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걸 자각하자 마트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검붉은 공간 안에서 목소리만 들려왔다.
엄마? 엄마?! 어디 갔어, 혼자 일어날 테니까 장난하지 말고! 엄마!
“일어나세요.”
가람은 눈을 떴다. 검붉은 공간은 가람의 눈꺼풀이었다. 처음 보는 돌 천장을 배경으로 뮐러의 얼굴이 보였다. 벽난로에서 탁탁 불똥이 튀기는 소리가 들린다.
가람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 귀를 적셨다. 꿈. 그게 꿈이었나.
곁에 앉아 있던 뮐러가 깜짝 놀라 차가운 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 위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은 세숫물을 닮아 있었다.
수건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 귓가로 뮐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열이 높아서 눈물이 잘 날 겁니다.”
아냐. 그런 게 아니야. 그래서 우는 거 아니에요. 잡아 줘, 손 좀 잡아 달라고.
“……아 줘, 잡아 달란 말이야.”
열에 들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차가운 감촉이 닿아 왔다. 뮐러가 열에 달아오른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뮐러의 상냥한 녹색 눈이 가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잡고 있겠습니다.”
한 손은 가람의 손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는 약을 먹인다. 약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씁쓸한 약초 즙이었다.
먹고 나자 열이 조금 내리는 것 같았다. 약을 삼킨 가람은 조용히 말했다.
“제 왼손 손등 보여 주세요.”
가람은 꼼짝도 할 수 없었기에 뮐러는 잡고 있던 가람의 손을 대신 들어 올려 보여 주었다.
흐리던 원 중 하나가 진해져 있었다. 안에는 숫자로 20이라고 적혀 있다. 아마 그것이 가람이 찾은 패스의 양인 것 같았다.
베이스캠프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얼마나 필요할까.
가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진한 원 속의 숫자가 바뀌었다.
20이라는 검은 문신이 피부에 녹아들듯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1,000이라는 숫자가 생겨났다. 가람이 바라는 것의 가격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첫 패스를 찾는 데 든 시간을 생각해 보면, 짧으면 10년 길어도 20년 안에는 가능할 것 같다.
모르드레드는 어째서 베이스캠프를 되찾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말했던 걸까. 가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르드레드는 패스로 무엇이든 구입할 수 있다고 했었다. 육체든, 힘이든 무엇이든.
가람은 지금 찾은 패스로 어느 정도의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패스를 써서 구입한 능력이 나중에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어떻게 얻은 패스인데.
하늘을 날거나 모르드레드처럼 강력한 마법을 쓰는 건 얼마일까? 나침반은 대답했다. 200패스, 220패스.
그리 저렴하지는 않구나. 20패스로 살 수 있는 능력은 뭐가 있지? 나침반은 다시 대답했다. 숙면을 취하는 능력.
그 후로도 차례차례 글씨가 떠올랐다. 속독 능력, 제법 잘 맞는 직감 능력, 동물들이 친근하게 여길 확률, 아무거나 잘 먹는 능력, 조금 빠른 상처 회복력, 반사 신경.
가람은 아픈 와중에도 조금 웃었다. 쓸 만한 능력을 얻는 것이 쉽지는 않을 모양이다. 가람은 다시 눈을 감았다. 검붉은 시야 위로 모르드레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첫 패스가 선물이라고 했던 그 말. 그때는 무심히 넘겼던 그 말이 이제 의미를 갖고 다가왔다.
그때 들었던 어떤 말도 무심히 넘겨서는 안 되었다. 좀 더 물어보고, 좀 더 새겨들었어야 했다.
그때와 같은 크기의 패스를 한 번에 얻는 일은 이제 거의 없으리라. 모르드레드가 했던 ‘선물’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그 패스를 가졌어야 했다. 그 패스를 가지고, 능력을 사서 패스를 찾으러 다녔어야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찬란했던 그 패스를 손에 넣었더라면 지금처럼 여행이 고달프지는 않았으리라.
모르드레드가 가람의 첫 패스를 가짐으로써 모든 걸음이 꼬여 버렸다. 그걸 뺏기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그리고 고생스럽긴 하겠지만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오늘 꾼 꿈을 반드시 예지몽으로 만들고 말 거다.
“뮐러는 괜찮아요?”
가람이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물었다. 열이 다시 오르고 있었다. 뜨끈한 눈꺼풀이 부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저는 괜찮습니다.”
“웨이크는요?”
“고비는 넘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약초를 구하기가 힘들어서…….”
“치료를 하려면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여기를 떠나도 괜찮은 겁니까? 찾으시는 건…….”
“이미 찾았어요. 괜찮아요.”
짧은 고민 후 마침내 뮐러가 제안했다.
“바랄라인 제국 수도를 추천합니다. 괜찮은 치유 마법사와 의사를 구하기 좋은 곳이죠. 마법 열차로 바로 갈 수 있고요.”
“그러면 바랄라인으로 가요.”
가람은 고민 없이 승낙했다. 피곤했다. 다시 몸이 꺼져 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위에서 푹푹 밟아 뭉개는 것처럼 한없이 묻혀 들어간다. 의식을 잃으려는 가람을 뮐러가 붙잡았다.
“트라키아 공녀가 가람의 나이를 다섯으로 알고 있던데…….”
“내버려 둬요.”
가람은 굳이 나이를 밝히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생명의 은인. 그런 은인을 속이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내버려 두었다.
양심보다는 목숨이 귀하고, 웨이크와 뮐러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내놓을 목숨은 자신의 것만이 아니다.
여차하면 묵인했다는 점에서 웨이크와 뮐러까지 그녀의 분노를 살 수 있었다.
진실을 밝히면 자신의 마음은 가벼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덜자고 감당 못 할 사태를 불러올 수는 없었다.
차라리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 나았다.
진실된 고백 앞에서 트라키아가 ‘참 정직한 사람이군요!’ 하고 그냥 넘어갈 것 같지도 않다.
그녀가 관대한 것은 자신을 어린아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아니게 된 후의 문제를 가람은 상상하기 싫었다.
“알겠습니다. 저 혼자 역까지 옮기긴 힘들 테니 돈을 좀 써서 사람을 부려도 되겠습니까?”
“네.”
그 후로도 뮐러는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가람은 관성적으로 네, 네 하고 대답하다가 어느 순간 다시 까무룩 의식을 잃어버렸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것이 정신인지 육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흔들리는 의식 속에서 깜빡이는 시야가 몇 번이고 점멸한다. 깜빡일 때마다 가람의 눈앞은 마차의 천장으로, 무언가 질문하는 뮐러의 얼굴로, 낯선 덥수룩한 수염들로 뒤덮였다.
춥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으나 그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가람이 다시 눈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이 크페타인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여기는…….”
마른 목소리. 뮐러가 재빨리 가람을 부축해 입가에 물잔을 대어 주었다. 가람은 그것을 몇 모금 들이켜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공간이다.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자신은 마법 열차 안에 있었다. 가람의 옆 침대에는 고른 숨을 내쉬는 웨이크가 눈을 감고 있다.
“저 얼마나 잤어요?”
가람은 질문하다가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입을 뻐끔거렸다. 뮐러는 조심스레 가람을 다시 눕혀 놓았다.
“일주일 좀 안 됐습니다. 그렇게 기절하시고 바로 인부를 구해 바랄라인행 기차표를 샀어요. 서두르지 않으면 다음 기차가 일주일 뒤에 있었던 터라, 공주에게는 별말도 못 하고 급히 왔군요. 그래도 여관 주인과 그녀가 귀한 약초를 챙겨 줘서 둘이 정신을 잃고 있을 때 입으로 좀 흘려 넣었어요. 안 그랬으면 열을 못 이겨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뽀삐는요?”
“당연히 데려왔으니 걱정 마세요.”
가람은 뮐러의 말을 들으며 숨을 살살 내쉬었다. 말을 하려고 복부에 힘을 주자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왔다.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그녀는 몸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작게 말을 흘렸다.
“왜 이렇게 아픈 거죠?”
뮐러의 녹색 눈이 둥그렇게 뜨이더니 웃음기를 담고 휘어졌다. 곧 실소가 터져 나왔다.
“당연히 아프죠. 갈비뼈 세 대가 금이 가고 전신이 타박상에 동상으로 가득한데요. 혹시 간지럽더라도 긁지 마세요.”
가람은 멍하니 생각했다. 어디 부러진 데도 없고 구멍 난 데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아프지?
가람의 부상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웨이크가 워낙 크게 다쳐 버려서 무뎌졌을 뿐, 그녀의 상처도 큰 것이다. 다만 이렇게 크게 다쳐 본 것이 처음이라 몰랐을 뿐.
뮐러는 데굴데굴 눈알만 굴리는 가람을 두고 허공의 물 덩이에 뜨끈해진 수건을 집어넣었다.
물 덩이가 마구 요동치며 수건을 뒤흔들더니 곧 적절한 물기만 머금게 한 상태로 뮐러의 손에 뱉어 놓는다. 뮐러는 그것을 다시 가람과 웨이크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일어나셨으니 뭔가 좀 드셔야죠? 먹을 걸 주문하고 오겠습니다.”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통에 짧게 신음했다. 어딘가 움직이려고 하면 온몸이 들썩이도록 아팠다.
통증이 심해 무언가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틀 만에 일어났으니 뭐라도 먹어 둬야 몸이 나을 터다. 자리를 비우는 뮐러의 너머로 웨이크가 눈을 뜬다.
“웨이크. 좀 어때요?”
웨이크는 대답 대신 멍한 눈으로 기차를 둘러보았다. 크페타인의 산에서 기절하고 처음 의식을 차리는 것이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느릿하게 끔뻑여지던 그의 눈이 가람과 마주치고 짧게 흔들렸다.
“크페타인을 떠나서 바랄라인으로 가는 중이에요.”
“아…….”
말을 하려던 웨이크는 자신의 새된 소리에 놀라고, 목의 통증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러나 의외로 부러진 팔과 다리는 그리 아프지 않았다.
오른쪽 다리의 무릎 아래와 왼쪽 팔의 팔꿈치 위쪽이 싸하다. 통증이라고 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잘려 나가기라도 했나 오싹해져 고개를 들던 그는 목에 대못을 박는 것 같은 고통에 말도 못 하고 꿈틀거렸다.
잠시 후, 고통을 가라앉힌 웨이크가 말했다. 잠깐 사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머리카락을 적셨다.
“가람은 괜찮습니까?”
“죽을 것같이 아프지만 괜찮네요.”
제법 넉살을 되찾은 가람이 너스레를 떨자 웨이크가 드물게 미소했다.
“이렇게 따듯한 데 누워 있으니 지난날이 다 꿈 같죠?”
“굉장한 악몽이었습니다.”
“맞아요. 정말. 당분간 북쪽은 가긴 싫네요.”
그렇게 말하는 가람과 웨이크 사이로 무른 음식 접시를 든 뮐러가 앉았다.
그는 웨이크가 깨어 있는 것을 보고 접시를 하나 더 가져왔다.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워낙 작아서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천천히 드세요.”
가져온 음식은 고기와 곡류를 곱게 간 오트밀이었다. 간은 거의 되어 있지 않아 고소한 맛 외에는 별맛이 없었다.
그래도 입에 뭔가 들어가자 살 것 같아서 먹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뮐러의 숟가락 앞에 입을 벌렸다.
두 개의 숟가락을 번갈아 놀리느라 뮐러의 손은 오랜만에 매우 바빠졌다.
“전에 산에서는 제가 두, 웁. 사람한테 먹여 드렸는데, 이렇게도 되는군요.”
밀려드는 숟가락에 잠시 말을 끊고 넙죽 받아먹은 가람이 피식 웃었다.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제가 이렇게 간호해 드릴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뮐러는 힘들지 않아요? 이렇게 간호하느라 무리해도 되는 거예요?”
가람의 걱정에 뮐러는 어깨만 으쓱했다.
“별로요. 두 사람이 워낙 많이 자서 심심한 것 외에는 딱히 힘든 것은 없습니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무방비하게 낯선 사람 손에 간병을 맡기고 눈을 감을 정도는 아닙니다.”
“쉬엄쉬엄 해요. 그러다가 진짜 몸져누우면 어떡해요.”
“바랄라인에 가면 뜨거운 물에 목욕도 하고, 최고급 숙박소에 머물면서 고위 치유 마법사를 불러다가 치료받으며 호사스럽게 지낼 텐데요 뭐.”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뮐러가 밉지 않게 싱긋 웃었다.
“한 번쯤 그렇게 지내 보고 싶었는데……. 안 됩니까?”
“얼마든지요. 그런데, 그 고위 치유 마법사라는 사람이 웨이크의 팔다리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뭐 돈은 좀 들겠지만요.”
돈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람은 은행에 쌓여 있는 거액의 보석들을 생각했다. 자신의 복대 안에 있는 알 굵은 보석들도 생각했다.
그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질문했다. 보석을 좀 더 가져올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얼마나요?”
“저는 치유 마법사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1천 골드 이상 1만 골드 이하라고 생각합니다. 고위 마법사는 대부분이 귀족이라, 평민이 귀족을 부르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죠. 귀족이 마법사를 부를 때는 저 금액의 절반도 필요하지 않답니다.”
뮐러는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가람은 다행스러운 기분이었다. 거액을 내더라도 그것이 나았다.
이 세계의 돈 같은 것은 가람에게 있어서는 어디에서든 퍼 올 수 있는 공기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거액을 주고도 치료해 줄 마법사를 구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았다.
사실 저만한 금액을 가진 평민이 없다는 점에서, 치유 마법사는 평민에게 있어 하늘의 별 같은 존재다.
특히 고위 치유 마법사는 돈만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움직인다고 해도 어지간한 거액이 아니면 일을 받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10골드, 100골드 정도는 귀족인 그들에게 푼돈이다. 그러니 그들에게까지 거액인 금액이 아니면 절대로 마법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 일에서 제가 느낀 게 몇 가지 있는데요.”
가람의 말에 웨이크는 시선으로, 뮐러는 입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어떤 거요?”
“살아 있을 때 즐길 건 다 즐기고 해 볼 건 다 해 보는 게 좋다는 거요.”
세 사람은 동시에 웃고, 두 사람은 다시 고통에 숨을 죽였다. 잠시 끙끙거린 후 가람이 말했다.
“그러니까 좋은 것 있으면 추천해 줘요. 수도라고 하니 좋은 곳이겠죠? 저는 뭐가 있는지도 모르니까 추천해 줘요. 웨이크는 바랄라인에 가 본 적 있나요?”
“없습니다.”
웨이크의 경험은 의외로 그리 풍부하지 않았다. 웨이크의 삶은 베녹사스의 푸른 녹음으로 우거져 있다.
그는 대화보다는 숨죽이는 일이 많았고 요리보다 덫을 만든 횟수가 더 많았으며 길보다 산이나 바위, 늪을 걷는 일이 더 많았다.
오히려 빚쟁이를 피해 대륙을 떠돌며 여러 도시를 전전했던 뮐러가 경험 면에서는 더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 바랄라인에 가 본 사람은 제가 유일하군요?”
뮐러가 장난스럽게 으스대자 가람과 웨이크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다시 아파했다.
“그런 것 같네요. 어서 이야기보따리 좀 풀어 봐요. 계속 누워서 잤더니 이제 잠을 더 자기도 힘들어요.”
부드러운 공기가 흐른다. 내던져지고 굴려지며 얼어붙고 쫓기었던 그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쁨이 평온히 시간을 감싸 안았다. 세 사람은 조용히 생환의 기쁨에 젖어 들었다.
“바랄라인 수도는 황금의 도시라고 불립니다. 황제가 살고, 황성이 있고, 어떤 도시보다 귀족을 흔히 볼 수 있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렇게 말한 뮐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주변이 좋은 뮐러인데 웨이크만도 못한 설명이었다.
“그게 다예요?”
가람의 질문에 뮐러가 눈을 굴리다가 조금 부끄럽게 고백했다.
“사실, 바랄라인의 모든 건 돈입니다. 여행자 세금이라는 것도 있고, 숙박 세금, 도시 이용 세금, 도로 이용 세금 등이 있죠. 여행자는 도시의 우물을 이용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물조차 사서 마셔야 합니다. 눈떠서 눈 감기 전까지, 그리고 눈을 감은 후에도 돈을 내야 하죠. 그래서 돈이 궁하던 저는 매일 5쿠퍼짜리 주먹만 한 검은 빵으로 하루의 허기를 채우느라 바빴습니다. 잠은 골목에서 잤고요. 그래서 좋은 게 뭐가 있는지도 잘 몰라요. 다만 즐길 거리가 많은 것 같긴 하더군요.”
잠시 고민하던 뮐러는 생각났다는 듯 반갑게 덧붙였다.
“바랄라인 수도에서 가장 호화로운 여관은 ‘금화 한 닢’입니다. 1인실 숙박료가 1골드라고 하더군요. 무섭지 않습니까? 다른 곳은 고급 여관이라고 해도 50실버를 넘지 않는데 말입니다.”
가람은 기억을 더듬었다. 베록에서 휴식의 요정에서의 1박은 10실버였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자신에게 감탄하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크는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사냥꾼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라서 더욱 그런 것 같다.
“도시 자체는 몹시 아름다워서, 저는 골목에서 자면서도 꽤 괜찮았습니다. 날이 좋을 때면 하얀 돌로 만든 황성이 눈부시게 빛나고 잘 닦인 도로 곁의 화단에서 꽃잎이 날리곤 했죠. 그러면 저는 마법학 책을 읽으며 꽃잎을 따서 먹곤 했습니다. 배가 고팠거든요.”
뮐러의 설명은 또다시 조금 이상하게 끝을 맺었다.
“그런데 꽃잎을 따 먹으면 안 됩니다. 벌금을 내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꽃 좀 먹었다고 벌금을 내라니. 몹쓸 도시입니다.”
뮐러는 그 외에도 수도의 귀족 저택들과 기사들의 행진, 황성 옆에 높게 솟은 마법사의 탑, 전 대륙에서 모이는 물자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보석으로 세공한 깃털 부채를 부치며 기사를 대동하고 산책하는 귀족가의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화려하고,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도시 바랄라인.
뮐러의 이야기 속에서 기차는 바랄라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Chapter 5
기차에서의 나날은 단조로웠다. 가람이 눈을 뜨면 뮐러가 미음을 먹였고 뒤이어 삼킨 독한 약 기운에 잠이 들었다.
회복에 전념한 덕분인지 눈을 뜰 때마다 몸 상태는 호전되어갔다. 그렇게 잠들었다 깨어나면 창밖의 풍경은 부쩍부쩍 바뀌어 있었다.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기에 뮐러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심심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을 간병하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미리 구해 두는 등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웨이크가 괴물 같은 회복 속도를 보여 주고 있긴 하지만, 기차에서 내릴 때쯤에는 목발이 필요할 것이다. 뮐러는 승무원에게 부탁해 목발 한 쌍을 얻어 놓았다.
그런 나날 속에서 기차는 소리 없이 바랄라인 역에 정차했다. 햇살 노란 정오의 일이었다.
내리자마자 가람은 콧속으로 밀려드는 온갖 냄새에 잠시 당황했다. 바랄라인 역은 지금까지 가람이 거쳐 왔던 그 어떤 역보다 가장 역다웠다. 역 주변의 빼곡한 시설들부터가 그랬다.
구운 감자 상인, 말린 과일 상인, 제 손으로 직접 쓴 책을 가지고 나와 큰 소리로 세기의 다시없을 이야기라며 홍보하는 사람도 있었다. 냄새의 근원은 그것들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도박사와 기차에서 내리는 돈 많은 여행객을 낚아채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온갖 종류의 호객꾼이 외치는 소리로 역은 아주 소란하다.
내리는 승객들은 바닥에 깔아 놓은 상인들의 좌판을 밟지 않기 위해 걸을 때마다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 북새통 속에서 이미 어떤 사람은 상인의 술수에 넘어간 모양이다. 어디에도 쓸모가 없어 보이는 목각 장난감을 손에 들고 진지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 풍경을 배경으로 가람 일행이 기차에서 내려 소란 통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 손님. 여기 손님이 찾던 물건이 있습니다.”
뮐러의 부축을 받아 걷던 가람은 속삭이듯 말하는 상인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었다.
상인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양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시늉을 하며 가람을 불렀다.
상인의 좌판에는 정체불명의 물약이 조잡하고 지저분한 병에 담겨 늘어서 있었다.
“제가 찾던 물건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