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 말과 절묘하게 맞물려 손님 중 누군가가 뾰족하게 중얼거렸다. ‘냄새나.’ 고의적으로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가람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었다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크페타인에 도착했을 때부터 제대로 씻지 못한 몸에서는 악취가 났다.
크페타인에서 며칠 묵으며 그 냄새에 익숙해진 덕분에 의식하지 못했는데, 저런 말까지 듣고 나니 부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열흘 치예요.”
가람은 주머니를 열어 천 골드 금화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잠깐 사이 남자는 다년간의 여관업으로 다져진 귀와 눈으로,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짐작해 냈다.
슬쩍 비춰 보이던 금빛과 저 묵직한 무게감을 생각하면 저 주머니 안에는 이 여관을 1년 동안 대여할 수도 있을 정도의 금액이 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
게다가 스스럼없이 거액을 건네는 손에는 망설임이라곤 없다.
대어 중의 대어. 대박 중의 대박, 광산으로 따지면 보석 광맥이 터진 거고 모험가로 따지자면 황금 도시를 발견한 거나 다름없다.
남자는 기쁨에 젖어 들어 더없이 정중하게 네모반듯한 천 골드 금화를 받아 들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저는 이 여관의 지배인 도란스입니다. 이리로.”
도란스가 눈짓하자 소년 둘이 가람의 짐을 나누어 들었다. 앞서 걷는 도란스를 따라 가람은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여관 직원이 따라붙어 부축해 주긴 했지만 가람과 웨이크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계단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가람과 일행이 걸을 때마다 더러워졌지만 도란스는 그걸 보면서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앞서 걸으며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금화 백 닢의 방에 묵는 손님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소개했다.
“묵으시는 내내 한 명의 전속 직원이 문 앞에 늘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뭐든 심부름을 시키시면 됩니다. 그리고 원하시는 때 언제나 뜨거운 목욕을 즐기실 수 있으시며, 방에 묵으시며 드시는 모든 음식은 무료입니다. 그리고 꼭대기 층의 공중 정원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무료입니다.”
무료, 무료, 무료의 향연이다. 무료로 여관에 딸린 마차를 이용할 수 있고, 여관의 마부를 이용할 수 있으며, 이 모든 서비스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이용 가능하다.
가람은 새삼 돈이 좋긴 좋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입니다.”
도란스가 방문을 열어젖히자 웨이크와 뮐러의 눈 또한 휘둥그레졌다. 두 사람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하지만 가람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방은 몹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현대의 호텔과 호화로운 공공장소에 길들여진 가람이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가람은 그렇게 고급스럽다고 호언장담한 것에 비해 조금 구리다고 생각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커다란 사슴 머리 박제였다. 그 아래로 자수 놓인 태피스트리가 펼쳐져 있었고 적목 테이블이 벽난로 앞에서 은은히 그림자를 드리운다.
창문의 비로드 커튼이나 방 안의 장식물들은 하나같이 질이 좋은 것뿐이었으나 가람의 눈에는 마치 박물관 어딘가에서 대충 가져온 골동품처럼 보였다.
뮐러와 웨이크의 반응에 뿌듯한 표정을 짓던 도란스는 가라앉아 있는 가람의 눈과 마주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 주십시오.”
도란스가 소리 죽여 방을 나가자 짐을 들고 따라왔던 시종 둘도 구석에 적당히 짐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떠나려는 시종 둘 중 하나를 가람이 불러 세운다.
“잠깐, 여기 적당히 먹을 것 좀 가져다줘요.”
“백 닢 숙박객을 위한 정찬 메뉴가 있습니다. 그걸로 드릴까요?”
“네.”
소년마저 자리를 떠나자 가람은 소파에 늘어졌다. 그리고 뮐러가 정신없이 여기저기의 방문을 열어젖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발칵 연 문에서 호화로운 욕실을 발견한 뮐러가 기쁨의 탄성을 지른다. 방은 전부 네 개, 욕실은 두 개가 딸려 있었다.
그렇게 방문을 한껏 열어 본 후, 세 사람이 각자의 방을 정할 때쯤 식사를 가지고 온 점원이 노크해 왔다.
“들어와요.”
곧이어 차려지는 음식들에 가람은 언젠가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정찬 메뉴’라는 것은 그야말로 정찬이었다. 한 스무 명이 앉아서 먹어도 될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한 양의 요리는 대식가인 웨이크마저 질리게 만들었다.
끝없이 들어오는 접시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 배가 부를 지경이다. 분명 세 사람인 걸 봤을 텐데 대체 이 양은?
“식사 후 그대로 두시면 저녁 중으로 치워 드리겠습니다.”
부자들의 방식이라는 건가. 미간을 찌푸리던 가람은 어차피 식사는 무료라는 점에서 기분을 풀고, 설사 무료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무료나 마찬가지라는 점에 다시 깨달음을 얻었다. 고생했으니 이 정도는 즐겨야지.
“여기 심부름도 받는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손님.”
“그럼 고위 치유 마법사를 알아봐 주세요. 여기까지 왕진 오실 수 있는 분으로.”
웨이크의 다리가 아직 불편해서 통원 치료는 힘들다. 점원은 알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더 필요한 사항을 확인 후 방을 나갔다.
문을 닫자 가람은 수많은 요리의 산과 다시 마주했다. 마치 3인용 뷔페 같은 느낌이다.
“저 한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뮐러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던 웨이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창문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유리창이다. 가람이 이때까지 묵었던 여관 중에서 유일하게 창문이 유리로 돼 있었다.
지금까지 묵었던 여관들은 모두 나무창이라, 열어 두지 않으면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노을이 질 때쯤이면 늘 꼼꼼히 촛대에 불을 밝혀야 했다. 그러고 보니 마법 열차의 창이 유리창이었지.
“어떤 말이요?”
웨이크는 주욱 늘어선 음식 접시들과 호화로운 여관 내부를 짧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슬쩍 웃으며 말했다.
“지금 좀 행복합니다.”
‘저도요.’ 뮐러가 짧게 덧붙인다. 가람은 웃을까 하다가 짧게 어깨를 으쓱이곤 테이블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 앞접시에 가장 가까운 거리의 요리를 담았다.
“이건 무슨 고기죠?”
가람이 양념을 해서 구운 큼직한 고깃덩이를 썰며 질문했다. 뮐러가 마찬가지로 국수 요리를 덜며 대답한다.
“말고깁니다.”
“이건요?”
이번에는 마치 육회처럼 생고기를 저며 놓은 것이다.
“말고깁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이 말고기일 겁니다. 바랄라인에서는 말고기 요리가 많거든요.”
“왜요?”
“여기 바랄라인은 바로 30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 중이었습니다. 국가 인구의 4분의 3이 죽어 나간 전쟁이었죠. 덕분에 사방에는 죽은 말들이 널려 있었고, 가장 흔한 것이 죽은 군마의 고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 갖은 방법으로 말을 요리해 먹던 문화가 남아 있죠.”
“전쟁이요? 혹시 요즘도 전쟁을 해요?”
“지금은 역사적으로 안정기라서 큰 전쟁은 안 하지만, 영지전 같은 소규모 전쟁은 늘 있는 일이죠. 사실 그것도 진짜 전쟁은 아닙니다. 영주나 대전사가 싸워 그것의 승패로 결정하죠. 사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용병이 이런 심부름꾼 같은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전쟁터에서 칼 밥 먹고 사는 직업이었죠. 재미있는 이야기 해 드릴까요?”
“어떤 이야기요?”
“전쟁 직후 식량이 몹시 부족해서 말의 고기마저도 없었을 때는 인육으로 한 요리법도 성행했다고 합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바랄라인에서 비밀 메뉴로 인육 요리를 시킬 수 있었죠.”
가람이 노골적으로 역겹다는 표정을 짓자 뮐러가 아차 하더니 곧바로 사과했다.
“식사하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이 도시에는 거지가 정말 많네요. 다른 도시에서는 거지를 거의 보지 못했는데.”
“벌이가 좋거든요. 물가가 워낙 비싸니 일할 만큼 크지 않은 아이들을 밖으로 돌려서 구걸을 시켜 가계에 보태는 겁니다. 뭐, 저도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없는 돈을 털어 적선을 했었죠. 보시다시피 애들이 좀 불쌍하게 생겼습니까? 두고두고 마음에 밟히느니 돈 몇 푼 주고 끝내는 게 좋지만, 그래도 한 번 주기 시작하면 아까처럼 끝이 없으니.”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자신의 세계처럼 멀쩡하게 생긴 어른이 구걸을 했다면 절대로 돈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뼈에 가죽만 입힌 그 몰골들을 보니 인간으로서 외면하기가 힘이 들었다.
아이들은 정말로 비쩍 말라서 앞으로 단 한 끼만 굶어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것처럼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몰려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전의 세계에서는 구세군 냄비나 지하철의 거지에게 적선을 했다고 그렇게 모든 걸인들이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한 명에게 돈을 주었으니 자신의 몫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생각했지. 여러모로 상식이 어긋나는 곳이다.
“다시는 적선을 못 하겠어요.”
“그렇죠? 적어도 이 도시에서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 물가는 왜 그렇게 비싸요? 기후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편이고 위치도 제법 괜찮지 않나요?”
“아까 말했다시피, 전쟁이 문젭니다. 오랜 기간의 전쟁은 국고를 갉아먹었고 지금은 다시 채우는 중이죠. 세금이 얼마나 높은지, 여기 시민들은 일주일에 한 번도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베록처럼 바다가 있어서 생선이 흔한 것도 아니니 마른 사람들이 많죠. 이곳의 평민들은 대부분 구운 감자나 열매, 거친 빵을 먹습니다. 무슨 일이든 벌금부터 먹이고 보는 것도 다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죠. 걸인을 왜 그냥 두는지 아십니까? 동냥한 돈에서도 세금을 뗀답니다. 동냥 세죠.”
뮐러는 정말로 아는 것이 많았다. 보아하니 이곳에서 지낸 기간이 짧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째서 꽃잎까지 뜯어 먹어 가며 이 도시에 머물러야 했냐는 가람의 질문에, 뮐러는 마법 학회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귀족들이 많으니 괜찮은 직장을 구하기도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 힘들면서도 왜 여기를 떠나지 않아요? 베록 같은 곳으로 가면 좋잖아요.”
“집값이 어디 싸야죠. 그리고 바랄라인 사람들은 다른 지역은 모두 깡촌으로 취급하면서 도시에 산다는 자부심이 아주 커요. 아까도 봤지 않습니까? 웨이크가 이리저리 둘러보니 길 가던 거지까지 웨이크를 보며 웃던데요.”
뮐러가 혀를 차며 하는 소리에 마침 커다란 말고기 햄을 먹으려던 웨이크가 딱 굳었다. ‘저 말입니까?’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는 목을 가다듬고 조용히 대답했다.
“저는 몰랐는데요.”
괜히 말했나 싶어 뮐러가 찔끔하자 가람이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웨이크, 산에서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았잖아요. 전 웨이크가 산에서도 엄청 많이 먹으면 어쩌나 하고 비축 식량 챙기면서 엄청 걱정했었어요.”
웨이크는 가람의 여섯 배, 뮐러의 세 배를 먹는다. 그래서 처음 크페타인을 오를 때 그 부분을 특히 신경 써서 한 번 베이스캠프로 가서 식량을 털어 올 각오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산을 오르자 웨이크는 딱 뮐러만큼만 먹는 게 아닌가.
“많이 먹으면 몸이 무거워져서 사냥 시에는 소식합니다. 사흘간 굶으면서 트롤을 쫓은 적도 있습니다. 대신 사냥하지 않을 때는 나중을 대비해 최대한 먹어 두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가람은 앞에 놓인 꿀빵을 쪼개어 절반을 뮐러에게 건네었다. 뮐러가 건네받은 꿀빵에 말고기와 감자를 볶은 것을 올려 한입에 덥석 베어 먹는다.
대충 꿀빵을 먹어 치운 가람은 적당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좀 씻어야겠어요.”
“저희는 좀 더 먹다가 씻겠습니다.”
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가람은 방 안에 딸려 있는 욕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가죽옷 외에 옷이 전혀 없었는데, 다행히 호텔 가운처럼 보이는 연두색 옷이 비치되어 있었다.
따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욕조마다 뜨거운 물이 가득한 것이 무척 만족스럽다.
가람이 느긋하게 몸을 담그는 동안 두 남자는 식사를 끝냈다.
“뮐러.”
우물쭈물하던 웨이크가 어색하게 뮐러를 불렀다. 그리고 껄끄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힘겹게 말을 꺼내었다.
“씻는 것 좀 도와줄 수 있습니까?”
웨이크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이 단어의 조합이 정말로 생소했다. 씻는 것과 도와 달라는 말이 한 문장 안에 들어가다니.
씻지 않고 잘까 했지만 가람과 함께 다니며 편안한 생활이 몸에 배었는지 욕실을 멀쩡히 두고도 악취 나는 몸으로 잠을 청하기가 괴로웠다. 뮐러는 의외로 흔쾌히 허락했다.
“좋습니다. 먼저 씻겨 드리죠. 제가 먼저 씻으면 웨이크를 씻기면서 엉망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뮐러는 웨이크를 부축해 욕실까지 데려갔다. 커다란 목제 욕조는 뮐러와 웨이크가 살면서 봐 온 어떤 욕조보다 커다랬다.
밥을 먹는 사이 물을 교체한 듯 욕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향유를 풀었는지 옅은 향이 나는 수증기가 욕실을 부옇게 채우고 있었다.
“호화롭죠?”
뮐러의 질문에 웨이크가 동의했다.
“사실 가람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안에서 목욕을 한다는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웨이크가 주로 애용하는 것은 맑은 호숫가나 폭포 아래의 고인 물, 개울 따위였다. 그나마도 자주 하지 않았다.
사냥감을 잡고 가죽을 씻거나 피를 닦아 내기 위해 가끔 들렀을 뿐이었다. 이따금씩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해지면 그제야 씻곤 했다.
뮐러 또한 사정이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그도 싸구려 여관 뒤쪽에서 우물물을 끼얹는 정도가 다였다.
뮐러는 웨이크의 팔과 다리, 그리고 찢어진 상처들이 물에 젖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어쩐지 내려다보는 뮐러의 시선이 민망해서 웨이크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다가 이 어색한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해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뮐러가 난감해졌다. 머리를 북북 감겨 주고 있는데 사르륵 눈을 감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침묵이 계속되니 오히려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뮐러가 괜히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진짜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동감입니다.”
팔 하나로 온몸을 씻는 건 힘들고, 그렇다고 가람에게 씻는 것을 도와 달라 할 수도 없었으며, 다 큰 어른이 심부름꾼 소년에게 몸을 맡기기도 꺼림칙했다.
사냥꾼들이란 애초에 낯선 타인에게 몸을 맡기기 좋아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차라리 부탁할 거면 동료인 뮐러가 나으리라. 웨이크는 새삼 뮐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람과 자신 단둘이 다니며 이렇게 다쳤다면 굉장히 불편했을 게 틀림없다.
“뮐러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조용히 머리를 씻기던 뮐러가 그 말에 웨이크의 머리카락을 힘주어 잡아당겼다.
“하지 마요. 진짜 분위기 이상해지잖아요.”
무언가 하고 있는 뮐러야 괜찮겠지만, 가만히 있는 웨이크는 그 어색함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늘 말없이 조용하게 잘 있었는데 지금 이 묘한 상황 때문인지 어색해서 참을 수가 없다.
“씻겨 주시는 게 능숙하네요.”
“동생이 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나이상으로는 뮐러가 웨이크보다 형이었다. 웨이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뜬금없이 솟아오르는 장난기를 참지 못하고 말을 풀어 버렸다.
장난기라니, 늘 긴장 속에서 살았던 웨이크는 내심 말을 하고도 스스로 깜짝 놀랐다.
“제 마음 아시죠?”
“아, 좀 하지 말라고요.”
뮐러가 펄쩍 뛰자 웨이크가 씨익 웃으며 ‘고맙다고요.’ 하고 덧붙인다. 울컥한 뮐러는 일부러 거품이 팍팍 튀도록 험악하게 머리를 씻겼다. 거품이 눈이고 코고 가리지 않고 튀어 오른다.
허우적거리던 웨이크는 지지 않고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뮐러에게 치덕치덕 거품을 묻혔다.
결국 두 남자는 낄낄거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곧 서른인 나이가 무색한 모습이었다.
목욕을 마친 두 남자는 조금 처량한 기분으로 각자 잠이 들었다. 내가 뭘 한 거지.
* * *
다음 날 아침,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거실 문을 연 가람은 깜짝 놀라 하품하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거실의 소파에 낯선 여자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