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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53화 (53/256)

53화

웨이크는 죽은 토끼의 귀를 잡고 자랑스레 흔들다가 경악하는 가람을 보고 의아해졌다. 가람은 떨떠름한 얼굴로 아니라며 대충 대답했다.

웨이크는 끝까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능숙하게 솜씨를 발휘해 뻣뻣하게 굳은 토끼를 잘 두들겨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꺼낸 뒤 대충 씻어 불에 구웠다.

“운이 좋았습니다.”

가람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귀엽던 토끼가 푸줏간의 무언가로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뮐러는 얼마 전 가람이 겪은 일을 알면서도 앞에서 토끼를 손질하는 웨이크의 무신경함에 도저히 할 말이 없어 입만 벌리고 있었다.

슬금슬금 가람의 눈치를 살피니 속에서 울컥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삼키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울 것 같지는 않아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냥꾼들이란.

“뭐 도와줄 건 없나요?”

가람이 예의상 질문했다. 질문하면서도 내장을 치워 달라거나 하는 부탁을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요리에 심취한 웨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웨이크는 생강가루를 뿌리고 기름을 칠하고 소금을 뿌리는 등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재주란 재주는 모두 부리고 있었다.

가람은 이제 갈색으로 익어 제법 요리의 모양새를 갖춘 토끼를 보며 안도하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처음 손질하면서 토끼의 내장을 꺼낼 때는 사실 좀 견디기 힘들었다.

웨이크의 요리는 그가 열심히 한 만큼 걸작이라고 불리기 충분했다.

절인 고기와 마른 음식에 절어 있던 깔깔한 입에 갓 잡아 구운 고기는 그야말로 갈쭉한 육즙이 일품인 별미였다.

그러나 맛과는 별개로 가람은 토끼 다리를 들고 뜯으며 닭다리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이것도 같이 드십시오.”

“술을요?”

뮐러가 꺼내 든 것은 짚에 싸인 술병이었다. 이런 외지에서 술을? 가람이 걱정스레 주변을 둘러보자 웨이크가 안심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도 괜찮습니다. 근처에 맹수는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더군요.”

웨이크까지 그렇게 말하자 가람은 뮐러가 내미는 나무잔을 받아 들었다. 잔 가득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술은 예상과는 달리 바닥에 간신히 깔리는 정도의 양만 차올라 있었다.

가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뮐러가 슬쩍 윙크하며 보란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술이 늘어나는 마법!”

딱 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깔려 있던 술이 퐁퐁 솟아올라 컵을 가득 채웠다.

웨이크가 든 컵도 똑같이 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 모금 마셔 보니 사과 향이 느껴지는 달달한 과실주다.

“이런 마법도 있어요?”

가람이 얼떨떨하게 묻자 뮐러가 배를 잡고 하하핫 웃는다. 만족스럽게 술을 들이켠 웨이크가 대신 대답했다.

“바랄라인 리큐르입니다. 과실주의 수분을 다 날려 낸 뒤 비밀스러운 기법으로 가공하면 물 한 컵에 한 모금만 타도 제법 그럴듯한 술이 되죠. 값이 비싸지만 바랄라인에 들를 수 있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구입하려고 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이건 바랄라인 사과 리큐르고, 저쪽에 꿀 리큐르와 복숭아 리큐르가 있으니 나중에 드셔 보시죠. 또 하나 좋은 점은 매우 빨리 깨고 뒤끝이 없다는 점입니다.”

길게 설명한 웨이크는 단숨에 컵을 비우고 복숭아 리큐르를 따라서 마셨다.

가람은 사과 리큐르를 홀짝이며 한 손에 들고 있던 토끼 다리를 한 입 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에 반사되는 나뭇잎들 사이로 별들이 경쟁하듯 반짝인다.

날씨가 맑은 탓인지 손을 뻗으면 그대로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워 보였다. 밤공기 특유의 향에 숲과 장작의 그을음, 토끼 다리의 훈연 향이 섞여 든다.

모든 날이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근처에서 곰의 흔적을 발견하면 잠도 못 자고 걸을 때도 있었고, 지나치게 걸은 후 찾아오는 다리의 근육통에 땅이 피워 올리는 냉기까지 더해져 잠 못 이루게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단조로운 나날이 이어지는데 근처에 있을 것 같은 패스는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피로와 근육통이 뒤섞여 가람은 마치 막 태어난 사슴처럼 비틀비틀 걸었다.

“잠깐, 오솔길입니다.”

웨이크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오솔길은커녕 우거진 풀밖에 보이지 않는다.

뮐러도 가람과 같은 표정이었다. 웨이크는 직접 손을 뻗어 풀을 들추어낸 후 발에 밟혀서 숨이 죽은 풀들을 보여 주었다.

“자주 다니는 길은 아닌 것 같군요. 아무래도 이 근처에 마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을이요?”

사방을 둘러봐도 그저 숲, 숲뿐이다. 우거진 산골에 있을 만한 마을이라면 대체 무슨 마을인가?

의아했지만 오솔길이 이어진 방향이 마침 패스의 바늘이 가리키는 쪽이라 세 사람은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길의 끝에 웨이크의 말대로 정말 작은 마을이 있었다.

“전쟁 시절 전쟁을 피해 산으로 도망친 피난민들이 이런 식으로 자리를 잡아 만든 마을이 꽤 있다고 들었습니다.”

뮐러의 말을 들으며 가람은 왼손 손등을 들어 올렸다. 바늘은 정확히 마을 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들어가요.”

빵 굽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은 대단히 평화로운 풍경이었기에 가람과 일행은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앞을 막아서듯 교차되는 창대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마 이 마을의 자경대인 듯 마을 입구를 지키는 경비는 몹시 경계 어린 태도였다. 지금까지 여러 마을을 다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가람은 조금 당황했다.

“이방인이 이런 곳에 무슨 일이지?”

교류가 많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보니 이방인에 대한 경계가 몹시 강한 모양이다. 마을이라기보다 촌락에 가까운 작은 마을이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상황에 대처하는 것은 별개다. 결국 뮐러가 대신 나섰다.

“저희는 여행자인데 길을 잃어서 헤매던 중 간신히 이 마을을 찾아 들어왔습니다.”

산을 헤매며 때 묻은 세 사람의 몰골이 경비의 심금을 제법 울린 모양인지 두 남자는 시선을 교환하더니 창대를 물렸다. 그러나 굵은 목소리로 경고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조용히. 문제를 일으키지 말도록.”

“네, 그럴게요.”

순순히 대답하는 가람에게 잠깐 시선을 준 경비는 가람이 동양인임을 깨닫고 조금 신기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면역이 된 가람은 시선을 흘리며 조용히 마을에 입성해 손등을 살폈다. 바늘이 아주 짧다. 근처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마을 안에 있는 건 처음이군요.”

가람의 말에 뮐러와 웨이크는 조금 의아해졌다. 가람에게 있어서는 세 번째 패스지만 뮐러와 웨이크에게 있어서는 고작 두 번째 패스일 뿐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의아함을 눈치챘지만 가람은 설명 대신 바늘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마을 안으로 한 발짝씩 걸어 들어갈 때마다 주민들은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태도로 세 사람을 대했다.

슬쩍 다듬던 야채를 통 아래로 숨기거나 그러면서도 끝까지 시선은 따라붙는 식이었다.

마을은 약 30채 남짓한 규모로 단출한 구조였는데, 여관이나 상점 같은 시설이 전혀 없이 오로지 민가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아마 소를 키우는 사람은 우유와 야채를 교환하거나 각자의 집에서 약간의 돈을 받고 판매하는 식인 것 같았다.

계속해서 걸어가던 가람은 패스가 거의 점에 가까운 모습이 되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작은 집에 조금 당황했다.

혹시나 싶어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자 바늘은 단숨에 뒤쪽을 가리켰다. 틀림없다. 이번 패스는 이 집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주인 없는 동굴이나 절벽에 있었다면 쉬웠을 것이다. 거침없이 걷던 가람이 집 앞에 멈춰 서자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해서 고개를 빼고 이 낯선 방문자들을 살폈다.

등 뒤로 빼곡하게 꽂히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과 따라붙는 자경대원의 시선에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다.

가람은 혹시나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그 집 주변을 빙빙 돌았다.

하지만 바늘은 정확히 작은 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집의 마당 텃밭에서 지렁이를 쪼아 먹던 작은 암탉이 무슨 일인가 싶어 목을 길게 빼고 꼭꼭 중얼거린다.

“왜 그러십니까?”

가람의 행동이 심히 수상해 시선을 끌어 모으는 데 부족함이 없었던지라 점점 집요해지는 마을 사람들의 눈을 견디다 못한 뮐러가 결국 직접 질문했다.

“그게, 이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남의 집에 불쑥불쑥 들어가긴 좀…….”

가람이 쭈뼛쭈뼛 대답했다. 주어가 생략된 말이었지만 뮐러는 그 뜻을 알아듣고 함께 난감해졌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찾고 있다는 것이 이 안에 있는 모양이다. 둘이 함께 끙끙 고민하는데 웨이크가 불쑥 제안했다.

“돈을 주고 이 집 자체를 사 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사실 가람이 제일 먼저 떠올린 것도 그 방법이었다. 하지만 허튼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계 어린 시선들에 곧 접어 버렸다.

갑자기 나타난 여행자들이 멀쩡히 살고 있는 집을 덥석 구입하겠다는데 순순히 팔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그런 짓을 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집은 작고 낡긴 했지만 애정 어린 손길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낡은 나무문도 몇 번이나 고쳐 단 흔적이 역력했고 벽에 진흙을 덧바른 티가 확연하다.

한두 해 살던 집은 아닌 걸로 보였다. 집의 주인은 이 집을 그저 주거지 정도로 여기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세 사람이 집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요?”

찔리는 구석이 있던 가람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허리가 굽을 대로 굽은 할머니가 주춤주춤 걸어 다가선다.

마당을 노닐던 암탉이 매우 반기는 눈치인 것을 보아 아마 이 집의 주인인 모양이었다.

수상한 자들이 제 집을 놓고 빙빙 돌고 있으니 걱정이 되어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나타난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난감한 상황이라 가람이 땀만 흘리는데 의외로 노인은 선선한 태도였다.

“여행자인감?”

“아, 네.”

“잘 곳을 찾고 있소?”

노인의 질문이 마치 우물에 드리워진 동아줄처럼 느껴져 가람이 정신을 번쩍 차리는데, 뮐러 또한 같은 생각을 했던지 매끄러운 태도로 나섰다.

“그렇습니다. 혹시 빈방이 있다면 묵어갈 수 있을까요?”

노인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절뚝절뚝 다가와서는 가람과 웨이크, 뮐러를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그러곤 잘 펴지지도 않는 허리를 우드득 펴서 해가 지고 있는 산봉우리를 한 차례 응시하더니 사태가 어찌 될까 싶어 구경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휘둘러보고 혀를 찼다. 무슨 구경이 났다고. 에잉.

“들어오시구려. 여긴 촌 동네라 여관 같은 것도 없어. 내 아들 방이 비어 있으니 거기서 묵으시게.”

너무나 쉽게 풀려 버린 일에 가람이 얼떨떨하게 서 있자 노인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재촉한다.

어여 들어와. 벌레 들어와! 세 사람은 각자의 말을 마당에 들여놓고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을 노닐던 닭은 갑작스러운 봉변에 말을 피해 꼭꼭꼭 도망치기 바쁘다. 세 마리 말과 한 마리 닭은 마당을 나눠 가지고 서로를 살피기에 바빴다.

노인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동작으로 부지깽이를 집어 벽난로의 불씨를 살렸다.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집 내부는 밖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욱 집 주인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람은 노인이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손때가 반질반질한 의자의 팔걸이를 발견했다.

집의 구조는 입구에서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했다. 들어가면 바로 벽난로가 보이고, 벽난로의 왼쪽에는 둥근 나무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왼편에는 침대와 궤짝이 놓여 있었고 궤짝 옆의 작은 방문 너머가 아들의 방인 듯했다.

“집이 아주 꽉 찬 것 같네그려.”

노인이 벽난로 위에 놓여 있던 주전자에서 묽은 무언가를 따라 세 사람 앞에 놓아 주었다. 컵이 모자라는지 가람의 것은 컵이고 웨이크와 뮐러의 것은 사발이었다.

노인이 권하는 대로 한 모금 마셔 보니 곡물 가루를 끓였는지 숭늉 같은 맛이 났다.

세 사람이 목을 축이는 것을 확인한 노인은 그제야 참고 있던 질문을 꺼내었다.

“그런데 어디서 오는 참인가?”

“바랄라인입니다.”

웨이크의 대답에 노인의 얼굴이 대번에 반가움으로 물든다.

“바랄라인 사람인가?”

“아닙니다.”

웨이크가 부정하자 노인은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사이 가람은 집 안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이 안 어딘가에 패스가 있다.

손등을 표 나지 않게 여기저기로 옮겨 가며 바늘을 관찰하던 가람은 문득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에 끌어당겨지는 기분. 끌림이라고 말하는 편이 올바를 듯하다. 마치 자신이 자석에 딸려 가는 철 가루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끌림은 침대 옆에 놓인 궤짝으로 이어졌다.

패스는 궤짝 속에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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