성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약실의 탄약을 다 비웠어도 곰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배와 허벅지에 각각 한 발이 맞고 나머지는 전부 빗나갔다. 상처 입은 곰은 광분해서 달려왔다.
가람은 다른 총을 꺼내서 마구 쏘았다. 어느새 지척에 와 있는지라 조준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약 4미터를 남겨 둔 거리에서, 가람의 총탄이 곰의 이마와 눈알을 꿰뚫었다.
눈알이 터져 나가고 총탄이 곰의 뇌를 휘저었다. 곰은 달려오던 탄성 그대로 앞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 뒤로 조금 늦은 웨이크와 뮐러가 나타났다. 곰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가람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는다고 생각했었다.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다.
가람은 멍하게 자신의 바로 옆에 나동그라진 곰을 내려다봤다. 터진 안구가 덜렁덜렁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총을 쐈어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가람은 두 사람이 총에 놀라서 굳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깨달았다. 그런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걱정하고 있었다.
“무엇을 했든, 최악의 사태입니다.”
웨이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멀리서 낮은 쿠르릉거림이 들려왔다.
공기의 떨림.
눈사태였다. 총성이 뒤흔든 산이 무너지고 있었다.
“……!”
가람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다음 순간, 거센 눈의 파도가 그 자리를 휩쓸었다.
* * *
멀리서 보기에 눈사태는 마치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는 포근한 풍경처럼 보인다.
눈이 갖고 있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우레 같은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파묻힌다고 해도 다시 파고 올라가면 되지 않을까? 이것은 눈사태를 본 적이 없는 많은 남부 사람들의 생각이다.
눈사태의 공포는 같은 규모의 해일이나 지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불친절한 지면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디디고 있는 산악가들에게 눈사태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재앙이었다.
눈사태가 일어나면 산악가들은 제일 먼저 자신들의 위치를 빼앗겼다.
만약 당신이 눈사태에 휩쓸린다면 오직 눈만이 알고 있는 ‘도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눈에 함께 휩쓸려 온 각종 부산물들이 당신의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눈알을 찌르거나 온몸에 생채기를 내는 꼴을 맨정신으로 감당해야 한다.
만약 운이 좋아서 눈사태가 끝날 때까지 부러진 나뭇가지에 얼굴이 꿰이지 않고, 돌이 갈비뼈를 으스러뜨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일단 눈을 파고 나가려고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지렁이가 아닌 이상 방법은 없다.
사실 지렁이라도 방법은 없다. 땅속에서 땅을 판다는 것은 위에 있는 흙의 무게를 모조리 감당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눈을 파먹고 뒤로 배출하지 않는 이상.
그러니 아마도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심하기 직전에 깨달을 것이다. 아, 결정하지 않아도 얼어 죽게 되어 있구나.
이렇게 사망한 당신은 눈이 녹거나 땅 파기 좋아하는 굶주린 산짐승이 발견할 때까지 그대로 보존될 것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썩거나 동물이 당신을 좀 뜯어 먹는 건 전혀 아프지 않을 거다.
당신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리고 가장 좋은 점은, 그 모든 체험이 공짜다.
가람은 애석하게도 그 모든 체험을 사양했다. 눈에 휩쓸리는 순간 가람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뒤쪽에 차원 문을 열었고 그 안으로 쏙 던져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을 열었던 마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런 가람의 위로 아직 연결된 차원 문에서 눈이 좌르륵 쏟아져 내렸다. 정신없이 허덕이던 가람은 차원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과 함께 밀려 들어온 무언가가 뒤통수를 내리쳤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몸에 힘이 빠지더니 곧 의식이 흐려졌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후로도 눈은 한참이나 밀려 들어와서 가람을 마트 벽까지 밀어 낸 후에야 멈췄다.
그 눈 속에서 가람은 한참 동안이나 기절해 있었다.
‘살아 있나?’
굳어지고 있는 눈 속에서 가람은 희미하게 의식을 차렸다.
가람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손쓸 수 없는 무자비한 눈의 파도가 눈앞에 선연했다.
사실 무슨 정신으로 차원 문을 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순발력이 자신에게 있었다니.
가람은 천천히 몸 여기저기에 힘을 줘 보았다. 정상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니 부러지거나 심각하게 다친 부분은 없어 보였다.
눈 속에 오래 파묻혀 있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감각이 둔해진 탓에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몸이 아주 무겁고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녹슨 듯이.
그런 몸으로 굳어진 눈을 깨고 나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가람은 간신히 팔 하나를 빼서 근처에 있는 돌로 제 몸을 덮은 눈을 내리쳤다.
돌에는 살짝 피가 묻어 있었다. 그 피의 정체를 알 것 같았지만, 가람은 묵묵히 눈을 부수었다.
아직 차원 문은 열려 있었다. 가람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웨이크! 뮐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