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가람은 어디선가 이 비슷한 일을 겪어 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물론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그스름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껄렁하게 말을 걸어오는 세 남자는 베록의 불량배를 떠올리게 했다.
모르드레드에게 배신당하고 넝마가 되어 베록시에 간 날, 가람이 길을 물어봤다가 괜히 험한 욕만 들어먹었던 그 일의 주인공 말이다.
어쩐지 그 일이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세 남자는 가람이 개의치 않고 빵을 먹자 조금 당황해서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가람은 기이하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분하고, 태평한 기분이다. 그때와 지금은 여러모로 많은 것이 다르다.
맛없는 빵을 한입에 털어 넣은 가람이 한 손으로 권총을 잡고 꺼냈다.
어차피 사람에게 쏘려고 꺼낸 건 아니었기에 딱히 겨누지는 않고 총구가 땅을 보게 하며 늘어뜨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자각하자 눈알이 터져 죽어 나갔던 곰이 떠올랐다.
뇌수와 조각난 안구가 죽처럼 눈구멍을 통해 흘러나왔었다. 가람의 상상력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그 모습을 눈앞의 세 불량배에게 적용시킬 정도는 되었다.
역시, 사람에게 총을 쏠 자신은 없다.
만약 사람을 쏜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총에 맞든, 맞지 않든 사람에게 총을 쏘았다는 것만으로 선을 넘어 다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 다시 사람에게 총을 쏘기 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확신을 닮아 있었다.
베록에서 가람을 구해 주었던 남자는 서슴없이 난봉꾼의 손등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하지만 가람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 짓을 하면, 그런 짓을 하면.
상상할 수 없다. 미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그 꺼림칙함은 사후 세계나 캄캄한 길을 걷는 것과 같은 종류다.
꼭 팔이 부러지지 않아도 그 고통을 감지하듯 가람은 그렇게 예상했다.
“이봐, 내 말 안 들려? 귀머거리냐?”
얍삽하게 생긴 남자가 덜렁덜렁 다가선다. 가람은 권총을 힘주어 잡았다.
그러나 사람에게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쏠 수 있다. 사람을 향해 총을 쏘지는 못하겠지만 위협 정도는 할 수 있다.
가람은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의 옆, 양배추 따위를 싣고 있던 작물 수레의 한쪽이 박살 나서 부서져 나갔다.
강한 총성에 뒤이어 양배추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진다. 시시덕거리던 세 남자의 얼굴이 딱 굳는다.
“뭐, 뭐야.”
“뭐야, 이건?”
총에 맞은 수레는 바퀴의 이음새가 박살이 났다. 관통당한 양배추 하나도 갈기갈기 터져서 제 속을 보이고 있었다.
불량배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가람의 평가가 수정되었다. ‘만만한 작은 동양 여자’에서 ‘정체불명의 동양 여자’로. 가람은 다시 한 발 더 발사했다.
수레는 양 바퀴를 모두 잃고 주저앉았다. 총성으로 굳어 있던 농부들이 연이어 발사되는 총탄에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그중에 다행히 수레의 주인은 없는 모양인지 남의 수레에 무슨 짓이냐며 호통 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총을 겨누는 가람은 내심 긴장해 있었다. 실수로라도 총탄이 튀거나, 아차 해서 방향을 잘못 잡고 총을 쏘거나 할까 봐 팔에 힘을 꾹 주고 있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변한 얼굴은 제법 차갑고 냉혹해 보이는 효과를 발휘했다.
불량배는 그 두 표정의 차이를 간파할 만큼 눈썰미가 있지도, 심적으로 여유롭지도 않았다.
“제, 제길!”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주춤주춤 물러서던 불량배들은 곧 등을 보이며 후다닥 도망쳤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단단한 수레를 박살 내는 정체불명의 마법사. 아니,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달려들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가람은 조금 묘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아 남은 새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가람을 주저앉은 수레가 양배추를 눈알 삼아 노려본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힘으로 누군가를 제압한다는 건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지만,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이유를 가만히 생각하던 가람은 트라키아를 떠올렸다. 그녀에게서 자신도 모르게 배워 온 것이다.
트라키아는 다소 격한 방법을 쓰긴 했지만, 자신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직접 힘을 휘두르지 않고도 그것을 행사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었다.
그런 점에서 비슷했다. 가람의 방식이 그녀보다 조금 덜 폭력적이었을 뿐, 결국 비슷한 것이다.
“이런 곳에서 뭐 해요?”
새고기가 영 텁텁해서 마저 먹을 기분이 안 든다. 여관으로 돌아갈까 싶어 일어서던 가람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대단히 의외의 인물이라, 가람은 조금 놀랐다.
이름이 그러니까……. 기억을 더듬던 가람은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화답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일단 입을 열었다.
“의, 사선, 아니, 마법사님.”
가람이 호칭을 헤매자 그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에녹사가 부드럽게 웃는다.
해 질 녘의 밤색 머리카락이 구릿빛으로 타올랐다. 노을 덕분에 묘하게 부드러운 공기가 흘렀다.
“에녹사 뷔 비트리코예요. 에녹사라고 불러요.”
“아, 네. 저는 가람이라고 불러 주세요.”
가람은 눈앞의 의사가 조금 불편했다. 그러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대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이 불편함은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 모르고 저지른 무례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그게 분명했다. 또 실수를 저지르면 어쩌나 싶어 대화하기가 거북했다.
“여기서 뭐 해요?”
에녹사는 살갑게 질문했다. ‘격식 있게 대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그녀를 분류했던 가람은 그 허물없는 태도에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이제 돌아가려는 참이었어요. 그, 에녹사 님은요?”
‘에녹사 님.’ 혓바닥의 모래처럼 까끌까끌한 느낌이다. 가람의 기색을 눈치채고 에녹사가 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냥 에녹사라고 불러도 좋아요. 너무 뭣하면 ‘에녹사 씨’도 좋구요. 익숙하지도 않은 예법 차리기 힘들잖아요? 사실 저도 그런 거 피곤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차려야 할 때도 있으니 그럴 땐 어쩔 수 없지만요. 그렇게 덧붙인 에녹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에녹사의 태도는 그런 격식과 어느 정도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있었다.
다짜고짜 환자를 보자던가, 치료를 빨리 하자거나 하는 태도는 가람이 경매장에서 보았던 우아하게 느릿느릿 움직이는 귀족 어린아이들과도 많이 달랐다.
그래도 귀족인데. 갈등하던 가람은 조금 애매하게 납득했다.
“네에…….”
“저야, 가람 씨가 여기 있는 걸 보고 왔죠. 저에게 줘야 할 게 있잖아요?”
주지 않은 의뢰비. 에녹사의 말은 그것을 가리킨 것이었다.
“치료는 어떻게 되었나요?”
“지금은 자고 있어요. 오늘 밤 늦게나 내일 새벽이면 일어날 거예요. 사실 치료는 한참 전에 끝났는데, 의뢰비 때문에 기다리다가 결국 안 오기에 일단 집에 가고 내일 받으러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어요.”
“아, 죄송해요.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해서…….”
가람이 사과하며 복대에서 주섬주섬 미스릴 주화를 꺼내자 에녹사가 급히 가람의 팔을 붙잡으며 만류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네?”
“쇼핑 좋아해요?”
가람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충격받았다. 자신이 쇼핑을 좋아했던가? 아니면 좋아하지 않았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소소한 것들은 최근의 기억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가람이 대답하지 않고 우뚝 멈춰 서 있자 무언을 긍정이라고 해석했는지 에녹사가 가람을 잡아끌었다.
“아, 저기…….”
뒤늦게 가람이 입을 열었으나 에녹사가 너무나 즐겁게 미소한 얼굴로 돌아보자 꿀꺽, 말을 삼켜 버렸다.
그러고 보니, 거절해도 되는 걸까? 무례는 아닐까? 이것도 무례면 어떡하지.
하긴, 어차피 여관에 가도 둘 다 자고 있을 테니 할 일도 없다. 괜히 가서 아픈 사람을 귀찮게 하느니 이 아가씨와 함께 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가람은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힘차게 걷는 에녹사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에녹사는 능숙하게 마차꾼을 불러 마차를 타고 고급 상가로 향했다.
제일 먼저 향한 상점은 의류점이었다.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의류점답게 외형부터 번쩍거린다.
일반 상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마치 작은 성을 지어 둔 것 같은 느낌의 가게는 작은 분수와, 잘 꾸며진 정원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얀 돌로 지은 그 건물은 간판조차 은이었다. 아니, 은인지 잘 닦은 쇠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섬세한 세공으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 여자가 우아하게 새겨져 있었다. 꼬부라져 내려온 귀밑머리까지 보일 정도로 섬세한 세공이다.
가람이 가게의 외형을 둘러보는 사이, 누군가가 날듯이 마차로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 어머, 이게 누구예요! 에녹사! 너무 오랜만에 왔잖아요!”
연보라색 프릴을 펄럭이며 다가온 그녀는 서른 중반은 되어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눈만은 소녀처럼 반짝이는 통에 가람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보니 간판의 모델은 본인인 것 같았다. 그 귀에 반짝이는 할미꽃 옥 귀걸이가 우아하다.
그러나 몸가짐은 전혀 우아하지 않았다. 귀족인 것 같은데, 에녹사와 매우 절친한 사이인지 손을 부여잡고 방방 뛸 것 같은 모습은 우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요즘 좀 바빴어요. 오늘 일하고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렀네요. 보시다시피, 저 아가씨 옷차림 때문에.”
두 여자가 동시에 돌아보자 가람은 괜히 뻣뻣한 가죽옷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워낙 옷차림이나 예쁘고 귀여운 것을 챙기는 것 자체가 사치인 처지라 가람 본인도 그런 것에 무뎌져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되자 좀 민망했다.
“그리고 나도 오늘 돈 벌어서, 겸사겸사 쇼핑하러 왔어요.”
“의뢰인이에요?”
“네, 오랜만에 일 좀 했죠.”
에녹사가 싱긋 웃자 가게 주인은 능숙하게 두 사람을 안으로 이끌었다.
도자기와 세공된 보석으로 치장된 내부는 가람이 지금까지 본 어떤 건물보다 세련되었다. 적어도 잘린 사슴 머리가 장식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그러했다.
“앉아 있어요.”
에녹사와 가람에게 자리를 권한 여주인은 조용히 시립하고 있는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가람은 붉은 소파에 앉아 팔걸이의 금 자수를 괜히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벽지에도 이것과 비슷한 덩굴 같은 장식이 붙어 있었다.
장식들은 대부분 그림이었지만, 중간중간에 보석과 금, 은으로 세공한 세공품이 붙어 있어 입체감을 살렸다.
전체적으로 붉은색과 금색으로 꾸며진 장소였다. 응접실인지, 아니면 대기실인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공간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가람의 눈이 가만히 웃고 있는 에녹사와 마주쳤다. 에녹사의 밝은 고동색 눈동자에 묻어나는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여기는 파티 드레스뿐만이 아니라 간단하게 입을 수 있는 산책용 드레스도 판매하니까 가람의 마음에 들 만한 물건도 꽤 있을 거예요.”
“그런가요.”
가람이 가만히 대답하는 사이 두 사람 앞에 음료가 놓였다. 산더미 같은 크림이 올라간 정체불명의 음료였다.
음료를 내놓은 하녀가 소리 없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에녹사가 대신 차를 권했다.
“마셔 보세요. 전 이것 때문에 일부러 여기를 찾기도 해요.”
차의 옆에는 젖은 물수건이 함께 놓여 있었다. 저건 뭘까. 잠시 시선을 주었던 가람은 에녹사가 크림에 거의 코를 박고 음료를 들이켜는 것을 보고 뒤따라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크림은 매우 푹신하고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도가 높다.
에녹사와 마찬가지로 코를 박고 한 모금 들이켜자, 익숙한 맛이 났다. 초콜릿이다.
지금까지 마셔 본 어떤 초콜릿보다 진한 초콜릿이었다. 끈적이는 그 느낌은 혀에 착 달라붙었다. 반쯤 녹은 크림이 농후한 초콜릿과 함께 섞여 입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의외로 그리 달지는 않았으나, 한 모금만 마셨을 뿐인데도 초콜릿 특유의 향과 맛이 오랫동안 남았다.
코를 파묻은 크림에서 단내가 난다. 입을 떼자 윗입술과 코에 크림이 하얗게 묻어 있었다. 젖은 수건의 용도는 그것을 닦아 내는 것이었다.
여기에도 초콜릿이 있구나.
“마음에 들어요?”
“네.”
에녹사에게 대답한 가람은 다시 초콜릿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몸이 따듯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람과 에녹사가 번갈아 가며 초콜릿을 들이켜는 사이 하녀와 여주인이 드레스가 걸린 토르소를 줄줄이 들고 와 두 사람 앞에 세워 두기 시작했다.
드레스는 총 일곱 벌로, 대부분 치맛단이 발목이나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실용적인 형태였다.
절제된 레이스와 적당히 부푼 치마는 드레스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소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천이나 단추는 고급스러웠다.
“이제 골라 볼까요?”
그렇게 말한 에녹사는 신중하게 여주인과 말을 주고받으며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산더미 같은 드레스가 옮겨져 올 거라고 생각했던 가람의 예상과는 달리, 일곱 벌이 전부였다. 워낙 일반 옷보다 고가인 사치품이니, 산더미처럼 갖고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게다가 이곳은 여러 명이서 만든 옷을 파는 곳도 아니라, 오직 여주인의 ‘작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가람이 예상한 만큼의 드레스를 보려면 제국 황녀의 옷 방이나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가람은 이거 어때요?”
여주인과 토론하던 에녹사가 가만히 앉아 있던 가람에게 불쑥 물었다. 연노랑색의 치마에 연두색의 덧치마가 붙어 있는 단정한 느낌의 드레스였다.
“괜찮은 것 같아요.”
“흠, 그럼 이건요?”
“그거도 괜찮은 것 같아요.”
비슷한 대화가 몇 번 반복되었다. 슬슬 가람이 지겨워질 무렵, 에녹사가 물었다. 조금 걱정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그렇게 거금을 의뢰비로 걸 정도면 금전적인 부담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제가 실수한 건가요?”
가람이 의뢰에 건 금액은 전부 3만 골드였다. 세 사람이니 한 명당 1만 골드로 계산한 것이다.
최고 수준의 마법사가 오길 바라는 마음에 금액 또한 그만큼 건 것이다.
의뢰금에 비하면 가벼운 상처였지만 에녹사가 아닌 다른 마법사였다면 하루 만에 자리를 털고 나올 수는 없었을 거다.
에녹사의 말에 가람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고,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드레스가 싫은가요?”
“아뇨.”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감상을 하기가 힘들었다. 무슨 색을 좋아했는지, 어떤 느낌을 좋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까부터 모든 드레스를 괜찮다고 하고 있잖아요.”
“그런가요…….”
가람은 괜히 어색하게 웃다가 이어지는 에녹사의 말에 웃음을 지웠다.
“혹시 좋아하는 게 없는 건 아니겠죠?”
정곡이다. 가람이 입을 다물자 에녹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흥이 깨졌는지 에녹사는 손짓을 해 드레스를 모두 물렸다.
이어서 여주인에게 사과의 말을 곁들인 인사를 건넨 후 가람과 가게를 빠져나왔다.
“조금 걸을까요?”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녹사는 차분한 걸음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거리는 적막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에녹사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고급 상가를 거의 빠져나올 무렵이었다.
“살면서 끝없이 아프고 낫기를 반복하는 게 마음이죠. 몸에도 그렇듯 마음이 낫는 데도 약이 필요해요. 약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가 없어서 가람은 ‘글쎄요.’ 하고 대답했다.
“약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중요해요.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은 오래 살지도, 잘 살지도 못해요.
죽음의 순간 지탱해 줄 좋아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가람을 처음 볼 때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가곤 있지만 죽음이 닥치면 지탱할 것이 없어 그대로 모든 걸 놓아 버릴 사람 같았죠.
제가 쓸데없이 참견한 거라면 미안해요. 병이란 마음에서 오기도 하는 거라, 그런 쪽으로 민감하거든요.”
가람은 묵묵히 에녹사의 말을 들었다.
에녹사는 표정이 없어 가늠하기 힘든 가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저 웃어 버렸다. 조금 기다렸으나 가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이쪽이에요. 저쪽 양계장을 지나서 정육점 너머로 가야 하죠. 가람 씨는 저와 반대편이네요.”
가람은 마찬가지로 대답하지 않았고, 에녹사는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멀어져 갔다. 어느새 길어진 밤 그림자가 에녹사 뒤를 길게 따른다.
의미 없는 시선으로 그것을 좇으며 가람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에녹사의 말을 곱씹었다.
결론이 나지 않는다. 솔직히, 에녹사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에녹사는 가람의 안에 있는 어둠에게 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나 그 말이 걱정을 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을 이만큼이나 자세히 관찰하고 조언한다는 것은 그녀가 따듯한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걱정해 준 마음은 고마웠다.
가만히 몇 번 더 생각하던 가람은 곧 모든 생각을 털어 버렸다. 아픈 웨이크와 뮐러를 위해 돌아가는 길에 뭔가 사 갈 것이 없을까.
미스릴 주화에서 5만 골드를 뽑아 둔 덕분에 현금은 충분했다. 그중 3만 골드는 에녹사에게 줄 의뢰금이다.
의뢰금. 가람은 아직도 그녀에게 의뢰금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다. 가람은 에녹사가 모퉁이를 돌았던 것을 기억해 뒤를 따라 걸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곁들일 생각이었다.
실제로 가람이 말을 곱씹는 시간은 짧았기 때문에, 에녹사와 가람의 거리는 멀어 봐야 20미터 남짓이었다. 걸음을 서두른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만한 거리다.
반쯤 뛰던 가람은 마침내 양계장을 지나서 정육점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나 돌기가 무섭게 황급히 뒷걸음질해 모퉁이 뒤로 몸을 숨겼다.
희미한 마법 등 아래에 은 갑옷과 펄럭이는 녹빛 치맛자락이 비쳐지고 있었다.
모퉁이 뒤에서 놀란 가슴을 지그시 눌러 진정시키며 가람은 아직도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심스럽게 목을 빼고 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기사 한 명이 더 있었다.
경비대원임이 분명한 옷인데 하나는 망을 보고 있었고, 하나는 에녹사를 커다란 자루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에녹사가 격렬하게 저항하자 강한 주먹이 그녀의 복부를 후려쳤다.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정신을 놓은 에녹사가 축 늘어진다.
머리, 팔, 다리를 끝으로 에녹사의 녹색 치맛자락이 자루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가람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들이 에녹사를 자루에 담는 것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 기사는 기절한 에녹사를 어깨에 둘러멨다.
나머지 기사 하나가 신중하게 주변을 점검하자 가람은 재빨리 고개를 빼어내 숨었다.
이쪽으로 오면 어떡하나 하고 무서운 마음을 부여잡는데, 다행히 걸음은 멀어졌다.
동시에 죄책감이 가람을 휘감았다. 불의를, 그것도 자신을 걱정해 준 사람에게 닥친 위기를 보고 스스로의 무서움에 숨어만 있었다는 사실이 가람을 비난했다.
가람이 다시 고개를 빼어냈을 때는 두 기사와 자루에 담긴 에녹사가 정육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람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어리둥절했고, 신고를 하든 뭘 하든 최소한 상황은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납치인 건 분명한데, 어떤 종류의 그리고 누구의 어디로 가는 납치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놓치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기사들의 걸음이 빨라 가람은 오래 생각할 수 없었다.
가람은 권총 두 자루에 탄약을 꽉 채우고 언제든 뽑을 수 있는 위치에 꽂아 두었다.
권총 하나는 아예 손에 들고 가람은 몸을 낮추어 신중하게 두 사람의 뒤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