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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57화 (57/256)

57화

살짝 뒤를 향해 주의를 주고 가람은 뽀삐를 재촉했다.

허벅지의 연한 살이 내내 쓸려서 피가 날 정도였지만 거리가 멀어 이렇게 달리지 않으면 아주 늦어서야 저곳에 도착할 수 있을 듯싶었다.

서둘러 달리는 내내 야수들판의 바람이 귓가를 스치운다. 서늘한 온도가 추울 법도 한데 어쩐지 기분이 점점 유쾌해졌다.

그리고 그 기분은 마침내 커다란 은호의 등짝이 보이자 절정에 달했다.

모닥불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호랑이의 등에 길게 매달린다. 그 그림자 속에서 하얀 꼬리가 슬렁슬렁, 바닥을 탁탁 치기도 했다.

가람은 쫑긋거리는 귀로 트리거가 자신이 왔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람의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사실 트리거는 꽤 한참 전부터 뽀삐의 말발굽 소리와 냄새로 가람이 왔음을 알고 있었다.

“넌 왜 내가 밥 먹을 때만 오는 거냐.”

호랑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가람을 돌아보았다.

설마, 설마 하던 웨이크와 뮐러는 딸꾹질을 할 정도로 놀라 말의 고삐를 급히 움켜쥐었다.

쩡하고 얼어붙어 더 이상 걸어오지 않는 두 사람을 뒤돌아보며 가람은 그들이 호랑이 상태의 트리거는 본 적이 없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워낙 트리거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여기서도 보통 특이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쪽은 친구예요.”

웨이크와 뮐러는 벙벙한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예?

“전에 만났었죠?”

웨이크와 뮐러가 자신의 기억력을 심각하게 의심하는 동안 가람은 재깍 말에서 내려 트리거가 슬쩍 내어준 자리에 앉았다.

어색하게 서 있던 뮐러와 웨이크도 가람이 워낙 천연덕스럽게 행동하자 주춤주춤 트리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불가에 앉는다.

앉는다곤 해도 언제라도 다리를 펴고 도망칠 수 있도록 쭈그려 앉은 상태였다.

특히 웨이크는 손이 검의 근처로 움찔움찔 움직이고 있어서 여러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아직 식전이냐?”

“불빛이 보이기에 트리거가 있을 줄 알고 그냥 왔죠.”

가람의 대답에 트리거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못 본 사이에 어쩐지 넉살이 늘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달달 떨며 우는 애처로운 모습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허리춤에 큼지막한 메이스를 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엿한 여행자처럼 보여서 제법 마음이 놓인다.

“옜다. 먹어라. 너희도.”

트리거는 굽고 있던 고기를 쿡 찍어다가 뮐러와 웨이크에게 던지듯 건네었다. 얼떨결에 착 받아 든 두 남자는 어색하게 눈치를 보며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시선이 트리거의 부리부리한 눈과 커다란 발바닥, 입가에 맴도는 것이 고기가 코로 들어가는지 눈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전에 잠깐, 노예 경매장에서 봤었잖아요. 혹시 기억 안 나시나요? 그때는 흰 머리랑 검정에 가까운 회색 머리가 섞인 남자의 모습이었어요.”

그제야 뮐러와 웨이크는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경계는 여전하다.

트리거는 두 남자가 털을 세우고 있는 모습을 스윽 보더니 심드렁하게 다시 고기나무 열매를 굽기 시작했다.

불의 주인은 전에 봤던 그 불도마뱀이라, 가람은 그 도마뱀에게도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불도마뱀은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도마뱀에게 무시당해 머쓱해진 가람에게 트리거는 가장 커다랗고 잘 익은 고깃덩이를 건네어 주었다.

막 지글지글 익고 있던 것을 꺼낸 터라 가람이 가죽 장갑을 낀 채로 받아 들어 크게 한 입 베어 물자 입가로 육즙이 과즙마냥 확 터져 나온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냐?”

“아, 그게 여기 있거든요. 여전히 맛있네요. 이건.”

“음, 내가 잘 구워서 그래.”

가람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육즙을 앞발로 닦아 할짝인 트리거가 여세를 몰아 앞발 두 개의 털 정리를 하더니 단정하게 앉았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에 했던 지저분한 호랑이라는 농담이 생각이 나서 가람이 슬쩍 웃는다.

“그게 여기 있으면 이번에는 내가 좀 도와줄 수 있겠군.”

“그렇죠?”

“좀 고마워하는 흉내라도 내라.”

“감사합니다. 나으리.”

“이봐.”

헤헷 하고 웃어 버리는 가람의 얼굴에 트리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고기만 뜯고 있는 두 남자를 흘끔 살핀 호랑이가 히죽 미소했다. 그래도 제법 동료와 잘 다니는구나 싶어 흐뭇하다.

그러나 송곳니가 드러났으므로 미소 짓는 얼굴은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웨이크와 뮐러가 그대로 뚝, 굳는다.

“그런데, 그건 좀 모았어?”

트리거가 갑자기 목소리를 줄이며 은근히 묻는다. 가람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입 안의 고기만 우물우물 씹다가 문득 트리거가 전혀 먹지 않았음을 깨닫고 덩어리 하나를 주욱 찢어 입에 물려 주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웨이크는 고깃기름이 번들번들한 가람의 손을 트리거가 와작와작 먹어 버리지 않을까 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친구니 뭐니 해도 상대는 집채만 한 호랑이다. 게다가 은호라니, 크페타인도 아닌 이곳에 웬 은호란 말인가.

“별로 많이는 못 모았어요.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좀 모으긴 했다는 거군.”

“고기나 먹어요.”

이제 70 모았다. 1,000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것이다.

가람은 속이 답답해져 일부러 그것으로 뭘 살 수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오래 걸릴 거라고,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패스가 모이는 속도는 생각보다 더 느리게 느껴졌다. 도중에 많은 일이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가람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잠시 지난날을 짧게 반추했다. 트리거는 묵묵히 앉아 가람의 눈 안에 스치는 것들을 슬쩍 훔쳐보았다.

다시 만난 가람은 4개월간의 변화치고는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적응하려고 했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거의 타지 못했던 말도 타고, 가늘던 팔다리에는 탄탄하게 근육이 붙었다.

깨작깨작 고깃기름이 묻을까 조심해서 먹던 사람이 무슨 사흘은 굶은 것처럼 고기를 탐한다.

옷은 척 보기에도 태가 나는 가죽에 허리에는 제법 손을 탄 메이스, 갖고 다니는 짐들도 예전의 이계 물건이 아니라 이곳 물건의 비율이 높다.

“좀, 괜찮아 보이긴 한데. 괜찮으냐?”

트리거가 입 안의 고기를 꿀떡 삼키고 넌지시 묻는다. 가람은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문득 웨이크와 뮐러가 대단히 불편한 안색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만큼이나 친근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되었지 않을까 했지만, 역시 친구의 친구라고 해도 남일 뿐인지 두 남자는 먹는 고기가 체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웨이크, 뮐러. 먼저 가서 주무세요. 이야기 좀 하다가 잘게요.”

“괜찮습니다.”

사실 괜찮다기보다 커다란 은호를 지척에 두고 잠을 청할 수 있을 만큼 웨이크의 신경이 둔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트리거가 노골적으로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자 조금 고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 세 마리를 삼각형으로 배치한 후 사방에 철끈과 트랩을 깔더니 뮐러를 끌어다가 그 안에 자리 잡는다.

대놓고 경계하는 그 모양새에 트리거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얼떨결에 끌려가 앉은 뮐러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말에 기대어 누웠다.

말 또한 이 인간이 왜 이리 유난을 떠나 하는 눈으로 웨이크를 바라보았지만 가람만은 그를 조금 이해했다.

“저 녀석 사냥꾼이었지?”

“그렇죠.”

트리거는 입맛을 다셨다. 쩝 하는 소리에 웨이크의 귀가 곤두선다. 그 모습을 보고 트리거는 괜히 놀려 주고 싶어서 으르릉하고 목을 울렸다.

가람은 결국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웨이크가 거의 검을 뽑아 들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놀리는 거 좀 그만해요.”

“재밌잖나. 근데 저 녀석 성격이 좀 변한 거 같다.”

“그런가요?”

“응. 예전에는 놀려도 무시할 것 같았는데 좀 인간이 싱싱해졌다고 해야 하나. 팔딱팔딱하니, 보기는 좋구먼.”

웨이크의 눈이 점점 매서워지자 가람은 억지로 트리거의 커다란 머리를 꾹꾹 눌러 관심을 돌렸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털에 고깃기름을 닦자 트리거가 곧바로 혀를 빼어 싹싹 다듬는다. 전에 말한 안 하얗다는 소리가 꽤 충격이었던 걸까.

“털에 신경 많이 쓰네요.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나도 한창때의 호랑이인데 신경 써야지. 그때는 바쁜 일이 많아서 그랬어.”

가람 정도는 한입에 반 토막 낼 수도 있어 보이는 커다란 호랑이가 마치 고양이라도 된 양 새침을 떨며 털을 다듬는 모습은 자주 보기 힘든 진귀한 광경이다.

어쩐지 처음 여기 와서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가람은 팔을 짚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트리거는 불에 고기를 좀 더 올려 두었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일이야, 늘 많죠.”

“무슨 일?”

가람은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트리거는 묵묵히 기다리며 열심히 불을 내는 도마뱀에게 고기를 먹여 주었다.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는다.

도마뱀의 배가 두둑이 찰 무렵, 하늘에 넋을 놓고 있던 가람이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하늘 말이에요. 색색깔의 별도 많고, 굉장히 아름답고, 광활하잖아요. 이렇게 보고 있으면 종종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막상 뛰어들면 숨도 못 쉬고, 죽을 것 같으면서도 내가 살던 곳은 엄청나게 멀어져 있고, 후회도 할 수 없을 만큼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 거예요.

어떻게든 길을 찾아서 눈앞의 하늘을 뒤져 봐도 멀리서 봤던 아름다움이나 그런 반짝거리는 것들이 사실은 그냥 내가 있던 곳의 촛불 같은 거나 다름없는 거고, 사실은 그 속에 엄청 무서운 것들이 많이 숨어 있는 거죠.”

“음.”

“그냥, 그랬어요. 뭐랄까, 줄곧 그런 느낌이었어요. 사실 지금도 좀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도 좀 나아졌냐?”

“그렇죠 뭐.”

트리거가 마지막 고기를 집어 먹자 불도마뱀이 인사도 없이 내뺀다. 예절이라곤 없는 놈들이야.

트리거가 투덜거리는 것을 들으며 가람이 슬쩍 불도마뱀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시원스런 성격이라 좋은걸요.

“그게 웃기다는 거야. 불도마뱀 주제에 차갑고 시원해서 어쩌자고. 쯧쯧. 어쨌든 이리 와라, 오랜만에 안고 자 보자.”

트리거가 말들의 옆에 몸을 길게 빼고 꼬리로 툭툭 제 허리를 두드린다.

“잠깐만요.”

가람은 물티슈를 꺼내어 손을 깨끗이 닦고 트리거의 하얀 가슴팍에 푹 파묻혔다.

손질을 부지런히 했는지 감촉도 좋고, 가만히 머리를 묻고 있으니 북 치는 것 같은 심장 소리가 단단하게 울린다.

마치 모든 것에서 지켜 줄 것 같은 따듯한 온도와 강한 소리에 가람은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트리거는 커다란 앞발로 가람의 상체를 덮고 꼬리를 둥글게 말아 감싸 안았다.

다음 날 아침, 웨이크는 자신이 깜빡 잠들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머리 위로 휘잉 하니 바람이 불어 까치집이 된 머리를 엉망으로 흐트러뜨린다.

대충 손으로 슥슥 빗어 정리한 웨이크는 가람이 들판에 엎드린 채 트리거의 앞발을 붙잡고 낑낑 팔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뮐러는 그 중간에서 심판을 보고 있었다.

“…….”

웨이크가 말하는 법을 다시 기억해 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 또 졌네. 웨이크, 일어났어요? 오늘은 좀 늦게까지 주무셨네요.”

그야 어제 새벽 늦도록 경계를 서느라 깨어 있다가, 결국 트리거의 새근새근한 숨소리를 듣고 느지막이 잠이 들었으니.

그러나 웨이크 자신도 스스로가 그렇게 오래도록 잠들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해를 보니 새벽이 지난 지 한참인 것 같은데. 아니, 그것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왜 깨우지 않으셨습니까?”

“아, 트리거한테서 이기면 출발하려고 그냥 있었어요.”

이길 수 있을 리가 있나. 영원히 안 깨울 작정이었던 걸까. 웨이크는 거의 가람의 상체만 한 호랑이의 앞발을 바라보다가 어쩐지 모든 것이 굉장히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친 숨을 내쉬고 주섬주섬 일어난 자리를 수습했다.

야외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은 기묘할 만큼 평화로운 느낌이다. 들판의 독사, 키 작은 육식 동물들, 벌레 따위가 이상할 만큼 해를 끼치지 않는다. 아무튼 덕분에 오랜만에 푹 잤다.

몸이 개운함을 느끼던 웨이크는 조금 느리게 가람의 말을 깨달았다. 푹 자라고 일부러 깨우지 않은 거구나.

그러고 보니, 최근 길을 재촉하고 빗속에서 잠을 자느라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일어났으니 가죠.”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이번에는 트리거가 좀 도와준다고 했으니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짐을 챙기던 웨이크는 가람의 말에 더욱 저 호랑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아무리 맹수라고 해도 여기 짐승들이 떼로 덤비면 도리가 없을 텐데.

“그래도 긴장은 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웨이크가 조용히 충고하자 트리거가 콧방귀를 뀌며 끼어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 애송이. 나는 이 들판의 지배자니까.”

그 오만한 말에 웨이크가 우뚝 멈춰 섰다. 가람, 당신 지금 뭐랑 팔씨름을 한 건지 알고 있습니까?

“그거 혹시 야수들판의 왕이라는 말인가요? 야수들판의 지배자는 엄청나게 커다란 흑마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뮐러가 재깍 끼어든다. 웨이크는 할 말을 잃고 트리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야수들판. 그리 넓은 지역은 아니었으나 들판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야수의 숲 덕분에 모르는 이가 없는 지역이다.

바로 이 세상에 나는 곳이 몇 없어 진귀하게 취급되는 고기나무 열매의 주 생식지였기 때문이다.

웨이크의 기억이 스르륵 어젯밤으로 되감아진다. 그러고 보니 어제 뭔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던 그 고기가…….

“몇 해 전에 바뀌었다. 지금은 내가 지배자야.”

“그럼 그 흑마 케르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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