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 앞에 트라키아가 나섰다.
그녀가 거대한 검을 얼어붙은 눈 더미에 박으며 웨이크에게 짧게 시선을 주었다. 다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웨이크는 그녀의 검 뒤에 있지 않았다.
“이봐! 기어서라도 내 뒤로 와라, 움직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은 그가 필사적으로 움직였지만 너무 늦었다.
뮐러가 달려가 웨이크를 잡아끌었다. 웨이크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가람은 웨이크의 뒤로 돌아가 그를 밀었다.
웨이크가 트라키아의 검 뒤로 들어온 것과 눈사태가 들이닥친 것은 동시였다.
그리고 가람은 트라키아가 어떻게 눈사태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단단하게 박힌 대검은 밀려드는 눈을 철벽처럼 막아섰다.
트라키아는 눈이 대검의 키를 넘으려고 하면 대검을 슬쩍 뽑아 조금 앞으로 민 후 다시 꽂았다. 눈을 뜨고 보면서도 믿지 못할 기예였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던 눈사태는 그 검 앞에서 차례차례 토막이 났다. 진지한 얼굴의 트라키아는 눈사태의 괴물과 싸우는 용사처럼 보였다.
눈사태가 괴성을 지르며 더욱 포악하게 달려들었으나 트라키아는 덤덤하고, 단단했다.
강했다.
물결처럼 갈라져 양옆으로 흐르는 눈사태를 가람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휩쓸리면 순식간에 끝장이 나고 말 거다.
그때, 불길한 생각을 한 가람을 타박하기라도 하듯 떠내려가던 무언가가 가람의 발목을 잡아챘다.
웨이크를 밀어 넣느라 조금 나와 있던 발목을 나뭇가지가 낚아챈 것이다. 생각은 짧았고,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
비명을 지르려고 뻐끔 연 입 안으로 눈가루가 밀려들었다. 뮐러인지, 웨이크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가람 대신 절규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멀어져 가는 트라키아가 보였다. 눈사태를 막는 데 집중하느라 뒤늦게 사고를 알아챈 트라키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벌써 이렇게나 멀어졌는데도 그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대책 없는 상황 속에서 가람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움켜쥐려고 허우적거린 손이 가람의 발을 낚아채었던 나뭇가지를 잡았으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가람은 나뭇가지를 움켜쥔 채로 함께 휩쓸려 갔다. 아래로, 아래로.
풍경과 기억이 마구 뒤섞였다. 트라키아의 얼굴, 멀어진 그들의 모습, 산, 나무, 흐린 북쪽 하늘, 눈사태, 쓸려 가는 옆의 눈의 파도, 나뭇가지, 다시 트라키아의 얼굴, 웨이크, 뮐러, 엄마, 아빠, 다시 흐린 하늘, 쓸려 내려가는 나뭇가지들.
죽는다.
자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눈사태의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눈이 휩쓰는 대로 마구 휘둘러진 시야가 무의미한 산과 나무, 하늘을 반복해서 스쳐 갔다.
나뭇가지와 돌이 얼굴을 때려서 피가 나는데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하늘이 보였다. 흐린 잿빛 하늘.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짧은 부유감에 몸이 붕 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람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깨닫는 순간, 몸이 곤두박질쳤다.
아래에서 위로 무섭게 바람이 불어닥쳤다. 몸을 잘 펼친다면 그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은 광풍이었다.
가람은 머리부터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중에서 자세를 고쳤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무게 중심을 잡고, 함께 떨어져 내리는 옆의 나뭇가지와 돌 따위를 발로 차고 손으로 잡아 몸을 돌렸다.
가람의 노력이 빛을 발해 그녀는 간신히 머리부터 떨어지는 것만은 면했다.
몸통부터 떨어진 가람은 아직 굳지 않아 푹신한 눈 위로 조금 파묻혔다. 그리고 으스러질 것 같은 몸을 움직여 눈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굴렀다.
가람이 자리를 피하기 무섭게 눈이 들이닥쳤다. 빨리 피하지 않았으면 묻히고 말았으리라.
한참 굴러간 가람은 단단한 얼음 바닥에 널브러졌다. 어디가 부러진 게 확실하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입 안이 터졌는지, 아니면 배 속이 터졌는지 목 안에서 피가 올라왔다. 그걸 삼키며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평평한 얼음 땅. 얼어붙은 호수인가? 하긴, 여기가 어디인지 그게 무슨 상관인가.
몸이 점점 나른해지고 감각이 멀어진다. 그러나 가람은 감으려던 눈에 힘을 주었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그것이 보였다. 환각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있었다. 패스.
흐린 시야에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색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바로 눈앞에 있었다. 가람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배를 끌며 기었다.
한 뼘, 한 뼘씩 거리를 줄여 갔다. 패스, 저기에 있다. 바로 저기에.
눈사태가 멎고 뒤늦게 아래로 휩쓸린 가람을 찾아 낭떠러지 앞에 선 트라키아는 경악했다. 가람이 지금 기어가는 곳은 얼음 호수다.
굴러가는 꼴을 조마조마하게 보고 있다가, 가장자리에 멈춰서 안심했더니 제 손으로 얼음이 얇은 중앙으로 기어가고 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트라키아는 자신의 검을 등에 메고, 양어깨에 웨이크와 뮐러를 짊어진 뒤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렸다.
가람과 달리 쉽게 눈에 착지한 그녀는 기겁해서 혼이 빠진 두 남자를 눈 위에 내려놓고 서둘러 가람에게로 달렸다.
“그만둬라! 위험해!”
그 말은 가람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기어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패스가 있다.
기어가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넓게 펼쳐진 자세는 체중을 분산시킨다.
그러나 그 효력도 다했는지 가람의 몸 아래 얼음에 얇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트라키아는 애가 타서 가장자리를 서성였다.
“멈춰! 엉덩이를 때려 줄 테다!”
트라키아가 외치는 순간 가람은 멈췄다. 아래의 얼음에 다시 한 번 빠지직 금이 갔다.
트라키아는 가람이 멍하니 허공을 보길래 덩달아 열심히 그쪽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가람이 보고 있는 것은 패스였다. 바로 앞에 그것이 있었다. 가람은 떨리는 손을 들어 패스에 가져다 대었다.
패스는 모르드레드와 함께 찾았던 그것과 달리 몹시 작았다. 탁구공만 하던 첫 패스와 달리 이것은 새끼손톱만 한 금색 구체였다.
가람이 손을 가져다 대자 패스는 짧게 빛난 후 문양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패스를 삼킨 문양이 금빛으로 짧게 빛난 후 다시 검게 물들었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전신의 피가 진해지는 느낌. 피가 무거워지는 느낌.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그러니까 이제, 쉬어도 되는 것이다.
가람은 미소하며 눈을 감았다. 동시에 다시 얼음에 금이 가며 한 귀퉁이가 깨어져 나갔다. 트라키아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대검을 꺼내었다.
트라키아는 대검을 뻗어 그것을 스푼처럼 사용해 가람을 끌어왔다. 동시에 가람이 있던 자리에 물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가람은 의식을 잃고 있었다. 뺨을 후려치자 잠시 정신을 차린 것 같았지만 금세 스르륵 다시 늘어진다. 트라키아는 이를 악물고 어깨에 가람을 둘러메었다.
“마법사. 걸을 수 있지?”
“걷겠습니다.”
대답하는 뮐러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웨이크의 부축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한 트라키아는 다른 쪽 어깨에 웨이크까지 짊어지었다.
웨이크는 불평 없이 어깨에 매달려 걱정스레 가람을 살폈다. 피를 토하는 가람을 본 뮐러의 얼굴이 굳었다.
트라키아는 짧게 말했다. 초조함이 가득했다.
“버텨라.”
뮐러, 웨이크, 그리고 가람까지.
셋 모두에게 한 말이었다.
가람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들려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릴 적 업혔던 아버지의 등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찾았으니까, 이대로 쉬었으면 좋겠다.
계속, 계속 쉬었으면.
* * *
알람 소리.
귀 바로 옆에서 울리는 익숙한 소음에 가람은 눈을 떴다. 낯익은 천장. 낯익은 벽지. 익숙한 냄새. 친숙한 공간. 자신의 방이었다.
창문으로는 밝은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다. 올 리 없는 아침. 날 리 없는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가람은 웃어 버렸다. 꿈이구나.
손을 들어 알람을 껐다. 생채기와 냉기에 다 터서 덕지덕지 피가 묻어 있던 손인데, 지금은 매끈하다. 꿈. 꿈이구나. 그런데 어느 쪽이 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혼란해진다. 밝은 햇살에 눈이 따갑다. 침대보의 감촉, 따듯한 냄새. 이렇게 닿아 오는 감각이 꿈이라고?
가람은 납득할 수 없는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몸이 가볍다. 언제나 웅크리고 자서 찌뿌둥하던 몸이 아니었다. 얼마 만에 맞이하는 상쾌한 아침인지.
방문을 열자 된장찌개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식탁 위에는 케이크와 새우튀김, 보쌈 등 가람이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하다.
엄마는 어색한 얼굴로 된장찌개를 휘젓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멀뚱하게 서 있는 가람을 아버지가 끌어왔다.
“왜 이렇게 멍해? 잠 덜 깼어?”
주춤주춤 의자에 앉자 된장찌개를 내려놓으며 엄마가 핀잔을 줬다. 가람은 반사적으로 멍하니 대답했다.
“어? 어, 응.”
정말 꿈인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말다툼을 하고 나서 그대로 자 버린 후 꾼 꿈인가?
“어제 싸우고 애가 겸연쩍어서 그런 거지. 자, 우리 딸 아빠가 김 싸 줄게.”
“보쌈도 있는데 왜 그런 걸 먹여?”
“일어나자마자 고기 먹으면 안 좋아. 시작하는 음식은 가벼운 걸로 먹어야지.”
아빠가 싸 주는 김말이를 받아먹으며 가람은 혼란스러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꿈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약간 기억이 나는 것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종국에는 무슨 기억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게 꿈이었구나!
“내가 먹을게.”
가람은 보쌈을 집어 먹으며 다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털어 버렸다. 그래, 악몽을 계속 생각해서 뭐 해.
그것보다, 엄마한테 사과를 해야겠다. 엄마와 싸우고 나서 죄책감에 그런 꿈을 꾼 게 분명하다.
“엄마, 저기 어제는 내가…….”
가람이 우물쭈물 꺼내는 말을 가람의 엄마가 웃으며 막았다.
“됐어. 우리 공주님 생일인데 아침부터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래도…….”
“그것보다, 조금 있다가 마트 갈 건데 같이 갈까? 너 생일 음식 만들고 나니까 냉장고가 텅 비었네. 알바 가기 전까지 시간 좀 있지?”
덮어 두자는 미연의 말에 가람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다 털어 버린 것 같은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 응.”
“그래, 그럼 어서 먹고 씻고 와.”
그 후 제법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을 가진 후, 아버지가 출근하고 가람은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왔다.
세면대에 물을 튼 가람은 물소리에 다시 걱정스러워졌다. 만약 이게 정말 꿈이라서 세수하는 순간 깨어나면 어쩌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보기에도 정말로 시원해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쩐지 이마나 몸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망설이던 가람은 결연하게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바닥에 물을 받았다.
다행이었다. 차가운 물이 손에 닿는데도 깨지 않았다. 정말로 이건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람은 서둘러 씻고는 조금 들뜨고 말끔한 기분으로 마트로 향했다. 엄마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가람이 의아한 것 같았지만 곧 장 보는 것에 집중했다.
마트는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꽤 붐볐고, 그 속에 있으니 악몽의 그림자가 완전히 가시는 것 같았다.
가람은 생각했다. 생일날 아침부터 꿈 한번 스펙터클하네.
“엄마, 파 떨어졌지 않아?”
“음, 우유랑 계란도 다 떨어져 간다.”
가람은 카트를 밀며 엄마 뒤에서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값비싼 과자를 슬쩍 카트에 넣으려는데 생일이라 봐주는 건지 엄마는 살짝 눈을 흘기기만 했을 뿐 말이 없다. 가람의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
“그러고 보니까 전에 이모 결혼 날짜 잡혔다고 하지 않았어?”
가람이 촐랑이며 묻는 순간 지나던 사람과 가람의 카트가 엉켰다. 좁은 마트 복도에서 카트끼리 부딪히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격렬하게 부딪혔던지라, 가람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부딪혔던 남자는 매너 없게도 가람을 흘끔 보고는 휭하니 가 버렸다.
“아,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가람이 도끼눈을 뜨며 멀어져 가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엄마는 그런 가람을 보며 혀를 찼다.
“으이구, 칠칠맞게. 어서 일어나.”
“아픈데 왜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
가람은 괜히 엄마를 원망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어딘가 다쳤는지 일어나지지가 않는다.
“어? 나 발목 삐었나 봐. 엄마, 나 손 좀 잡아 줘.”
가람의 말에 엄마는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나.”
“말만 하지 말고 좀 잡아 달라구.”
가람이 손을 내밀었으나 잡아 오는 손은 없었다. 엄마는 가람을 내려다보며 반복했다.
“일어나.”
“잡아 달라니까.”
“일어나. 일어나.”
문득 가람은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굵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