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가람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려는 고개를 억지로 끌어 내렸다.
굴러온 것의 정체를 확인한 눈이 그대로 굳는다. 숨도 멈췄다.
그대로 얼어붙어서 누군가 건드리면 버석버석 부스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가람은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에녹사의 머리를.
“아아아…….”
비탄, 슬픔, 비명, 흐느낌이 뒤섞여 낮고 기묘하게 흘러나왔다.
가람은 그대로 무릎을 대고 앉아 에녹사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에녹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다.
그 머리를 품에 안고 옷이 피에 젖는 것도 아랑곳 않으며 가람은 멍하니 에녹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득하다. 끊어질 것 같은 여린 슬픔이 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차오른다.
‘나부터 하는 게 옳은 것 아닌가요?’
당당하던 목소리와 벙긋거리며 걱정하던 입 모양, 노을 속에서 나타난 에녹사, 좋아하는 것을 찾으라던 그 목소리. 목소리, 상냥한 말들.
패스, 패스. 좀 더 패스가 있었더라면. 힘이 좀 더 있었더라면, 차라리 이곳에 따라 들어오지 말고 어젯밤에 실종을 알렸더라면, 그랬더라면 에녹사는 살 수 있었을까?
기억을 뒤로 당겨 몇 번이나 다른 선택을 해 보아도 이미 늦은 후회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이미 목을 쳤더군요.”
뭔가 더 말하려는 웨이크의 입을 뮐러가 꾹 눌렀다. 그의 무신경함을 시선만으로 짧게 비난한 뮐러는 가람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괜찮습니까?”
가람은 미동도 없이 넋을 놓고 에녹사의 잘린 목을 내려다보고 있다.
뮐러는 가람의 정신이 붕괴하기 직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더 기다릴 수 없다.
그가 짧게 눈짓하자 웨이크가 가람을 안아 들었다. 뮐러는 놓지 않으려는 에녹사의 머리를 간신히 가람의 품에서 빼앗는 데 성공했다.
“여길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일당이 올지도 모르니, 나가서 신고하죠.”
듣는 사람이 없는 말을 읊조린 웨이크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다. 가람은 제 손에 들린 소총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죽었다. 그리고 자신도 죽이려고 했다. 똑같은 짓을, 그 끔찍한 짓을, 똑같이. 자신도 똑같이. 몸서리가 쳐진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가 온다면 망설임이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겪은 ‘살인’이라는 일의 끔찍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니, 인형과 실제 사람만큼 완전히 달랐다.
사실, 방아쇠를 당기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넘어갈 수 있다고, 그런 자신에게 구역질이 치밀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에녹사, 이것도 미안해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언젠가 정말로 쏘아야 할 것이다.
가람은 늘 앉아만 있던 그 시작점에서 일어서게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달갑지 않은 준비였다. 세상이 바뀐다면 상식도 바뀌어야 하는 법.
그러나 오랫동안 뿌리박힌 관념은 시간의 무게만큼 무거웠다. 딱 그만큼 무거웠다.
절대 열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어떤 ‘문’의 문고리를 이때 잡은 것이다.
“저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웨이크는 안아 든 가람을 내려다보았다. 넋이 나간 눈동자는 내용물이 없다.
스스로 말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웨이크는 말을 받아 주었다.
“왜입니까?”
옆에서 걷던 뮐러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저 말을 받을걸. 저 말에 저런 대답이라니. 나였다면 당연하다거나,
그것이 옳다거나 뭔가 위로가 되는 말을 해 주었을 텐데. 그러나 가람은 질문해 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비척비척 말을 이었다.
“사람을 죽이면 나도 똑같은 살인자가 되는 거잖아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겉에서 보기에 그런 거 알 바 아니잖아.
나를 해하려고 했다고 해도, 언제나 끝에 살아남은 사람은 살인자니까. 내 말 이해해요?
죽어 버리면 그걸로 끝이지만, 살게 되면 살인자예요. 어차피 똑같은 살인자 둘이 치고 박다가 하나가 진 것뿐이죠. 살인자들의 대결이라고요. 언제나 죽은 사람은 피해자니까, 남는 건 살인자가 된 나뿐이죠.
어차피 똑같은 살인자가 된 나를, 누군가가 복수를 하려고 칼을 들고 덤벼들어 찌르거나 어느 날 죽여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겠죠.
우습지 않아요? 살려고 죽였는데, 그런 이유가 붙어 있다고 해도 살아남은 순간 악당 쪽이 되는 거예요. 그런 악당이 죽고 먹혀서 사라진들 누가 슬퍼하겠어요.
악당이 되고 싶진 않아요. 내가 죽으면 나를 죽인 사람을 비난하고, 나를 해하려 한 사람이 나쁘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살인자끼리 죽이다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요. 어차피 사람들과 섞여 살 수 없는 위험한 작자들이 자멸했는데 누가 슬퍼하겠어요?
그렇다고 그냥 손 놓고 당해 주진 않을 거지만요. 하하,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에녹사가, 에녹사가…….”
목소리는 작게 잦아들었다. 가는 실의 끝이 가늘가늘하게 바닥을 스치는 것 같은 목소리로 가람은 흐느끼듯 속삭였다.
“아직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아직, 아직까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그놈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방아쇠를 당기려고 최후의 마음을 다잡는 순간, 가람은 깨달았다. 천하의 악한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다.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은 스스로가 착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인다.’라는 사실은 그 하나만으로 무겁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토막 쳐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에조차.
만약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해진다면, 결국 언젠가는 그놈들처럼 되고 말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너무나 끔찍해서.
“당연한 일입니다.”
누군가가 대답했으나 가람은 누가 대답했는지 알 수 없었다. 까무룩, 의식이 가라앉는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난 가람은 습관처럼 손등을 바라보았다. 바늘은 하나, 충전이 끝나 있었다. 매일 아침, 손등을 확인한다.
어느새 이런 습관이 생겼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이상하겠어. 이쪽 손에 팔찌라도 하나 끼던가 해야지.
“풋.”
작게 웃음이 터졌다. 의미 없는 웃음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육점 지하에서 사람을 도축하는 자들로 인해 누군가의 아침 식사가 될 뻔했는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이리도 밝다.
정말 날씨가 좋았다. 창문 밖의 맑은 하늘에서 부유하는 먼지를 따라 무의미하게 시선을 옮기던 가람은 밧줄을 자를 때 베인 손을 내려다보았다.
에녹사가 있었다면 서비스로 치료해 달라고 했을 텐데.
에녹사. 의뢰금은 어떡하지? 백작가로 전달해야 하나. 아니, 죽은 줄은 알고 있을까?
눈물이 나지도,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슬프지도 않았다. 강력한 어떤 것이 그 모든 것을 막아서서 차단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람은 그 강력한 벽 너머에서 들끓어 부서지는 슬픔을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슬픔은 파도처럼 몰아쳐 벽을 부수려 들었으나, 벽은 단단했다.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서 가람은 손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었다. 들어와요. 작은 목소리였으나 문밖의 사람은 용케 그 말을 듣고 문을 열었다.
고급 경첩이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매끄럽게 열린 문 사이로 뮐러가 들어왔다.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아서, 식사하겠습니까?”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갈아입혔는지 자신은 가운 차림이었다. 신경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대충 옷을 여미고 성큼성큼 방을 나선다.
겪은 일에 비해 터무니없이 멀쩡한 몸에 다시 피식 웃음이 터졌다. 뮐러는 불안한 얼굴로 그 얇은 웃음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까?”
뮐러가 빼어 주는 의자에 앉으며 가람은 고갯짓만으로 대답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웨이크가 손수 음식을 앞으로 밀어 주었다.
그것을 시선 끝으로 바라보며 가람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잠시 침묵이 스치고 지나갔다. 웨이크와 뮐러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짧게 시선을 교환한 후 웨이크가 말했다.
“비트리코 영애는 오늘 저녁 장례를 치른다고 합니다. 가족들만 참석해서 조촐하게 치를 생각이랍니다. 그 일당 네 명은 오늘 정오에 모두 교수형에 처해진다고 하더군요. 이백 명에 가까운 인간을 도살한 극악 범죄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까 찾아온 경비대장이 이걸 전해 주라고 하더군요.”
웨이크가 내민 것은 익숙한 물건이었다. 권총 두 자루와 돈주머니, 그리고 복대다.
가람은 ‘우두머리의 집에서 찾아냈다고 합니다.’ 하고 짧게 덧붙이는 웨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대충 옆에 내려놓았다.
돈주머니를 슬쩍 열어 본 터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는 웨이크와 뮐러는 그 무심한 태도에 조금 움찔했다.
“그게 끝인가요? 네 명이 아니에요. 뒤에 높은 분이 있다고 했어요.”
분명히 들었다. ‘주인님’이 있었다. 그 네 명이 끝이 아니다. 가람은 화내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는 칠흑 같은 시선으로 조용히 벽 너머에서 가람을 주시했다.
“아마, 고위 귀족일 겁니다.”
“에녹사도 귀족이었는데요.”
“그냥 ‘귀족’이 아니라 ‘고위 귀족’일 겁니다. 그도 아니면, 세상에는 귀족 외에도 세력을 가진 인물이 많습니다. 어느 쪽이든 건드리면 안 되는 벌통이나 마찬가집니다.”
가람은 가만히 뮐러를 바라보았다. 뮐러는 가람이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가 생각 외로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에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가람이 다시 묻는다. 그 외에는?
“아, 저희는 무혐의이니 떠나고 싶을 때 얼마든지 떠나도 좋다고 하더군요.”
웨이크가 재깍 덧붙이자 가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도시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다.
“그럼 오늘 중으로 재정비를 해서 떠나는 게 좋겠어요. 방향이 정해졌거든요.”
에녹사의 장례에 참석하자거나 그런 이야기를 예상했던 두 남자는 무심하기까지 한 담백한 태도에 조금 당황했다.
가람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생각을 떠올렸다.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패스. 그것으로 에녹사의 목숨을 사는 데는 얼마나 들까.
손등 위에 떠오른 숫자는 500패스였다. 모으려면 한참 걸리겠네. 장례식까지 치른 사람이 살아 돌아오면 백작가에서 좋아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가람은 어쩐지 이 생각들이 에녹사의 당당한 태도를 퇴색시키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가람의 생각이지 에녹사의 생각이 아니다.
어쩐지, 에녹사는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녀와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이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만두자. 패스는 충전되었고 자신은 떠나기만 하면 된다. 바늘의 끝을 향해 걷고 또 걷다 보면 언젠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며 가는 거다. 베이스캠프를 되찾기만 한다면 모든 번민과 갈등이 사라질 거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다.
“좀 드십시오.”
웨이크가 말하며 음식 접시를 더욱 가까이 밀어 놓았다. 그 손짓에서 걱정을 읽어 낸 가람은 미소하려고 했지만,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보는 순간 격렬하게 토악질했다.
잘 굽힌 노릇노릇한 스테이크. 시간이 좀 지난 탓인지 핏물이 배어 나와 있다. 눈앞이 번쩍이며 끔찍한 광경들이 연이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뮐러가 몹시 당황하며 가람의 등을 두드렸다. 먹은 것이 없기에 토사물은 위액이 전부였다.
그것이 바닥의 카펫에 젖어 드는 것을 바라보던 가람은 거칠게 가운 소매로 입가를 닦아 냈다. 그리고 한쪽에 놓여 있던 복대를 들어 탈탈 털어 낸다.
엄선해서 골라낸 알 굵은 보석 반지가 대굴대굴 굴러 손안에 쌓였다. 가람은 그대로 그것을 뮐러에게 내밀었다.
“이거, 비트리코 백작가에 드리고 오세요.”
에녹사의 중간 이름 ‘뷔’는 ‘∼가문의’라는 뜻이다. 영지가 없는 귀족이 사용한다. 영지가 있는 귀족은 ‘혼’을 넣었다. ‘∼를 다스리는’이라는 뜻이다.
그 밖에 가문의 대표에게만 붙는 중간 이름 등 귀족의 이름은 복잡한 것이 많았다.
잠깐 스치듯 보았던 상식책의 내용을 떠올린 가람은 어렵지 않게 비트리코 백작가의 사정을 짐작했다.
비트리코 백작가는 그렇게 대단히 지체 높은 귀족가는 아닐 것이다. 거대한 영지를 가진 세도가가 일개 평민의 치료에 걸음할 리는 없다.
귀족가의 아가씨가 직접 돈에 품을 팔아 움직인 것을 보면 비트리코 백작가의 경제 사정이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마법에도 다른 귀족들보다 많은 돈을 쏟지는 못했으리라. 평민보다는 나았겠지만.
실제로 에녹사는 어릴 때 대성한 치유 마법사였던 양친을 잃은 뒤 어린 남동생을 돌보며 가문을 받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지만 가람은 그 반지들이 조금이나마 에녹사의 빈자리를 채워 주었으면 했다.
뮐러는 제 손에 돌멩이라도 되는 양 성의 없게 놓이는 반지들을 눈을 홉뜨고 내려다보았다.
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복대에 한 나라의 황녀나 되어야 가질 수 있을 법한 보물이 들어 있었다니.
“이 정도면 보탬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뮐러는 자신이 지나치게 활기차게 대답했다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이 반지들의 가치는 흥분이 아깝지 않을 정도니까.
“그런데, 이걸 전부 말입니까?”
뮐러는 얼굴 가득 아깝다는 기색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람은 마음 같아서는 금고의 것도 탈탈 털어다가 주고 싶었지만 너무 큰 재물은 또 다른 분란을 불러올 수 있다. 일곱 개의 반지. 저 정도가 적절하리라.
“네.”
건조하게 대답한 가람은 음식으로 시선을 옮겼다. 뮐러가 급하게 접시를 물리려 했으나 가람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한 입 베어 문다.
다시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가람은 끝까지 씹고 삼켜 기어코 한 접시를 비워 냈다.
“전 먼저 일어날게요. 내일 아침에 떠날 테니, 준비해 두세요. 그리고 두 분 말도 한 마리씩 구입하세요.”
“아, 예.”
얼떨떨한 대답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온 가람은 지치는 기분으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쉬어야 했다. 내일 아침 다시 움직여야 하니까.
에녹사의 일은 이곳에 남겨질 것이다. 가람은 그것을 가져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운이 나빴어, 운이 나빴을 뿐이야. 계속해서 합리화하는 와중에도 다른 쪽에서는 죄책감이 속삭인다.
정말로? 망설이지 않고, 눈을 뜬 순간 차원 문을 열고 넘어가서 총을 가져다가 난사했다면 에녹사를 구할 수 있었어. 네가 망설인 탓에 죽은 거야. 너무 우유부단해서.
마음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이었기에 그것은 걸러지는 일 없이 그대로 가람에게 파문을 남겼다. 그 속삭임은 기묘하게도 에녹사의 목소리였다.
가람은 외면하려 눈을 감았으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다가왔다. 반복한다. 네가 너무 우유부단해서. 이기적이라서.
목소리는 이윽고 조롱하기 시작한다. 어째서 그렇게 약한 거지? 왜 그렇게 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거야? 위기 사태에 왜 그렇게 멍청한 얼간이처럼 굴어서 내가 죽게 만든 거야?
가람은 무서웠다. 이곳 세상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살면서 돼지 한 마리조차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하물며 스스로의 손으로 죽여 본 적은 더더욱 없다.
눈앞에서 사람이 도축되는 꼴을 보며 그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 만큼 그녀의 정신은 메말라 있지 않았다.
지나친 잔인함은 사람을 압도한다. 가람은 압도당했었다.
그래도 뛰어들었어야지. 너는 멍청해. 그리고 약해. 지금이라도 마음을 먹어. 방해하는 놈들은 모두 총알받이로 쓰고 나자빠지게 만들라고.
쉽잖아?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는 거야. 목소리는 킬킬 웃고 있었다. 지나치게 일그러진 그것은 이미 에녹사의 것이 아니다.
나는 군인도 뭣도 아니라고. 그렇게, 재촉하지 마. 아직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시간? 살인을 준비할 시간? 살인자가 될 시간? 목소리는 매우 즐거운 듯이 시간, 시간을 되풀이했다. 어차피 될 거, 그냥 저질러 버려. 하면 쉽다고.
가람은 침착성을 되찾았다. 그 경계, 필사적으로 가람을 막던 마지막 선의 정체를 깨달았다. 도덕성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람의 ‘자리’였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그리하여 모두 제자리에 돌아갔을 때 가람 또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평생 제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할 수 있다면.
목소리는 다시 킬킬 웃는다.
그런 것치고는 손가락이 언제나 방아쇠에 닿아 있는데.
죽지도 않아야 하니까.
그래. 죽지도 않아야 하고 죽이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나 죽지 않기 위해 죽여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가람이 결론 내리자 목소리는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언제고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것을 본능처럼 느끼며 가람은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으나 가람은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Chapter 6
어스름이 밝아 온다. 가람은 침대에 누운 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바랄라인의 지붕들이 천천히 색을 얻기 시작한다.
첨탑, 종탑, 둥근 황성의 지붕과 각양각색의 고급 주택들, 그리고 높은 성벽의 망루와 그 너머의 들판을 바라본다. 들판은 모두 밀과 감자로 가득 차 있다.
감자. 감자밭. 불량배. 사람. 인사. 인사하는 사람.
자연히 연상되는 다음 단어를 가람은 깊게 눌러 지워 버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사물을 본다. 익숙해진 방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낯설다. 무심코 생각하던 가람은 실소했다. 여기에 내게 낯설지 않은 것이 있기나 한가.
새삼스러운 생각이다.
베이스캠프로 다시 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서 가람은 물건을 챙겨 오기로 했다.
웨이크 등이 장을 봐 오긴 했을 테지만 부족한 것은 있다. 크페타인에서 대부분의 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차원 문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열린 차원 문은 빛났으나 그 빛은 주변의 어느 것도 밝히지 않았다. 어떤 그림자도 만들지 않는 빛이었다.
문을 넘어 익숙해진 장비를 챙긴다. 총탄은 충분히 남아 있기 때문에 경찰서에서 챙길 것은 없었다.
집으로도 가지 않았다. 오직 저쪽 세상과 마트만 돌아다니며 가람은 짐을 챙겼다.
짐은 첫날보다 간소했다. 보석도 없고, 잡다한 용품도 없다. 햄이나 과자, 조미료는 아직 뽀삐의 등짐에 좀 남아 있었다.
가람은 고체 연료와 코펠 등의 산악용품과 라이터, 속옷과 여성용품, 손전등, 영양제와 소독약, 진통제, 항생제를 챙겼다. 가방 하나도 되지 않는 양이다.
챙겨 온 것들을 들고 방을 나서자 거실 한편에 짐 꾸러미가 보인다. 가람은 뮐러와 웨이크가 사 온 것들을 살펴보았다.
말린 과일과 소금에 절인 소고기, 무화과 잼, 소젖 치즈, 양젖 버터, 향신료 꾸러미, 단단한 보리빵 같은 보존식과 털가죽 침낭 세 개, 짚으로 감싼 유리병도 몇 개 있었는데, 마개를 뽑아 냄새를 맡아 보니 술인 듯했다.
그것들의 옆에는 배려 깊게도 가람의 옷도 있었다. 모두 고급품이다.
두 남자가 사 온 옷은 보온 마법이 걸린 망토까지 딸려 있었다. 가죽옷의 안감은 양모로 짠 것인 듯 도톰하고 부드러웠다.
가죽옷도 가죽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움직이기 편했다. 그러나 매우 질겨서 한두 푼 하는 물건은 아닌 듯싶었다.
가람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그들이 사 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미스릴 주화와 고액 금화가 든 복대를 찬 후 천으로 만든 긴팔 옷을 입고, 그 위에 반팔 가죽옷을 걸친다.
허리에는 어제 산 주머니가 달린 벨트를 둘렀다. 벨트의 주머니는 모두 세 개. 하나에는 약을 넣고, 나머지 하나에는 라이터와 고체 연료를 담는다.
마지막 주머니에는 작은 단위의 금화와 은화가 담겼다. 그 위에 베록에서 산 단검을 차고 양 겨드랑이 아래에 약실을 꽉 채운 권총을 매단다.
마지막으로 가죽 신발을 신고 망토를 걸쳐 모든 것을 덮자 준비가 끝났다. 이 차림만으로 5kg은 될 거다.
그렇게 방을 나서자 거실에는 이미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짐을 분류하고 나누던 두 사람이 기척을 느끼고 돌아본다.
“잘 잤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인사에 웨이크는 조금 어색해했고 뮐러는 자연스럽게 웃었다. 가람은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도 좀 주세요.”
뮐러가 짐 더미에서 지도를 찾아 건네었다. 언뜻 보니 지도 외에 책도 몇 권 보인다. 가람은 그쪽을 오래 바라보지 않고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뮐러가 새로 사 온 지도는 대도시에서 구입한 것이라 그런지 베록에서의 것보다 훨씬 정밀해 보였다. 표시된 지역도 넓었다. 지도를 펼치자 두 사람이 다가와 옆에 섰다.
이번 바늘은 그리 길지 않았다. 크페타인의 중간 정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걸어서 3일 거리에 있는 듯싶었다.
크페타인의 패스를 찾을 때, 차콘다에서 보았던 바늘과 거의 비슷한 거리다.
가람은 지도를 펼쳤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음을 깨닫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곳에서는 나침반이 통하지 않아 어느 쪽이 북쪽인지 알기 힘들었다.
“여기, 이쪽인데 걸어서 3일 정도 거리인 것 같아요.”
가람은 손등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려 주었다. 뮐러는 잠시 고민하다가 창문을 내다보고 오더니 곧 지도를 돌려 가람이 가리킨 방향으로 직선을 하나 그었다.
“바랄라인 산맥이 뒤쪽에 있으니, 남서쪽입니다. 내륙 쪽이군요.”
3일이면 이 정도 위치입니다. 하고 짚어 주는 곳을 보니 아무런 영지도, 마을도 없는 산골짜기다.
워낙 자세하지 못한 지도라서 실제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크게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다.
의외로 가까운 곳이라 생각하던 가람은 문득 깨달았다. 크페타인을 기준으로 하자면 제법 먼 곳이지만 가람 일행이 미리 어느 정도 남하한 상태이기 때문에 거리가 줄어든 것이다. 운이 좋았다.
“아침을 먹고 출발할까요?”
가람이 묻자 뮐러와 웨이크는 선선히 동의했다.
“음, 더 볼일이 없으시면 그러죠. 저희는 어제 볼일을 다 봤습니다.”
은행에 들러 비상용 보석 반지를 좀 더 찾아 둘까 하던 가람은 곧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수중에 있는 현물 포함, 50만 골드로도 충분하다.
만약 더 필요하다면 다른 도시에서 찾아도 될 테지. 어쩐지 이 도시에서는 꺼림칙했다.
“저도 없는 것 같네요.”
“그렇군요. 아, 어제 백작가에 전해 준 반지 말입니다.”
어제 건넨 반지들에 대해 반쯤 잊고 있던 가람은 갑작스러운 화제에 조금 긴장했다.
“반지가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