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백작이 고맙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뭔가 질문하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없었습니다. 워낙 침통한 분위기라…….”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신 다른 것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런데, 저건 뭔가요?”
가람이 가리킨 것은 쇠로 만든 기묘한 물건이었다. 어찌 보면 수갑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그냥 고물처럼 생긴 것이 용도를 알 수가 없는 쇳덩이다.
“덫입니다.”
“덫?”
“예. 토끼나 다람쥐 같은 작은 짐승을 잡는 데 쓰는 덫입니다. 꽤 좋은 것을 팔더군요.”
덫은 왜……. 질문하려던 가람은 갑자기 웨이크가 손을 내미는 바람에 그 말을 삼켰다.
“이거…….”
웨이크가 내민 손바닥 위에는 전에 한 번 보았던 물건이 놓여 있었다. 기차역에서 불운을 막아 준다며 상인이 팔고 있던 기묘한 목각인형이다.
빈말로라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모양새였지만 가람은 그 마음이 고마워서 받아 들었다.
“선물이에요?”
“그렇습니다.”
손바닥 안의 배불뚝이 목각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가람의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오른다. 기쁨, 감동 같은 좋은 것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목각인형의 부푼 배를 두어 번 쓰다듬은 후 가람은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고마워요.”
웨이크는 대꾸 없이 그 인사를 받아들였다. 짐으로 다시 몸을 돌리는 그 행동에서 가람은 쑥스러움을 읽었다.
괜히 히죽 웃던 뮐러는 곧 웨이크를 따라 짐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가람 또한 지도를 접고 곧 그 틈에 끼었다.
손이 많았기 때문에 일은 금세 끝났다. 짐은 세 개로 나뉘어져 뽀삐와 뮐러, 웨이크의 말에 각각 조금씩 실렸다.
제 등을 비우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뽀삐는 드디어 짐말 신세에서 벗어나 기쁘다는 듯 따각따각 걷고 푸릉푸릉 환호했다.
반면 뮐러와 웨이크의 말은 조금 충격받은 기색이었는데, 한가락 하는 놈인 것 같아 따라왔더니 등에 짐을 싣게 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감히 내 등에 짐을 싣다니 하고 조금 실의에 빠진 두 말과 아무래도 좋은 듯 신난 뽀삐를 밖에 두고 여관 안으로 돌아오자 직원 일동이 깊게 고개를 숙인다.
대표로 나선 지배인이 주머니 하나를 내밀며 깊게 배꼽 인사를 했다.
“다음에도 꼭 저희 여관을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마 이 인사는 가람이 덜 거슬러 받은 200골드와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열흘의 선금을 지불했지만 기간을 다 못 채우고 떠나야 했기에 가람은 나머지 돈을 거슬러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여관의 특급 서비스를 선보이겠다며 돈을 토하느니 차라리 피를 토하고 말겠다는 지배인의 태도에 감명을 받아 결국 200골드를 덜 받기로 한 것이다.
주머니를 받아 들어 안을 열어 보니 잘 닦아 놓은 두툼한 둥근 금화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 주머니를 대충 허리의 가죽 가방에 챙긴 후 마지막으로 여관의 요리를 싼 보퉁이를 챙겨 받아 문을 나섰다.
가람이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우렁찬 배웅 인사가 터져 나온다. 무슨 일인가 싶어 힐끔거리는 행인들의 시선에, 가람은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날씨는 정말로 좋았다. 잔인하도록 푸른 하늘이 눈이 부시다. 햇살도 딱 포근하고 바람이나 기온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길을 떠나기에는 정말 좋은 날이다. 이렇게 좋은 날씨는 오랜만이었다.
도시 내에서는 말을 타고 움직일 수 없었기에 세 사람은 말의 고삐를 잡고 성문까지 걷기로 했다.
수레와 등짐을 진 사람들 사이로 걸으며 가람은 새삼 바랄라인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서 흥정을 하고, 호객을 하고, 구걸을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과 매섭게 뜬 눈으로 그 사이를 누비는 경비대는 처음과 같은 모습이었으나 가람은 처음과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맹수도 자연재해도 없어 안전하게 쉴 수 있으리라 생각한 바랄라인에는 또 다른 맹수가 살고 있었다.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가람은 그 사실을 거칠게 배웠다. 휴식처는 오직, 단 한 곳뿐. 먼 미래에 되찾을 그곳뿐이다.
일반 상가를 지나서 돌아 나오자 저 멀리 성문이 보였다. 성문 주변은 길을 떠나는 여행자들의 마지막 구매욕을 자극하는 상인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상인부터 시작해서 싸구려 단검이나 화살, 양초나 보퉁이, 자투리 가죽 같은 것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여행자들은 저마다 화살을 조금 더 보충하기도 하고, 양초를 더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 풍경을 가람의 시선이 건조하게 훑는다.
“응?”
시장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뮐러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제법 손님이 많이 모인 좌판이었다.
상인은 커다란 목소리로 손에 목각인형을 들고 그것을 홍보하고 있었다. 익숙한 생김새다.
가람의 가방에도 매달려 있는 물건이었다. 웨이크가 아침에 선물한 그것. 액운을 막아 준다는 부적이다.
여행길을 떠나기 전 행운을 빌기 위해 구입하는 모양이라고 짐작하며 그곳을 지나가려는데 호객꾼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다섯, 열! 이것만 있으면 쑴풍쑴풍 낳는다 이겁니다.”
낳는다니? 셋의 걸음이 멈칫했다. 상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산의 상징! 효과 톡톡히 본 사람 많다니까요. 자, 여기 배를 보십쇼. 영험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이가 없어 고민인 부부, 늦깎이 부부, 병아리 같은 손자손녀를 원하는 분들 다 이리로 오십시오! 저기, 저 청년도 어제 사 갔답니다. 명물 다산부적!”
천천히 가람의 시선이 웨이크를 향한다. 멍하니 상인을 바라보던 웨이크는 가람의 시선을 눈치채고 화들짝 놀랐다.
순식간에 목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손사래를 치며 온몸으로 그 시선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저는 그런 의도가,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액을 막아 준다고 해서!”
물론 아닌 것을 안다. 그러나 뮐러까지 가세하여 무언의 시선을 던지자 웨이크는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늘 무덤덤하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차분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던 손은 허공을 휘저으며 손사래 치기 바쁘다.
보기 드물게 망가지는 귀한 모습이라 가람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가람에 이어 뮐러까지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제야 웨이크는 침착함을 되찾고 평소의 무덤덤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세 사람은 조금 밝아진 기분으로 성문을 나설 수 있었다.
성문 밖은 다듬어진 관도가 펼쳐져 있었다. 제법 넓은 대로는 마차와 수레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가람은 웨이크의 도움을 받아 뽀삐의 등에 올랐다. 뽀삐의 키가 키인지라, 등자의 높이만 해도 상당해서 혼자 타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익숙해진다면 머지않아 혼자서도 말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사람을 태운 뽀삐는 잠시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다가 곧 적응해서 경쾌하게 걷기 시작했다.
뽀삐의 등 높이는 2미터에 가깝다. 게다가 걸을 때마다 흔들려서 가람은 매우 요동치는 목마에 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잡을 것이라고는 오직 고삐밖에 없는데, 부둥켜안을 기둥이나 손잡이라면 모를까 가죽 끈은 사실 그리 의지가 되지 않는다.
오직 허리와 허벅지만으로 흔들림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뽀삐가 조금만 빨리 걸으면 겁이 나서 등자에 끼운 발로 뽀삐의 배를 꽉 감싸곤 했다.
“조금 속도를 늦출까요?”
손이 하얗게 되도록 고삐를 잡고 있는 가람이 아슬아슬해 보였는지 뮐러가 슬쩍 묻는다. 웨이크는 말없이 속도를 조금 늦췄다.
두 사람의 말이 앞서 걷고, 그 사이를 가람의 말이 조금 뒤처져 걷는 모양새라 가람은 자신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뇨. 괜찮아요. 계속 가요. 익숙해져야죠.”
가람이 그렇게 말하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멀리 두려고 노력했다.
근처를 바라보면 시야의 흔들림 때문에 쉽게 속이 역해지고 만다. 그래도 좀 단련이 되었는지 처음보다는 훨씬 살 만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가람은 몸을 편안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 기색을 느낀 뽀삐가 걸음에 속도를 붙인다.
익숙해졌다곤 해도 식사를 말 위에서 할 정도는 아니라 세 사람은 중간에 멈춰 배를 채웠다.
여관에서 싸 준 음식은 식은 칠면조 다리와 치즈가 듬뿍 들어간 고구마 빵이었는데 그리 오랫동안 보존될 만한 성질의 음식은 아니었다.
그래도 맛은 꽤 좋았다. 속이 좋지 않아 입이 깔깔한 가람이 먹을 수 있었을 만큼.
속이 역해질 것을 대비해 가람은 음식을 먹는 양을 조절했다. 거의 주먹만 한 양을 먹어 허기만 채우고 말에 오른다. 금세 배가 고파졌지만 구토를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가람이 오직 말을 타는 데에 모든 신경을 기울였기 때문에 세 사람은 정말로 조용히 걷기만 했다.
간간이 뮐러가 이야깃거리를 꺼냈지만 혀를 깨물까 봐 가람이 거의 대답하지 않자 곧 그 대화조차 끊겨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오직 걷는 것에만 집중한 덕분에 노을이 질 무렵 세 사람은 관도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잘 닦인 길은 이것으로 끝이다. 관도가 끝나는 지점에는 세 갈래의 길이 나 있었고, 금속으로 만든 튼튼한 이정표가 각각의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요.”
가람이 그렇게 선언하자 두 남자는 익숙하게 손발을 맞추어 야영지를 꾸리기 시작했다.
웨이크가 무거운 침낭을 펼치거나 돌을 치우면, 가람이 주변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와 불을 피웠다. 그러면 뮐러는 솥에 물을 채워 그 위에 올려 두는 것이다.
그에 이어 또다시 가람이 가방에서 치즈와 고기 따위를 꺼내어 숭덩숭덩 잘라 넣는다.
그러면 뮐러가 국자로 그것을 휘젓고, 웨이크는 쇠꼬챙이에 고기를 끼워 굽기 시작한다. 그사이 벌레를 쫓는 잎을 꺼내어 태우는 것은 가람의 몫이다.
나란히 매인 세 마리 말도 그 분업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근처의 풀을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가람은 야영을 할 때에 아낄 수 있는 현대 물품은 아끼자는 주의였다.
고체 연료가 그 대표적인 예시였는데, 이런 식으로 나뭇가지나 마른 말똥을 구할 수 있으면 그것을 태워 연료를 아꼈다.
가지에 덜 마른 생나무가 섞여 있으면 매운 연기가 피어오르기는 했지만, 한 끼 먹자고 고체 연료를 퍽퍽 써 대면 정작 동굴이나 호숫가 같은 마른 나무를 구하기 힘든 곳에서 문을 열어야 한다.
마을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뭐가 살고 있을지 모를 이런 숲속에서 연료 때문에 비상구를 써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식사 준비를 끝내자 노을이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옅은 남색으로 가라앉은 하늘 아래에 모닥불이 불똥을 튀긴다.
스튜는 아직 끓지 않고 있었지만 고기는 제법 익었다. 보존을 위해 절인 고기는 그냥 먹기엔 몹시 짜서, 빵에 끼우거나 스튜에 소금 대신 넣어 먹거나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람이 산 고기는 고급이라 그래도 제법 풍미가 있었지만, 보통 절인 고기는 씹을 때마다 바닷물 같은 짠물이 나와 먹기 고역스럽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식사거리의 손질을 끝낸 뒤 한숨 돌리고 있자니 웨이크가 일어섰다. 화장실인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던 가람은 웨이크가 낮에 샀던 쇠 덫을 들고 일어서자 따라나섰다.
“저도 같이 가요. 좀 배워 두고 싶어서요.”
일어선 가람이 뮐러에게도 의향을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서 야영지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고기가 탈지도 모르니까요.”
가람은 두 번 권하지 않고 웨이크를 따라 어두운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해가 진 숲은 우거진 나무 그림자로 제 발밑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가람은 몇 번이나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며 겨우 밤의 숲에 익숙해지는 데 성공했다.
걸음은 높이 들고, 내딛는다. 바닥에 발을 끌지 않는다. 두 가지만 숙지하면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는 일은 드물었다.
“보통 초식 동물을 노릴 때는 이렇게 우거진 풀 바로 앞에 숨깁니다. 그리고 반드시 옆에 다른 덫을 하나 더 설치합니다.”
웨이크는 꼼꼼한 손길로 덫을 쳤다. 가람은 그가 덫을 설치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잘 봐 두었다.
“하나 더요?”
“예. 덫 하나가 실패했을 때의 보험도 되고, 덫에 걸린 초식 동물을 노린 육식 동물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잘 잡히나요?”
“베녹사스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숲에 먹을 만한 게 제법 자라고 있는 걸 보니 어느 정도 동물이 살고 있을 것 같긴 합니다.”
가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토끼는커녕 다람쥐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초식 동물이 있을까? 그런 가람을 눈치챈 웨이크는 슬그머니 웃었다.
사냥감을 찾으려면 사냥물이 아니라 그 흔적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가람은 사냥꾼도 뭣도 아니었으므로 웨이크가 가리키는 흙 패인 자국이나, 조금 상처 난 나무 귀퉁이를 바라보면서 동물의 자취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거의 운에 가깝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가람은 문득 위를 보다가 기묘한 형상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키가 작은 나무인가 했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그 형태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어두운 숲에서 만난 기묘한 형상.
소름이 돋을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곁에 선 웨이크가 담담히 한 말에 가람은 침착성을 되찾았다.
“사람이군요.”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그 형상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곧 주섬주섬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가람과 웨이크는 자리에 서서 그 형상을 지켜보았다. 마치 신발을 벗는 것 같은 행동을 하더니 곧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대체 저 사람 뭐 하는 거죠? 하고 질문하려던 가람은 웨이크가 매우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웨이크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서 있는 앞쪽은 절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