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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62화 (62/256)

62화

가람이 눈에 띄게 낙담하고 있자 훈제 오리를 가져오던 로아나의 눈이 세모꼴로 치켜뜨인다.

붉은 수염은 빨리 무언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저 훈제 오리가 입이 아닌 다른 곳에 쑤셔 넣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

“그,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배를 살 정도로 돈이 많으면 차라리 용병선을 고용하는 건 어때? 그리 좋은 배를 가진 녀석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 달라는 곳까지는 가 줄 거야.”

물론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녀석들이어야겠지만.

“용병선이요?”

붉은 수염은 너 오늘 목숨 구한 줄 알라는 듯 오리를 내려놓는 로아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리 하나를 주욱 뜯어 입에 덥석 문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육질이 씹히고, 뜯기는 모습을 보자 가람은 문득 자신들이 음식을 전혀 시키지 않았음을 깨닫고 점원을 불렀다.

“여기 오늘 추천할 만한 것 있나요?”

로아나가 아닌 다른 점원이었는데, 주근깨가 귀여운 소녀였다. 아래로 묶은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음, 저분이 드시고 계시는 훈제 오리랑, 왕삼치 소스구이, 문어 호박찜, 왈라피냐가 있어요.”

“왈라피냐는 뭔가요?”

“커다란 새우의 배를 가르고 토마토와 향신료를 채워서 치즈로 덮어 구운 거예요. 최근에 새로 생긴 거죠.”

“그럼, 저는 왈라피냐로 주시고, 음.”

가람의 시선에 웨이크와 뮐러가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훈제 오리로 주십시오.”

“왕삼치 소스구이로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메모하는 점원을 바라보던 가람은 아무 생각 없이 웨이크를 바라보다가 주문을 좀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어 호박찜의 맛이 궁금했다. 웨이크가 있으니 음식이 남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문어 호박찜이랑 여기서 제일 좋은 과실주도 한 통 주세요.”

“한 통이나요? 그리고 문어 호박찜은 좀 매운데요.”

“딱 좋네요. 그리고 뒤에 두 분도 앉아야 하니 의자 두 개만 더 주세요.”

그렇게 주문을 마친 가람은 다시 붉은 수염을 돌아보았다.

“술 한 통을 샀으니, 계속 이야기를 해요. 용병선이요?”

집요하게 빛나는 가람의 검은 눈을 보며 붉은 수염은 오늘도 일찍 들어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한 통의 술을 다 비울 때까지 이 아가씨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붉은 수염의 생각은 새벽녘 가람이 두 통, 세 통째의 술을 시키자 수정되었다. 그냥 놓아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군, 으로.

* * *

가람은 딱 천장이 세 개로 겹쳐 보이는 정도의 숙취 속에서 깨어났다. 시야가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든다.

이가 다 빠진 것같이 덜그럭거리는 골로 가장 처음 인식한 것은 누워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서 있었다면 입으로 뇌를 토할 것 같았으니까.

‘지독한 아저씨 같으니라고.’

붉은 수염도 가람에 대해 같은 평가를 내렸다는 것은 공교로운 사실이다.

가람은 아직도 술맛이 남아 있는 입을 쩝, 하고 다시고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다행히 토하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방은 매우 청결했다.

하지만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불탄 종잇조각을 움직이는 것처럼 불타서 바스라질 것 같았다. 열이 많이 났다.

술을 좀 먹여서 정신을 잃게 만들면 뭔가 정보가 더 튀어나오지 않을까 해서 무리를 하면서까지 술을 먹였는데, 안타깝게도 가람 자신도 너무 마시는 바람에 별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가람의 머릿속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가장 최근의 기억은, 붉은 수염이 껄껄 웃으며 스튜 그릇에 자신의 얼굴을 처박고 마셔 대는 모습이었다.

얼핏 배경으로 머리에 그릇을 쓰고 있는 뮐러와 드물게 볼이 붉어져서 붉은 수염의 친구와 서로의 코를 잡은 채 대화를 하고 있는 웨이크도 떠올랐다.

이 방법은 앞으로 쓰지 않는 게 좋겠다. 선원의 주량을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가람은 결국 욕실에서 한 번 토하고 나서 기진맥진해 다시 침대로 엎어졌다. 지금이 몇 시인지, 패스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은 제발 내장을 토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잠깐 기절, 아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가람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지는 해의 붉은 그림자가 방 안을 할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위장 또한 허기에 할퀴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가람은 일단 몸을 좀 추슬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람은 침대에서 구르듯 내려와 후들후들 떨리는 팔다리를 가누어 바닥을 짚어 가며 기었다.

문 앞으로 가니 잠금쇠가 걸려 있었다. 이 시간까지 왜 아무도 오지 않았나 했더니 이것 때문인 모양이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던 가람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다시 기어서 짐 가방으로 향했다.

거울을 꺼내서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뺨에는 침 자국이 말라붙어 있고 머리카락에는 음식인지 뭔지 해산물 조각이 붙어 있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스튜인 것 같다. 어제 새벽에 나란히 스튜로 씻기 놀이라도 한 모양이다. 붉은 수염은 세수를, 가람은 머리 감기를.

일단 가람은 욕실로 가서 차가운 물로 씻었다. 물의 냉기 덕분인지 열기가 좀 가시고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그러나 여전히 팔다리가 후들거린다.

가람은 천천히 기다가 바닥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엉거주춤 걷다가 천천히 허리를 펴는 그 모습은 마치 인류의 진화 단계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씻고 나니 좀 봐줄 만한 몰골이다. 가람은 뇌 대신 벌 떼가 가득 차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웅웅거리는 머리를 꽉 눌렀다. 대충 씻어 낸 젖은 머리카락이 손에 철썩 달라붙는다.

문을 열기 직전에 말리고 나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가람은 그대로 문을 나섰다.

벌써 오늘이 다 갔다. 숙취에 누워 있다가 소중한 하루를 다 날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움직여야 한다.

아래로 내려가니 슬슬 테이블에 손님들이 차고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시간, 똑같은 풍경이다. 그 풍경은 멈춰 버린 가람의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가람은 꺼림칙한 기분으로 빈 테이블 중 하나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로아나가 보이지 않는다.

“저기.”

“네, 손님?”

오가는 점원을 부르긴 했는데 갑자기 두통이 찡하게 밀려오는 바람에 잠시 말을 잃었다.

가람은 탁자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가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을 할 때마다 소리의 진동이 뇌를 주무르는 것 같았다.

“로아나 못 보셨어요?”

점원은 갈래머리의 주근깨가 귀여운 소녀였다. 자주 보던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봤었다.

그녀는 퀭하니 죽어 가는 가람을 보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딱 쳤다.

“어제 엄청 마시던 분이시군요! 안 그래도 너무 안 일어나셔서 깨우러 가려고 했어요. 로아나 언니는 손님이 너무 안 일어나신다고 약 사러 갔어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가람은 떠나려는 점원을 붙잡고 은화 하나를 꺼내어 쥐여 주며 부탁했다.

“제가 지금 도저히 위로 올라갈 상태가 못 되어서 그런데, 제 동료 좀 깨워서 데려와 주세요. 그리고 속을 달랠 만한 음식 3인분 정도 준비해 주시겠어요?”

“그럴게요.”

점원이 떠나고 가람은 잠시 탁자의 나뭇결과 대화를 나누었다. 고개를 박고 끙끙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맞은편에 앉는 기척이 느껴진다.

부스스하게 얼굴을 들자 빛이 날 정도로 상큼하게 웃고 있는 로아나가 컵을 슥 밀어 주며 안부를 물었다.

“아직도 힘들어요? 이거 먹으면 좀 괜찮을 거라는데.”

“아, 고마워요.”

가람은 꿈틀거리며 컵 속의 약을 맛도 보지 않고 허겁지겁 들이켰다. 약초즙 특유의 풋풋한 쓴맛에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속이 좀 가라앉는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다. 두통도 훨씬 가셨다. 가람의 놀란 얼굴에 로아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굉장히 좋은 거라고 하더라구요.”

“네. 그러네요. 아, 어제 술값 얼마나 나왔죠?”

가람의 질문에 로아나는 앞치마를 뒤적거려 양피지를 꺼내었다. 어제의 주문서인 듯했다.

“음, 어디 보자. 고급 포도주 여섯 통, 오리 한 마리, 새끼 돼지 햄, 왈라피냐, 왕삼치, 문어, 휴식의 요정 특선 스튜, 말린 청어, 과일들. 전부 4골드 11실버 31쿠퍼네요.”

뭘 이렇게 많이 먹은 거지. 먹은 것 중 절반은 분명히 토했을 거다. 가람은 확신하며 주머니에서 5골드 금화 하나를 꺼내어 로아나에게 건네었다.

“거스름돈은 괜찮아요. 로아나가 가져요. 약값도 그걸로 될까요?”

“그럼요, 충분하죠.”

계산을 마치고 있자니 뮐러와 웨이크가 갈래머리 점원의 손에 이끌려 비척비척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둘 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뮐러는 가람과 눈이 마주치더니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가 곧 헛기침을 하고 슬그머니 테이블에 다가앉았다.

로아나는 두 남자에게도 약을 내어주고는 일을 해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잠시 안부 인사가 오갔고 셋 다 멍하니 테이블의 무늬와 대화를 나누었다. 무엇부터 해야 하더라.

가람은 멍한 머리로 생각하다가 시야 안으로 불쑥 묽은 오트밀 그릇이 들이밀어지자 정신을 차리고 그것을 삼켰다.

적당히 뜨겁고 부드러운 곡물 죽이 위장을 달랜다. 그쯤 되자 슬슬 몸 상태가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술은 적당히 마셔야겠습니다.”

뮐러가 가람에게 말하며 남은 죽을 단숨에 들이켰다. 가람은 그가 죽을 다 먹기를 기다리다가 두 남자에게 질문했다.

“어제 뭣 좀 들은 거 있어요?”

“아, 그래서 그렇게 선장에게 술을 먹였던 겁니까?”

웨이크가 뒤늦게 깨닫는다. 가람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취하게 만들고 뭔가 질문하면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을까 했는데, 제가 취해 버렸네요.”

가람이 머쓱하게 코끝을 만지자 뮐러가 싱긋 웃었다.

“별것은 없었습니다. 어제 제가 잔뜩 취한 척하고 물어봤는데, 용병선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더군요.”

“취한 척이요?”

“예. 술꾼들이란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덜 취한 것 같으면 정신을 차리려고 하고, 더 취한 것 같으면 얼른 취해 버리려고 하는 습성이 있거든요. 완전히 맛이 간 척했죠.”

“그럼 스튜 그릇을 머리에 쓰고 있을 때도 제정신이었어요?”

“그럼요.”

가람은 뮐러가 극단에 들어가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그걸 하는 수밖에 없지. 가람은 오트밀을 서둘러 마시며 재촉했다.

“어서 먹고 용병 길드로 가죠. 문 닫기 전에 가야 해요.”

“벌써 다 먹었습니다.”

두 남자가 동시에 대답했다. 가람은 입 안의 죽을 우물거리다가 삼킨 후, 나머지 죽을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록의 용병 길드는 바랄라인보다 조금 작고, 허름했다. 아니, 사실 많이 작고 허름했다.

바랄라인의 용병 길드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데다 오가는 사람도 많아서 마치 시청 같은 인상을 주었다면 베록의 용병 길드는 동사무소 같은 느낌이었다.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들이 램프 안에 불붙은 초를 넣어 벽마다 걸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짧게 인사해 왔지만 그걸로 끝이다.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용병 길드에 있는 사람 중 8할은 양피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시판 앞에 모여 서 있었다. 가람도 익히 아는 게시판이다. 의뢰 게시판.

가람은 일단 의뢰들을 좀 살펴서 얼마 정도의 금액을 걸어야 할지 가늠하기로 했다.

의뢰는 얼핏 보기에도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에 의뢰 내용과 보수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는데 사실 대부분은 1골드가 넘지 않는 간단한 일들의 의뢰였다.

웨이크와 뮐러도 그 옆에 서서 의뢰 내용을 함께 살폈다. 그러나 모든 의뢰를 다 읽어 봐도 용병선이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

곡식 수확을 도와줄 사람을 찾거나, 여관에서 음유 시인을 찾는다거나, 마차 수리나 선원 등을 모집하는 것이었고, 용병대를 원하는 의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육로 호위가 대부분이었다.

가람은 고민하다가 적당히 100골드 정도를 걸기로 했다. 기본 100골드에, 그 이상은 용병대의 규모나 다른 기타 사항 협의 후 결정하기로.

“그, 양피지 하나 주세요.”

가람은 저 종이를 의뢰지라고 해야 할지, 양피지라고 해야 할지 헤매다가 결국 적당한 단어를 골랐다.

직원은 옆에서 작게 잘린 양피지를 꺼내며 질문했다.

“의뢰하실 겁니까?”

“네.”

“의뢰 내용은 제가 적고 공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작성이 끝나면 뒤에 보이는 게시판에 붙이시면 됩니다.”

“네.”

“그럼 의뢰 내용을 말씀해 주시죠.”

“용병선을 구하고 있어요. 목적지는 아직 모르구요. 방향이 동쪽이에요. 그리고 보수는 기본 100골드에 협의로 더 추가 지불할 용의도 있어요.”

“음, 고액 의뢰군요. 지원 자격은 있습니까?”

“딱히 없어요.”

대답하던 가람은 문득 접수처의 벽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집요한 시선이라,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왜 쳐다보는 거지? 뭔가 노리는 거라도 있는 걸까? 뭔가 노리더라도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가람은 등 뒤에 선 웨이크와 뮐러의 기척을 확인하고 다시 양피지를 작성하는 데 집중했다.

“끝났습니다. 수수료는 3실버입니다. 저 뒤에 붙이시면 됩니다.”

가람은 은화 세 개를 건네고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게시판에서 가장 잘 보일 만한 위치를 찾아 붙이고 나니, 붙이기 무섭게 누군가가 그것을 떼어 냈다.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접수처에서 가람이 의뢰를 작성하는 내내 바라보고 있던 남자였다.

“뭐죠?”

짧게 깎은 수염에 장난기 많아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남자는 물 빠진 청바지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씨익 웃었다.

“용병선을 찾으십니까?”

“그런데요.”

웨이크가 슬쩍 남자와 가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달이 나면 언제든지 제지할 수 있지만 대화는 막지 않는 적당한 위치였다.

가람은 그를 흘끔 바라본 뒤, 홀스터의 권총에 손을 대었다.

“이런, 살벌한데요. 제 소개를 좀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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