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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56화 (56/256)

56화

Chapter 7

에루시오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집안의 첫째로 차녀 세레데트와 막내 여동생 티노시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에 세상을 돌아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혼자 떠나려고 했는데 세레데트에게 들키고 말았고, 결국 둘이 떠나려는데 막내 티노시에게까지 들켜 입막음을 위해 결국 다 같이 집을 떠나왔다는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여행이 아니라 가출이 아닌가 싶었지만 가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여행을 한 지 이제 네 달 정도 되었습니다.”

가람이 여행한 시간도 딱 그 정도 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가람이 상념에 잠기려는데, 시간을 주지 않고 곧장 티노시의 발랄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처음에는 정말 장난 아니었어요. 막, 길을 물어봤는데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마을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어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도시에서는 강도 짓도 당당하게 하더라고요. 결국 오빠가 흠씬 두들겨 줬지만.”

“그래서 결국 경비대에 벌금을 내야 했지.”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에루시오가 담담히 덧붙였다.

뮐러가 구해 온 술은 제법 질 좋은 백포도주와 럼 위스키였는데 발효 중인 위스키에 사탕수수를 넣어 단맛과 풍미를 더한 술이었다.

제법 독한데도 불구하고 맛은 달았고, 입 안에 향이 은은하게 남는 점이 특이했다.

아무래도 집집마다 술을 담그다 보니 이런 독특한 술이 나올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럭저럭 맛은 괜찮았다.

“맞아. 그래서 거지가 됐잖아. 티노시가 그 남자한테서 빼앗은 무기라도 숨겨 놨으니 다행이지.”

세레데트가 백포도주를 홀짝이며 점잖게 말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점잖지가 않다.

“빼앗아요?”

가람이 조금 놀라 묻자 티노시가 히죽 웃으며 자랑스럽게 무언가를 꺼내 놓았다. 제법 묵직하고 손질이 잘 된 메이스다.

그러고 보니, 사람은 세 명인데 무기는 검, 활, 프레일, 메이스로 네 개라 의아했는데 주인이 없는 무기였던 모양이다.

“이거예요. 꽤 좋은 거 같아요.”

촛불을 받아 반짝거리는 메이스는 끝이 여러 개의 도끼 같은 칼날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양날 도끼 세 개를 교차해 붙여 둔 것 같았다. 둔기에 가깝긴 하지만 날이 있어 위협적이었다.

옆에서 럼 위스키를 홀짝이던 웨이크가 짧게 감정했다.

“좋은 것이군요. 판매한다면 15골드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웨이크가 말한 가격이 예상보다 훨씬 컸던지 세 사람이 기쁨에 젖어 짧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 말을 듣고 가람은 메이스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손잡이에는 단단히 가죽을 붙여 미끄러지지 않게끔 돼 있고, 통짜로 전부 쇠로 만들어져 있다.

가람이 유심히 살펴보자 티노시가 방글방글 웃으며 손에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한번 잡아 보세요.”

“아니, 난 이런 건…….”

거절하던 가람은 결국 권유에 못 이겨 잡아 보았다. 확실히 좋은 물건인지 휘두르기 쉽게 무게의 배분이 잘 되어 있었고, 손잡이도 손에 착 달라붙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걸로 공격당한 대상은 검에 베인 것 정도는 우스울 만큼 참혹한 꼴이 될 것 같았다.

가람이 어색하게 메이스를 내려놓자 세레데트가 눈을 빛내며 질문했다.

“별로예요?”

“아뇨, 좋은 물건이네요.”

“저기, 그러면 혹시 이거 구입해 주시지 않을래요? 싸게 14골드에 드릴게요. 네?”

갑작스러운 세레데트의 말에 에루시오가 마시던 술을 뱉을 만큼 놀라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세레데트! 무슨 짓이야! 불쾌해하시잖아!”

에루시오가 눈치를 보는 것과 달리 가람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다만 차분한 미인으로 보이던 세레데트가 갑자기 돌변한 것에 조금 놀랐을 뿐이다.

에루시오의 말에 세레데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 표정이 티노시와 거의 판박이라, 새삼 자매구나 싶었다.

“무기를 안 갖고 계시기에 권해 본 거야. 우리 지금 완전 빈털터리라서 식량 살 돈도 없잖아.”

“맞아. 맞아. 벌금 내서 돈 없잖아.”

티노시까지 가세하자 에루시오는 배신감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티노시 너마저!

“너희가 합류해서 여행비가 늘어났기 때문이잖아. 소 판 돈으로 나 하나 정도는 충분히 건사할 수 있었어.”

“소도 헐값에 팔려고 했으면서.”

세레데트가 반격하자 에루시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소를 팔았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역시 여행이라기보다 가출 쪽이 맞는 것 같다.

두 여동생이 참새처럼 짹짹 협공하자 에루시오는 조금씩 바닥으로 침몰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길도 못 묻고 막 그랬을걸.”

“마을에서 세레데트 언니가 사기당할 뻔한 것도 막아 줬잖아.”

그대로 두면 에루시오가 바닥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처럼 보였기에 가람은 웃음을 참으며 참새 같은 말다툼에 끼어들었다.

“제가 살게요. 안 그래도 무기 하나 사려고 했어요.”

에루시오는 순간 가람의 등 뒤로 비치는 후광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상냥한 사람도 있다니.

뮐러는 순박한 청년 하나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술잔을 들어 웃는 얼굴을 숨겼다. 정말 귀여운 일행이다. 여행길에서 이만큼이나 유쾌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힘든 일이건만.

“14골드 되겠습니다아―”

세레데트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금화 다섯 개를 받아 챙겼다. 10골드 금화 하나와 1골드 금화 네 개다.

이걸로 당분간 마을에서도 여관비가 없어서 노숙을 하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평상을 빌리는 데 갖고 있는 대부분의 돈을 써 버려서 그 뒤가 암담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여행자란 보통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전 재산이며 몹시 궁핍하기 마련이다.

어디 귀족가의 도련님이 아닌 이상은 개당 10쿠퍼 남짓 하는 종이 같은 빵에 개울물과 산열매를 주식으로 하며, 길을 걸으면서 보이는 온갖 것들을 주워 팔아 여행비를 충당하곤 한다.

길바닥에 값나가는 게 굴러다닐 리 없으니 기껏해야 약초나 죽은 동물의 가죽, 몬스터 부산물 따위였다.

이곳의 빵은 가람이 알던 버터와 우유가 잔뜩 들어간 폭신폭신한 빵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빵도 있었지만, 보통 주먹만 한 것이 1실버는 했고, 꽤 사는 집안이 아니면 가끔 특별한 날에나 사 먹는 정도였다.

보통 돈이 없는 여행자들은 보관이 용이하고 값이 싸다는 이유로 가람이 이곳에 왔을 때 처음 먹어 봤던 건빵 같은 빵을 먹곤 했다.

“그런데 소를 팔다뇨?”

구입한 메이스를 짐 사이에 잘 갈무리해 두고 가람이 질문했다.

갑자기 매우 쑥스러워하기 시작한 에루시오 대신 금화 다섯 개로 대번에 기분이 좋아진 세레데트가 싱글싱글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집에서 키우던 소예요. 한창 힘쓸 때의 소를 1골드에 팔 뻔했지 뭐예요. 정말, 칼 쓰는 일 외에는 잘하는 게 없다니까요.”

세레데트는 마치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에루시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티노시가 함께 한숨을 쉰다. 죽이 척척 맞는 자매였다.

에루시오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헛기침을 하느라 바쁘다.

“그래도 우리 마을에서는 제일 인기 있는 남자였어요. 무려 멧돼지를 혼자 잡은 멧돼지 슬레이어예요. 그렇게 큰 멧돼지를 혼자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을걸요.”

티노시가 가루가 되기 직전의 에루시오가 불쌍했던지 슬쩍 화제를 돌린다. 이래서 막내란 그렇게 얄미움에도 불구하고 미워할 수가 없다.

에루시오는 조금 감동한 얼굴로 티노시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쑥스럽게 덧붙였다.

“그리 큰 놈도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전직 와이번 슬레이어 웨이크가 흐음 하고 턱을 괸다. 제일 인기 있는 남자였다는 티노시의 말대로 에루시오는 제법 훤칠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아직 한창 자라나는 청년이었고, 웨이크에 견줄 바는 못 된다.

가람이나 뮐러가 워낙 덤덤하게 대해서 그렇지, 웨이크는 한때 노예 경매장에서 귀부인들의 찬탄을 한 몸에 받던 몸이었다. 촛불에 얼비치는 준수한 얼굴에 세레데트의 뺨에 설렘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디서 오시는 길이세요?”

“티노시.”

“무슨 말만 하면 티노시이―래. 치잇!”

엄중한 에루시오의 말에 티노시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곧 살금살금 눈치를 보았다.

“저기, 질문하면 안 되는 거예요?”

비가 오는 숲의 밤은 서늘하기가 입김이 나올 정도였지만 술기운이 돌자 몸이 훈훈해서 그런지 추위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가람은 두 잔째의 백포도주를 따랐다.

“괜찮아요. 저희는 바랄라인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 말에 세 사람이 감탄을 터뜨린다. 귀족이 마을 거지만큼이나 많이 돌아다닌다는 제국의 수도, 아름답고 발달한, 기사님들이 매일 순시하고 있다는 그곳. 정말로 그곳에 다녀오셨어요? 하며 저마다 바랄라인에 대한 환상을 떠들어 댄다.

가람은 백포도주 한 잔을 다 비우고 모든 질문을 긍정했다.

“맞아요. 그런데 그쪽은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저희는 베르하르트 왕국에서 오는 길이에요. 음,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길이세요?”

가람 일행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지 못했기에 그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뮐러가 지도를 주섬주섬 꺼내기에 방향을 알려 주었더니 거리를 가늠해 본다.

“이렇게 계속 남하하면 야수들판 북단으로 진입하게 될 겁니다.”

“야수들판으로 가세요?”

야수들판. 귀에 익은 이름이다 싶더니 트리거를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그때는 정말로 무슨 동화나 떠올리면서 신기한 일도 다 있다며 하룻밤의 꿈치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참 까마득하다.

술맛이 쓰다 싶어 봤더니 웨이크가 럼 위스키를 채워 놓았다. 백포도주가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렇네요.”

가람이 선선히 대답하는데 세레데트가 갑자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지도 말인데요. 아까 봤더니 표시되지 않은 곳도 있던데. 괜찮으시다면 저희 지도를 구입하지 않으실래요?”

그러면서 주섬주섬 꺼내는 지도를 보니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많이도 돌아다녔는지 지도 가득히 무언가가 그려지고 적혀 있었다.

바랄라인에서 산 지도에서는 나오지 않는 지역들도 꽤 많이 표시되어 있다.

아마 직접 적은 것인 듯 지도의 곳곳마다 다녀왔던 여행지의 소감이나 주의할 점 따위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뱃놀이 좋겠다. 돈이 없어.’, ‘덥다. 물값 비싸.’ 같은 내용들이 웃음 짓게 만들 만큼 귀여운 필체로 동글동글하게 적혀 있다.

실제로 여행자들끼리는 이렇게 여행지의 지도를 사고팔기도 했다. 그래서 여러 장의 지도를 갖고 다니는 것은 필수다.

“좋아요. 그것도 사죠.”

제법 쓸모가 있어 보였기에 가람은 그 지도를 구입했다. 손가락 세 개를 좌악 펴며 3골드만 달라는 세레데트의 말에 에루시오가 급히 말린다.

메이스를 사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공짜로 주고 싶다는 말에 세레데트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쪼아 댔다. 다시 에루시오가 가루가 되도록 공격받기 시작했다.

가람은 조금 즐거운 기분으로 그것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3골드를 꺼내어 건네었다. 장사에 대단한 소질이 있는 아가씨다.

가람 일행은 모르지만 실제로 10실버가 아닌 5실버에 누워서 자는 자리를 얻어 낸 것도 모두 세레데트의 입담 덕분이었다.

에루시오, 세레데트, 티노시 세 사람의 눈에 가람은 매우 신비하고 노련한 동양의 여행자로 보였다.

씀씀이도 그렇고, 갖고 있는 물건이나 베푸는 음식들도 호사스러운 것이라 제법 성공한 여행자가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저희는 위쪽으로 계속 올라가서 크페타인까지 가 보는 게 목표예요. 걸어서 가야 하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요. 바랄라인에서 용병 일이라도 구해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 여기서 메이스를 판 덕분에 그럴 필요는 없어져서 다행이에요.”

세레데트가 차분하게 이야기하자 티노시가 ‘고마워요.’ 하고 덧붙였다.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술이 다 떨어질 무렵 어느새 밤이 깊었다.

누군가가 ‘거기 잠 좀 잡시다.’ 하고 타박했기에 가람과 세레데트, 티노시는 급히 자리를 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짧은 작별 인사 후 여행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도 있었으나 같은 속도로 가는 사람은 없었다.

에루시오는 몹시 아쉬운 얼굴로 걷는 내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가람은 반대편의 길 끝으로 향하고 있었으므로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그 후로 날씨는 여전히 꾸물꾸물했으나 다행히 비가 오지는 않았다.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는 하늘이라 부지런히 길을 재촉한 덕분에 가람 일행은 일주일째에 마침내 야수들판의 북쪽으로 진입했다.

* * *

이곳의 첫 기억은 야수들판의 바람 소리였다.

길가에 듬성듬성한 나무 십수 그루를 헤치고 들어가자 바람이 춤추는 너른 평야가 나타났다.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은 기억과 달라진 점이 없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까지 똑같아서 가람은 순간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맡았던 것과 같은 차가운 공기가 폐부 가득 스며든다.

들판의 밤공기는 마을이나 대도시의 그것보다 훨씬 차갑고 청명한 느낌이었다. 연일 비가 온 탓인지도 모른다.

뽀삐는 근처의 풀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말발굽에 밟혀 누운 풀 옆으로 놀란 뱀이 후다닥 꼬리를 빼고 도망친다.

지평선 끝에 마치 별이 떨어진 것 같은 불빛이 보인다.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아주 멀리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왼손 손등의 문양을 확인하니 우연인지는 몰라도 바늘은 불빛을 향하고 있었다.

가람은 어쩐지 저 불빛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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