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가람은 이쯤 해서 뮐러가 왜 웨이크와 다퉜는지 깨달았다.
악몽 속에 등장한 인물은 뮐러 혼자뿐이었던 것이다. 곁에 다른 일행이라거나 위협적인 그 누군가도 없었다.
평소 대놓고 눈치가 없던 웨이크는 뮐러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채지도 못했으리라.
“숲이니까 배 위에서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죠?”
“뭐 그렇죠. 가까운 시일은 아니고, 나중에 꽤 재수 없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입니다.”
뮐러가 워낙 불안해했기 때문에 가람은 자신에게까지 그 불안이 옮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가람과 불안을 공유하던 뮐러는 무언가 다른 화제를 꺼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손은 좀 괜찮으십니까?”
가람은 뮐러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그 질문을 꺼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리 달가운 화제는 아니었다.
가람은 갑자기 몸을 뒤틀고 침대 위를 마구 뒹굴며 고통스럽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발작에 가까운 그 반응에 뮐러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악, 내 손! 으아악! 아아아악! 내 손이!”
“가, 가람!”
뮐러는 굉장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 침댓가를 맴돌았다. 가람이 그만큼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눈을 까뒤집으려고 들던 가람은 뮐러가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기절시키려고 하자 순식간에 표정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기분 같아서는 이렇게 뒹굴고 싶지만, 아픈데 아프다고 하면 더 아플 것 같아요.”
앞에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차라도 한 잔 놓여 있어야 할 것 같은 차분한 어조였다. 뮐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황당하게 가람을 내려다보았다.
“놀랐잖습니까.”
가람은 어깨를 으쓱이며 뮐러가 다시 자리에 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통을 제곱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보아하니 끊어져 나간 손가락도 없는 것 같고.”
“터프하군요. 장난치는 것을 보니 견딜 만한 모양입니다.”
뮐러의 말은 틀린 것이었다. 가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패스를 써서 낫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다 쓰고 있었다.
태연한 척 웃는 얼굴 아래로 얼마나 치열한 갈등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는 오직 가람 본인밖에 모를 것이다.
차라리 손을 잘라 내고 싶은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괜히 참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베록으로 돌아가면 말끔히 나을 수 있기에, 참으면 해결되는 일에 공연히 패스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때, 선실 문이 열리더니 붕대와 약재 따위를 든 웨이크가 성큼 들어섰다. 뮐러는 좀 불편한 안색이었다.
하지만 웨이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가람의 발치에 서서 안부를 물었다.
“괜찮습니까?”
뮐러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가람은 다시 쇼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담백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자 뮐러는 대단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가람은 웨이크가 적당한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앉는 것을 기다린 후 그가 가져온 붕대를 애써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밖은 어때요?”
“금 산호가 시들어 버려서 실망한 선원들이 술을 마구 마시고 있는 것 외에는 별문제 없습니다.”
“금이 아니었어요?”
“예. 그냥 금색에 좀 단단한 해초 같은 것이더군요. 시간이 좀 지나니 흐물흐물해지면서 갈색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렇군요.”
웨이크가 덤덤하게 말한 것과는 별개로 선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목적지도 정해져 있지 않은 배에 탈 정도라면 제법 사정이 열악한 처지의 사람들이었던지라 일확천금을 가져다줄 환상의 금 산호가 사실 언뜻 보석처럼 보이기도 하는 석류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절망하기에 충분한 일이다.
가람이 누워 있는 선실이 안쪽 2층에 위치해 그렇지 갑판에서는 그 사기꾼―거북은 사기를 친 적 없다―거북을 비난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개중에는 듣기 민망한 상스러운 욕도 섞여 있었는데, 걸쭉하기가 열흘 끓인 고기 스튜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다.
“붕대를 갈죠.”
웨이크가 약병을 열며 차분하게 말했다. 가람은 반투명한 병 안으로 보이는 짙은 녹색의 약을 바라보았다. 꺼림칙했다.
“잠깐, 잠깐만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좀 덜 됐어요.”
웨이크가 시선만으로 ‘무슨 준비 말입니까?’ 하고 묻는다. 뮐러가 짧게 한숨을 쉬고 끼어들었다.
“당연히 씹다 뱉은 꼴이 된 자기 손을 마주할 준비죠. 좀 기다리다가 가람이 잘 때 합시다.”
“고마워요, 뮐러.”
“별말씀을.”
가람과 뮐러가 인사치레를 주고받는 동안 웨이크는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고 뭔가 짧게 생각하더니 곧 펼쳤던 약과 붕대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가람은 손가락 외에 다른 화제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방금 들은 악몽밖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뮐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 안 좋은 것일수록 머릿속에 강하게 남는 법이다. 하지만 웨이크 덕분에 고민은 길어지지 않았다.
“그 거북, 이빨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없었으면 아예 잘렸을 테니까요.”
고마워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걸 다시 짚어 줘서. 한 번 더 말하지만, 통증 속에서 가람이 웨이크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가람은 평소에도 자주 발휘하던 인내심을 다시 한 번 끌어모아 미소로 그 말을 받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웨이크는 죄가 없다. 이래서 사람은 때를 잘 맞춰야 하는 것이다.
“맞아요, 웨이크. 위로해 준 건 고맙지만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요. 제 손 말고 뭔가 다른 화젯거리는 없나요?”
뮐러는 조금 안타까운 시선으로 웨이크를 짧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환자와 방 안에 단둘이 있으면서도 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자신을 봤음에도 굳이 손에 관한 화제를 꺼낸 눈치 없는 사람을 향한 측은함이 담겨 있었다.
“없습니다.”
웨이크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가람은 할 말을 잃고 당당한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길고 긴 한숨이었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뮐러가 먼저 방을 떠났고, 딱히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웨이크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람은 의식을 잃고 다시 잠듦으로써 그 방을 떠났다.
가람이 다시 일어났을 때, 손의 붕대는 깨끗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람은 식은땀에 절어 불쾌한 몸을 허리의 힘만으로 일으켰다.
다친 것은 손이었지, 다리가 아니었다. 가람은 충분히 걷고도 남을 만한 몸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선실 안에는 통증을 잊게 만들어 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가람이 선실을 뛰쳐나온 명료한 이유였다.
선실 복도로 나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가람은 드물게 있는 램프의 불에 의지해 복도 여기저기에 몸을 부딪혀 가며 갑판 쪽으로 걸었다.
항해 중인지 배가 계속 기우뚱거려서 똑바로 걷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갑판으로 올라오는 데 성공한 가람은 강풍 속의 정신 나간 것 같은 술판을 발견했다.
선원 중 하나를 줄에 묶어 거북을 낚아 보겠다며 후미에 매단 것이나,
대롱대롱 매달린 채 흔들리며 힘차게 무언가를 토하는 선원, 돛대를 기어오르는 선원, 배의 가장자리를 날갯짓하며 아슬아슬하게 걷는 선원, 무엇이 그리 좋은지 서로를 줄로 묶고 배의 흔들림에 따라 굴러다니는 세 명의 선원 등 무엇 하나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람은 모아진 미간을 펴려고 손을 들어 올리다가 닿기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간신히 멈췄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붕대 감은 손을 바라본 뒤 그나마 술판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 다가섰다.
몇 개의 낚싯대를 사이에 두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확히는, 뮐러와 웨이크가 끼어 있는.
낚시. 통증을 잊기에 나쁘지 않은 방법 같다.
“아, 가람. 앉아요.”
뮐러가 부르고 브라한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가람이 주춤주춤 원 안으로 끼어들자 선원들은 흥미로운 눈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빙 둘러앉은 이들 중 가람이 익히 아는 사람들 외에 두 명의 낯선 선원이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붉은 수염을 몹시 닮아 있었는데, 수염의 색이 달랐다.
“어, 괜찮습니까?”
질문한 남자는 낚싯대를 잡고 있던 선원이었다. 가람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여 주었다.
“괜찮아요.”
“그, 손 다친 것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에 금 산호를 얹은 투명한 거북이 번쩍거리고 있는데 머리 위로 용이라도 날아가지 않는 이상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옷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다들 장난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험, 거 미안합니다.”
마지막 말에 이르러서야 가람은 그가 사과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끼어든 후 원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비교적 조용해졌음을 눈치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람은 의뢰주였다. 멧돼지 같은 모습과 달리 선원은 꽤 소심한 감성의 소유자인지 그 사실이 몹시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입니까?”
“예. 당연하죠. 호위하거나 간호하는 건 계약서에 없었으니까요. 별로 신경 안 써요. 다만 제가 정신을 잃었을 때 잠수복을 누가 벗겼는지 신경 쓰일 뿐이에요.”
그 말은 종전보다 더 깊은 침묵을 낳았다. 가람은 둘러앉은 남자들의 눈알이 갑자기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사실 그렇게 심하게 신경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그 옷을 계속 입혀 둘 수는 없었으리라.
시선들의 매스 게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든 시선의 끝에는 뮐러가 있었다.
뮐러는 손가락보다 더 강렬하게 닿아 오는 그 시선 속에서 더듬더듬 변명했다.
“눈은 감았습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뮐러. 이제 이야기 계속하세요. 오기 전에 뭔가 즐겁게 얘기하고 계시던데.”
“뭐 별로 시답잖은 이야기였습니다.”
뮐러의 말에 크게 반박한 남자는 밀본이었다. 가람은 그가 청년답게 핏대를 세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시답잖은 이야기 아닙니다! 3 대 1로 제가 그 깡패들을 확, 아, 정말 보셨어야 했는데. 완전 끝내줬다구요. ‘나는 돛새치 용병대 삼등 조타수 밀본이다.’라고 딱, 말하니 걸레짝이 된 놈들이 꿈틀거리는데…….”
정말로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가람은 밀본의 이야기를 웨이크와 브라한이 조용히 듣고 있는 것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웨이크와 브라한에게 앞다투어 전적을 묻기 시작했다. 브라한은 침묵했고, 웨이크는 내키지 않는 투로 대답했다.
“사람과는 딱히 싸워 본 적 없습니다.”
“사람이 아닌 것은?”
“제가 잡아 본 것 중 가장 강한 것은 와이번입니다.”
격이 다른 상대가 나오자 갑자기 남자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순식간에 기가 죽은 그 판에서 브라한만이 의연했다.
그는 조금 이채 어린 눈으로 웨이크를 보다가 곧 흥미 없다는 듯 술을 들이켰다.
“뮐러는 저런 것 없어요? 그러고 보니 팔 굽혀 펴기도 엄청 쉽게 했었고.”
가람의 질문에 뮐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요?”
“네.”
뮐러는 잠시 고민하다가 갑자기 실실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었다. 선원들은 아무리 봐도 샌님처럼 보이는 이 마법사가 뭔가 말하려 하자 나름 흥미롭다는 태도로 뮐러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날도 마법서를 사서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이었죠. 왕년의 뮐러는 제법 전투적인 청년이었답니다. 그리고 골목길에서 딱 마주친 거죠. 다들 아시겠지만 마법서는 값이 꽤 나간답니다. 모두 일곱 명의 불량배들이 저를 막아섰습니다. 그리고 저는 7 대 0으로 간단하게 승리했죠.”
“일곱 명이나?”
휘둥그레진 선원들과 함께 놀라고 있던 가람은 문득 그 말에서 의문점을 발견해 냈다.
“잠깐, 7 대 1이 아니라 7 대 0이요?”
뮐러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속는군요. 뭐, 싸우는 사람이 없으니 7 대 0이죠. 도망갔거든요. 그리고 제 책들을 지켰으니 결과적으로 이긴 겁니다.”
뒤늦게 깨달은 선원들의 황당한 감탄사가 이어졌다. 가람은 덩달아 웃다가 브라한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웬일로 술판이에요?”
“순풍이라 출발했던 것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물자를 아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확실히 출발했을 때보다 바람이 강하긴 했다. 가람은 제멋대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묶으려다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그러나 곁에 앉아 있던 선원 하나가 눈치 빠르게 가람의 머리카락을 모아 쥐어 묶어 주었다.
“고마워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사를 주고받고 있자니 갑자기 망루에 서 있던 선원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이 아니었다. 비명에 가까운 환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