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자신이야 목숨을 건졌지만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도무지 희망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무력감과 피곤함, 욱신거리는 통증이 의지를 갉아 내었다.
하지만 가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이런 일을 당할 일이 없었을 사람들이다.
눈사태 속에서 제 한 몸만 뺀 것도 모자라 포기까지 해 버릴 수는 없었다.
가람은 눈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 조각이 우수수 떨어져 발치에 쌓였다. 대충 눈을 털어 낸 가람은 눈 더미 위의 차원 문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등 뒤로 차원의 문이 닫히고는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새하얀 풍경.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막막하면 아예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람은 눈사태로 쌓인 눈 위를 터덜터덜 걸었다. 아직 굳어지지 않은 눈 위로 체중이 실리자 발이 푹푹 빠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떼기가 고역이었지만 가람은 무작정 아래로 걸어갔다. 휩쓸렸으니 아래쪽에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걷던 가람은 실성한 것처럼 갑자기 눈을 파헤쳤다. 저온에 굳어진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아서 그저 손바닥을 삽처럼 푹푹 움직였다.
그러다가 다시 걷고, 다시 파헤쳤다. 사방은 너무나 넓고 조용했다.
어디부터 파야 할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두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걸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람은 무작정 사방을 돌아다니며 눈을 팠다. 파고 걷기를 반복했다. 하얀 눈 위로 파헤친 자국들이 길게 그녀를 따랐다.
“흐…….”
꽉 물었던 입술에서 힘이 빠지며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둑이 터질 것 같았다.
우욱 하고 울음을 삼킨 가람은 고이려는 눈물을 눈을 깜빡여 없애 버렸다.
눈은 아래쪽으로 갈수록 깊어졌다. 처음 가람의 무릎까지 잡아먹던 눈은 어느새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미친 듯이 앞으로 밀고 나가던 가람은 무게로 인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웨이크, 뮐러…….”
웨이크는 어떻게 됐을까. 팔이 부러진 것 같았는데. 여기 어딘가에 있겠지. 있을 거야. 살아 있을까? 살아 있을까…….
넋이 빠진 가람의 뺨을 무언가가 후려쳤다. 산짐승은 아니었다. 눈사태로 인해 주변의 산짐승은 다 쓸려 내려가 버렸다.
뺨을 후려치고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그것이 바람에 휘날리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떼어 낸 가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언젠가 웨이크가 챙겨 넣었던 라면 봉지였다. 가람은 서둘러 그곳에서 몸을 빼내고 라면 봉지가 날아온 방향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오른쪽 뺨을 때렸으니 오른쪽에서 날아왔을 확률이 높았다.
달려간 가람은 나무에 걸려 반쯤 파묻힌 배낭을 발견했다.
가죽 배낭은 여기저기가 찢겨 나가서 속의 내용물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터진 가방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늘어져 있었다.
“웨이크!”
아래에 웨이크가 있었다. 가람은 직감하며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아래로 파 내려갔다. 가방을 발굴하고,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자 가방을 잡고 있는 손이 나타났다.
가방이 나무에 걸렸고, 그걸 붙잡고 버틴 모양이었다. 손은 돌과 눈 덩어리에 상처 입어 엉망이었다. 얼어붙은 피가 여기저기 묻어났다.
“금방 구해 줄게요. 조금만, 조금만 버텨요…….”
가람이 울먹이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가죽 장갑을 끼고 있어도 냉기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손이 얼어서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을 파헤칠 수는 있었다.
손이 언 덕분에 감각이 둔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끊임없이 웨이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웨이크의 머리가 드러났다. 그 와중에도 모자와 방한 도구가 벗겨지지 않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가람은 그의 마스크를 벗기고 자신의 장갑을 벗은 뒤 코 밑에 손을 대어 보았다. 하지만 손에 감각이 없어서 숨을 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제 모자를 벗고 귀를 대어 보았다. 기분 탓인지 미약하게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웨이크! 정신 차려요! 웨이크!”
웨이크를 흔들던 가람은 그의 뺨을 때리고 손으로 눈꺼풀을 뒤집어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뺨을 몇 차례 후려치자 웨이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무겁게 열렸다. 흐린 갈색 눈이 두어 번 깜빡이더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가람에게 고정되었다. 아. 그가 짧게 신음했다.
“아, 다행이다! 잠시만, 금방 파내 줄게요!”
가람은 서둘러 그의 상체를 파헤치고 팔 아래에 손을 넣어 그를 끌어 올리려고 들었다.
끄응 하고 힘을 썼지만 꿈쩍하지 않는다. 무겁긴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건 이상했다. 좀 더 파내야 하나?
“뮐……러가 있습니다.”
가람의 의아한 시선에 웨이크가 아직 파내어지지 않은 자신의 한쪽 손을 향하여 눈짓했다.
가람은 조심스럽게 그의 팔 쪽을 파내었다. 그리고 뮐러의 뒷덜미를 잡은 채 얼어붙어 있는 그의 손을 발견해 냈다.
뮐러는 새파란 입술로 의식을 잃은 채였다. 가람이 뮐러를 발견한 것을 확인한 웨이크는 다시 미련 없이 의식을 잃어버렸다.
웨이크가 뮐러를 너무 꽉 잡고 있어서 한 사람씩 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람에게 두 명의 성인 남자를 끌어 올릴 힘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가람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짧은 생각 후, 가람은 두 사람의 주변을 마구 파서 주위에 벽을 쌓기 시작했다.
옮길 수 없다면 여기에 캠프를 만들면 된다. 이미 얼어붙은 손은 너덜너덜했지만 가람은 필사적으로 땅을 파고 벽을 쌓았다.
금방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혹사당한 몸인데 무슨 기운이 났는지 가람은 펄펄 날며 캠프를 만들었다.
위급 상황에 발휘되는 초능력인지, 가람은 세 사람이서 세 시간 동안 만들어야 겨우 만들었던 캠프를 혼자서 두 시간 만에 만들었다.
이글루를 만들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가람은 드디어 눈 속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의 옆에 불을 피우고 눈을 코펠에 넣고 끓였다.
주변에서 주워 온 장비 중에 고체 연료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침낭을 펴고, 주변에 남아 있는 먹을 것을 주워 왔다. 벌써 해가 졌고, 몸도 한계에 달한 지 오래였지만 몸이 움직여지는 이상 움직였다.
팔이 천근만근이라도, 다리가 어디에 묶인 것처럼 무거워도 움직여지면 움직였다.
훈훈해진 이글루 덕분인지 잠시 후 웨이크가 의식을 차렸다. 아까보다는 나았지만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이나 굳은 몸이 상태가 몹시 안 좋아 보였다.
그가 깨어나자 가람은 끓이고 있던 음식을 한 숟가락 떠서 조심스레 먹였다.
뜨거운 것을 먹자 조금 기운이 나는지 웨이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좁긴 하지만 제대로 된 캠프 안에 누워 있었다.
눈사태에 휩쓸린 줄 알았던 가람은 기력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멀쩡해 보인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웨이크는 뮐러를 살폈다.
“뮐러는 괜찮습니까?”
그 질문에 뮐러는 직접 대답했다.
“일어났어요.”
쇳소리 같은 목소리였지만 가람은 크게 안심했다.
“그런데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군요.”
“좀 먹으면 기운이 날 거예요.”
가람은 끓고 있던 스튜를 뮐러에게도 먹였다. 뮐러는 정말로 꼼짝도 할 수 없었기에 말없이 그것을 받아먹었다.
가람이 뮐러를 간호하는 사이 웨이크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자신과 뮐러는 금방 몸을 추스르기 힘들다. 뮐러는 몰라도 자신은 분명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한쪽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눈사태 사이로 커다란 돌이 떠내려오며 다리에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부러진 다리로 하산은 불가능하고, 식량도 얼마 없다.
사실 초반부터 무리가 많은 산행이었다. 처음 북쪽 산을 등반하면서 닦아 둔 길도 아닌 험지로 다녔으니.
웨이크는 입맛이 썼지만 담담하게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은 살 수 없다.
사냥꾼으로 살며 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자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웨이크는 가람이 뮐러에게 스튜를 다 먹이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하게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네? 어디 불편하세요?”
가람의 말에 웨이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에 가람은 어쩐지 그가 하려는 말을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죽으면 필모른의 제 여동생에게 제가 방랑벽이 도져 멀리 떠났으니 찾지 말아 달라 전해 주십시오.”
그 말에 가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참고 있던 가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런 가람에게 웨이크가 덤덤히 덧붙였다. 여동생의 이름은 웨이미입니다. 가람은 결국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식량은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네? 죄송해요.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가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 꼭 살아서 가요. 그런 말 하지 마요. 제발 힘내요. 힘내요, 그런 생각 하지도 말아요. 제발, 죽지 말라구요…….”
웨이크는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고개를 들었다. 뮐러는 그 모습이 눈물을 참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죄송하지만, 다리가 부러진 것 같습니다.”
“제가 부축할게요.”
“불가능합니다. 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할게요! 할 수 있어요. 꼭 해낼게요. 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돌아가야죠. 돌아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가요.
이번에는 따듯한 곳으로 가요. 기차에서 목욕도 하고, 뜨거운 수프랑 맛있는 걸 먹으면서 치료도 하고, 푹신하고 햇살 좋은 침대에서 하루 종일 잠도 자요.
웨이크가 좋아하는 운동도 하고, 단것도 잔뜩 먹구요. 네?”
그러니까 제발.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말아요.
가람은 계속 애원했다. 웨이크는 복잡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방법이 없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그러나 대답 정도는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힘내 보죠.”
확답을 들은 가람은 가방에서 구급용품을 꺼내어 부러진 웨이크의 팔과 다리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기차에서 데이지의 남편을 간호하며 쌓았던 실력이 다시 발휘되었다. 부러져서 툭 튀어나온 다리와 팔이 이제 징그럽지 않았다.
웨이크와 가람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뮐러가 순간 흠칫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그는 주변의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었다.
“잠깐.”
뮐러가 손을 휘저어 주의를 모은 뒤 입술 앞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두 사람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무언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가람도 들을 수 있었다. 무거운 무언가가 눈을 밟으며 육중하게 움직이는 소리.
뽀드득뽀드득 밟히는 눈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바짝 긴장한 세 쌍의 눈이 의미 없는 시선을 교환했다.
불안과 공포에 젖은 가람은 연료에 눈을 끼얹어 불을 꺼 버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은 귀를 곤두세우며 기도했다.
제발 이리로 오지 않길.
그 바람과는 달리 소리는 점점 이글루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규칙적인 소리는 무언가 무게 있는 동물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이제 그만. 그냥 제발 지나갔으면.
소리가 지척에서 나자 가람은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총을 꺼내 들었다. 어둠 속에서 반사되는 쇠의 빛을 확인한 뮐러가 조용히 만류했다.
“그건 쓰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때, 입구 바로 앞에서 소리가 멈췄다. 가람은 소리 내었던 자신의 입술을 꾹 눌러 틀어막았다.
가람과 웨이크는 숨도 쉬지 않았다. 곰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북쪽 짐승?
그때, 발걸음이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