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절벽 앞에서 신발을 벗고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
“멈춰요!”
가람은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어 곧바로 외쳤다.
그 사람이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처럼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람이 소리 지르자 옆에 있던 웨이크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가람은 순식간에 뒤처져 웨이크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웨이크는 정말로 빨랐다. 달린다기보다 땅을 박차고 길게 멀리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걸음 달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로 쑥쑥 튀어 나간다.
웨이크는 곧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한 남자를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순박한 얼굴의 남자는 웨이크에게 뒷덜미가 잡힌 채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사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아직 뺨에 눈물 자욱이 남아 있었다.
그 자국을 보고 가람은 남자가 하려던 일을 확신했다. 이 사람은, 자살하려던 것이다.
일단 급한 마음에 잡긴 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망설이던 가람은 결국 이 말을 꺼내고 말았다.
“저기, 식사하셨어요?”
가람의 말에 남자의 눈에 눈물이 망울망울 맺히더니 곧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곧이어 쓰러지듯 주저앉아 큰 소리로 통곡하는 남자 덕분에 가람은 그만 당황해 버렸다.
제법 먹음직스럽게 치즈 방울을 터뜨리는 스튜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뮐러는 가람과 웨이크가 데려온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눈치 빠르게 한 자리를 내어주었다.
남자는 비척비척 걸어와 웨이크가 권하는 대로 앉고, 가람이 들려 주는 대로 스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누굽니까?”
스튜를 거의 다 먹어 갈 무렵, 뮐러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가람은 덤덤히 대답했다.
“숲에서 만났어요.”
뮐러는 그 뒤에 무언가 설명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람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뒷부분은 상상과 추리를 동원해서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퉁퉁한 배를 보니, 푸줏간 주인인가? 아니면 술주정뱅이?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웨이크처럼 추리해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뮐러가 결국 포기할 때 즈음, 결국 뮐러에게 ‘살찐 남자’로 평가받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잘 먹었습니다.”
스튜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남자는 그제야 마음이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그는 질문하고 싶지만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세 사람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소금 장수 솔터입니다. 바랄라인에서 소금을 파는, 아니, 팔던 사람이지요.”
타닥 하고 장작이 타서 쪼개어진다. 불똥 튀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솔터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붉고 검은 불그림자가 그의 코와 눈을 뒤덮고 어른어른 춤을 춘다. 그는 회한 어린 얼굴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것도 소용이 없지만, 이렇게 앉고 보니 누군가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은 기분이군요. 지겨운 이야기겠지만,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솔터의 이야기는 그가 이름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바랄라인에 상경해 날품팔이로 한 자리를 마련했었다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맨손으로 상경한 시골 청년 솔터는 그 성실함 하나만으로 번듯한 ‘소금 상인’까지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좋았습니다. 동트기 전부터 소금을 떼어 오고, 밤에는 집에서 늦게까지 소금 덩어리를 빻으며 새우잠을 잤지만 그때가 좋았지요.
계속, 계속 위로 올라가기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행상인 말렉이 크게 한탕 하고 싶지 않냐고 묻더군요. 말렉은 상경했을 때부터 저를 많이 도와줬던 동료입니다.
늘 기회를 잡으라고 했었죠. 그게 기회였습니다. 그때는 그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처럼 보였습니다.”
솔터를 잠시 입을 다물고 모닥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람은 어쩐지 그 뒷이야기를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렉이 손 내밀어 줬는데 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누누이 말했던 공것은 없다는 말을 기억해야 했었는데.”
솔터는 잠시 한탄하다가 곧 빠른 어조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기였습니다. 저는 빌릴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돈을 빌렸고, 그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 말렉의 집에 가 보니 텅 비어 있더군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말렉이 사라지자 그가 빚을 졌던 사람들이 모두 저에게 와서 으름장을 놓더군요.
하지만 정말로 저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치고, 도망치고. 말렉을 찾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지요.
그러다가 결국 다 포기하고 드러누울 생각으로 바랄라인으로 돌아갔는데, 하하.”
솔터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젖어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느릿하게 말을 잇는다.
“고문꾼이 있더군요. 저처럼 배째라며 드러눕는 사람들의 배를 정말로 가르는 사람들입니다.
빚을 진 사람을 고문해서 돈이 나올 만한 어떤 구석이라도 토해 내게 만드는 작자들이죠.
우연찮게 그들이 저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잡히는 건 시간문제겠죠. 바랄라인의 누군가가 저를 봤을 테니까요. 저는 제 의지를 그리 맹신하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온 저이지만, 마지막으로 지키고 싶은 것 정도는 있습니다. 가족까지 노예 딱지를 붙여 팔아 버린다는 놈들인데.
그래서 이곳에서 저 스스로 제 입을 닫게 만들고 모든 것을 끝내고자 한 것입니다.”
솔터가 이야기를 끝내자 모닥불이 타닥타닥 떠들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한동안 조용히 모닥불의 말을 들어 주었다. 한동안 불똥 튀는 소리가 이어진다.
웨이크는 묵묵히 불똥과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뮐러는 솔터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가람은 고민에 빠졌다.
솔터의 일은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그냥 넘기기 힘들었다.
모닥불만 바라보며 핼쑥한 안색으로 앉아 있는 솔터는 동정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가람은 그에게 동정 외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솔터가 어느 정도의 빚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람에게 있어서 그리 큰 금액은 아닐 터다.
가람의 고민은 그 후로도 좀 더 이어졌다. 그리고 가람은 깨달았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솔터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고, 자살하려 했던 행동 자체가 가람의 동정을 염두에 두고 한 계산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를 도와줌으로써 어떤 흉계에 휘말릴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솔터가 산적 따위의 끄나풀이라 가람 일행에게 돈이 좀 있나 싶어 정찰차 파견된 사람이라거나.
하지만 이곳은 관도다. 매일 경비병이 오가는 길목이었다.
만약 솔터가 산적이라면 이 가까운 곳에 산적이 있다는 건데, 감옥에 들어가는 게 소원인 산적이 아닌 이상 그럴 일은 없다.
좀 멀리서 그의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가 가람 일행을 덮칠지도 모르지만, 가람조차 바늘에 의지해 움직일 뿐 자신이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 모르는데 산적 따위가 가람의 앞길을 예측하고 기다리고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라고 봐도 좋았다.
상념에 잠겨 있던 가람은 문득 서글퍼졌다. 막다른 길에 몰려 죽을까 말까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가 서글프다.
만약 이런 일이 원래 세계에서 벌어졌다면, 가람은 저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 딱한 사람을 도왔을 것이다.
도울 방법보다 의심부터 해야 하는 현실이, 그리고 그렇게 변한 자신이 서글프다.
만약 솔터의 말이 거짓말이라 해도 그가 말한 모든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다행스러운 일이고, 사실이라면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테니 마찬가지로 다행한 일이다.
솔직히, 가람은 누군가가 지독한 꼴을 당하는 모습을 그냥 묵과하기 힘들었다.
솔터가 그 도살자들이 잡아 죽였던 가엾은 농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결론 끝에, 가람은 질문했다.
“빚진 금액이 얼마 정도인데요?”
“제가 빌린 금액은 200골드 남짓이었습니다. 하지만 말렉이 500골드나 빌렸더군요. 이자가 붙고 벌금까지 붙어서 어느새 빚은 3천 골드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말렉을 찾지 않고 처음부터 포기한 채로 하루하루 빚을 갚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이만큼까지 불어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찾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다 늦은 말이지만요. 하하. 3천 골드면, 1년에 50골드씩 번다고 해도 60년이 걸리는군요.
그사이 이자가 계속 붙을 테니 평생 빚만 갚다가 끝날지도. 아니, 이미 고문꾼이 쫓고 있으니 그럴 일도 없겠군요.”
솔터는 맥 빠진 얼굴로 허허롭게 웃었다. 그는 조용히 앉아 있는 세 사람에게 일일이 눈을 맞추더니 이야기를 들어 줘서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어디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