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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52화 (52/256)

52화

가람이 급히 붙잡자 솔터는 흐릿하게 웃었다. 둥글둥글하게 배까지 나온 아저씨인데 왜 이렇게 처연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가람은 진지한 어조로 질문했다.

“지금이라도 그 빚 다 갚으면, 해결되는 거예요?”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 솔터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런 그를 손짓해서 자리에 앉힌 후 가람은 대답을 기다렸다.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그는 느리게 반응했다.

“그 말은, 설마…….”

“맞아요. 제가 갚아 드릴게요.”

가람이 선언하자 놀람 섞인 침묵이 내려앉았다. 얼떨떨한 솔터의 얼굴에 천천히 자조적인 미소가 떠오른다.

가람의 말이 허세이거나, 농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얼굴을 읽고, 가람은 주머니에서 대뜸 네모반듯한 금화 네 개를 꺼내었다.

“4천 골드예요. 3천 골드에서 이자가 더 붙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좋을 대로 쓰세요.”

솔터의 시선이 반들반들 노란 금화에 못 박혔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 버린 것 같은 그의 손에 가람은 직접 금화 네 개를 쥐여 주었다.

솔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손안의 금화를 바라보다가 멍하니 가람을 쳐다보았다.

“이건, 혹시 또 다른 수법의 사기라거나 그런 것 아니지요? 혹시 꿈입니까?”

“아니에요. 차후에 갚을 수 있다면 갚고, 갚을 수 없다면 갚지 않아도 좋아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손안의 금화를 꽉 잡아 감촉을 확인하는 그에게 가람은 조용히 말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몇 천 골드, 금은방에서 언제든지 주워 올 수 있는 반지 하나면 그 배가 되는 금액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사치도, 향락도 누릴 시간이 없는 가람에게 그것은 1패스의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필요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편이 좋았다.

“왜, 왜 제게 이렇게…… 은혜를 베푸는 겁니까?”

솔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몸을 굽힌 채 가람을 올려다본다. 벌겋게 핏발이 선 눈에는 금세 눈물이 맺힐 것 같았다.

“사람 돕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요. 돕고 싶으니 돕는 거죠.”

가람의 담담한 대답에 솔터는 다시 손안의 금화를 내려다보았다. 몇 번이나 ‘정말로, 정말로?’ 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반쯤 쉰 목으로 그는 누구에게 묻는지 모를 질문을 거푸 퍼부었다.

손바닥 안의 금화가 세상의 진리라도 되는 듯 그는 한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고요한 눈에 파문이 한 방울, 두 방울. 와들와들 떨리더니 곧 쏟아질 것 같은 격정이 가득 차 뜨겁게 뚝뚝 떨어져 내린다.

마침내 그는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끅, 끅 흐느끼는 울음은 담담한 척했으나 그의 시름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려 주는 것 같아 세 사람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울며 연신 머리를 숙였다. 울음과 감사가 뒤섞여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가람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솔터의 등을 토닥여 그를 달래는 일은 뮐러가 맡았다. 솔터는 한참 흐느끼다가 눈물을 훔치고는 반짝이는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성공해서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결연한 말에 가람은 웃으며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답해 주었다. 도울 수 있다면 돕고, 그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대가를 바란다면 그건 도움을 베푼 것이 아니라 판매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훈훈한 분위기가 흐르는데 갑자기 묵묵히 앉아 있던 웨이크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만 자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간이…….”

말을 흐리며 흘긋 올려다보는 시선을 따라가니 달 세 개가 나란히 떠 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떠오르는 달의 개수가 많아져 밝아지는지라, 늦은 줄도 몰랐다. 훈훈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는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솔터가 조금 무안한 얼굴로 사과하자 가람은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하지만 자긴 해야겠네요.”

지금 자도 많이 늦었다. 가람은 잘 준비를 하기 전에 망토를 벗어 솔터에게 건네주었다. 침낭이 셋뿐이라 솔터의 몫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뮐러와 웨이크도 제 망토를 벗어 준 덕분에 솔터는 마법 망토에 파묻혀 밤을 보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짧은 밤 인사 후, 각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일행 중에 귀가 밝고 영리한 말이 있다면 불침번은 필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뽀삐는 충분하고도 남는 불침번이었다.

모두 순조롭게 꿈나라로 여행을 떠나는데 가람은 익숙지 않은 털가죽 침낭 때문에 고역스러워하고 있었다.

무두질 약품 냄새와 고릿고릿한 냄새가 더해져서 비에 젖어 곰팡이가 슨 양말을 코에 처박고 자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털 침낭에서 풍기는 노린내에 곤혹스러워하다가 결국 머리를 빼고 잠드는 방법을 택했다. 침낭의 윗부분을 베개처럼 말아서 베고 눕자 코끝에 시원한 밤공기가 흐른다.

바로 앞에 보이는 밤하늘에는 압도될 만큼 많은 별이 펼쳐져 있었다. 이 세계에 왔을 때 보았던 별 많은 하늘이다.

뽀삐는 한편에 앉아 가람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가람이 짧게 밤 인사를 건넨다.

“잘 부탁해. 뽀삐.”

모두 자고 있는 밤이었기에 뽀삐는 울음소리 대신 눈을 깜빡여 대답했다.

* * *

다음 날 아침, 날씨는 놀랍도록 맑았다. 누군가 정성껏 빨아 널어놓은 것 같은 밀도 높은 하얀 구름이 느긋하게 흐른다.

야숙을 하고 나면 으레 옷이 이슬에 젖어 축축하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이 산뜻했다. 공기 전체에 기분 좋은 기운이 흐르는 것 같은 날씨다.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은 웨이크였다. 일어나서 침낭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침낭을 돌돌 말아 버리는 재주를 보여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깨어난 사람이 없어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숨이 죽어 가는 숯에 마른 풀과 장작을 던져 넣어 불씨를 살리고 가방에서 마른 음식을 꺼내어 네 명분의 몫을 준비했다.

커다란 한 장의 육포는 돌돌 말려 있어서 먹을 때마다 단검으로 적당히 잘라 끊어 내야 했다. 빵 또한 매우 단단한 것이라 그는 톱질하듯 단검을 슬금슬금 움직여 빵 덩이를 베어 냈다.

치즈를 두툼하게 썰어 내고, 잼을 빵 위에 한 덩이씩 퍼낼 무렵 가람이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킨다.

멍하니 사방을 살피던 가람은 빼곡한 수림을 발견하고 천천히 어젯밤의 일들을 기억해 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웨이크와 꾸물꾸물 자리에서 나오고 있는 뮐러, 그리고 누운 채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는 솔터를 확인하고 세 마리 말들 또한 제자리에 있음을 본 후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털가죽 침낭은 냄새가 나고 무거운 데다 솜 침낭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축률이 낮았지만 푹신함이나 보온성은 비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몸을 웅크리지 않고 잤더니 결리는 데가 없고 수면 부족으로 인해 몸이 무거운 일도 없다.

솜 침낭에서 잘 때는 자고 일어나도 잔 것 같지가 않았는데. 제대로 된 숙소에서 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길에서 이렇게나 푹 잔 것은 처음이다.

“푹 주무셨습니까?”

뮐러는 그렇게 말하곤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물 덩어리를 내밀었다. 세수를 하라는 뜻이다. 침낭 속이 좀 더울 정도로 따듯했던 탓인지 가람의 얼굴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일들이 좀 민망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가람은 덤덤하게 물 덩이에 손을 넣어 물을 떠서 세수를 하고 이도 닦았다.

뮐러는 웨이크와 솔터에게도 같은 양의 물 덩이를 만들어 준 후 자신의 얼굴도 씻고 물도 마셨다.

침낭까지 모두 정리하고 솔터에게 빌려주었던 망토까지 돌려받아 등에 걸친 후, 자리를 잡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손에 들자 그제야 솔터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세 분은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어제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어조다. 아침에 일어나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자 솔터는 격렬한 감동과 차가운 이성을 동시에 맛보았다. 그리고 상인 특유의 조심성을 되찾았다.

이 대단한 행운에 감사하며 하루아침에 지옥에서 끌어 올려 준 가람에게 실수하지 않도록 어휘를 고르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음, 남쪽으로 갈 생각이에요.”

솔터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세수를 마치고 얼굴의 물기를 닦던 가람이었다. 화장품 같은 것은 바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남쪽 말입니까?”

“정확히는 남서쪽이지만. 음. 그런데 솔터 씨는 바랄라인으로 돌아가서 다시 사업을 하실 건가요?”

적당히 대답하던 가람은 자신의 답변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리고 육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여행을 하며 고역스러운 많은 것들을 만났지만 아침에 딱딱하고 텁텁한 마른 식사를 하는 것은 여전히 힘겨운 일이다.

“예. 일단 빚을 갚고 나서요. 한 번 잃은 신뢰를 되찾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돈을 갚고 나면 제가 말렉을 쫓느라 그랬다는 걸 알 테니 이해해 줄 겁니다.”

“그, 고문꾼들은요? 별로 좋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로 그냥 그렇게 놓아줄까요?”

“그럼요. 그 사람들도 어엿한 직업인입니다. 하는 일이 좀 험하긴 하지만, 쫓는 사람들 입장에선 제가 돈을 떼어먹은 사기꾼이니……. 사실 그 사람들도 엄연한 국가에 발을 걸친 사람들인걸요.”

솔터의 말을 들으며 가람은 육포를 씹는 틈틈이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 바랄라인의 상인 생활이나 쫓기던 때의 나날, 또는 그 말렉이라는 작자에 대한 질문이었다.

가람의 의도대로 그 질문들은 그를 잔뜩 흥분시켰다. 거품을 물며 말렉의 무도함과 파렴치함을 고하는 솔터는 가람에게 질문을 던질 생각 따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입니다. 저는 순진한 사람이 아닌데도 상대가 마음먹고 사기를 치려고 들면 깜빡 속을 수밖에 없더군요. 하긴, 그게 직업이니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자리를 잡아야 하는 처지에 다가오는 사람을 모두 경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솔직히 이방인은 저이니 그들이 저를 경계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여겨야 했습니다.”

솔터는 고요한 아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어찌나 열정적으로 웅변하는지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말로 그가 겪었던 일을 눈앞에서 보고, 말렉이라는 자가 천하의 무도한 악마로 여겨질 지경이다.

상인 특유의 혼을 빼앗는 것 같은 화술은 때로는 연기를 하고, 때로는 손뼉을 부딪쳐 효과음을 내며 박진감 있게 이어졌다.

가람과 뮐러는 적당히 맞장구치며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기의 첫째 조건은 신뢰입니다. 이번에 정말로 단단히 당했지요. 사기꾼들은 상대가 자기를 믿고 있는지, 믿지 않는지 기막히게 알아차립니다. 믿고 있지 않다 싶으면 아예 사기를 치지 않지요. 딱 믿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뒤통수를 치는 겁니다. 그래서 당할 수밖에 없어요. 일단 믿는 작업이 끝나야 사기를 치는데 어떻게 실패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면 안 당했을 거다 뭐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건 당해 봐야 아는 겁니다. 그런 소리 하는 사람만큼 멍청한 사람이 없어요. 나는 지금 수다를 떨고 있는 너조차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정떨어지는 소릴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니.”

이어지던 솔터의 명강의 ‘사기에 대하여’는 웨이크의 차분한 말에 다소 갑작스럽게 그 끝을 맞이했다.

“다 드셨으면 이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웨이크가 모닥불을 흩뜨리며 짐을 챙겨 일어나자 솔터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 무안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귓불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그리고 웨이크가 고삐를 끌고 오는 사이 솔터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저희는 갈 길이 멀어서 여기서 그만 가야겠네요. 바랄라인으로 돌아가시면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뭔가 더 할 말이 없을까 고민하는데 솔터는 오히려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절이라도 할 기세의 그를 가람이 황급히 멈춰 세우자 눈물까지 글썽이며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후에라도 바랄라인에 오시면 제가 정말로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소금 장수 솔터를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할 테니 꼭 와서 저를 찾아 주십시오. 그리고 여행길이 평안하시길 기원하고 또 기원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뇨,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정말로 감사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두어 번 더 서로를 향한 감사의 말이 오갔다. 지켜보던 뮐러는 이대로는 끝이 없겠다는 생각에 가람의 손을 끌어다가 뽀삐의 등에 앉혔다.

가람은 말 등에 앉은 후에도 몇 번이나 솔터와 안부 인사를 나누고는 결국 그를 길 위에 남겨 두고 떠났다.

먼저 떠나라고 해도 가지 않고 동시에 각자의 길을 가자고 해도 그가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터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꼭 옛날의 저 같군요. 저도 한때 믿었던 친구에게 마법서를 도둑맞은 적이 있었죠.”

이제 완전히 점이 되었음에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솔터를 슬쩍 뒤돌아보던 뮐러의 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가람이 묻자 뮐러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서 다시 훔쳐 왔죠.”

잠시 황당하게 뮐러를 보던 가람은 문득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저도 그런 적 있어요. 믿고 있던 친구에게 잠시 책을 맡겼는데 잃어버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책이 나중에 놀러 갔던 친구의 집에 꽂혀 있더군요. 제 이름까지 쓰여 있었는데요. 결국 친구와 사이가 틀어질까 봐 말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책은 어떻게 됐습니까?”

“새로 샀죠.”

뮐러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에게 같은 책을 또 사야 하는 이유를 말하지 못했던 가람은 결국 제 용돈을 털어 책을 사는 수밖에 없었다.

뮐러가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가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흔한 책이었나 보군요.”

“네. 뭐, 그랬죠.”

이 세계는 인쇄술이 존재하긴 했지만 폭넓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아직 산업 자체가 어부나 농부 같은 1차 산업에 집중되어 있었고, 책의 수요 자체가 없으니 책을 많이 찍어 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기술 자체도 몹시 조잡했고, 기술공도 드물었다.

그런 처지라, 인쇄술은 그저 조금 큰 도장 정도로 사용되는 것이 전부였다.

보통 극악 범죄자의 현상 수배서나 나라 전체에 붙이는 방, 길드의 공고문 등 같은 내용이 대량으로 필요한 일에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책은 대부분 필사본이었고, 서점마다 구할 수 있는 책도 모두 달랐다. 게다가 책은 필사꾼이 복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도 책을 인쇄하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그 외에 무지하고 다루기 쉬운 백성을 원하는 군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이 세계에서 책은 특정 계층 이상 되는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말 전혀 아깝지 않으십니까? 4천 골드 말입니다.”

뮐러가 넌지시 묻자 가람은 어깨만 으쓱였다.

“전혀요. 사실 저는 그런 게 별로 익숙하지 않아요.”

“그런 거라니, 어떤 것 말입니까?”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요. 특히 나쁜 방향으로 결정짓는 걸 정말 못 하죠. 그 상황은 제가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 도움은 제게 있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만약 솔터를 돕지 않아서 그가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고 다음 날 그 흔적을 발견했다면 생각만 해도 정말.”

가람은 뒷말 대신 표정으로 그 끔찍함을 표현했다. 그리고 뮐러는 무언으로 납득했다. 하긴, 그렇기도 하군. 그나저나.

“이제 말을 타는 게 좀 익숙하신가 보군요.”

뮐러의 말에 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뽀삐에 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떤 일을 익힘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긴장이라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괜히 실수하지 않으려고 긴장한 탓에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힘을 빼고 걸터앉자 중심을 잡기도 더 쉬웠다.

힘이 빠진 탓에 쓸리고 있는 허벅지와 충격을 받고 있는 허리가 후에 제법 아플 것 같지만 그러면서 승마에 필요한 근육들이 생기는 게 아니겠는가?

“조금 더 빠르게 가도 될 것 같아요. 뛰는 건 아직 무리지만, 으앗!”

가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뽀삐가 알아듣기라도 한 듯 따각따각 걸어 뮐러와 웨이크의 말을 제치고 선두로 나섰다.

그간 뒤에서 꽁무니만 졸졸 따라갔던 것이 몹시도 억울했는지 갈기를 휘날리며 푸릉거리는 것이 여간 상큼한 것이 아니다.

빠르게 걷자 등이 흔들리는 속도가 거의 두 배가 되었다.

가람은 중간중간 손등의 패스를 보랴, 고삐를 잡으랴, 중심을 잡으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간신히 패스의 방향과 전혀 다른 곳으로 가는 불상사만은 막을 수 있었다.

“워워, 뽀삐야. 음, 이쪽이에요.”

잘 가고 있는 뽀삐를 멈춰 세운 가람은 멀쩡한 길을 버려두고 나무가 우거진 숲을 가리켰다.

말끔하게 닦인 길을 내버려 두고 험한 산으로 오르자는 가람의 말에 두 사람은 당황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따랐다.

크페타인의 산에서 이미 시달릴 대로 시달려 온갖 고초를 겪은 웨이크는 가람이 절벽으로 가자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두 사람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걷자 가람은 조금 민망해져서 얼굴을 조금 붉혔다.

숲은 우거져 있긴 했지만 말을 타고 못 갈 정도는 아니라 세 사람은 말에 오른 상태로 길을 걸었다. 가람에게는 조금 힘겨운 일이었다.

패스는 깊고 깊은 숲을 가리켰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길은 더욱 험해져서 결국 밤이 되자 도저히 말을 타고 다닐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숲속 야영지에서 웨이크가 드물게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 등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며 선언했다.

“오늘 저녁은 이겁니다.”

가람은 웨이크가 갑자기 깜짝 선물처럼 꺼낸 것에 그야말로 기겁하고 놀랐다. 아니, 덫을 칠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왜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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