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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55화 (55/256)

55화

리사 할머니가 눈에 걱정을 그렁그렁 매달고 손을 붙잡아 온다. 주름지고 낡은 손은 매우 뜨거웠다. 가람 또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요 며칠간 가람은 마을에서 무언가를 많이 얻었다. 정, 사람 사는 맛, 즐거움, 우정이나 가족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이든 가람에게서 고갈되었던 것과 아귀가 맞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 스스로에게도 말 못 할 마음이었지만 이렇게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정붙이고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 생각은 스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지만.

“죄송해요.”

“이렇게 비가 오는데…….”

할머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더니 다시 가람의 손만 꼬옥 잡았다. 그 주름진 손 위로 부슬비가 눈물처럼 몇 방울 떨어진다.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 몇몇이 가람 일행을 둘러싸고 있었다.

변변한 우산도 없어 다들 토란 잎을 우산처럼 쓰고 있다. 빗방울이 구슬처럼 토란 잎 안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곧 그칠 거예요. 괜찮아요.”

“길에서 감기라도 들면 어떡하누.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응?”

리사 할머니의 걱정은 애처로울 만큼 따듯했다. 한 마디씩 들을 때마다 목구멍 안쪽이 아려 오는 것 같았다. 가람은 메는 목을 침을 삼켜 풀어내며 할머니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할머니도 감기 조심하셔야 해요. 장작 많이 패 놓았으니 아끼지 마시구요.”

리사 할머니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가람의 눈동자는 조금 충혈되어 있었지만 단단했다. 더 붙잡는 것은 민폐였다.

늙은이가 돼서 주책은 부리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가람을 잡는 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다시 올 거지?”

가람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아들만 기다리는 할머니가 자신 또한 기다릴까 걱정이 되었다.

기다리며 속이 탈까 염려됐다. 그런 가람 대신 뮐러가 나서서 대답했다.

“예. 저희는 여행자이니 이 근처를 지날 일도 있겠죠. 그럼 꼭 다시 오겠습니다.”

리사 할머니는 호언장담하는 뮐러를 어른어른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주름 사이로 젖어 드는 눈물을 가람이 얼른 옷소매로 닦아 줬다.

“젊은 애들은 떠나면 안 와. 돌아오는 걸 못 봤어. 내 아들도…….”

차마 말을 못 잇던 리사 할머니는 한참 동안 세 사람의 얼굴을 마음속에라도 새기려는 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집 안에 잠시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들고 나와 가람에게 안겨 주었다. 받고 보니 낡은 천으로 꼬깃꼬깃 단단히 싼 보퉁이다.

익숙한 무늬라 어디서 보았나 했더니 할머니가 즐겨 입던 치마의 천이었다.

“할머니, 이런 거 안 주셔도…….”

말하던 가람은 보퉁이 안으로 만져지는 감촉에 다시 목이 메었다. 투박한 나무통 하나와 동글동글하고 적당히 말랑말랑한 감촉.

할머니가 가끔 아껴 먹던 말린 자두와 꿀에 절인 밤이었다. 자두는 뮐러가 기웃거리면 생색내듯 하나씩 건네어 주곤 했는데 가람에게는 그냥 손에 쥐여 줬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주지 않았다. 할머니의 낙이자 유일한 간식거리인 말린 자두, 그리고 꿀에 절인 밤은 이런 산골짜기에서는 보물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다.

만져지는 양으로 보아 전부 가지고 온 것이 분명했다.

“별로 가진 건 없고, 내가 그냥 고마워서…….”

달고 쫄깃한 말린 자두와 꿀에 절인 밤은 할머니가 가진 것 중에서 유일하게 낡지 않고 좋은 것이었다.

워낙 단출한 살림이라 챙겨 줄 것이 없다며 리사 할머니는 조금 부끄럽게 웃었다.

이가 다 빠져 옴쭉한 입이 빙그레 미소하는 것을 보고 가람 또한 급히 뽀삐의 말 등을 뒤져 사탕과 바랄라인 리큐르를 있는 대로 다 꺼내어 할머니에게 선물했다.

리사 할머니는 한사코 사양하다가 다음에 올 때 또 사서 오겠다는 말에 받아 들었다.

“저흰 멀리까지 다니니까 최대한 천천히 드셔야 해요.”

가람의 당부에 리사 할머니는 그러겠다며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의 살림에 돈으로 보태어 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서 큰 재물은 오히려 해가 되는 법이다.

재물을 탐내고 할머니를 해할지도 모른다. 탐욕은 모든 범죄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왔었던 때처럼 조심해서 떠나 주는 것이 최고다.

“이거 우리가 조금씩 모은 건데.”

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자 젖소 키우는 피터가 대표로 나서서 무언가를 전달했다. 작은 보퉁이 세 개다.

“이건 선술집 포보가 매상 올려 줘서 고맙다고 주는 육포고, 이건 내가 만든 치즈야. 그리고 이건 세단이 주는 약초야. 먹으면 그냥 몸에 다 좋대.”

일일이 설명하는 피터의 말에 걱정이 듬뿍 묻어 있어 가람의 코끝이 다시 시큰해졌다.

이 마을의 몇 안 되는 사냥꾼 중 하나인 조크는 사냥 기술을 나누며 웨이크와 정이 많이 들었는지 부둥켜안고 난리도 아니다.

뮐러는 마을 아이들의 눈물 섞인 배웅을 받고 있었다. 단순한 물 마법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마법을 본 아이들에게 뮐러는 오래도록 전설적인 남자로 기억되리라.

“그럼, 이만 정말로 가 볼게요.”

가람이 뽀삐의 등에 올라앉아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이 마을에 머물면서 할 수 있게 된 것이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혼자서도 말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허벅지 살이 다 까지도록 연습한 덕분에 가볍게라면 달릴 수도 있게 되었다.

웨이크가 내내 전문 교습을 해 준 덕분이지만,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람 일행은 눈물 섞인 배웅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화창한 날에 도착한 것과 달리 떠나는 날에는 비가 끈질기게도 내렸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작별의 여운에 젖어 묵묵히 말을 몰았다. 세 마리 말도 할머니네 닭과 정이 들었는지 먹먹한 눈치였다.

그러나 여운이 가시고 나자 가람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어떻게 자죠?”

숲은 시끄러운 곳이다. 비가 오면 더했다. 비가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와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을 때리는 소리로 사방이 가득 차서 작은 목소리 정도는 금세 묻힐 만큼 소란하다.

수다를 떨기에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몇 번이나 외쳐 웨이크와 뮐러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

어두운 하늘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숲에 마법을 걸어 보통보다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운 곳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시야가 몹시도 나쁜 데다, 우거진 나무들은 뒤에 무언가 굉장한 괴물이라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섬증이 밀려와 가람은 억지로 밝은 생각을 하려 했다. 그러나 ‘바퀴벌레 괴물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라고 생각하면 반대로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글쎄요. 일단 길 밖으로 나가 봐야겠습니다.”

뮐러의 목소리는 빗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렸다. 웨이크는 구름을 읽으려다가 우거진 나뭇잎에 가려서 여의치 않자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다시 대화가 끊겼고, 가람은 참지 못하고 또 입을 열었다.

“만약 비가 더 많이 오면 어쩌죠?”

여전히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람은 세 번 만에 말을 전달할 수 있었다. 뽀삐만 가람의 말을 한 번에 듣고 귀를 쫑긋거릴 뿐이다.

“운이 좋다면 동굴이라도 발견하게 되겠죠.”

“운이 나쁘면요?”

“나무 위에 잎으로 엮은 지붕을 만들어 잠을 청해야죠.”

“굴러떨어지지 않을까요?”

“단단히 줄로 묶어야죠.”

담담한 뮐러의 말에 가람은 뽀삐를 재촉했다. 말의 목덜미를 탁탁 두드리며 ‘조금만 빨리 가자.’라고 말하자 굳이 배를 찰 것도 없이 뽀삐는 알아듣고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짧게 히힝 하고 대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구름이 낀 하늘이 워낙 어두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가람이 어렴풋이 점심때는 지나지 않았을까 생각할 무렵, 세 사람은 길을 발견했다.

잘 닦인 길은 아니었고,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도 알 수 없는 길이었으나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으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가람은 크게 마음이 놓였다.

“무섭습니까?”

가람이 시커먼 숲을 흘끔 보며 진저리를 치는데 웨이크가 무덤덤하게 물어 왔다.

가람은 이 질문이 무슨 의도를 담은 건가 생각하다가 머리를 털어 버리고 대답했다.

“조금요.”

가람의 대답은 웨이크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숲에서 늘 살아오던 사람이 숲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공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웨이크는 가람의 두려움을 공감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무에 몸을 묶고 자려면 어느 정도 우거진 곳이 아니면 안 됩니다. 숲이 무섭다면, 동굴을 찾아보는 게 좋겠군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길을 따라 좀 내려가자 저 멀리 천막이 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치 커다란 여행자들의 모임 같았는데, 긴 나무 평상을 줄줄이 붙이고 그 위에 왁스 칠 한 얇은 모직물로 지붕을 만들어 비를 막고 있었다.

나무 평상에는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모닥불이 없다는 점이다. 하긴, 나무며 공기며 할 것 없이 모든 게 다 축축하게 젖었으니 모닥불을 피울 방법이 없다.

가람은 빗물이 흐르는 바닥에서 잠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하게 여기며 뽀삐의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저곳에서 쉴 수 있을 것 같으니 서둘러 잠자리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고, 허벅지와 엉덩이에게 더 이상 가혹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저 천막은 대체 뭘까요?”

“행상인들의 천막입니다. 도시에서 도시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장사꾼들인데, 여행하는 상인이라고 여기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정말 운이 좋군요. 그나저나, 자리가 있어야 할 텐데요.”

뮐러는 몹시 반가운 기색으로 설명했다. 이런 길에서는 돈도 다 소용없다. 돌에게 ‘500골드 줄 테니까 동굴이 되어 보지 않을래?’ 하고 말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무나 꽃도 마찬가지다. 길에서 유용한 것은 오직 운과 물건들, 그리고 생존 능력이다.

행상인 휩스는 가람이 천막을 발견하고 나서 3분쯤 후에야 그들을 발견했다.

준마 세 마리에 입고 있는 옷은 가죽옷이고 말 등에 짐을 가득 실은 것을 보니 여행자치고는 돈도 제법 있어 보인다.

매우 부드러운 양가죽 셔츠에 물소 가죽 신발은 이름난 장인이 만든 물건인지 그 모양새부터 다르다.

몸에 맞춘 듯 유려한 선의 옷을 보며 휩스는 습관처럼 감정했다. 10골드? 12골드쯤 되어 보이는데. 어디 귀하신 나으리인가?

어디서든 나으리란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은 애증의 존재이다.

그 두둑한 주머니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젠체하는 태도와 입만 벙긋해도 경을 치겠다는 둥 채찍으로 후려갈기겠다는 둥 하는 성질 나쁜 망아지 같은 꼬락서니는 정말로 좋게 봐주기 힘들었다.

그러나 가람 일행이 조금 더 가까워졌을 때 휩스는 안도했다. 동양인 나으리는 없기 때문이다.

천막 가까이에 도착한 가람은 조금 당황했다.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게다가 모두 젖은 가죽신을 벗고 발을 말리고 있는 통에 콤콤한 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냄새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된 터라 가람은 천천히 말을 몰아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휩스가 불쑥 막아서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내일 아침까지 있을 거요?”

가람은 대체 이 사람이 누군가 하고 가늠하다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세 사람에 15실버요. 앉아서 자면 한 사람당 5실버, 누워서 자면 10실버. 말은 평상 밖에서 비만 피할 수 있소. 한 마리당 1실버.”

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을 끔벅이던 가람은 그것이 이 천막을 빌리는 대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베록의 여관이 하루 묵는 데 10실버였음을 생각하면 제법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비가 올 때만 할 수 있는 한철 장사라 값이 좀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돈이 아까우면 빗물 위에서 강제로 씻김당하며 자는 수밖에.

“누워서 잘게요. 여기 33실버.”

가람이 건네는 은전 여섯 개를 휩스는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음, 33실버 딱 맞군. 이쪽이우.”

휩스가 턱을 까딱거리곤 걸음을 옮기자 가람은 서둘러 뽀삐의 말 등에서 내려 따라갔다.

평상은 하나하나가 주차장 두 칸 정도의 크기로, 총 여덟 개가 조금 띄엄띄엄 사이를 두고 붙어 있었다.

휩스를 따라 도착하고 보니 이미 평상에는 선객이 있었다. 하지만 자리가 남는 평상은 이 평상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기에 가람은 불평하지 못했다.

“바짝 붙어서 자면 세 명 정도는 누워서 잘 수 있을 거요. 만약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지 말고 그냥 참고.”

대단히 불친절한 안내 문구를 뱉은 휩스는 가람이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휙 소리 나게 떠나 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가람의 어깨를 뽀삐가 위로하듯 주둥이로 두드린다. 가람 또한 뽀삐의 콧잔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가람에게 발을 말리던 평상 위의 선객 세 명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꽂혀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가람이 먼저 인사하자 선객 세 명이 주춤주춤 모여 앉아 자리를 내어주었다.

남자가 하나 여자가 둘이다. 세 명 모두 허리에 검이나 활, 철퇴나 프레일 따위를 차고 있었다.

가람은 그들을 관찰하며 평상 위로 올라앉았다. 뮐러와 웨이크도 각자 빠르게 제 우비를 수습해 말 등에 올리고 평상 위에 다가앉는다.

“배고프네요.”

어색하게 부츠를 벗어 발을 말리던 가람이 말했다. 이렇게 발 냄새가 나는데 식욕이 돌다니, 여러 의미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뮐러가 한 차례 웃고는 등짐에서 무화과 잼과 빵, 육포를 꺼내었다. 불이 없었으므로 스튜 같은 국물 음식은 무리였다.

웨이크는 양초를 꺼냈고, 가람은 양초에 불을 붙였다. 스튜는 무리겠지만 양초에 육포 정도는 구워 먹을 수 있다. 마을에서 선물받은 약초로 차를 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술이 없는 게 아쉽네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그런지 분위기가 마치 야외 주점 같았다.

대학 시절 축제 때 노상 주점을 운영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가람이 입맛을 다시자 뮐러가 은근히 물어 왔다.

“좀 사 올까요?”

“여기서요?”

“예. 행상인 집단이지 않습니까? 잘 찾아보면 술을 파는 행상인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듣고 새삼 둘러보니 여기저기에서 무언가 늘어놓고 팔기도 하고, 물건 앞에서 고민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쨌거나 꽤 구미가 당기는 말이라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뮐러가 곧 구해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꼭 행상인이 파는 것만 사는 게 아닙니다. 아마 술을 좀 갖고 있는 여행자에게 팔라고 하면 선선히 팔아 줄 겁니다.”

뮐러가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웨이크가 조용히 말했다. 가람이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는데, 전혀 관심 갖고 있지 않던 선객이 불쑥 말을 걸었다.

“여행한 지 얼마 안 되셨나요?”

여행자치고는 고운 말투다. 목소리의 주인은 굽슬굽슬한 금발 머리카락에 빗방울을 매달고 있는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앳된 아가씨였다.

밝은 갈색 눈동자는 날이 맑다면 황금색으로 보일 법도 했다. 어쨌든, 호기심이 가득 찬 커다란 눈동자는 굉장히 귀여웠다.

“티노시! 그렇게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된다고 했잖니.”

가람이 막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급히 끼어들어 주의를 준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듯싶었다.

사과의 말을 꺼내려는 남자보다 앞서 가람이 입을 열었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어요.”

남자의 혼찌검에 찔끔한 표정을 지었던 티노시가 화악 하고 살아난 얼굴로 우쭐해져 남자를 돌아본다.

그는 아예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더니 가람 일행을 조심스레 살폈다.

“제 여동생이 아직 어려서, 죄송합니다.”

가람은 많은 여행자들을 만나 보지 못해 몰랐지만, 여행자들이란 다들 유쾌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보통은 사연이 있기 마련이고, 대부분 우울하고 조금 위험한 사람들이다.

말이 여행자지 수배 중인 범죄자인 경우도 있고, 마을에서도 쫓겨난 추방자인 경우도 있었다.

길을 떠도는 부랑자들 중에는 질이 나쁜 사람도 아주 많아서 이렇게 불쑥 말을 걸었다가 뜻하지 않게 시비에 말려드는 경우도 많았다.

“괜찮아요. 식전이면 좀 들겠어요?”

가람은 티노시가 침이 줄줄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무화과 잼이 발린 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권했다.

네! 하고 받아 드는 티노시를 보고 그의 오빠는 아예 눈을 가려 버렸다. 그래도 가람이 그리 질이 나쁜 부류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그는 움찔움찔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좀 수상한 사람들이다. 뭘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것보다 티노시, 오빠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은 먹지 말라고……. 후, 됐다.

“사실 어제부터 제대로 된 걸 거의 못 먹었거든요. 헤헤.”

티노시는 뺨을 다람쥐마냥 부풀리고 가람이 뜯어 준 주먹만 한 빵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리고 민망한 듯 헤헤 웃는 것이 귀여워 한 덩이 더 주자 그것도 재깍 받아 먹어 버렸다. 어찌나 잘 먹는지 자꾸 무언가 주게 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빵과 육포를 건네던 가람은, 문득 모두가 아주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멈추었다.

정적.

“저기, 죄송하지만 저도 좀 얻어먹을 수 없을까요.”

정적을 깨고 질문한 사람은 티노시와 똑같은 빛깔의 눈과 머리칼을 가진 여자였다. 아마 티노시의 언니쯤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녀의 말에 티노시의 오빠가 경악하며 ‘세레데트!’ 하고 외친다. 아마 이름인 듯싶었다.

그러나 때마침 티노시 오빠의 위장이 요란하게 울었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더듬더듬 변명했다.

“저도 어제부터 굶어서…….”

남자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붉어지고 점점 아래로 숙여진다.

결국 다섯 사람은 음식을 앞에 놓고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뒤늦게 술병을 들고 희희낙락하게 돌아온 뮐러는 상황을 보며 짤막하게 말한 뒤 다시 떠났다.

“술을 좀 더 구해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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