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다이라라고 불린 조선소 주인은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값을 내렸다.
30만 골드. 그 이하로는 절대 안 된다고 못 박는 모습에 가람은 다시 한 번 로아나의 위력을 절감했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포도주를 잔뜩 배에 선적하고 말린 어육이니 뭐니 배에서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밤새도록 실었다.
브라한은 어디서 수배했는지 밤중에도 선원들을 모아 왔다. 되도록 빨리 출발했으면 좋겠다는 가람의 말에 출발 날짜는 다음 날 정오로 당겨졌다.
가장 바쁜 것은 브라한이었다. 그는 배를 돌아다니며 꼼꼼하게 물이 새는 곳은 없는지, 나무가 썩고 있는 곳은 없는지 확인한 뒤 목록을 짜서 식료품을 선적했다.
보통 이런 항구 도시에서는 선원들이 필수적으로 싣는 식료품들이 마치 패키지여행 상품처럼 짜여 있기 마련이고 덕분에 일을 덜 수 있었지만, 그뿐이다.
급히 모집한 선원 중에 불순분자는 없는지 면밀히 살피는 것이나 예비용 키, 예비용 돛 등 갖가지 물건들을 챙기는 등 손 가는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한 번 출항하면 배 위는 완벽하게 밀실이 되어 버린다. 망망대해에서 먹고 마시고 자고 즐기는 모든 것을 배 위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꼼꼼하게 챙길수록 항해는 즐거운 것이 된다.
특히 가람이 금전적인 문제에 대해 금화를 주머니째로 퍼 준 상태라 차후 문제가 발생하면 ‘돈이 부족해서.’ 같은 변명은 전혀 통하지 않게 되는 터라 브라한은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가람도 한가하지만은 않았다. 아직 믿을 수 없는 브라한에게 뮐러와 웨이크를 감시로 붙여 놓고 가람 또한 준비에 바빴다. 그중 하나는 뽀삐와의 작별 인사였다.
배 위는 말에게 그리 좋은 환경이 못 된다. 그래서 가람은 돌아올 때까지 휴식의 요정에 뽀삐와 말들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저쪽 세계에서 챙겨 올 것이 있었다.
가람은 차원 문을 열기 위해 아무도 없는 방 안 욕실에 홀로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문을 열기 직전, 가람은 확인하듯 손등을 들어 바늘을 확인했다.
모로 세워진 손등의 바늘은 정확히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수면보다 조금 더 깊은 곳을.
* * *
파도는 아무리 부딪혀도 배를 깰 수 없다. 가람은 무의미한 시선으로 파도가 뱃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가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들이 저 파도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걱정하고, 자신을 둘로 쪼개어 토론하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함에 발버둥 쳐도 파도는 배를 깰 수 없다.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가람의 어두운 안색을 눈여겨보고 있던 뮐러가 슬쩍 다가섰다. 이른 아침부터 누가 뱃전에 서 있나 싶어 봤더니 가람이다.
가람은 애써 웃으며 뮐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뭐, 이제 잘 만하군요. 아직도 울렁울렁 흔들리는 건 느껴지지만요. 브라한 씨 말로는 큰 배라서 그리 심하지 않은 거라고 하던데, 역시 사람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다행이네요.”
뮐러는 가람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정신을 어딘가에 두고 온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가 대답하기 곤란해 말을 돌렸음을 눈치챘음에도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네? 아뇨, 뭐 그냥 이것저것. 뽀삐 생각도 하고…….”
가람은 적당히 둘러대었다.
“그렇군요. 저도 제 말에 슬슬 이름을 지어 줘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던 중입니다.”
뮐러의 말에 가람은 정말로 뽀삐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버렸다. 해가 뜨지도 않은 시간의 마구간은 어두웠다.
가람은 뽀삐가 자신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뽀삐는 곧 돌아온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가람이 거듭 설명하고 나서야 기다란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가람이 떠나는 것과 자신이 남는 것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가람은 크페타인에서의 예를 들어 뽀삐에게 설명했고 뽀삐는 솔직하게 그런 것은 싫다고 대답했다.
‘나를 볼 것이 벽밖에 없는 마구간에 계속 홀로 두는 것도 괜찮아요. 저는 귀가 있으니까요. 짐을 내 등에 실어도 돼요. 귀리만 줘도 잘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꼭 돌아와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실 거죠?’
‘물론이지.’
가람은 조금 찡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뽀삐는 눈을 조금 내리깔고 앞발굽으로 바닥을 긁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손으로 책상 따위를 긁는 행위에 해당했다.
‘빨리 누나가 돌아와서 내 등에 짐을 싣고 다시 같이 다녔으면 좋겠어요.’
가람은 꼭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로아나에게 몇 번이나 뽀삐들을 잘 부탁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로아나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불안하긴 했다.
“그런데 그 이상한 물건들은 정말로 뭡니까?”
가람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뮐러가 이야기하는 것은 가람이 마트에서 챙겨 온 잠수복, 오리발, 물안경 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산소통은 없었다. 그 점이 가람을 근심 속으로 내몰고 있었다.
“이번 걸 찾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보다, 대체 어디서 그런 게 생겨난 겁니까?”
“미안해요. 말해 줄 수 없어요.”
뮐러는 입맛을 다셨다. 가람은 상냥하고 착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절대 알려 주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준 입장에서 좀 섭섭한 것도 사실이었다. 분위기가 침묵으로 잠시 굳어졌다.
“흠흠, 그런데 의뢰 한 번으로 30만 골드에 달하는 배를 주는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 정도는 되어야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후불이고, 위험도도 높잖아요. 정확하게 명시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정상적인 용병대라면 절대 맡지 않았을걸요. 맡아 준 것이 고맙기도 하구요. 돈도 살아 있어야 쓰죠.”
“그래도 그 정도 금액이라면 달려들 다른 용병대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냥, 도와주고 싶었어요.”
가람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나쁜 쪽으로 결정짓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다.
기왕 누군가의 앞에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면 되도록 좋고 즐거운 문을 열어 주고 싶었다.
행복한 길을 가도록. 브라한이 너무 무겁고 어두워 보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오늘은 바다도 잔잔하고 바람도 그리 거세지 않군요. 낚시 내기 하기 좋은 날씨입니다.”
뮐러의 목소리가 아니다. 웨이크가 뮐러와 가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출항하고 사흘간 멀미로 반쯤 죽어 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선원들과 낚시도 할 정도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가람은 그 적응력에 혀를 내둘렀다. 가람이야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 기구 등으로 멀미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지만 두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승마 경험이 있어서 적응이 빠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좀 이겼어요?”
“음, 바다에서 하는 사냥은 거의 운이라 좀 힘들더군요.”
졌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웨이크의 겸연쩍은 얼굴에 가람은 가볍게 웃었다. 낚시는 배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여흥거리다.
선원들이 볼 때마다 가람에게도 함께 하자며 권해 왔지만 낚싯대를 잡고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점점 더 기분이 무거워져서 낚시를 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까지 모은 패스는 85. 트리거의 동굴에서 15패스를 찾은 덕분이다. 그러나 아직 100도 되지 못했다니.
앞으로 모아야 할 패스가 915패스나 남아 있는데 벌써부터 쓰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쓴다면 어떤 능력을 사야 할지도 결정 내리기 힘들었다. 물속에서 숨 쉬는 능력 50패스. 겨우 숨 쉬는 능력에 50패스나 써야 하다니.
그 능력을 사고 나면 35패스밖에 남지 않는다. 다른 능력은 무엇이 있을까. 물을 조종하는 능력? 원하는 정도의 위력을 가지려면 패스가 부족했다.
모르드레드가 사용했던 제대로 된 마법, 그 불꽃 마법 하나를 손에 넣는 데 200패스가 필요하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물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조종하는 것뿐이라 그런지 50패스 정도 저렴해서 150패스였지만 그래도 그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자신에게 150패스가 있었다 하더라도 물을 조종하는 능력을 샀을지는 미지수다.
사고 나면 패스가 0이 된다. 다시 0패스로 시작하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차라리 쓰지 않고 말지. 정말로 위험한 순간에는 차원 문으로 도망치면 된다.
뮐러와 웨이크는, 위험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그렇게 아껴야 한다.
가람이 상념 속으로 빠져들자 두 남자는 시선을 교환하고 식사를 챙겨 오기 위해 선창으로 내려갔다. 다시 가람은 홀로 부서지는 파도를 보았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을까. 패스를 쓰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이 없을까. 그런 가람의 손을 잡아 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브라한 씨?”
가람은 묵묵한 브라한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톱 끝이 너덜너덜해지고 피까지 얼비치는 자신의 손가락들을 발견했다.
가람은 멋쩍은 마음에 주먹을 쥐어 손가락들을 감추었다. 헤진 손끝이 따끔거렸지만 아픔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다.
브라한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커다란 덩치에 위압감도 장난이 아니라 가람은 다시 상념에 빠져들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없는 곳으로 장소를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걷는 것과 같은 속도로 따라붙어 오는 걸음에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기, 혹시 저 따라오시는 거예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람은 뒷머리를 긁적이려다가 뜨끔하는 통증에 급히 손을 떼어 냈다.
브라한은 한숨을 닮은 소리를 내더니 가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가람의 손을 잡아 주머니에서 꺼낸 약을 바르고 얇은 붕대로 감쌌다.
가람의 두 배는 될 법한 커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다른 쪽 손도 주십시오.”
두 손 다 깨물었었나. 가람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 모습이 남들 보기에도 상당히 민망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어나세요. 왜 무릎을 꿇고 그러세요.”
“키가 안 맞습니다.”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가 너 왜 이상한 생각 하느냐 하고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져 가람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그의 키가 크긴 하다. 키뿐만이 아니라 덩치도 엄청나게 컸다.
브라한은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고, 가람은 이 민망한 상태의 민망한 침묵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상투적인 질문을 하기로 결정했다.
“약은 늘 갖고 다니세요?”
“예.”
거친 돛과 닻줄을 다루다 보면 손이 찢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약은 그때를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갖고 다니는 선원보다 챙기지 않는 선원이 많은 것이 보통이다. 손 찢어진 것쯤이야 놔두면 낫는 거다. 다들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가람은 브라한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커다란 덩치를 볼 때부터 생각했던 것을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크페타인 출신이세요?”
“그렇습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말에 가람도 덩달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은 없었다. 익히 예상했던 무언가가 맞아떨어졌을 때의 작은 성취감이 있을 뿐이다.
가람은 치료가 된 손에 대해 브라한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손끝을 감은 붕대의 매듭이 예쁘게도 지어졌다.
가람의 시선이 붕대 끝, 손가락을 따라서 손등으로 향한다. 이리저리 산만하게 펼쳐진 손등의 낙서들.
가람은 익숙해진 그 문양 속에서 바늘을 찾았다. 그리고 현재 배의 방향과 바늘의 방향이 약간 어긋나 있음을 발견했다.
“아, 방향 어긋났어요. 이쪽이에요. 약간, 약간 어긋났네요.”
처음에야 약간이지만 오랫동안 항해하면 가면 갈수록 각이 점점 벌어져 결국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쪽 말입니까?”
“네, 제가 보고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브라한은 그 자리에서 즉시 손을 흔들어 키를 지키고 있는 일등 조타수 밀본과 수신호를 나누었다.
본래 돛새치 용병대의 삼등 조타수였던 밀본은 어느새 일등 조타수로 승진했다.
조타수란 비행기로 따지면 파일럿, 기차로 따지면 기관사나 마찬가지였다. 경우에 따라서 선장과 대등하거나 아주 약간 낮은 자리에 위치한다.
배의 키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조타수와 선장 둘뿐이었다. 조타수의 영향력이 아주 큰 배에서는 선장조차도 키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나이는 어려도 선원들 사이에서 꽤 대접받는 편이었다.
다행히 날씨는 아주 청명했다. 선원들은 낚시를 하며 떠들어 댔고 밤이면 모두 어린아이처럼 순하게 잠이 들었다.
브라한이 사람을 아주 잘 골라 뽑은 덕분에 어떤 소란도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소란을 피우면 그자를 그대로 바다에 내던져 버릴 것 같은 브라한의 외형이 그 평화에 한몫하기도 했다.
그런 평화 속에서 동쪽으로 항해한 지 12일째 만에 문양의 바늘 끝이 원 안으로 들어왔다.
배로 12일간 밤낮없이 꼬박 달린 데다 배의 속도가 걸음보다 빠름을 염두에 두고 계산하면, 육로로 따졌을 때 거의 두 달은 걸렸을 거리였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가람은 홀로 잠수할 것을 선언했다. 물론 배는 발칵 뒤집어졌다.
“안에 거대한 식인 물고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선원은 가람과 인사말을 몇 번 나눈 것 외에는 말도 섞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가람은 그의 이름도 몰랐다.
하지만 그 선원은 조용히 제법 은은한 분위기를 피우며 뱃전에 장식물처럼 서 있는 작은 아가씨가 꽤 마음에 든 상태였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스스로 고기밥이 되겠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