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떠났다.”
케르타는 역대 야수들판의 지배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인간에게 호의적이었던 지배자다.
그가 있기 전의 야수들판은 지나는 것만으로 목숨을 잃는 자가 왕왕 있던 지역이었다. 야수들판에 대한 악명은 그 시절에 쌓인 것들이다.
한 걸음에 한 명. 두 걸음에 두 명, 세 걸음에 전멸. 노랫말과도 같은 이 말은 당시 야수들판이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전쟁이 있던 시절에도 군대는 야수들판만은 지나지 못했다. 용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야수들판을 스치면 마치 지워 낸 것처럼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득을 본 것은 베록시다. 야수들판이 군대를 원초적으로 막아 주었기 때문에 베록시는 전쟁 당시에도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그 평화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서 베록시에서는 야수들판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경외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군요…….”
다시 그 시절의 야수들판으로 돌아가는 건가 싶어 순간 철렁했던 뮐러지만 어느새 가람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들판 위를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트리거를 보고 걱정을 깨끗이 털어 버렸다.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모양이다.
하지만 웨이크는 아직 대단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어서, 뮐러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손에 음식과 물잔을 쥐여 주었다. 일단 밥이나 드세요.
가람이 전신의 체중을 이용해 팔씨름에 덤벼들자 트리거도 지지 않고 엎치락뒤치락하더니 곧 킬킬 웃으며 옷과 털에 흙을 묻혀 가며 서로 누르고, 눌러진다.
제 몸의 5분의 1도 안 되는 가람에게 내리눌려 배를 보이며 엄살을 떨던 트리거가 단숨에 가람을 내리누르는 꼴을 웨이크는 빵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보았다. 어쩐지 좀 지치는 기분이다.
“으아, 꼬리 쓰면 반칙! 반칙이에요!”
“그럼 너도 꼬리 써.”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결국 몸싸움은 꼬리에 돌돌 감긴 가람의 패배로 끝났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지만. 트리거는 웨이크가 손에 든 것을 거의 다 먹었음을 확인하고 어슬렁어슬렁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다 먹었으면 이제 가자.”
“아, 이쪽이에요.”
가람은 말을 타는 대신 트리거의 옆에 붙어서 함께 걸었다. 웨이크와 뮐러는 그 뒤에서 졸졸 따라 걸었다.
마지막으로 세 마리 말이 막아서듯 뒤를 따른다. 세 사람과 네 마리는 조금 기묘한 모습으로 야수들판을 가로질렀다.
가람은 걸으며 오랜만에 신이 나서 이것저것 이야깃거리를 꺼내었다. 뮐러와 웨이크는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저렇게 활발한 가람은 처음 본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여러 가지 의미로 위태위태하던 모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동안 별달리 신나는 일이 없었는데도 가람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처음 마차를 탔다거나, 뽀삐가 얼마나 똑똑한지, 라거나 하는 이야기였으나 트리거는 묵묵히 들어 주었다.
“숲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침부터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까지 걸어도 바늘은 여전히 뾰족했다. 동그랗게 될 때까지 걷는 거다.
그러면 그곳에는 패스가 있었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트리거가 짧게 주의를 주었다.
“숲으로 들어가면 라쿠카와 마주칠 수도 있다. 물론 내가 옆에 있으니 가까이는 안 오겠지만, 혹시나 길을 잃으면 큰일이니 잘 붙어 와라. 너희 둘도.”
호랑이의 묵직한 시선에 웨이크와 뮐러는 저도 모르게 빠르게 걸어 그 뒤로 바짝 붙었다.
말 세 마리도 눈치 빠르게 따라붙는다. 숲으로 들어서자, 가람이 질문했다.
“라쿠카요?”
“전에 그 벌레들 말이다.”
“아.”
가람이 짧게 진저리 치며 발밑의 나무둥치를 넘었다. 숲은 그리 우거져 있지는 않았으나 나무 덕분에 그늘이 져서 시원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잎의 나무가 많았다. 하트, 번개, 구깃구깃 뭉쳐 놓은 것 같은 색까지 특별한 잎사귀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아직 이쪽이냐?”
“아, 아뇨. 조금 어긋났네요. 오른쪽으로. 이쪽이에요.”
가람은 나무를 짚으며 높은 돌을 올랐다. 늘 느끼는 거지만 가죽 장갑은 정말로 산 보람이 있는 물건이다. 손 씻기 불편한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쓸모가 있다.
만약 장갑이 없었다면 거친 나뭇잎이나 뾰족한 돌부리를 붙잡느라 손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으리라.
숲은 걸을수록 점점 산이 되었다. 험해지는 지형에 가람이 몇 번이나 이끼를 밟고 미끄러진다. 그때마다 가람은 트리거의 꼬리를 밧줄마냥 붙잡았다.
갑자기 꼬리가 빠지도록 세게 잡힌 트리거가 질겁했지만 미끄러지니 근처에 끈 같은 게 있으면 잡고 만다는 변명에 조금 늙은 표정만 지을 뿐이다.
“그런데 트리거는 몇 살이에요? 한창때라고 하니까 갑자기 궁금해서요.”
“올해로 마흔이다.”
“네?”
“마흔.”
거듭 강조하는 숫자에 갑자기 가람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호랑이의 평균 수명을 따져 보았다.
30년, 아니, 20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사실 트리거는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기 직전의 할아버지였던 건가.
“왜 그래?”
“생각보다 엄청 많아서요.”
“흐응, 뭐 그렇게 볼 것 없다. 몸은 아직 청춘이니까. 그런데 계속 이쪽 맞아?”
“맞아요.”
바늘을 확인한 가람이 단호하게 끄덕이자 트리거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쩐지 걸으면 걸을수록 내키지 않는 기색이다.
이쪽에 싫어하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가람은 궁금했지만 대답해 줄 것 같은 얼굴이 아니라 대신 다른 말을 꺼내었다.
“트리거. 전 스물다섯인데.”
“그래서?”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돼요?”
“아니.”
단호한 대답 후 트리거의 입가가 씰룩인다. 얼굴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그 표정에 가람은 조용히 꼬리를 말기로 했다.
“알았어요.”
“흐음. 그런데 이쪽 맞아? 정말로?”
그 음성에 불안감이 짙게 묻어났기에 가람은 거듭 바늘을 확인하고 혹시나 해서 트리거에게 질문했다.
“뭔가 이쪽 방향에 위험한 것이라도 있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다. 설마, 아니겠지.”
무언가를 연신 부정한 트리거는 곧 언제 망설였냐는 듯 단호히 걷기 시작했다.
뭔가를 떨쳐 내려는 것 같은 힘 있는 걸음에 가람은 몇 번 더 질문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만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혀에서 단내가 나도록 산을 오른 결과, 바늘의 길이를 무지막지하게 줄이는 데에 성공했다.
“거의 다 왔어요. 저 동굴 안쪽 같은데요?”
가람은 도착했다는 기쁨에 서둘러 동굴로 향했다. 트리거는 입을 딱 다물고 무언가 대단히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뒤를 따랐다.
웨이크와 뮐러는 다시 불안해졌지만 기운에 예민한 뽀삐와 말들이 침착한 것을 보고 안정을 조금 되찾았다. 그리고 가람을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석회나 종유석이 장식된 그런 아름다운 동굴은 아니었다. 차라리 곰 굴에 가까운 모습이다.
작달막하니 말 세 마리가 들어가면 꽉 찰 만한 모습이었는데, 바닥에는 먼지와 어떤 동물의 털이나 썩은 낙엽 같은 것이 뒹굴고 있어 대단히 지저분했다.
한쪽에는 무언가의 변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뭔가 살고 있던 모양이군요.”
“대단히 지저분한데요.”
“지저분한 무언가가 살았던 모양입니다.”
뮐러와 가람, 웨이크가 순서대로 한마디씩 떠들며 동굴 안쪽을 살폈다.
뮐러와 웨이크는 혹시나 있을 위험한 무언가를 찾는 것이었고, 가람은 동굴의 쌓인 낙엽 등을 헤치며 패스를 찾았다.
하지만 분명 바늘은 동그란데 패스는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 넓은 곳도 아니라서 숨길 데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찾는 것이 없습니까?”
웨이크가 동굴 한쪽의 커다란 나뭇조각을 살피다가 질문했다.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벽을 샅샅이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굴 탐색을 끝낸 뮐러가 웨이크에게 슬쩍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나저나 여기 상당히 냄새가, 좀 나는군요.”
“아마 최근까지 뭔가 살았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살고 있다. 내 집이야.”
뮐러와 웨이크가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트리거는 대단히 겸연쩍어하는 두 남자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혼자 사는 청년 호랑이 집이 좀 더러울 수도 있지. 까다롭기는.”
면박을 준 트리거는 슬쩍 가람에게 다가섰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두 남자는 무안한 얼굴로 동굴 구석에서 찌그러진 것마냥 우두커니 서서 헛기침을 하며 괜히 말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기 트리거 집이었어요?”
“뭐, 일단은 그렇다. 그런데 찾는 게 이 근처에 있냐?”
“네. 여기 있는 건 분명한데, 바늘도 분명 둥근데 보이질 않네요. 왜, 왜 없지. 분명 여기가 맞는데. 찾지 않으면 다음 패스로 갈 수 없는데…….”
가람은 사방을 뒤지며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제 몸만 한 나무를 휘딱 뒤집어엎고, 쌓인 나뭇잎은 모조리 흩어 버리고, 굴러다니는 털까지 집어다가 사이사이를 살펴보고, 벌레처럼 벽에 딱 붙어 핥듯이 살핀다.
점점 이성을 잃고 있는 가람을 보며 트리거는 혀를 찼다.
“여기 위쪽이나 그런 데 있는 거 아니냐?”
“위쪽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걸……. 아.”
말하는 순간 무언가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가람은 줄곧 수평으로 들고 있던 손등을 수직으로 세웠다.
안쪽으로 꺾여 세워진 왼손 손등의 문양, 그 속의 바늘은 정확히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평으로만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던 바늘은 손등의 방향이 바뀌자 스르륵 모습을 바꾸어 아래를 가리켰다.
가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스의 고도를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고마워요, 트리거. 역시 아래쪽에 있네요.”
“뭐 별말씀을. 그런데, 아래쪽?”
“네.”
“집 안에?”
“네. 저쪽 아래 같네요.”
가람의 손가락이 동굴의 정중앙을 정확히 지목했다. 단단한 돌바닥은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저 아래에는 패스가 있다.
찾았다는 기쁨에 들떴던 가람은 문득 트리거가 매우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동굴 아래에 패스가 있다.
그렇다는 건, 동굴 아래를 파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동굴은 트리거의 집이다.
“트리거…….”
가람의 조용한 부름에 트리거는 깊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이거 말고 다른 걸 찾으러 가는 건…….”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이걸 흡수할 때까지 바늘은 여기만 가리키기 때문에 불가능해요.”
다시 깊고 깊은 한숨. 한 번, 두 번. 어쩐지 가람은 트리거의 입에 담배를 물려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갑자기 집의 어딘가로 걸어간 트리거가 곰방대 하나를 꺼내어 처억 무는 게 아닌가.
그리고 불을 피워 연기를 한 모금 뱉어 내더니 정말로 하기 싫은 결정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어쩔 수 없지. 파라.”
“네. 저기, 트리거. 정말로 미안해요.”
“아냐. 괜찮아. 파.”
“미안해요.”
가람은 입으로는 연신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뽀삐의 등짐에서 곡괭이 꺼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진심을 담은 가람의 사과가 몇 차례 더 있은 후 곡괭이가 돌바닥에 힘차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역시 돌을 부수기에는 힘이 모자라다.
내리치는 반동으로 곡괭이 자루가 손아귀를 찢을 듯이 몸부림쳤다. 가람은 결국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동굴 입구에 서 있는 두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려던 가람은 순간 두 사람의 뒤로 주욱 내밀어진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노을의 역광 탓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길쭉하고 시커먼 그림자 속에서 안광으로 보이는 것이 희번득한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곡괭이를 툭 놓자 두 남자도 뒤를 돌아보고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그러나 정작 그 주인공은 태연하게 입을 여는 게 아닌가.
“왕, 집 부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