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조금 컬컬한 목소리였다. 낙엽이 부서지는 것 같은. 말을 하며 동굴 안으로 조금 더 들어섰기에 가람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린이었다. 아주 거대한.
“자라드. 왔냐?”
자라드라고 불린 기린은 기다란 다리를 수습해 동굴 앞에 앉더니 곧 목을 빼어 신기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빛나는 검은 눈으로 가람 일행을 살폈다.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머리가 지척까지 와서 킁킁 냄새를 맡자 가람은 바짝 굳었다.
“어. 그런데 인간들이 왕 집 부수는 거야?”
“그래. 왜 왔냐.”
“그냥.”
그렇게 말한 자라드는 아예 입구에 눌러앉아 가람 일행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왜 부수는지 묻기보다 심심하던 차에 직접 지켜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트리거는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아 버렸고 중간에 낀 가람만 어색하게 곡괭이를 다시 주워 든다. 새카만 기린의 눈동자가 가람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따라붙었다.
“뭐 하냐? 계속해.”
트리거가 슬쩍 말해 왔으므로 가람은 부담스러운 기린의 시선을 외면하려고 노력하며 곡괭이질에 박차를 가했다.
커다란 두 짐승 사이에서 눌려 죽을 것 같은 압박을 받고 있음을 온몸에서 차가운 땀을 흘리는 것으로 표현하며 두 남자도 힘껏 손을 놀렸다.
깡, 깡, 하는 돌 깨는 소리가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반복 작업이라는 것은 집중하게 되면 대단히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한 번씩 할 때마다 성취도가 눈에 보인다면 그 몰입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외면하고 싶은 무언가가 끈덕지게 따라붙는다면 더더욱.
세 사람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도록 곡괭이질을 하며 점점 안쪽으로 파고 들어갔다.
사방에 파낸 돌 따위가 쌓여 자그마한 언덕을 이루었지만 세 사람은 자각조차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이 파이는 속도는 느렸다.
하지만 가람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패스의 바늘은 아래쪽을 가리키며 뾰족이 솟아 있긴 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단히 짧은 편에 속했다.
밑으로 1미터가량 파고 내려가자 마침내 패스가 나왔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동굴 안은 밤처럼 컴컴했다.
그 안에서 빛나는 패스는 마치 별과 같아서 가람은 홀린 듯이 지치고 무거운 손으로 패스를 흡수했다.
15패스. 쉽게 찾은 것치고는 많은 패스였으나 여전히 부족하다.
아쉬워하며 고개를 들던 가람은 대단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덩이 안을 내려다보고 있는 십수 마리의 동물들과 눈이 마주쳤다.
껌뻑껌뻑.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가람 일행은 모닥불을 앞에 두고 동물들과 둘러앉아 있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술도 한 잔 손에 들었다.
대단히 지쳐 있었으므로 어떤 절차를 거쳐 불 앞에 앉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무언가 동물들이 우르르 밀고 당긴다 싶더니 불 앞에 앉았고, 웅성웅성 둘러앉는다 싶더니 술을 들게 되었다.
가람은 짐승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무의식적으로 나무잔 속의 것을 한 모금 마셨다. 대단히 순한 맛의 과실주였다.
“왕의 집을 부순 게 저 인간들이라고?”
검은 원숭이.
“왜 부쉈대?”
갈기 늑대.
“나도 몰라. 근데 구덩이 엄청 크던데. 중간이 커다랗게 파헤쳐진 게 뭐가 살 만한 꼴이 영 못 되던걸?”
기린.
“그러게. 구덩이 엄청 크더라. 어이, 고기나무 열매 좀 더 가져와!”
재규어.
“내가 불도마뱀 데려왔어. 어, 이미 있네. 에이. 너 가라.”
붉은 여우.
가람은 붉은 여우가 데려온 불도마뱀이 대단히 모욕적이라는 듯 콧방귀를 뀌며 꼬리로 여우의 주둥이를 후려친 뒤 떠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간으로 치면 따귀를 맞은 것쯤 되는 모양이다. 다시 한 모금,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이 인간들 왜 이렇게 멍해. 너 뭐 했냐?”
검은 원숭이가 재규어에게 묻자 재규어가 몸의 점이 다 떨어져 나가도록 고개를 저었다.
격렬한 부정에 이번에는 푸른 자칼에게 같은 질문을 한 원숭이는 결국 가람에게 직접 질문했다.
“어이, 인간?”
“네……. 네!?”
타성적으로 멍하니 대답하던 가람은 뒤늦게 대단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원숭이를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는 가람을 검은 원숭이가 영 미덥잖은 기색으로 본다.
“왜 그렇게 멍해?”
“아, 그냥…….”
“너희가 너무 성가시고 정신 사나워서 그렇지.”
몸에 칭칭 들러붙는 흑백 줄무늬 뱀을 끊임없이 잡아 떨쳐 내며 트리거가 진저리 쳤다.
왕의 몸에 붙으면 은신이 된다며 낄낄거리는 뱀 두 마리에 둘러싸이고, 원숭이에게 털이 골라지며, 안겨 드는 작은 오소리를 떨쳐 내느라 매우 바쁜 모습이었다.
왕이라기보다 친구, 아니, 보모에 가까운 모습이다.
“아니거든요.”
붉은 여우가 얄밉게 부정하더니 몸을 둥글게 말아 푹신한 제 꼬리를 깔고 가람의 앉은 다리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람이 저도 모르게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하는데 검은 원숭이가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너 정체가 뭐야? 응?”
아무래도 이 원숭이는 대단히 의심이 많은 성격인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휙휙 꼬리를 흔들어 대는 원숭이에게 나른하게 퍼져 누운 여우가 가람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핀잔을 주었다.
“왕의 친구겠지 뭐. 왕은 친구가 많잖아.”
“하긴, 그런가? 너 왕의 친구냐?”
“아, 예.”
가람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러자 원숭이는 저 혼자 ‘그런가? 그럴지도? 그러려나. 그렇구나.’라고 확정 짓더니 긴 팔로 자칼이 주둥이를 박고 핥고 있던 잔을 휙 빼앗아 왔다.
“그래? 그럼 건배하자.”
“아, 예.”
검은 원숭이는 주우욱 한 번에 들이켜더니 그대로 머리를 쿵 부딪치며 의식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붉은 여우가 숨넘어갈 듯 데굴데굴 웃는다.
술을 빼앗겼던 푸른 자칼은 조금 슬픈 기색으로 빈 술잔을 할짝댔다. 가람은 자칼의 앞에 거의 마시지 않은 잔을 내려놓고 권했다.
“마셔요.”
푸른 자칼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경계심이 강한 모양인지 가람이 권했는데도 좀처럼 입을 대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마시던 거라서 싫은가요?”
검푸른 털을 가진 자칼은 난처한 듯 꼬리를 살랑이다가 ‘그럼.’ 하고 슬쩍 다가와 술잔에 주둥이를 박았다.
가람은 손을 뻗어 잔을 기울여 마시기 편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슬쩍 술판을 둘러보니, 웨이크는 침팬지 하나와 대작을 하는 듯했고, 뮐러는 트리거의 옆에서 뱀 세 마리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공격이라고 해도, 옷 속이나 팔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이 전부지만 차가운 감촉이 대단히 소름 끼치는지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떨쳐 낼 용기가 없어서 가만히 참는 듯했다. 반대로, 세 마리 뱀은 연신 따듯하다며 뮐러의 체온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왕이 여러 짐승 많이 줍는 건 봤지만 인간을 줍는 건 처음이야.”
붉은 여우가 말하자 저 멀리 앉아 있던 기린의 목이 쑤욱 다가와 동조했다.
“맞아.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말이지.”
“예전 왕은 진짜 무서웠으니까.”
두 동물의 대화에 가람이 슬쩍 끼어들었다. 무서운 트리거라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트리거가요?”
“응. 엄청 무서웠는데, 당시에는 노리는 것들이 많아서 좀 그럴 필요도 있었지. 요즘이야 없지만.”
기린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아직 술을 마시고 있는 자칼을 턱짓했다.
“저 녀석이 합류하던 때 즈음이 정말 대단했지. 그 당시 저쪽 대장은 커다란 황소였는데, 방랑자로 이름이 높은 놈이었어. 강하기도 하고 그만큼 패악한 놈이라 우두머리라는 우두머리는 다 죽이고 그 밑의 짐승을 아래로 들였었지. 사실 말이 강하다는 거지 난 처음 봤을 때 무슨 괴물인 줄 알았다니까.”
“자라드, 너도 크잖아?”
“난 그냥 위로 길 뿐이고. 상상해 봐, 인간. 머리 높이가 나만 한 괴물 황소를 말이야.”
그러면서 기린은 제 목을 주욱 빼었다. 붉은 여우는 가람이 저를 거부하지 않자 슬쩍 일어나 가부좌한 다리 위로 올라가 몸을 말았다.
“사실 저만큼 크진 않았고, 좀 비슷하긴 했어.”
“그래도 그때 트리거는 그놈의 반의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고.”
자라드라고 불린 기린이 여우에게 핀잔을 주더니 가람의 얼굴 바로 앞에서 열렬히 눈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투가 시작된 거야. 황야에서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데.”
“그때 여름이었는데. 그리고 황야가 아니라 들판이야.”
콱. 조용히 해. 머리의 뿔로 박아 버릴 듯 시늉하며 붉은 여우에게 핀잔을 준 자라드는 곧 뜨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느새 푸른 자칼도 흥미로운 얼굴로 자라드를 올려다보고 있다.
“괴물 같은 황소와 우리의 가녀린 왕. 곧 피바람이 불 황야에서 두 파의 짐승들이 으르렁대는데, 그 커다란 괴물이 동굴처럼 큼지막한 입을 열어서 우렁우렁 말하는 거지. ‘나는 방랑자 디문그다.’ 아, 디문그가 그 소 이름이야.
그때는 트리거도 제법 어렸고, 케르타도 없어서 전력이 많이 비어 있었거든. 아닌 척해도 우린 사실 좀 무서웠어. 그리고 트리거도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했지.
사실 그때까지 우리는 트리거가 그냥 좀 어린 호랑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겁먹어도 어쩔 수 없었어. 무서워했어도 아무도 트리거를 비난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세상에. 그 작은 호랑이가 코웃음을 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어?
‘방랑자? 웃기는 이름이군. 부랑자로 만들어 주지.’
그리고 트리거는 이겼어. 대가로 디문그가 데리고 있던 짐승들 중 괜찮은 녀석들을 숲에 받아들였지.”
“그게 다예요?”
너무나 간단하게 이겼다는 말로 끝나자 황당해진 가람이 물었다. 자라드는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나는 호랑이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잘 모르거든. 지어내서 말하는 것보다는 그냥 한 방에 마무리하는 게 더 깔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트리거는 멀리서도 그 말을 다 듣고 있었다. 쑥스러운 듯 쫑긋거리는 귀 사이로 줄무늬 뱀 하나가 다시 꾸물꾸물 기어오른다.
앞발로 휙 잡아채서 귀찮다는 듯 집어 던지자 이번에는 오소리가 ‘왕, 왕.’ 하며 달려들었다. 트리거는 술도 제대로 못 마시고 칭얼거림을 받아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람은 긴장이 좀 풀려서 붉은 여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노래 부르고 떠들어 대는 동물들. 푸른 자칼은 술을 다 마시고도 가람을 떠나지 않고 옆에 붙어 앉았다.
온기가 느껴지자 마음이 훈훈해진다. 편안해진 분위기에 가람은 슬슬 줄곧 궁금해했던 그것을 물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뭔데?”
자라드는 ‘예전에 나를 골려 먹었겠다. 이 자시이이익.’ 하고 덤벼드는 멧돼지의 머리를 가볍게 앞발로 눌러 제압하고 업신여겨 주다가 가람의 말에 다시 목을 길게 빼고 다가왔다.
“음, 별건 아니고. 사실 저는 트리거가 특별한 동물이라서 말을 할 수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 여기 계신 동물들도 다 말을 할 수 있기에. 뽀삐나 말을 못 하는 다른 동물과 뭔가 차이가 있나 싶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붉은 여우도, 자라드도, 푸른 자칼조차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가람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 설명했나 하고 재차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뽀삐 같은 제 말들은 말을 못 하는데 여기 동물들은 말을 하잖아요.”
그때, 갑자기 무언가가 대단히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저 말할 수 있는데요.”
뽀삐였다. 뒤이어 뮐러와 웨이크의 말도 덧붙인다. 나도 말할 수 있어. 나도, 나도.
“뭐, 뭐, 뭐…….”
가람이 경악해서 입을 뻐끔거리며 말을 더듬는데, 뽀삐는 가람의 속도 모르고 푸릉푸릉거리며 따각따각 걷는다.
대단히 태연한 신색이라 오히려 당황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가람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찬가지로 경악하고 있는 웨이크와 뮐러를 발견하고 안정을 조금 되찾았다.
“왜 말을 안 한 거야?”
간신히 충격을 수습한 가람이 질문하자 뽀삐가 도리어 의문스러워했다.
“왜 말을 해야 해요?”
가람이 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수습되었던 충격이 다시 끈을 풀고 뛰쳐나와 머릿속을 엉망으로 헝클어 버린다.
한참 동안 어, 어, 만 반복하던 가람은 간신히 의견을 말로 빚어내는 데 성공했다. 보고 있던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로 필사적인 노력 끝에.
“그야 말을 할 수 있으니까. 대화를 할 수도 있고.”
“길을 갈 때도 저한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잖아요.”
“그야 네가 말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
뽀삐는 입을 조금 우물거리다가 툭 대답했다.
“하지만 말을 해도 되는지도 몰랐는걸요.”
뽀삐의 말인즉슨 이러했다.
인간의 틈에서 자란 지 4년. 대단히 영특한 말이었기 때문에 뽀삐는 어느 정도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별달리 공부를 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익혀진 언어였다.
하지만 아무도 동물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고, 그 외에 사람 말을 할 수 있는 다른 동물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조용히,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로만 알았다.
가람과 만난 후 사람 탈을 쓴 호랑이가 가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지만, 그래도 태어나서부터 굳어진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 말 어렵고요.”
뽀삐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동의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말의 형태를 한 것도 있었지만 울음이나 쉭쉭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인간은 우리 말 안 하는데 말이야. 우리만 인간 말 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니 그냥 못 하는 척하는 거지.”
“맞아. 그리고 너무 어려워.”
“발음도 어렵고.”
동물들이 웅성웅성 떠드는 사이 가람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대단히 빠른 속도였다.
웨이크와 뮐러는 아직도 멍하니 뽀삐의 입을 바라보고 있다.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특히 웨이크의 얼굴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엉망이었다. 끈적한 혼란을 한 국자 퍼서 얼굴에 마구 문질러 주면 딱 저런 얼굴이리라.
지금이라면 누가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쳐도 모를 것 같았다.
“그런데, 뽀삐는 사람 손에 자랐으니 그렇다 쳐도 여러분은 어떻게 사람 말을 하는 거예요?”
“아, 그거. 케르타 때문에 그래.”
응응. 붉은 여우는 에헴 하고 나서더니 젠체하며 설명했다.
“케르타가 워낙 인간들과 협조적이라서. 뭐 그렇다고 해도 전부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좀 머리 나쁘거나 하면 못 하는 녀석도 있고 그렇지. 왜 해야 하는지 필요를 못 느끼는 녀석들도 안 하고.”
“필요요?”
짧은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길었다.
“그래. 말을 해도 듣지 않으니 할 필요가 있나. 통하지 않으니 아예 말하기를 포기하는 거지. 아주 예전에는, 그러니까 인간들이 다른 것의 껍질을 걸치며 살기 전의 시대에 말야. 그때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고 해.
하지만 점점 말을 해도 소통이 안 되니 아예 포기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냥 이렇게 굳어진 거지.
얼마 동안이냐고 묻지 마. 진짜 엄청나게 오랫동안이니까. 내가 한 만 번은 죽었다 태어나도 부족할 시간이니까.
사실 돼지 잡는 놈한테 돼지가 나 먹지 말라고 해도 그놈이 돼지를 안 잡을 것 같나? 천만에. 잡아먹히는 돼지를 본 적 있어?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뀌익뀌익 하며 저항하지. 구슬프다고.
말이 다르다고 해서 전해지지 않을 감정이 아니야. 그런데 언어 하나가 달라진다고 해서 뭐가 바뀔까.
바뀌는 건 하나뿐이다. 백정은 그냥 ‘돼지’가 아니라 ‘불쌍한 돼지’ 혹은 ‘말하는 돼지’를 잡는 거지. 어차피 서로를 먹는 사이란 그런 거야.”
붉은 여우의 냉소에 가람은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그것은 웨이크와 뮐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어차피 반복된다. 이 동물들이 말할 수 있음을 알려도 그저 그 역사가 반복될 뿐이다.
가람은 뿌리 깊은 체념과 불신을 읽었다. 붉은 여우는 어두워진 얼굴이 된 가람의 손등에 제 보드라운 뺨을 슬쩍 비비며 말을 이었다.
“비난하려고 한 말이 아니야. 우리도 어차피 그랬으니까. 고기나무 열매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그러고 있었을 테지. 그리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서로를 먹고 먹히는 관계를 이어 가고 있어. 어차피 그런 것이니 인간을 비난할 것이 아니지. 그냥, 어째서 우리가 인간에게 말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대답일 뿐이야.”
어느새 사방은 몹시 조용해져 있었다. 붉은 여우의 말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여운이 끝날 무렵, 트리거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자각하고 해산을 선언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에? 우린 지금부터인데.”
야행성 너구리가 항의하자 몇몇이 따라붙어 맞아 맞아 하고 동의했다. 사실 동물들은 대부분 야행성이다.
그것은 밤에 사냥할 필요가 없게 되어도 여전히 체질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 너희는 자리를 옮겨서 더 하던가 해.”
“왕은?”
“여기 있을 거야.”
몇 번 더 트리거를 붙잡던 동물들은 트리거가 완강히 버티자 곧 뿔뿔이 숲 안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여우와 푸른 자칼, 그리고 쓰러진 검은 원숭이를 수습한 자라드를 마지막으로 모든 짐승이 떠나자 언제 왁자지껄했냐는 듯 모닥불 주변은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남은 것은 어색하게 선 세 마리 말과 세 사람, 그리고 한 마리 호랑이뿐이다.
“뽀삐. 혹시 뭔가 불편하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앞으로는 말해 줘.”
가람은 뽀삐의 등에서 등짐을 내려 주며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뽀삐는 가람이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자체가 대단히 불편하고 어색한 듯 괜히 시선을 피하더니 한참 뒤에 속삭이듯 툭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