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런데 이렇게 낯선 사람을 불쑥불쑥 집에 들이는 게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뮐러가 조심스레 묻자 노인은 이가 다 빠진 쪼글쪼글한 입술로 홀홀 웃었다.
휘어지는 눈매가 고왔던 젊은 시절을 연상하게 하는 웃음이라 가람도 궤짝에 못 박혔던 시선을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이 뭐 무서운 거 있겠나. 그냥 밖에 돌아다니는 젊은이들 보면 다 내 아들 같고 딸 같고 그렇지. 혹시나 아들 소식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이방인만 보면 이리 집으로 들이고 만다네.”
“아들이요?”
“응. 아들이 하나 있는데, 몇 해 전에 큰일을 하고 싶다고 이 마을을 떠났지.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는 바랄라인에서 소금 장수를 한다는 편지였는데, 그 후로 소식이 뚝 끊겼어. 수소문을 해 봐도 바랄라인에는 그런 사람 없다는데,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편지를 써도 보낼 수가 없으니 쌓인 편지만 한가득일세.”
숨이 차는지 잠시 말을 쉰 노인은 죽기 전에 아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하며 말문을 흐렸다.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소매로 찍어 닦는 그녀를 바라보던 가람은 소금 장수라는 말에 무언가를 직감했다. 만약 이 직감대로라면 대단한 우연이었다.
“혹시 그 소금 장수 이름이 솔터인가요?”
“내 아들을 아는감?”
조심스레 꺼낸 질문에 노인은 가람의 손을 부여잡으며 격렬하게 반색했다. 가람은 조금 놀랐으나 부드럽게 말했다.
“네. 얼마 전에 만난 적이 있어요.”
“잘 지내던가? 어디 아픈 덴 없고?”
“예. 바랄라인으로 다시 돌아갔으니 이제 편지하셔도 될 거예요.”
가람의 말에 노인은 거듭 고마우이 하고 울음 섞인 말로 감사했다. 심장에 도는 피가 따듯해지는 느낌이다. 가람은 저도 모르게 미소했다. 그때 솔터를 돕길 잘했다.
만약 솔터가 자살했다면 이 노인의 소원은 영영 이루어질 수 없었으리라.
가람은 안도하며 노인이 자신의 손을 아들의 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다듬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크, 내 정신 좀 봐. 먼 길 오느라 시장했을 텐데.”
노인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가람이 대신 일어서며 만류했다.
“아니에요. 계세요. 그냥 불만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불을?”
노인은 가람이 앉혀 주는 대로 자리에 앉더니 어렵지도 않은 부탁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은 집 밖으로 나가 뽀삐의 말 등에서 식량을 가지고 들어왔다.
묵묵히 앉아 있던 웨이크와 뮐러도 가람을 도와 할머니에게 솥과 식기의 위치를 물어 저녁을 차리는 데 손을 보태었다.
솥에 고기와 재료를 되는대로 던져 넣고 물을 채워 끓인다. 그사이 빵을 구워 반을 갈라 햄을 채워 넣기도 했다.
각자에게 바랄라인 리큐르가 한 잔씩 돌아가고 앞접시에 잘 익은 스튜와 야채, 고기를 놓자 언제 넣어 뒀는지 할머니가 잿더미에서 포근포근한 감자를 꺼내어 손수 갈라 앞에 놓아 주었다.
저녁 준비가 끝나자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주 솜씨가 좋구먼.”
대단히 만족스러운 듯한 칭찬에 가람은 그저 짧게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 답례했다.
할머니를 위해 스튜의 모든 재료는 아주 작게 잘려서 요리되었다. 끓는 중에도 틈틈이 가위로 잘라 댄 덕분인지 이가 다 빠진 옴쭉한 입으로도 먹기 그리 불편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이름이 뭔가? 나는 리사라네. 리사.”
“가람이에요. 이쪽은 뮐러, 웨이크. 여행 중인 동료죠.”
“그렇구먼. 그래, 우리 아들은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건가?”
“그냥 길에서, 만났어요. 같은 야영지에서 야숙을 했거든요.”
가람은 어색한 얼굴을 재빨리 갈무리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노인이 그럭저럭 납득하자 안도하며 최대한 조심스러운 어조로 질문했다.
“저기, 그런데 이건 그냥 궁금해서 여쭈어 보는 건데, 저 궤짝 안에는 뭐가 들어 있나요?”
“흠?”
“아, 곤란하시면 안 보여 주셔도 괜찮아요. 그냥, 음…….”
남의 집 궤짝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행동이다. 도둑이나,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아들의 소식을 가져다준 가람 일행에게 깊은 호의가 생겼는지 언짢은 기색 없이 선선히 웃었다.
“호기심이 많은 아가씨구먼. 조금 부끄럽다만.”
노인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궤짝을 들어다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 서서히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가람은 긴장한 채로 상자 속을 주시했다. 마침내 뚜껑이 모두 열리고 나자 예상대로 그 안에는 패스가 있었다. 익숙한 황금색 빛의 구슬.
쉽다. 너무 쉬워서 얼떨떨할 지경이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도 있는 건가?
가람은 믿기지 않아서 손을 내밀었다. 패스에 살짝 가져다 대자 순식간에 손등으로 스며든다.
패스를 흡수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지만 정말 괴상하고 이상한 느낌이다. 몸 안 어딘가가 쿠웅 울리는 기분이었다.
영혼에 무게가 있다면 영혼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고, 영혼에 색깔이 있다면 색이 더 진해진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었다.
만약 가람 자신이 그림이었다면 두꺼운 매직으로 테두리를 그려 그림 속에서 가람 자신만이 굵직하게 강조되는 듯했다.
손등의 숫자가 70으로 바뀌었다. 쉽게 찾은 것치고는 대단히 많은 양의 패스였다.
그 울림에 젖어 있던 가람은 조금 뒤늦게 리사 할머니가 자신을 이상하게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자 안의 무언가를 집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상자 위 허공에 손을 대고 감동받고 있으니 여간 이상하게 보이는 게 아니었으리라.
패스를 흡수할 때 주변에서 보기에 무언가 이상한 현상이 생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가람이 조금 민망하게 손을 수습하며 짧게 변명했다.
“갑자기 손에 쥐가 나서요…….”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많은 편지였다.
종이가 한두 푼 하는 세상도 아닌데, 이 작은 마을에서 할머니가 종이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기란 정말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는 모두 귀퉁이가 너덜너덜하게 낡아 있었다.
“여기는 아들이 보내 준 편지, 그리고 이건 내가 쓴 편지라우. 방물장수가 올 때마다 한 장씩 사서 종이를 모았는데, 편지를 보내도 받을 사람이 없다고 하니…….”
잠시 말을 못 잇던 노인은 자신이 주책을 부렸다며 곧 궤짝을 수습해 침대 옆에 소중히 내려놓았다.
“그런데 아가씨는 고향이 어딘가? 아주 멀리서 온 것 같아 그러네.”
“아, 음, 동대륙에서 왔어요.”
“아니, 그렇게 먼 곳에서? 왜 여기까지 왔누?”
“찾을 게 있어서요.”
가람은 선선히 웃으며 대답했지만 노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노인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당부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집에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갑작스러운 화제에 가람은 조금 당황했다. 노인은 가람의 당황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꼭 자주 연락하고, 집에 편지해요. 응? 이렇게 예쁜 딸을 밖에 보내 놨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속이 타시겠어. 아직 이렇게 어린데.”
갑자기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가람은 복잡한 마음으로 어금니를 악물어 간신히 그것을 참아 냈으나 눈에 스미는 감정을 모두 막지는 못했다.
가람은 달아오르는 눈시울에 당황해 일부러 과장되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 고인 눈물을 꾸몄다. 전혀 졸리지 않았으나, 제법 능청스러운 하품이 나와 다행이었다.
“이런, 피곤할 텐데 너무 붙잡고 있었네. 방은 저기 내 아들 방 쓰고, 얼마든지 묵고 싶은 만큼 묵어. 아들의 소식을 가져온 손님들인데. 이 마을은 워낙 작아서 여관도 변변한 것이 없다네.”
노인 리사는 손수 가람을 아들의 방으로 안내하고 웨이크와 뮐러에게도 다른 방을 내어주었다. 다른 식구는 없다고 했으니 아마 생전에 남편 방인 듯싶었다.
아들의 방은 매일 청소가 되었던 듯 깔끔했다. 이부자리도 산뜻하게 세탁이 된 것이었다. 가람은 무거운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감정을 가라앉혔다.
감정은 가라앉히려고 할수록 더욱 튀어 오르고 부풀어 수습하지 못할 지경까지 치달았다.
가람은 이부자리를 끌어안고 소리 죽여 울었다. 귀 밝은 누군가가 들을까 싶어 울음을 잘게 씹어 삼켰다.
그리움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하며 상황에 대한 비관이기도 하다. 억누르고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열어 본 마음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뮐러와 웨이크는 가람의 눈이 조금 부어 있음을 발견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무언가를 숨기는 데 서툰 웨이크가 조금 어색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딱히 곤란한 일은 없었다.
가람 일행은 좀 더 묵고 갈 것을 노인 리사가 몹시도 권해 오는 터라 다음 패스가 충전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작은 마을이긴 하지만 식량을 구할 수도 있었고, 리사의 살림을 돌보아 주는 일도 꽤 보람이 있었으므로 나쁜 일은 아니었다.
가람은 웨이크와 하루 종일 장작을 패며 노인의 겨울나기를 도왔고 뮐러는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식량이나 약초 따위를 사서 보충했다.
첫날에는 그리도 경계하던 사람들이 솔터의 친구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언제 경계했냐는 듯 순박하게 돌변했다.
마을의 자랑이라며 떠들어 대는 통에 결국 어울려 술을 마셔야 했을 정도로 친근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단조로운 나날이었으나, 이런 평화는 까마득하게 오랜만이었다. 정말로 오랜만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할머니와 식사를 하고, 장작을 패고, 마을을 돌며 시간을 보내고는 아주 작은 선술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사는 사람들과 가볍게 술을 마시며 매일매일이 흘렀다.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밖의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다. 매일 그날이 그날인 소박한 마을이니 오랜만에 만나 보는 여행자가 반가울 수밖에.
첫날에는 솔터와 친구였다던 남성 두엇이 슬쩍 다가왔고, 가람 일행에 대한 경계가 점점 풀어지자 그 수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결국에는 마을의 경비를 서는 경비대까지 가람 일행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뮐러는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음유 시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조금 우쭐해졌다.
그러나 가람은 얼굴이 벌건 아저씨들이 옛날이야기라도 듣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 것에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사실, 이야기도 잘하지 못하는 터라 팀팀의 말재주를 빌려 오지 않았다면 많이 곤란했을 거다.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다음 날부터 비가 쏟아졌었다. 그렇게 화창했던 하늘이 다 속임수였다는 듯 하늘은 잿빛 구름이 꽉 끼었다.
연일 쏟아지는 비가 리사 할머니는 반가운 눈치였다. 선술집의 술꾼들도 술맛이 나는 날씨라며 좋아했으나 가람은 걱정스러웠다.
패스의 충전이 거의 끝나 감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맑아질 기미가 전혀 안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패스의 충전이 끝났을 때, 가람은 조금만 더 기다려 보려고 했다. 방향이 결정된 손등을 보면 금방이라도 떠나고 싶은데 밖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루만, 하루만 더 있으면 날이 맑아지지 않을까 싶어 기다려 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함이 심해져 갔다.
패스가 차 있을 때 찾으러 가지 않으면 시간을 굉장히 낭비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빨리 찾고, 충전시켜야 한다. 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늘을 보며 구름을 읽곤 했다.
그리고 패스가 충전된 지 3일째, 가람은 결단을 내렸다.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지고 있었다.
“꼭 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