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39화 (39/256)

39화

“아직 살아 있나?”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 아는 사람이다.

트라키아. 그녀였다.

가람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니, 세 사람 모두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말을 잊었다.

대체 어떻게 여기에? 그것보다, 왜 여기에? 아니, 정말로 그녀가 맞긴 한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산의 어떤 괴물인 건 아닐까? 너무나 터무니없는 행운은 상상력을 부풀렸다.

“다 죽었나?”

다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가람은 정신이 들어 발작하듯 외쳤다. 살아 있어요! 사람 있어요! 여기 있어요!

이글루를 부수려는지 난폭하게 밀고 들어오던 발이 딱 멈췄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달의 개수 때문에 이곳은 밤이 깊어질수록 밝아진다. 입구로 보이는 두터운 털가죽 신발에는 눈이 잔뜩 묻어 있었다.

트라키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가람만큼이나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큰 소리를 듣고 찾아오긴 했지만, 그리 기대하지는 않았다. 캠프처럼 보이는 게 있어서 반신반의했는데.

“들어가도 되겠나?”

“네!”

가람은 연료에 다시 불을 붙였다. 트라키아는 좁은 입구로 기어 들어왔다. 머리꼭지가 보이더니 곧 어깨, 허리가 들어왔다.

날렵하게 다리를 끌어 모아 단숨에 이글루 안으로 들어온 트라키아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대검을 안으로 들여서 깔고 앉았다.

“진짜 다 살아 있군.”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트라키아는 조금 얼떨떨하게 말했다. 트라키아의 시선이 가람, 그리고 뮐러, 웨이크에게 차례대로 옮겨 갔다.

고체 연료의 어른거리는 불빛이 그녀의 단단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는 반시체가 된 웨이크를 보고 혀를 찼다. 제일 튼튼해 보이던 녀석이 제일 박살이 났군.

가장 센 놈이 가장 상처 입었고, 가장 약한 녀석이 멀쩡하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센 놈이 약한 녀석을 지키느라 다친 것이다. 트라키아는 그런 바보들이 싫지 않았다. 좋은 놈이야.

트라키아가 좋은 놈이라고 평가하는 사이 웨이크는 그 와중에도 조심스레 그녀를 살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람과 뮐러는 몰라도, 그는 저 여자의 포악함을 익히 들어왔다.

풍문에 들려오는 소문 중 어느 것 하나 제정신인 것이 없었다.

남의 팔다리를 부수는 걸 빵 쪼개는 것만큼이나 우습게 여기는 공작의 따님. 폭군. 무뢰배. 학살자. 어쩌면 곰보다 저 여자가 더 위험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멀쩡하군.”

최소한 한 놈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을 하려던 트라키아는 가람을 힐긋 보고 그 말을 삼켜 버렸다. 그런 트라키아에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람이 질문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바로 직전에 눈사태가 났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 위험한 밤의 눈산은 또 어떻게 헤치고 왔는지.

낮에 멀쩡히 두 눈 뜨고 다녀도 미끄러지기 일쑤인 산을 밤에, 제 그림자에 가리면 보이는 것도 없는 상황에서 이동한다는 건 ‘지금부터 폼 나게 절벽으로 미끄러져 죽어 보겠습니다.’ 하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며칠간 산을 뒤지며 가람은 그 사실을 톡톡히 배웠다.

“웨이크가 많이 다쳤어요. 아, 그것보다 여긴 어떻게…….”

가람의 질문은 이 눈밭에, 밤에 어떻게 오신 거예요? 라는 뜻이었으나 트라키아는 말을 툭 잘라먹었다.

“헤일리가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군.”

“헤일리?”

“크페타인 여관의 여주인이다.”

가람은 튼실한 허리와 팔뚝을 가진 여주인을 기억해 냈다.

“그분이요?”

어째서? 가람이 표정으로 던지는 질문에 트라키아는 담담히 대답했다. 고체 연료가 신기한지 그것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헤일리의 첫딸은 태어난 지 30일째에 죽었다. 감기였지. 남쪽에는 그렇게 흔한 약초 한 뿌리가 없어서 죽었다.

그다음 해에 태어난 아들은 이틀 만에 동사했고, 셋째는 왕독수리가 물어 갔다. 간신히 두개골은 찾았지만 나머지는 찾지 못했다.

애지중지 키웠던 넷째 딸은, 민가까지 내려온 곰이 먹어 치웠다. 팔만 남아 있었지. 딱 너만 할 때였다.”

가람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어째서 그게 대답이 될 수 있냐고 묻지 않았다. 가람은 트라키아의 목소리가 무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거운 것은 자신의 몸이었다. 가물가물 닫혀 가는 의식 사이로 트라키아의 목소리는 젖은 헝겊처럼 밀려 들어왔다.

축축하고 늘어지는, 그리고 푸근하고 습기 찬 피로가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쉽게 자려고 하지 않았다. 자는 사이 뮐러와 웨이크 두 사람이 죽을까 봐 걱정되어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그만 쉬어라.”

“저 좀 쉬었어요.”

뒤통수에 돌을 맞고 마트에서 눈에 파묻혀 기절한 것도 어떤 의미로는 쉰 거다. 하지만 트라키아는 가람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내가 돌볼 테니 이제 좀 자라.”

눈사태는 어떻게 피해서 오셨어요? 우리는 4일이나 걸려서 들어온 이 산을, 어떻게 한나절 만에 올라올 수 있었나요?

가람은 자신이 질문했다고 생각했지만 트라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람의 혀가 어물어물 움직이다가 그대로 멈췄다.

“자.”

트라키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가람은 눈을 감았다. 까마득하게, 죽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득한 휴식이었다.

푹 고개를 꺾는 가람은 트라키아가 마법을 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앉아 있던 그 자세 그대로 정신을 잃는 가람을 보며 트라키아가 혀를 찼다.

울었는지 얼굴은 엉망이었고, 뒤통수의 머리카락은 마른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얼굴에는 뺨, 콧날 할 것 없이 생채기가 난 데다 튼튼한 가죽옷의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바람막이 로브는 어디에 걸려 찢겼는지 구멍이 나 있었다.

트라키아는 불편하게 고개를 꺾은 가람을 안아서 자신의 가슴팍에 비스듬히 눕혔다.

누워서 자는 것만큼 편하지는 않을 테지만 앉아서 자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너희들도 자라.”

끝까지 눈을 감지 않으려는 웨이크를 트라키아가 직접 손을 뻗어 눈을 감겼다. 금세 눈을 뜨고 경계하는 웨이크에게 트라키아가 픽 웃으며 말했다.

“강제로 자게 해 주랴?”

사나운 눈매와 거친 미소를 잠시 바라보던 웨이크는 잠시 얼음 천장에 시선을 주었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트라키아는 뮐러에게도 같은 경고를 하려다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그를 보고 웃어 버렸다.

깊은 밤, 붉은 머리의 공주님이 지키는 이글루에는 세 명의 여행자가 잠들어 있었다.

* * *

가람은 눈을 떴다. 며칠 사이 익숙해진 푸르스름한 얼음벽이 보였다. 고체 연료는 이미 다 타 버렸는지 이글루 안은 어두웠다.

코끝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다른 고체 연료를 꺼내어 불을 붙이려던 가람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안겨 있음을 깨달았다.

단단한 팔이 자신의 상체를 안고 기대게 하고 있었다. 찢어져 제구실을 할 수 없게 된 보온 로브 대신 등에 닿는 체온이 따듯했다.

“일어났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람은 자신이 누구에게 안겨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들도 기억이 났다.

곰을 만났고, 눈사태가 났고, 뮐러와 웨이크를 구하고, 이글루를 짓고, 트라키아를 만나고. 너무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의 사이에는 공백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네.”

대답하고, 가람은 고체 연료 두 개를 한꺼번에 집어다가 불을 피웠다.

바닥의 눈을 좀 파서 안쪽의 깨끗한 눈을 코펠에 담았다. 물을 끓이며 가람이 질문했다.

“저희는 어떻게 찾아오신 거예요?”

“야영 흔적을 따라왔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트라키아는 소리 없이 미소했다.

“크페타인 토박이와 초보 산악가를 비교하면 안 되지.”

하긴. 가람은 빠르게 납득하고 뮐러와 웨이크의 안색을 살폈다. 자고 있던 뮐러는 그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으나 웨이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바싹 마른 입술을 따듯한 물로 적셔 주자 깨어났는지 입술을 움직였지만 말하지도, 눈을 뜨지도 못했다. 열이 높았다.

고민하던 가람은 늘 메고 있는 작은 가방에서 두 알의 약을 꺼내었다. 아스피린이었다.

해열과 부러진 뼈의 염증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가람은 한참 동안 약을 들고 갈등했다.

기차에서 다리가 부러진 데이지의 남편에게, 그때도 약을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데이지의 남편은 이미 기차에서 처방한 약초 즙을 마시고 있었고, 가람의 약과 효능이 충돌해 더 안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을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져온 약이 똑같은 작용을 하는지도 의심되었다. 음식이야 비슷한 형태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약은 조금 달랐다.

자신이야 차원을 넘나드는 패스파인더이니 이곳의 것들을 먹고도 멀쩡할 수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다르다.

차원을 넘으면 그 차원에 적합하게 몸이 동화되는 자신과는 다르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가람은 언젠가 모르드레드가 알려 주었던 사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제가 살던 곳과 비슷한 환경의 세상이 있다니,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놀랍네요.’

‘비슷? 여기의 공기는 어쩌면 너의 차원과 다를지도 몰라. 중력이나 흙의 성분조차 다를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여기서 네가 정상적으로 숨 쉬고 먹고 살 수 있는 건 네가 패스파인더이기 때문이야.’

‘그럼 여기 사람들에게 제 세계의 음식이나 약이 독이 될 수도 있나요?’

‘음식은 괜찮을걸. 네 세계의 음식 체계는 여기와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약은 잘 모르겠군. 혹시 약 가진 것 있나?’

‘여기요.’

‘생긴 게 엄청 독특한데? 뭐로 만든 건지 모르겠군. 위험하게 느껴지진 않아. 아마 괜찮을 거다.’

가람의 세계에는 고기가 열리는 나무도, 호랑이가 쑥을 먹고 사람이 되는 일도 없다.

모르드레드는 괜찮다고 했지만 가람은 확신 없이 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전 세계의 약이 이들에게는 독이 될지도 모른다.

망설이던 가람은 결국 약을 든 손을 접어 버렸다.

가람의 확신 없는 손을 웨이크가 붙잡았다. 그는 열이 오른 눈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주십시오.”

마치 가람의 속내를 꿰뚫어 본 것 같은 말투였다. 가람이 망설이자 웨이크는 직접 손을 펼쳐 약을 가져갔다.

생소한 형태의 약이다. 그는 가람이 말릴 새도 없이 약을 삼켰다. 가람이 헉하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무슨 약인지도 모르고 먹으면 어떡해요! 어서 토해요!”

웨이크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독약인지, 명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독약이라면 긴 고통보다 짧은 안식이 낫고, 명약이라면 그것도 그것대로 좋았다. 트라키아가 있긴 하지만 웨이크는 그녀에게 별로 의지하지 않았다.

“쯧.”

웨이크의 생각을 단숨에 눈치챈 트라키아가 혀를 찼다. 바보 같은 놈.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놈.

가람은 안절부절못하며 웨이크의 안색을 살폈다. 잠시 후, 다행히도 웨이크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졌다.

“괜찮아요?”

“네. 통증이 많이 가셨군요. 진통제입니까?”

“진통도 되고, 염증도 가라앉히는 약이에요.”

가람은 그 후로도 웨이크를 유심히 살핀 후, 그가 정말로 괜찮아 보이자 그제야 뮐러에게도 약을 먹였다.

약에 내성이 없어서 그런지 약효는 정말로 뛰어나게 작용해서, 뮐러는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가볍게 가람을 도와줄 수 있는 수준까지 회복했다.

아직 몸이 무거운지 피로해 보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가람은 크게 안심했다.

가람이 두 사람을 보살피는 사이 식사를 만든 것은 트라키아였다.

그녀는 끓는 눈 녹은 물에 치즈를 녹이고 소금에 절인 양고기와 말린 야채 조각을 넣어 그럴싸한 스튜를 끓여 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어제 먹은 맹물 같은 스튜에 비하면 진짜 요리다운 요리였다.

눈사태로 짐의 대부분이 휩쓸려 간 후 웨이크의 가방에서 약간의 식량을 찾긴 했지만 그건 어제 끓인 스튜에 모두 써 버렸다. 가람은 반가운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 가지.”

조용한 식사가 끝나고 트라키아가 검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녀는 좁은 입구를 기어서 나가는 대신, 이글루를 검으로 후려쳐 박살 내고 커다란 문을 만들어 냈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눈 조각을 가람이 황망하게 쳐다보는 사이 트라키아는 짐짝처럼 웨이크를 어깨에 둘러메었다.

“무슨!”

“까탈스럽게 굴지 말고.”

항의하는 웨이크를 여염집 처녀처럼 취급해 단숨에 입을 다물게 한 트라키아는 가람이 남은 연료와 그릇을 챙기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아직 잘 걷지 못하는 뮐러를 부축하며 그 뒤를 따르던 가람은 손등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바늘은 이제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렇게, 거의 다 와서. 바로 근처에 있는데.

이 와중에도 패스를 찾으려는 자신이 너무나 싫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하산하면 언제 다시 올라올 수 있을지 모른다.

가람이 자신도 모르게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흘긋흘긋 시선을 주자 트라키아가 질문했다.

“그쪽에 뭔가 있니?”

가람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산에 찾으러 들어온 게 있는 것 같아요.”

트라키아는 자꾸 어깨에서 미끄러지는 웨이크를 한 차례 추켜든 뒤 질문했다. 배가 압박된 웨이크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중요한 것이냐?”

“……네.”

잠시 고민하던 트라키아는 쭈뼛쭈뼛한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잠깐 찾아보는 건 괜찮겠지.

“어느 쪽이지?”

“이쪽이요.”

가람은 트라키아가 향하고 있던 곳과 정반대되는 방향,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쪽은 조금 위험한데. 조심해서 따라, 젠장.”

무언가 느낀 트라키아가 짧게 욕설을 내뱉고 바닥에 웨이크를 내려놓았다. 딴에는 살살 한다고 했지만 바닥에 나동그라진 웨이크가 신음을 참지 못했다.

가람이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서자 트라키아가 검을 빼어 들었다.

가람이 그 위에 누워서 잘 수도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검이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온다.”

곰이나 산짐승이라도 오는 걸까 하던 뮐러와 가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산 위쪽에서 구름이 일어나고 있었다. 2차 눈사태였다.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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