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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44화 (44/256)

44화

도둑, 하인, 웨이크나 뮐러의 지인 등 여러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가람이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그녀는 나직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에녹사 뷔 비트리코예요. 마법사를 찾으셨다고 들었는데.”

금발에 가까운 옅은 갈색 머리가 목덜미에서 가볍게 묶여 부드럽게 살랑인다. 그보다 조금 어두운 색의 눈동자는 웃는 듯한 눈매와 어우러져 제법 상냥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까딱이지도, 몸을 굽히거나 손을 내밀지도 않고 꼿꼿한 자세로 자신의 이름만을 밝혔다.

고위 마법사라고 해서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를 예상했던 가람은 뒤늦게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마주 인사했다.

“아, 한가람입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나? 아니면 먹을 것이라도 대접해야 하나 하고 당황하던 가람은 이미 그녀가 차를 마시고 있음을 깨닫고 어색하게 맞은편에 앉았다.

가람이 자리에 앉자 에녹사가 차를 따라서 건넨다.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 들고 이어서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뭔가 들어가자 잠이 좀 깼다. 그제야 가람은 눈앞의 이 특이한 여자를 관찰했다.

녹색을 아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가볍고 보드라워 보이는 재질의 밝은 녹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진한 녹색의 띠를 둘렀는데, 띠에는 마찬가지로 흰색에 가까운 옅은 연두색의 실이 자수로 놓여 있었다.

머리에 꽂은 핀도 옅은 연두색, 손가락에 한 반지도 탁한 빛깔의 에메랄드였다. 가슴에는 프릴이 달린 녹색 브로치를 했다.

옷차림은 그렇다 쳐도 앳된 얼굴 탓인지 아무리 봐도 마법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기, 치유 마법사님 쪽에서 보내신 분인가요?”

“제가 치유 마법사예요.”

에녹사가 대답하는 순간 그녀의 뒤쪽 문이 열렸다. 뮐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녹사와 가람을 번갈아 보더니 ‘아.’ 하고 짧게 깨달은 후 가람의 옆자리에 앉았다.

거의 곧바로 웨이크까지 문을 열고 나와 절뚝거리며 의자에 앉고 나자 그때까지 조용히 차만 마시던 에녹사가 입을 열었다.

“환자는 누군가요.”

“저희 셋 다예요. 저기, 그런데 굉장히 빨리 오셨네요. 고위 마법사들은 다들 바쁜 분들이라 그렇게 빨리 오실 수 없다고 하던데.”

“내놓은 금액이 어지간히 커야죠. 사실 금액을 보고 반시체가 있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하군요.”

그렇게 말한 에녹사는 처음으로 엷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가람은 보다 수월히 치료받기 위해 애초부터 거금의 의뢰비를 내걸었었다.

그녀의 분위기가 풀리자 가람은 그제야 줄곧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런데 여기는 누가 들여보낸 건가요?”

에녹사가 워낙 당당하게 앉아 있길래 아까는 미처 묻지 못했다. 최대한 조심했으나 그 내용 탓에 질문은 조금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옆에서 쿠키를 집어 먹던 뮐러가 아차 한 얼굴로 재빨리 에녹사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쪽 문화에 아직 익숙하지 못해서 한 실수이니 너그러운 용서를…….”

뮐러의 말에 가람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는데, 에녹사는 가람이 내건 거액의 의뢰금 때문인지 흔쾌히 용서했다.

꽤 성격이 좋은 모양인지 눈치만 살피는 가람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까지 해 주었다.

“괜찮아요. 동양인이니 모를 수도 있죠. 귀족을 만나는 건 제가 처음인가 보군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요. 그건 제가 귀족이기 때문이에요. 당신들은 평민이니까요.

귀족이 귀족을 방문할 때나, 귀족이 하위 계급을 방문할 때는 하인이 응접실로 에스코트하고 주인이 나올 때까지 다과를 제공하는 법이죠.

응접실과 하인이 없으니 대신 여기 딸린 심부름꾼과 거실로 대체한 거예요.

사람을 불러 두고 이렇게 기다릴 공간과 시간을 보낼 여흥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로 여겨진답니다. 궁금증이 해소되었나요?”

부드럽게 웃으며 한 차례 세 사람을 훑어본 에녹사는 손바닥을 짝 부딪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문화 공부는 나중에 하고, 그만 일을 시작하죠. 아가씨가 제일 상처가 가볍고, 그다음이 이 물 마법사, 그리고 저 사람이군요. 누울 곳이 있나요?”

“이쪽으로.”

가람은 쓰지 않는 남은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에녹사는 대기 환자 뮐러, 웨이크를 소파에 앉히고 가람을 바라보며 침대를 턱짓했다.

“엎드려요.”

가람은 조금 망설이다가 침대에 누웠다. 가람이 눕자 그녀가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목덜미를 움켜쥘 것처럼 서슬 퍼런 손길이라 가람은 조금 움찔했다. 에녹사가 두 손을 가람의 등에 올리더니 아주 천천히 어루만지듯 상처를 쓰다듬으며 진단했다.

“갈비뼈에 금이 갔었던 것 같은데, 자연적으로 거의 치유가 되었네요.”

“네…….”

늘어지는 기분에 가람은 나른하게 대답했다. 적당하게 뜨거운 스팀 타월로 몸을 닦고 있는 것처럼 아득하고 따듯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묻어 있던 오물을 닦아 낸 것처럼 개운하고 시원하다.

에녹사의 손이 닿을 때마다 푸르게 물들어 있던 피부가 제 색을 찾는다. 팔을 쓰다듬자 트고 갈라져서 딱지가 앉아 있던 팔이 아물었다.

빛이 나오거나 하는 효과는 없었지만 충분히 드라마틱한 광경이었다.

뮐러는 눈을 크게 뜨고 에녹사의 마법을 지켜보았다. 놀라운 실력이었다. 그의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능력이지만 어린 나이에 이룬 성취가 놀라울 뿐이다.

세 살만 어렸다면 그 성취를 가능하게 한 재력과 재능에 질투했겠지만 뮐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렇게 가볍게, 간단하게 치료하는 마법사는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저 마법사가 지금까지 뮐러가 본 치유 마법사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일 것이다.

“다 끝났어요. 일어나요.”

잠시 몸을 쓰다듬은 것뿐인데 다 끝났다니? 가람은 미심쩍었지만 터서 갈라져 있던 팔이 매끈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에녹사는 놀라는 가람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더 아픈 곳은 없는지,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는지 질문했다.

속이 조금 메슥거리기에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에녹사가 자신의 녹색 가방을 뒤져 마른 약초 몇 가지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짓이겨 배합하더니 꿀로 동그랗게 뭉쳐 환약을 몇 알 만들어 내었다.

“이걸 먹어요. 메슥거림은 아마 마법 때문에 일그러진 몸의 균형 탓일 거예요. 먹고 나가서 좀 걸어요. 땀이 날 정도면 좋겠네요.”

“마법사인데 약을 주는 건가요?”

가람이 질문했으나 에녹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요하듯 약을 한 차례 더 내밀었다.

아직 까슬까슬한 풀의 질감이 남아 있는 약은 자꾸 목구멍을 찌르고 입 안에서 흩어져서 먹기가 여의치 않았다. 가람이 떨떠름하게 약을 삼키자 에녹사는 그제야 설명했다.

“마법으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으니까요. 약을 쓰는 게 좋은 건 약을 쓰고, 마법을 쓰는 게 좋은 건 마법을 쓰는 거죠. 치유 마법사는 당연히 모두 의사예요. 마법의 기초가 힘의 이해이니 당연히 몸이 치유되는 과정과 신체 구조에 대해 잘 알아야 하거든요. 다음.”

뮐러가 침대에 바로 눕는다. 에녹사는 뮐러의 얼굴로 손을 뻗어 눈을 감기더니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보던 가람은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에녹사가 순서를 정해 줄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부축받았던 자신보다 부축해 주었던 뮐러가 더 아팠다고?

“헉.”

뮐러는 아득해지는 기분에 단말마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뒤이어 몸이 무겁게 가라앉고 열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입술이 버석버석 마르더니 입 안 가득 매캐한 기운이 가득 찬다.

멀쩡해 보이던 뮐러가 에녹사의 손이 닿자마자 죽어 가는 것처럼 보이자 가람은 안절부절못하며 침대 주위를 맴돌았다.

“간혹 있죠. 책임감이 몸 상태를 이기는 경우가. 아마 그동안 이 사람이 두 분의 뒤치다꺼리를 한 모양이네요. 가장 연장자인가요?”

“네에.”

웨이크의 팔다리가 하나씩 부러졌으니 뮐러는 자신이 일행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대로 앓지도 못했다.

에녹사가 진단하자 뮐러는 알아줘서 고맙다는 듯 그제야 앓기 시작했다.

에녹사는 젊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혀를 차고는 신중한 얼굴로 집중했다. 만만치 않은 모양인지 곧 에녹사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거기, 계속 있을 건가요? 바랄라인은 좋은 장소가 많죠. 나가서 좀 걷고 땀을 내요. 아직 속이 메슥거릴 텐데요. 걸어서 땀을 빼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에녹사의 말에도 가람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침대가 흠뻑 젖도록 땀을 흘리는 뮐러를 두고 어떻게 나갈 수 있단 말인가.

가람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자 에녹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치료하고 나면 이 남자는 이대로 잠들 거예요. 그리고 저 팔다리 부러진 남자도 치료할 텐데, 엄청 고통스러워할걸요. 아마 부러질 때만큼 아플 거예요.”

“그렇게나요?”

가람이 깜짝 놀라자 에녹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의 얼굴이 걱정에 휩싸인 것과 달리 정작 웨이크의 얼굴은 담담하다.

“그럼 뼈 붙이는 게 쉬운 줄 알아요? 벙어리도 비명을 지를 정도로 고통스럽다고요. 저는 상관없지만, 남자들은 그런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더군요. 그러니까 나가서 좀 걷고 땀을 흘리라구요.”

에녹사는 벌써 몇 번인지 모를 ‘나가서 걷고 땀을 흘리라.’는 말을 반복했다.

가람의 시선이 열에 들떠 있는 뮐러와 웨이크를 오간다. 가람과 눈이 마주친 웨이크가 차분하게 권했다.

“괜찮으시다면 산책하고 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안색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람의 메슥거림은 더욱 심해져서 지금은 두통마저 일었다. 마법 치료의 부작용이다.

메슥거리는 것 정도야 견딜 수 있지만, 의사의 권유도 있는 데다 웨이크마저 그렇게 말하니 가람은 결국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앗, 손님! 외출하십니까?”

가람이 1층으로 내려오자 소년 하나가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주근깨가 흩어진 콧등과 굽슬굽슬 말린 갈색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람은 조금 뒤늦게 소년을 기억해 냈다. 첫날 가람에게서 금화 한 닢을 받았던 소년이다.

“네.”

“마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걸어서 땀을 내라고 했으니 마차는 필요가 없다.

무작정 여관을 나서려던 가람은 행선지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찾으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어제부터 냄새나는 가람의 가죽옷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 덕분에 어디로 갈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옷이 좀 필요해서 그런데, 괜찮은 옷 가게가 있을까요?”

가람은 지금도 크페타인에서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여전히 퀴퀴한 냄새가 나서 다시 입기 고역스러웠지만, 목욕 가운을 입고 방을 나갈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걸 걸치고 있었다.

나가서 뮐러와 웨이크의 것을 좀 사 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고급 상가로 가시면 많죠!”

그렇게 말한 소년은 물어보지도 않은 사항을 줄줄이 자랑스레 떠들기 시작했다.

매우 성실하고 친절한 태도라 가람은 소년의 기대와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금화를 향한 열망 말이다.

바랄라인은 크게 두 가지 지역으로 나뉜다. 고급과 일반이다.

이 두 지역은 모두 각각 상가, 주택가, 관공서를 갖추고 있었는데 상가 안에서도 생필품, 잡화, 식료품이나 가축 등의 전문 상가가 또 나뉘어졌다.

거대한 대도시답게 소금 상점만 열 개가 넘는다며 소년은 자랑스레 말했다.

“고급이랑 일반이 어떻게 다르죠?”

“일반 주택가는 일반 평민이 살고, 고급 주택가는 귀족들의 저택이 있죠. 일반 상가는 값싼 식료와 흔한 조미료를 팔고 고급 상가는 비싼 식료와 귀한 향신료, 고액의 보석이나 공예품을 팔아요. 일반 지역은 평민용, 고급 지역은 부자나 귀족용이죠. 관공서도 그렇게 나뉘는데, 고급은 황궁이나 기사단, 신전이고 일반은 용병 길드와 상인 길드 같은 것들이 있죠.”

“고급 상가에도 여행자용 옷이 있을까요?”

“그럼요!”

소년의 흔쾌한 대답에 가람은 고급 상가로 향하는 길을 물어 여관을 나왔다.

눈을 반짝이던 소년은 가람이 그대로 여관을 나서자 조금 실망했지만 곧 바쁘게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다. 여관이란 언제나 바쁘기 마련이다. 큰 여관이면 더더욱 바쁘다.

마찬가지 이유로 도시 또한 클수록 분주하고 바빴다. 바랄라인의 길은 수레의 천국이다.

손수레, 인력거, 작은 나귀가 끄는 무거운 광물 수레까지. 눈앞을 교차하는 수레 너머로 바랄라인 황궁의 둥근 금 지붕이 빛난다.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견고하게 배치된 석조 건물들, 계획적으로 짜인 도로는 뮐러가 꽃잎을 따 먹다가 벌금을 내야 했던 화단과 가로수로 꾸며져 있었다.

돌계단의 옆에는 인공 개울까지 흐르고 있는 데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대부분 몹시 고급스러웠다.

어제의 거지 떼는 역 근처에만 몰려 있었던 모양인지 이곳에는 보이지 않는다.

보도를 걷는 경비대는 마치 기사처럼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야말로 도시라는 느낌이 물씬 난다.

가람은 순순히 인정했다. 바랄라인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첫날에는 걸인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도로는 매우 널찍했기에 수레들 사이로 걷는 것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가람은 화단과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구경하며 여관 점원이 알려 준 길을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일반 상가가 나왔는데, 마치 재래시장처럼 물품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파는 것이 쏠쏠한 구경거리였다.

차양을 치고 제대로 차려 놓고 파는 상인도 있었고, 좌판조차 없이 땅바닥에 그냥 물건을 내려놓고 파는 상인도 있었으나 상인들이 파는 것은 일반 상가답게 대부분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

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에 집에서 직접 기른 채소나 말린 고기 따위가 담겨 있다.

병아리 장수가 파는 새끼 병아리가 요란하게 삐악대고, 그 옆에는 우유와 버터를 파는 상인이 소리 높여 호객을 했다.

손으로 대충 반죽해 구워 낸 빵 덩어리. 숙성시킨 모양새 그대로인 커다란 통 치즈. 죽은 새 뭉텅이와 깃털들.

그리고 말린 개구리나 소금에 절인 어육. 삭힌 말 뒷다리의 두툼한 고깃덩이, 싱싱한 버섯과 질이 좋지 않아 버석하고 털이 많은 양피지까지. 그것들 사이로 흥정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시장을 걸으며 가람은 양피지에 듬성듬성 난 양털을 만져 보기도 하고 상인이 맛보라며 입에 물려 준 체리도 한 개 얻어먹었다.

결국 안 사기가 미안해서 체리 한 주먹을 1실버 주고 사서 우물우물 먹으며 걷는데, 유난히 가죽을 많이 쌓아 둔 길목에 도착했다.

무두질을 할 때 쓰는 고약한 약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고급 상가는 조금 더 가야 했지만 가람은 충동적으로 주변의 가까운 의류점을 찾았다.

그 냄새를 뚫고 고급 상가까지 가고 싶지 않다. 게다가 아직도 속이 좀 메슥거렸다. 좀 더 걸어야 할 모양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죽을 분류하던 피혁상이 고개를 든다. 가람은 순간 잘못 들어왔나 했다.

자신이 들어온 곳은 의류점이었지 가죽 상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상점은 옷이라곤 안 보인다. 켜켜이 쌓인 이름 모를 가죽들밖에 없다.

가람이 다시 돌아 나가기 직전, 가죽 상인이 붙잡듯이 인사했다.

“오. 어서 오세요. 손님.”

제발 가지 말아요. 라는 말을 간신히 삼킨 것 같은 절박한 어조였다. 가람은 미안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잘못 들어온 것 같은데 그냥 나갈게요. 의류점인 줄 알고 들어왔어요.”

상인은 낚아채듯 가람의 옷깃을 붙잡았다. 매달릴 기세라 가람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잘 찾아오신 겁니다. 저희 여행자의 가죽에서는 무두질부터 꼼꼼히 해서 가죽옷을 만들죠. 아주 질겨서 갑옷이 따로 필요 없답니다. 화살도 막을 수 있을 정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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