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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47화 (47/256)

47화

여관으로 돌아가서 웨이크나 뮐러의 도움을 구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환자였고,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가람은 차원 문으로 제 한 몸 정도는 빼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도울 방법이 없다.

정육점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잠시 망설이던 가람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간간이 매달려 있는 고깃덩이들 사이로 몸을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비린내와 뺨이나 몸에 닿아 오는 살덩이의 감촉이 소름 끼쳤다.

반으로 갈라져 갈비뼈를 드러내고 있는 소나 큼직한 말의 뒷다리가 허공에 매달려 달랑거렸다. 기분이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에녹사는 왜 납치되었을까. 쫓는 와중에도 의문이 계속 맴돈다. 달빛에 덜렁덜렁 흔들리는 차가운 살덩이들은 불길한 생각을 하게 했다.

마침내 쫓던 길이 정육점의 지하로 이어지자 가람은 두려움을 삼키고 걷기 시작했다.

정신과 마음이 동시에 들어가기 싫다고 아우성을 쳐도 몸은 착실히 뒤를 밟아 나간다.

가람은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서 밝고 소란스러운 장소를 찾아 떠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곳은 너무 을씨년스럽고 소름 끼치도록 적막했으며 불길했다.

낡은 계단이 삐꺽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돌계단이라 그러지는 않았다.

하긴, 나무로 건물의 바닥을 만들었다면 정육점에서 새어 나오는 피로 금세 썩어 버리거나 냄새가 났을 거다.

이제 불빛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발밑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가람은 감에 의지해 조심조심 한 걸음씩 내디뎠다.

지하에는 절인 고기를 담은 나무 상자나, 고기를 절이는 용도의 소금 상자, 그리고 도축을 위한 잡다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뒤에 숨어 가며 가람은 살금살금 두 기사의 뒤를 따랐다. 밖에서는 긴장한 것 같던 기사들의 걸음이 지하로 들어오자마자 당당해진다.

가람은 더욱 숨을 죽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추적하다가 나가야겠다.

한 걸음마다 몸을 숨겨 가며 걷던 가람은 실수로 무언가를 치고 말았다.

순간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랐던 가람은 반사적으로 자신이 친 물건을 부여잡았다.

나무를 엮어 만든 광주리였다. 안에 무언가 들어 있는지 약간 묵직하다.

“응?”

기사가 무언가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자 가람은 깜짝 놀라 광주리를 안은 그대로 소금 상자 뒤에 몸을 숨겼다. 입술을 깨물고 시선은 정면으로, 귀는 바짝 뒤를 향한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쥐겠지 뭐. 빨리 오기나 해. 무겁다고.”

가람은 숨을 죽이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추적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마침내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되자 가람은 겨우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갔구나.

안도하며 바구니를 원래의 자리로 올려 두려던 가람은 무심코 바구니 안을 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둥근 형태의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조금 더 들어 올리자 횃불에 비쳐진 바구니 안이 조금 더 밝아졌다.

안의 것을 확인한 순간 가람은 저도 모르게 몸을 젖히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잘린 머리. 피에 절은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져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다.

뺨의 살이 도려내어져 치아가 훤히 보인다. 안구는 양쪽 다 없었다. 시커멓게 빈 눈알 구멍이 가람을 정확히 쳐다보고 있었다.

인간의 머리다. 난도질에 가까운 짓을 당하긴 했지만 분명 사람의 머리였다.

간신히 광주리를 떨어뜨리지 않은 가람은 그것을 더 들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빨리,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마구 쿵쾅거리던 심장이 다음 순간 그대로 멈췄다.

“안녕? 찍찍아?”

목소리는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가람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대신 총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대로 가람의 머리를 후려쳤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사이로 가람은 ‘기사, 아니, 기사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음험한 얼굴이 눈앞에서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가지 않았구나. 간 척하면서 발소리를 죽여 다가오고 있었어.’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암전.

* * *

“저희는 어젯밤부터 내내 이곳에 있었습니다.”

웨이크의 말에 경비대장이 지그시 웨이크를 노려보았다. 매부리코가 창날처럼 날카롭다.

“정말이오?”

“네, 맞습니다요. 손님들은 어제부터 아프셔서 계속 여기에 계셨습니다.”

재빨리 방에 딸린 심부름꾼이 동의했다. 경비대장은 무거운 시선을 떨어뜨리며 구레나룻과 수염을 쓰다듬었다. 피로가 묻어 나오는 동작에 처음의 흉흉했던 기세가 다소 줄어든다.

“이제 무슨 일인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저희도 일행이 돌아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뮐러가 매끄럽게 질문했다. 아침부터 갑자기 들이닥친 경비대 덕분에 둘은 잠도 깨지 못하고서 취조당해야 했다.

취조받는 과정에서 뒤늦게 가람이 돌아오지 않았음을 깨닫자 두 남자는 좀 더 신중하게 이 일에 임했다.

“실종 사건이오. 에녹사 뷔 비트리코 백작가 아가씨가 어제 이곳으로 걸음한 뒤 실종되었소. 마지막 행선지가 여기요. 어제 어디로 간다고 들은 것 없소?”

“저희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치료받으면서 정신을 잃었거든요. 지금 백작가에서는 난리가 났겠군요.”

이런 경우, 재수 없게 범인과 함께 말려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분노한 귀족들은 앞뒤 가리지 않는다.

최대한 많은 작자를 잡아들여 죄를 묻는 데 그 권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경비대장은 뮐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눈치챘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에녹사 뷔 비트리코 영애의 남동생이자, 현 백작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니니. 두 사람이 정말 환자였다면 알리바이는 성립하는 셈이로군. 그러면 우린 이만 가겠소.”

경비대원은 한 사람씩 경고하듯 웨이크와 뮐러에게 시선을 던지며 방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 뮐러와 웨이크는 잠시 시선을 교환한 후 서둘러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랫동안 던져두었던 검을 허리에 차고 벨트를 조여 맨다.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갑시다.”

“그런데, 어디로 가죠?”

그대로 여관을 나서려던 웨이크를 뮐러가 제지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여관 점원 하나가 다가와서 슬쩍 어슬렁거리며 넌지시 운을 띄운다.

“그 동양인 손님, 어제 가시기 전에 저한테 이야기하고 가셨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금화 하나를 받아먹고도 모자란 모양이다. 소년의 태도에 뮐러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지만 웨이크는 급한 마음에 50실버 동전을 꺼내어 들었다.

“확실한 거겠지?”

“그럼요.”

“말해.”

웨이크의 손에서 동전을 낚아챈 점원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다. 점원은 애써 점잖은 척 표정을 갈무리하며 싹싹한 태도로 대답했다.

“고급 상가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지체 없이 여관을 떠났다. 빠른 걸음으로 도로를 걷던 웨이크는 부러졌던 다리가 걷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된 것에 감탄했다.

뮐러 또한 열이 펄펄 끓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가벼운 몸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쾌차한 몸에 힘입어 두 사람은 거침없는 속도로 일반 상가까지 도착했다.

막 피혁상의 거리를 지나려던 참이었다. 웨이크는 갑자기 급제동이 걸린 듯 덜컥 멈춰 섰다.

킁, 하고 무두질에 쓰이는 약품 냄새를 맡는다. 미간을 잠시 찌푸리더니 바쁜 시선이 주변을 둘러보다 멈춰 섰다.

우연인지, 가람이 어제 들렀던 가죽 상점이었다. 웨이크는 곧장 상점으로 걸음했다.

뮐러는 잘 가던 웨이크가 갑자기 방향을 틀자 조금 당황했지만 뒤따라 걸었다.

“갑자기 어디로 가는 겁니까?”

뮐러의 질문에도 웨이크는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무거운 진지함이 얼굴을 가득 덮어, 마치 가면처럼 보였다.

거푸 물어도 웨이크가 대답이 없자, 뮐러는 묻는 것을 포기했다.

가죽 상점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간 웨이크는 단정하게 ‘혹시 어제 방문한 동양인 아가씨의 행선지를 아십니까?’ 하고 질문했다.

처음부터 방문했을 것을 확신한 질문이다. 대체 그 질문의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은 기분이던 뮐러는 당연하다는 듯 가죽 상인이 대답하자 입을 딱 벌렸다.

“동양인 아가씨 말이오? 어제 은행으로 가는 것 같던데.”

“은행은 어느 쪽입니까?”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걸어, 소금 상점 모퉁이를 돌아 우물 너머 광장이오.”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뮐러는 웨이크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바닥을 살피고, 주변을 둘러보며, 지목해서 묻는 사람마다 가람을 보았다는 사람이다.

특히 가람에게 적선받았던 거지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한 푼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가람을 눈여겨보던 그들은 가람의 행선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망설임 없이 방향을 선택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뮐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법처럼 느껴졌다. 경이로운 시선으로 웨이크를 바라본다.

“여기서 끊겼군요.”

고급 상점가의 아래, 일반 상가와 고급 저택가로 나뉘는 길목이었다. 웨이크는 그 주변의 길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난 탓인지 흔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뒤따르던 뮐러가 그제야 멍하니 질문했다.

“어떻게 그렇게 알아내는 겁니까? 아까는 가죽 상점부터 시작해서…….”

웨이크는 밟힌 풀을 들추어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비스듬하게 들린 시선이 마치 비난하는 것 같아서 뮐러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웨이크는 비난을 담은 적이 없었다. 너무 집중하느라 설명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사실, 무언가 일을 하고 그것에 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웨이크에게 아주 생소한 일이었다.

“아까 피혁상의 거리라면, 가람은 속이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거리로 따져 봤을 때 그곳까지 걸었다고 땀이 나지는 않을 겁니다. 좋지 않은 속으로 약품 냄새를 뚫고 가느니, 차라리 근처의 적당한 곳에서 옷을 사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예상이 맞았던 것뿐입니다.”

“그래도 그다음의 일들도 대체…….”

웨이크는 잦아드는 뮐러의 말꼬리를 물고 자르듯이 단호히 대답했다.

“추적술입니다. 사냥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나무의 숲이 사람의 숲으로 바뀐 것뿐이죠. 나무는 말하지 않지만 사람은 말을 합니다. 약간의 은화면 없는 말도 만들어 내게 할 수 있죠. 게다가 눈에 띄는 종류의 사람이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을 뿐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웨이크는 허리를 꺾고 숨을 몰아쉬었다.

워낙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결국 땀 한 방울이 콧날을 타고 흘러, 똑 떨어졌다.

“괜찮습니까?”

“견딜 만합니다.”

“일단 좀 쉬고, 치안대에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떨까요.”

웨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바랄라인은 여행자에게 호의적인 도시가 아닙니다. 우물물도 팔아먹는 이들이, 여행자 한 명의 실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서 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쉬는 게 좋다는 거지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뮐러도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웨이크가 추적을 그만둔다면 혼자서라도 가람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그에게 있어 웨이크나 가람이나 둘 다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 눈사태에서 웨이크가 자신을 잡아채지 않았다면, 가람이 얼어붙은 손으로 간호하지 않았다면 지금 살아 있지 못했을 거다.

“지하.”

주위를 둘러보던 웨이크의 시선이 정육점에서 멈춰 섰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깊어지는 눈매에, 뮐러가 질문했다. 웨이크가 혼자만의 생각으로 빠져들면 또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만다.

“지하요?”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무언가를 숨기기에 적절하지 않은 건물뿐입니다. 그리고 멀리 갈 수도 없었을 겁니다. 이 외곽으로 나가면 통행량이 많으니까요. 결국 통행량이 적은 이 근처에서 실종이 되었을 텐데, 무언가 숨길 만한 건물은 저 정육점뿐이군요. 정육점은 묵은 고기를 소금에 절이기 위해 숙성장을 만들어 두기도 하니까요. 구조를 보니, 저 정육점도 지하가 있어 보입니다.”

“그럼 저기에 있단 말입니까?”

“만약 있다면 그렇겠지요.”

“순순히 들여보내 줄까요?”

웨이크는 허리를 펴고 서산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저도 모르게 노을로 시선을 준 뮐러는 웨이크의 목소리에 그 얼굴로 다시 눈을 돌렸다.

“곧 해가 집니다.”

웨이크가 얼굴에 드리운 비릿한 웃음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게 어떤 생각이든 그에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뮐러는 작게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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