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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45화 (45/256)

45화

어지간히 손님이 오지 않는지 상인은 몹시 적극적이었다.

그는 가람을 매대 앞에 앉혀 놓고 잠시 기다리라 하더니 산더미 같은 가죽옷을 가져다가 쌓아 놓았다.

하지만 옷의 대부분이 갑옷에 가까운 옷들이었다. 상인이 말한 대로 화살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 보였지만 가람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죽 갑옷이 아니라, 거의 평상복에 가까운 옷을 찾는데요.”

아무래도 이 가게에는 자신이 찾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가람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상인이 집요한 미소를 띠며 가람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

가면 같은 미소가 일견 무서워 보일 정도다. 미소 짓는 눈에는 반드시 팔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손님이 원하시는 것도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가씨에게 어울릴 센스 좋은 일상 가죽옷을 가져올 테니!”

가죽옷은 무겁다. 그리고 천 옷에 비해 통풍도 되지 않으며, 물에 젖으면 그 감촉이 매우 불쾌하다.

젖은 가죽옷이 피부에 달라붙는 감촉이란, 같은 두께의 썩은 걸레가 달라붙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들이 가죽옷을 고집하는 것은 천 옷과 달리 어느 정도의 방어력과 내구성이 있기 때문이다.

돌바닥에서 뒹굴어도 잘 찢어지지 않고, 식물의 날카로운 가시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으며, 독충이 물어도 끄떡없다.

산이나 정글, 온갖 험한 장소를 쏘다니는 여행자에게 이것은 대단한 장점이다. 좀 냄새가 나고 무겁다는 이유로 이런 장점을 포기하는 여행자는 없다.

그러나 상인이 가져온 옷은 두꺼워도 너무 두꺼웠다.

“자자, 이건 어떻습니까? 흑소 가죽으로 만든 겁니다.”

상인이 다음으로 가져온 것은 검은색의 가죽 상, 하의였다. 투박한 모양새가 썩 마음에 차지는 않았지만 상인이 이끄는 대로 손을 대어 만져 보니 제법 부드럽긴 했다.

가람은 새삼 베록시에서 산 자신의 옷이 얼마나 질이 좋은 가죽옷이었는지 깨달았다.

로아나가 영주 성에 옷을 댄다며 가장 유명하다고 했던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에 비해 이 작은 피혁상의 옷은 간신히 옷의 모양새를 한 가죽 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좀 더 좋은 건 없어요?”

안감이 대어져 있지 않아 입으면 피부가 쓰라릴 것 같다. 가람의 말에 피혁상은 슬쩍 가람을 떠보았다.

“좋은 것은 꽤 비싸서…….”

“얼마 정도인데요?”

“제일 싼 것도 이 정도는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상인은 손가락 일곱 개를 펴 보였다. 7골드?

베록에서는 바지와 튜닉을 아주 고급품으로 샀어도 4골드 정도였다. 바가지인가. 가람은 잠자코 좀 더 보기로 했다.

“일단 보여 줘요. 물건이 좋으면 무리해서라도 살 수도 있죠.”

전혀 무리가 아니었지만 일단 가람은 그렇게 말했다. 상인은 반색하며 다음 물건을 가져왔지만 그것도 가람의 맘에는 그리 차지 않았다.

그래도 앞의 것보다는 나아서 가람은 결국 그걸 사기로 마음먹었다. 상인의 눈치를 보아하니 이 옷이 이 가게에서 가장 좋은 것인 모양이다.

“저 벨트는 얼마예요?”

계산을 위해 주머니를 끌러 내던 가람은 상인의 뒤쪽에 걸려 있는 특이한 모양의 벨트를 발견했다.

벨트를 따라 작은 가방이 조르륵 매달려 있었는데 지금 메고 다니는 가방 대신 저 벨트를 차고 다니면 대단히 편할 것 같았다.

“35실버인데 같이 사시면 5실버 깎아 드립죠. 이 옷과 합쳐서 1골드 되겠습니다.”

아까의 손가락 일곱 개는 7골드가 아니라 70실버였던 모양이다. 가람은 잠시 멈칫했다가 손톱만 한 금화 하나를 꺼내어 건네었다.

가격이 저렴하긴 하지만 웨이크와 뮐러의 옷은 다른 곳에서 사야겠다. 이곳의 옷은 질이 너무 좋지 않았다.

“여기서 갈아입고 갈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상인은 흔쾌히 안쪽 창고를 내어주었다. 가람은 한 손에 권총을 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춘 상태로 황급히 옷을 꿰어 입었다.

이제 거의 한 몸처럼 느껴지는 보석과 미스릴 주화가 든 복대를 차고, 재빨리 가죽옷을 걸치자 새 가죽 특유의 차가움에 소름이 돋는다.

갈아입는 사이 뭔가 수작이라도 부리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로 그런 일은 없었다.

하긴 무법지도 아니고, 도시의 시민이 갑자기 날강도로 돌변하는 일은 저 남쪽 야만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일 테다. 평판이 생명인 상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옷은 처분해 주세요.”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온 가람이 방금 벗어 던졌던 가죽옷을 내밀자 상인은 기쁜 얼굴로 받아 들었다.

조금 상하고 냄새나긴 하지만 그라면 얼마든지 손봐서 쓸 만하게 만들어 되팔 수 있었다.

좀 얼기설기한 모양새가 되겠지만 가죽이 워낙 좋아 보이니 별로 상관없을 것이다.

“여기서 은행 쪽으로 가려면 어느 쪽이죠?”

가죽옷을 계산하며 금화 주머니를 봤더니 자그마한 1골드짜리 금화는 제법 남아 있었지만 큰 금화는 거의 없었다.

마법사가 없는 곳에서는 미스릴 주화를 쓰기 힘드니 미리 현금을 좀 뽑아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람의 질문에 상인은 기분 좋은 얼굴로 길을 설명했다.

“나가서 오른쪽으로 주욱 가다가, 소금 가게에서 왼쪽으로 가면 우물이 나옵니다. 우물에서 광장을 따라 시계 방향으로 걷다 보면 용병 길드 옆에 있습니다.”

상인의 길 안내를 숙지하며 상점을 나오자 바로 앞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몇 명의 남자가 지나갔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가람이 황급히 물러서자 투구 안의 눈이 슬쩍 그녀를 향했다가 다시 앞으로 고정된다. 바랄라인의 치안을 책임지는 순찰대였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를 살피던 눈은 범죄자를 잡는 직업 특유의 날카로움이 있었다. 가람은 지은 죄는 없었으나 여기선 이방인인지라 괜히 그 시선 앞에 졸아들었다.

피혁상이 알려 준 은행을 찾아가며 가람은 몇 번이나 그런 순찰대를 마주했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소매치기는 없나, 수상한 인물은 없나 하고 꼼꼼히도 살핀다. 범죄자가 보이기만 하면 단숨에 잡아 가둬 주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가람은 괜히 슬금슬금 피해서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든든하긴 하지만,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왔던 시장을 되걸어 나가 소금 가게를 끼고 돌자 과연 우물이 나왔다.

우물가에는 물동이를 이고 물을 퍼 나르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곁에는 물과 주스를 파는 상인들도 가득했다.

우물 뒤쪽은 광장이었는데, 우물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관공서가 밀집해 있었다. 시계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온다고 했었지?

“물 사세요, 물. 방금 우물에서 길어서 아주 시원합니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우물가에 앉아 있던 여인이 가람의 옷깃을 잡아 흔든다.

깨끗한 옷차림이었지만 옷의 소매나 끝이 헤어져 남루했다. 가람의 옷깃을 잡은 손가락도 관절이 보일 만큼 말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랄라인에서는 여행자가 우물을 사용할 수 없다는 법이 있었다.

마침 오래 걷느라 목이 좀 마르기도 해서 가람은 물 가격을 물어보았다.

“20…… 아니, 15쿠퍼만 주세요.”

20쿠퍼를 부르려던 그녀는 너무 비싸면 가람이 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가격을 낮추었다.

주머니를 열어 보니 온통 실버와 골드뿐이라, 가람은 1실버를 꺼내어 건네고 물 다섯 그릇을 샀다.

그중 한 그릇은 마시고, 네 그릇은 가죽을 만지느라 찝찝해진 손을 씻었다. 뜻밖의 횡재수에 여인이 연신 가람의 복을 빈다.

“복받으세요! 행운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아주머니도 좋은 하루 되세요. 그런데, 은행으로 가는 게 이쪽 방향 맞나요?”

“아뇨, 반대편이에요. 저기, 저쪽이에요.”

물어보길 잘했다. 어차피 둥그런 구조라 계속 걸었으면 나왔겠지만 괜히 헛고생을 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물 파는 여인이 알려 준 방향으로 얼마 걷지 않아, 가람은 달랑달랑 흔들리는 간판을 발견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깨달았다. 건물을 잘못 들어왔다는 것을.

간판의 위치가 용병 길드와 은행 사이의 애매한 장소에 있는 것이 원인이었다.

예상치 못한 풍경에 잠시 당황하던 가람은 이왕 들어온 용병 길드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같은 분위기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관공서답게 접수하는 직원과 알 수 없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이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접수처의 벽을 제외한 세 면의 벽에 빽빽하게 달라붙은 양피지 조각이었다.

용병 길드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접수처에서 양피지를 받아다가 벽에 붙이기도 하고, 그 벽 앞에서 유심히 양피지를 읽고 있기도 했다.

대체 양피지의 정체가 뭘까 해서 게시판으로 다가가 봤더니, 양피지는 다름 아닌 의뢰 내용이었다.

의뢰인이 접수처에서 돈을 내고 특수한 인장이 찍힌 양피지를 사다가 의뢰 내용을 적어 벽에 붙여 두면 그 일을 하고 싶은 용병이 의뢰인을 찾아가는 방식인 것 같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정말로 별별 의뢰 내용이 다 있었다.

급히 상점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 내용부터, 보모, 호위, 선생님, 같이 산에 가 줄 사람, 어떤 동물의 가죽을 원한다는 내용, 희귀한 술을 구해 달라는 의뢰까지 정말로 별별 내용이 다 있다.

심지어 ‘팬케이크 잘 먹는 사람 구함.’, ‘약물 실험 대상 구함.’ 같은 괴이한 내용의 의뢰까지 있었다.

가람 또한 충동적으로 어떤 의뢰를 할까 하다가 웨이크와 뮐러 등과 우선 상의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그렇게 용병 길드를 나와 은행에 들러 미스릴 주화에서 현금으로 5만 골드를 뽑아내고 나오자 어느새 해가 낮아져 있었다.

노을이 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제법 출출해서, 가람은 광장에 즐비한 먹을거리 좌판에서 간단한 음식을 샀다.

베록의 길거리 음식이 대부분 해산물이었다면 이곳은 작물이나 새고기 같은 육지 음식이었다. 치즈나 우유로 만든 먹을거리가 가장 많았다.

가람은 30쿠퍼를 주고 고구마 같은 뿌리 열매를 넣어 구운 빵 한 덩이와 새고기를 넣은 구운 고기만두 같은 음식을 샀다.

마실 것으로 과즙 주스까지 한 잔 사고 나자 양손이 먹을 것으로 가득해졌다.

일단 배가 고파 충동적으로 사긴 했는데 여관으로 돌아가서 먹어도 되었을 것을. 뒤늦게 후회했으나 가람은 일단 좀 걷기로 했다.

힐끔대는 시선에는 이제 완전히 익숙해졌지만, 구경거리처럼 자신을 흘끔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먹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 걷지 않아 한적한 장소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채소를 수확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감자다.

가람은 한쪽의 바위에 앉아 그 풍경을 바라보며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별맛이 없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눈앞의 풍경은 풍요로웠다.

이곳은 농장이고, 저들은 농부인 듯했다. 한껏 전분을 머금은 알 굵은 감자를 줄줄이 수확한다.

주먹만 한 것도 있고, 머리통만 한 것도 있다. 이전 세계와도 닮아 있는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 문득 이렇게 혼자 있는 건 아주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있으면 심란한 감정에 사로잡힐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도 않다.

대단히 한가롭고,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정이 비록 표면적인 것일 뿐, 깊은 내면에는 어두운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어도 말이다.

가람은 굳이 소용돌이 안쪽을 들추어내지 않기로 했다. 다시 빵을 한 입. 역시 맛이 없다.

그렇게 농부를 보며 빵을 먹는데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야, 한가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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