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48화 (48/256)

48화

* * *

흐릿한 시야. 정체불명의 색깔들이 뒤섞인다.

다시, 가느다란 시야. 절컥이는 철 부츠가 피 웅덩이 위를 걷는다.

눈꺼풀에 힘을 주자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다. 횃불로 노르스름한 지하는 다듬어지지 않은 돌벽으로 어수선하다.

선반과 상자들. 그 뒤로 철벅이는 무언가가 연신 조각난다.

바닥을 짚고 눈을 비비려던 가람은 자신의 양손이 앞으로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뺨으로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져 턱을 타고 흘러내린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가람은,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기억해 내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며 화다닥 정신을 차렸다.

그리 유쾌한 장소는 아니었다. 으깨진 고기와 피가 끈적끈적하게 말라붙어 바닥의 돌 사이에 차고 흐른다.

피를 머금은 나무 탁자는 기괴한 빛깔이었다. 탁자 위에는 알 수 없는 약병들이 잔뜩 올라가 있다.

그 뒤로는 조금 긴 직사각형의 나무판자가 놓여 있고, 그 위로 연신 도끼 같은 칼이 내려쳐져 고깃덩이를 잘라 내고 있었다.

방 안의 사람은 모두 네 명이다. 그중에는 기절하기 전에 보았던 기사 두 명도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탁자에서 고기를 자르고 있다.

시시한 농담을 주워섬기며 낄낄거리던 두 기사는 가람과 눈을 마주치더니 빙긋 미소 지었다.

대단히 유순한 미소라 가람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어 줄 뻔했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후려 맞았는지 잊지 않았기에 그를 노려보았다.

“깜짝 손님이 일어났네.”

“그러게. 뜻밖이야.”

가람은 대꾸하는 대신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총은 두 자루 다 빼앗겼다. 옷은 그대로 입고 있었으나 복대를 빼어 갔는지 배가 헐렁하다. 돈주머니도 없었다. 저들이 가져간 게 분명하다.

주변에 주머니가 있을 만한 곳을 살펴봤으나 이미 빼돌렸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권총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에녹사가 자신의 바로 옆에 묶여 있었다. 가람은 에녹사를 봄으로써 자신이 어떤 모양으로 묶여 있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핏물 고인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양손은 두꺼운 밧줄로 묶여 있다. 묶인 손은 얼마나 피가 통하지 않았는지 시퍼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가람 자신의 손에도 감각이 없는 걸 보니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당신들, 뭐야.”

말을 하자 목이 아프다. 덕분에 으르렁거리듯 나온 목소리는 마치 위협처럼 들렸다. 두 기사는 히죽 미소 지으며 가람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뭘까? 알 필요 있겠어?”

그렇게 이죽거리는 기사는 왼쪽에 앉은 자다. 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오래 감지 앉았는지 기름져 있다. 같은 색의 눈에 어른거리는 것은 악동 같은 장난기다. 악의와 잔인함에 찌든 눈동자.

가람은 어금니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지 않으면 턱이 달달 떨릴 것 같았다. 어차피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조롱거리가 되어 줄 생각은 없다.

오른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에녹사의 뺨을 후려쳤다. 한 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두어 번 더 손이 휘둘러진다.

놀란 가람이 돌아봐도 손은 무자비하게 휘둘러진다. 에녹사의 뺨이 붉게 부어오르고 입 안이 터져 피가 새어 나왔다.

파르르 떨리는 에녹사의 눈꺼풀을 확인한 남자는 외쳤다.

“관람객 준비됐어!”

기사의 외침은 고기를 자르고 있던 남자를 향한 것이었다. 고기를 자르던 두 남자는 화답하듯 칼을 들어 보이고 손질이 끝난 고기를 한쪽으로 밀어 넣었다.

가람은 시선을 들어 고깃덩이들을 보았다. 둥근 모양, 직선에 위로 갈수록 부피가 큰 덩어리, 털 없는 옅은 색의 피부, 주름진 무릎. 인간의 허벅다리다. 무릎이 붙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깨닫자 가람은 경악해 엉덩이로 뒷걸음질 쳤다. 등줄기에 뾰족하게 우둘투둘한 돌벽이 닿아 온다.

기사 하나가 비죽 웃더니 잘 보이는 위치로 가람을 잡아당겼다.

“지금부터 재미있어. 눈을 감으면 눈꺼풀을 잘라 낼 거야.”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가람은 부들부들 떨며 그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피로 젖은 긴 탁자 옆으로 에녹사의 옆에 묶여 있던 남자가 끌려온다. 상자 뒤에 있어 미처 보지 못했던 남자다.

‘제물’은 모두 세 명, 저 남자와 에녹사, 그리고 가람이었다.

묶인 남자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런 그를 기사와, 고기 자르는 남자가 조롱한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남자는 애원과 반항을 번갈아 가며 저항했다.

“살려 줘, 이러지 마. 제발, 제발 살려 줘! 나는 그냥 농부일 뿐이라고!”

마침내 남자의 몸이 비스듬히 세워진 탁자에 고정된다. 탁자의 네 귀퉁이에는 마치 수갑 같은 굵은 팔찌가 사슬에 연결되어 있어서 손발을 결박하도록 되어 있다.

수갑에 묻어 있던 피가 끈적끈적하게 남자의 손목에 묻는다. 이제 남자는 애원하지 않았다. 대신 저주했다.

“이 개자식들! 쥐새끼한테 잡아먹혀라! 내 자식들이 알면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래? 그럼 자식들도 잡아 와야겠네.”

남자의 옷을 자르던 자가 태연하게 대답한다. 상의, 하의, 속옷까지 모두 단검에 의해 해체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알몸으로 결박된 남자는 이제 악을 쓸 기운도 없는지 간간이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이야, 이놈 물건 좋은데?”

두 남자가 낄낄거리며 매달린 남자의 물건을 단검 끝으로 툭툭 쳤다.

그때마다 눈에 띄게 움찔거리던 남자는 다음 순간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오싹한 비명을 내질렀다.

단검이 남자의 양물을 그대로 잘라 낸 것이다. 다리 사이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가 바닥을 타고 흐른다.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가람을 기사가 강한 아귀힘으로 고정했다. 눈꺼풀 자른다니까?

“난 내 거보다 큰 놈들 보면 화나더라.”

“너보다 작은 놈이 어디 있다고 그래. 뭐, 어차피 피 빼는 데는 여기를 자르는 게 제일 좋지만.”

고통으로 경련하는 가엾은 남자를 앞에 두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익숙한 솜씨로 남자를 도축하기 시작했다.

도축. 그것 외에 다른 어울리는 말을 찾기가 힘들다. 배를 길게 갈라 내장을 빼어 담고, 갈비, 목, 엉덩이, 척추, 허벅지 등을 부위별로 토막 친다.

남자는 내장이 모두 뽑혀 나오고 반 토막이 날 때까지 살아 있었다. 뻐끔거리는 입으로는 피거품 끓는 소리가 나고, 눈에 맺힌 눈물이 피 웅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남자는 소리 없이 자신의 아이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끔찍하다. 너무나 끔찍한 광경에 가람은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환자를 치료하느라 어지간한 상처에는 익숙한 에녹사조차 토악질을 참지 못했다.

가람은 그저 하얗게 질려 도축꾼들이 남자를, 아니, 남자였던 고기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자, 다음.”

가람이 고개 돌리지 못하도록 머리통을 잡고 있던 기사가 그대로 가람을 끌어당겨 올렸다.

비명, 저항, 욕설, 비난 중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가람은 공포에 질린 거친 숨만을 들이켰다.

힉, 힉, 하고 경기를 일으키는 가람이 탁자로 향해진다. 아직 이전 남자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탁자. 가람의 눈은 공포로 동공이 완전히 열렸다.

“잠깐!”

아래에서 들린 외침에 가람은 눈동자만 움직여 내려다보았다.

에녹사였다. 입가에 토사물이 묻고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에녹사는 의연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잡혀 왔으니 나부터 하는 게 옳은 것 아닌가요?”

어떻게 그런 말을? 가람은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무섭지 않은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가람의 믿을 수 없다는 시선에 에녹사가 빙그레 웃어 준다. 입가는 파르르 떨리고, 손발 또한 공포에 젖어 떨리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높고 단단했다.

네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시선을 교환하고 가람을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에녹사를 묶은 손을 풀어 주었다. 탁자의 네 귀퉁이에 매달기 위해서였다. 이어 발도 풀어 준 후 그녀를 질질 끌고 간다.

에녹사는 가람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작은 목소리라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가람은 입 모양으로 그 말을 읽어 냈다.

‘내가 죽는 동안 누군가 올지도 모르니까. 내가 시간이라도 벌어 줄 수 있길 바라요. 그리고.’

그다음 말은 보지 못했다. 에녹사를 빙글 돌려 탁자에 매단다. 가람은 공포가 사라졌음을 느꼈다. 저렇게 죽게 할 수는 없다.

에녹사의 오른팔에 수갑이 채워진다. 철컥, 조임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소름이 끼쳤다.

가람은 필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뭔가, 뭔가, 총이나, 뭐라도 좋으니까.

“귀족 정신, 햐, 나 그런 거 정말 좋아해요.”

기사 하나가 히죽 웃는다. 에녹사는 경멸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더러운 놈들, 기사의 수치다.”

“어? 우린 기사 아닌데. 주인님의 말만 듣는 개라오. 그분은 미식을 즐기는 분이시지. 이리도 고귀한 정신이 머무르던 몸을 먹게 되어 주인님도 기쁘실 거요.”

“먹는다고?”

“그럼, 재미로 살을 발라내는 줄 알았나?”

방법이 없다. 에녹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방 안을 필사적으로 살핀 가람은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이 공간 안에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두 기사는 에녹사를 조롱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다.

기회는 지금이다. 묶인 발로 여의치는 않지만, 조금 움직일 수는 있다.

가람이 소리 없이 일어섰다. 그러나 기사가 손을 뻗는다. 마음이 급해져 그 손을 피하려고 옆으로 뛰었다.

오래도록 피가 통하지 않았던 발바닥이 박살 나는 것처럼 아프다. 그러나 기사는 팔보다 긴 다리를 뻗어 가람의 발을 걸었다.

안 돼, 안 돼. 넘어지면 안 돼.

그 순간 가람은 차원 문을 바닥에 열었다. 그리고 넘어지는 그대로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차원 문은 넘어지는 가람을 삼켰다. 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어서 가능할지 확신이 없었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뻐할 시간은 없다.

일단 성공했다는 것을 깨닫자 가람은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기어 마트 주방 코너로 향했다.

빨리, 빨리, 에녹사가 죽기 전에. 꾸물거릴 시간 없어.

주방에서 이빨로 식칼의 포장을 뜯고 칼을 꺼내었다. 입에 칼을 물고 손목을 묶은 굵은 밧줄을 자른다. 급하게 놀린 칼에 손의 일부가 베여 피가 났지만 상관없다.

마침내 손과 발이 풀리자 감각조차 없는 손을 주무르며 정신없이 마트를 나섰다.

오래도록 묶여 있던 다리는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그러모아 가람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경찰서에 도착했다.

탄약이 채워진 권총과 혹시 몰라 소총도 집어 든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꾸만 미끄러졌다. 베인 손에서 난 피가 총신 여기저기에 묻어났다.

모든 무장을 마친 후, 문을 열기 직전 가람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제 열면, 시작이다.

문을 여는 와중에도 너무 많은 것이 떠올라 오히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텅 빈 머릿속을 충돌하는 관념들이 어지럽혔다. 살인, 도덕, 자기방어, 피, 잔인, 복수, 정당성 등.

이 순간 에녹사의 죽음을 방치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 중 나중에 어느 것을 더 후회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가람은 뛰어들기로 했다. 에녹사가 저를 위해 먼저 나서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차원 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어떤 마지막 경계선이 필사적으로 행동을 막아섰다. 외면하기 쉽지 않았으나, 움직임을 멈출 수도 없었다.

머릿속은 망설이고 있었으나 몸은 지체 없이 차원 문 안으로 뛰어든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람은 총구를 곧추세웠다. 바닥으로 들어갔던 덕분에 나오자마자 몸이 상자에 가려졌다.

아직 자신이 돌아온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혹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겁을 먹고 도망쳤나?

사람 하나가 갑자기 이상한 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충분히 경계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다. 놈들은 미친놈들이니까.

가람은 더 망설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불길한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다. 방아쇠에 닿은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 뻣뻣하다.

신호가 가는 순간, 이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움직일 것이다. 몸을 일으켰지만, 그러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다.

상자 너머에는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가람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가 믿을 수 없어서 확인하듯 그 이름을 불렀다.

“웨이크? 뮐러? 어떻게 여기에…….”

“가람이야말로 대체 어떻게 숨었습니까?”

웨이크와 뮐러의 눈에 가람은 상자 뒤에 숨어 있다가 나온 것처럼 보였다.

가람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다. 잠깐 이곳을 비웠는데…….

바닥에는 익숙한 네 남자가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넷 모두 발목 아래가 없다. 머리에는 뮐러의 것으로 보이는 물 덩이가 씌워져 있었다.

숨이 막혀 꼬르륵거리다가 질식했는지 안색이 새파랗다. 그러나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에녹사는?”

가람의 질문에 두 남자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못 보셨습니까?”

뭘요? 하고 물으려는 순간, 가람의 신발로 굴러온 무언가가 가볍게 부딪혔다. 크기는 배구공, 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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