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68화 (68/256)

68화

놀라 벌떡 일어섰던 사람들은 선원이 왜 비명을 질렀는지 깨달았다. 멀리, 금빛의 불빛이 보였다. 등대의 불빛이었다.

가람은 온통 검은 밤바다에서 땅에 떨어진 별처럼 반짝이는 그것을 바라보며 선원들이 금을 사랑하는 것은 바다에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이 금화의 반짝임을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배는 순풍을 타고 3일 후 항구 도시 베록에 무사히 정박했다.

* * *

“너무 급하게 떠난 것 아닙니까?”

뮐러가 아쉬움이 남는지 멀리 보이는 베록을 돌아본다. 가람은 뽀삐의 등에 엎드려 배에서 있었던 일들을 속삭여 주다가 흘긋 고개를 들었다.

“뭐 안 챙긴 것 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뮐러는 잠시 우물거리다가 ‘역시 아닙니다.’ 하고 싱겁게 말을 맺었다. 그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웨이크가 가람에게 말을 걸었다.

“손은 괜찮습니까?”

질문했던 웨이크는 가람의 표정에 조금 당황했다. 가람은 정말로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웨이크를 보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마주한 것 같은 표정에 웨이크는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뇨. 뮐러도 아니고 웨이크가 먼저 안부를 물을 줄은 몰랐거든요. 아,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악의는 없는 말이에요.”

웨이크는 잠시 말의 갈기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람은 문득 리사 할머니와 솔터를 만나고 난 이후로 웨이크가 이런 식으로 사색에 잠기는 일이 꽤 잦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가람은 잠시 가늠하다가 곧 털어 버렸다. 그리고 질문에 대답했다.

“괜찮아요. 음, 완전히 괜찮지는 않지만 많이 나아졌어요.”

“다행이군요.”

가람이 베록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당연하게도 손의 치료였다.

1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그 고통 속에서 가람은 제발 빨리 치유 마법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보수도 바랄라인에서의 배를 걸었고, 괜찮은 치유 마법사를 데려오기만 해도 수고비를 지급하기로 호언했다.

그만큼 고통은 가람의 정신을 좀먹었고, 절박함 가운데 내몰았다.

그 결과 베록에 있는 모든 치유 마법사가 가람의 작은 여관방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북적거리는 귀한 치유 마법사들의 틈바구니에서 가람은 붕대를 풀었다.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끔찍한 상처를 마주했다.

손의 뼈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손이라고 유추할 수 없었으리라. 가람은 너무나 끔찍해서 눈을 감고 외면했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어묵을 물에 불려 빨래판에 마구 문지른 뒤 뼈에 꿰어 두면 될 만한 모습이었다.

예전이라면 보기만 해도 비명을 질렀으리라. 떨어져 나가 너덜거리는 살점은 탄력이라곤 없어서, 붕대를 푸는 와중에도 묻어 나왔다.

그때마다 가람은 잇몸에 피가 맺히도록 이를 악물었다.

지켜보던 치유 마법사 중 하나가 이가 상한다며 천을 물려 주지 않았다면 아마 치과 치료까지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몇몇 마법사는 차라리 잘라서 의수를 다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고, 자르는 즉시 손목을 아물게 하겠다며 꾀어내기도 했다.

양심적인 어떤 마법사는 이런 상처는 치유할 수 없다며 자리를 떴다.

혈관이나 신경 무엇 하나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이 없었다. 상처 입었을 때 즉시 치료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지만, 항해하느라 방치된 동안 손은 너무 많이 상해 있었다.

새로운 손을 만들어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마법사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둘씩 떠나며 한산하게 비어 가는 방을 본 가람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에 오면 당연히 나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침내 방이 텅 비고 모든 마법사가 떠나자 가람은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말로 패스를 써야 하는 것인가.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쓸까, 말까. 아까웠다. 하지만 고통을 참는 것은 너무나 괴로웠다.

가람이 결심하기 직전, 뒤늦게 도착한 마법사 하나가 헐떡이며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 가람은 모든 패스를 탈탈 털어 손에 쏟아부었을 게 분명했다.

‘미안합니다. 퇴근 시간이 늦어져서 그만.’

유약한 학자풍의, 외알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낯익은 마법사였다. 그는 가람의 손을 보고 조금 놀라긴 했으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필생의 업이라는 듯 신중하게 가람의 관절과 신경부터 천천히 복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직접 신경을 이을 때는 계속 참고 있던 가람조차도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람의 손에서 손톱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위가 복구되었을 때, 가람은 고통 없는 맑은 정신으로 그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베록에서 처음 은행에 갔을 때, 가람의 질문에 답해 주던 창구 직원이었다. 그는 거의 하루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가람의 손에 모든 힘을 퍼부었다.

식은땀을 한 사발 흘리며 매달리는 그 얼굴은 지루하게 죽어 있던 그때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서 직접 입으로 듣기 전까지 반신반의했을 정도였다.

그는 뮐러와 비슷하게 빈곤한 마법사였다. 그러나 뮐러와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그가 놀랄 만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재능을 생각한다면 사실 이런 곳에 묻혀서 은행 창구나 보고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본인도 잘 알고 있는지 마법사는 보수를 받는 즉시 마법사 길드로 들어가 나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 그를 뮐러는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어째서 저런 기회가 오지 않았던 걸까.

가람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뮐러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이제 예전 같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어차피 제법 근사해 보이는 마법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을 뿐 자신은 마법에 재능이 없었다.

마침내 손톱까지 모두 재생되었을 때 가람은 그의 손에 갖고 있던 대부분의 금화를 넘겨주었다.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그 마법사가, 마법사가 아니라 천사로 보일 지경이었다.

좀 많다 싶은 그 보수를 마법사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람은 은행으로 가 바랄라인에서 탈탈 털어 버리느라 텅 빈 복대를 채웠다.

그 업무 또한 가람의 손을 치료해 준 마법사가 진행해 주었다는 것은 조금 재미있는 일이다.

여하튼 알 굵은 보석 반지로만 챙겼던 지난번과는 달리 알이 작은 것과 굵은 것 등 골고루 섞어 챙겼다. 그리고 서둘러 미련 없이 베록을 떠났다.

급히 떠나는 가람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심지어 브라한이 술자리에 초대까지 했는데도 가람은 뽀삐의 고삐를 잡고 길을 재촉했다.

잡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시 대작하자며 붙잡는 붉은 수염과 이야기나 하자는 로아나, 전속 고용주가 되어 달라며 매달리는 밀본에 새롭게 돛새치 용병대가 된 선원들까지 모두 주렁주렁 매달려서 붙잡아 댔다.

가람은 그 모든 권유를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하고 떠났던 것이다.

붕대를 풀고 새살이 돋은 손가락은 아직 남아 있던 살점들과 맞물려 얼기설기 흉터를 그렸다. 아물긴 했으나 아직 약간 어색했고 힘을 주면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이 급히 길을 떠난 것은, 마침내 아물어 제 색을 되찾은 손등의 문양이 충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바늘은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 위에서 이미 충전이 다 되었던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그걸 보자 마음이 급해졌다.

손이야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고 했으니 길을 가면서도 해결될 문제였다.

“날씨도 좋고 길 떠나기 좋은 날이잖아요.”

“그렇긴 하죠.”

뮐러는 탐탁잖은 얼굴로 떨떠름하게 가람의 말을 수긍했다. 가람도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다.

너무하다는 듯 바라보는 로아나의 눈동자가 지금도 가슴을 콕콕 찔렀다. 가람은 그 눈을 잊고 싶어서 괜히 뽀삐와 더 시시덕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그래도 서쪽이라니,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꿈 때문에 그래요?”

뮐러는 대답이 없었다. 가람은 말 등에 늘어져 흐늘거리며 눈만 들어서 스쳐 지나가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숲의 악몽이라. 이야기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뭐, 별일 있겠어요? 신경 쓰인다고 해서 야수들판을 가로지르지도 않고 이렇게 돌아가고 있잖아요.”

“어차피 야수들판을 가로지르면 모자산맥에서 멈춰야 합니다. 제 악몽 때문에 돌아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뭐, 그야 그렇지만.”

가람은 히죽 웃고 다시 뽀삐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흑마라 그런지 햇빛을 받아 따끈따끈한 것이 꽤 기분이 좋다.

내내 매달려서 손이 씹어 먹히던 고통에서 벗어난 후라 그런지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손이 아프지 않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새삼 건강하고 몸 아픈 곳이 없는 게 가장 행복한 거라던 부모님의 말이 생각났다.

가람은 흠칫했다. 부모님?

어떤 느낌이 밖으로 슬금슬금 흘러나올 듯하다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 흔적을 따라 빠져들려는 가람을 뮐러의 질문이 잡아당겼다.

가람은 아직 손짓하는 듯 한들거리는 그 감각에 잠시 집중하다가 곧 털어 버렸다.

“이대로 서남쪽으로 계속 진행합니까?”

가람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웨이크가 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뽀삐와 뮐러의 말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눈치 빠르게 웨이크의 옆으로 답삭 달라붙었다.

그리고 웨이크가 펼친 지도 위로 뮐러가 방향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쭉 가면 페놈강입니다. 페놈강을 따라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페놈 항구가 있죠. 뭐, 저희가 가려는 방향이랑은 상관없습니다. 저희는 여기 페놈강을 건너야 합니다. 대략 여기까지가 일주일 정도 걸리죠. 강을 건너면 야수들판과는 완전히 안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가면요?”

뮐러의 손가락이 양피지 지도 위를 훑어 낸다. 서쪽, 그리고 남쪽. 그 궤적을 따라 가람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마침내 멈춘 손가락의 옆, 낡은 잉크를 가람은 천천히 읽었다.

“베녹……사스.”

베녹사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기억을 되새김질하던 가람은 웨이크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굳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절로 흠칫할 만큼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뮐러의 손가락이 짚은 지점을 맹렬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붉은 기운이 보이는 것 같은 뚜렷한 적의에 가람과 뮐러는 당황했다.

“웨이크?”

가람은 조심스레 그를 불러 보았다. 웨이크는 미동도 없이 지도를 쏘아보다가 천천히 적의를 갈무리했다.

가람과 뮐러는 숨죽인 채 시선을 교환하며 웨이크가 무언가 설명하기를 기다렸다.

“전에 기차에서 말해 드렸다시피 베녹사스는 제 고향, 아니, 전 고향입니다.”

“아, 거기서 사냥꾼 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독룡 다라즈녹이 둥지를 틀고 저는 사냥터를 잃었습니다. 베녹사스의 영주는 다라즈녹에게 공물로 제 여동생을 바치려고 했고, 여동생을 보호할 만한 돈이 급히 필요해졌죠. 그 아이가 베녹사스에서 도망쳐 멀리서도 안전하게 살 만한 돈. 한두 푼은 아니죠. 그래서 노예 경매장으로 향한 겁니다.”

그 말에 그 노예를 구입한 가람은 굉장히 심란해졌다. 웨이크는 가라앉은 얼굴로 지도를 보다가 가람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아니, 지금 제가 비참한 처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평생 사냥꾼을 해도 손에 넣지 못할 금액도 받았고 동생도 안전하게 살고 있는 데다, 지금 생활도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으니까요.”

하지만 가람은 웨이크가 눈사태 속에서 거의 죽을 뻔한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웨이크였다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이런 수상쩍고 위험한 일행에 합류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고생들은 두 남자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이다. 자신이야 패스를 얻는다지만 두 남자가 얻는 것은 약간의 금화 외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람은 문득 눈사태 때 웨이크가 너무 쉽게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웨이크는 노예로 팔리는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을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처음의 그 태도도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금화 몇 푼에 팔아 치워 삶을 구입하는 기분은 어떨까.

가람은 잠시 생각하다가 지나치게 우울해지려는 것을 깨닫고 멈추었다. 새삼스럽다. 가람 또한 몇 푼 패스에 자신을 팔아먹고 있지 않은가.

원래 삶이란 자신을 팔아서 사는 것이다.

비싼 값에 팔아먹는 것을 사람들은 성공이라고 하고, 헐값에 팔아먹으면 실패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가람은 전에 읽었던 책의 구절을 떠올렸다.

비싼 값에 팔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헐값에 팔았다고 해서 행복을 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비싸게 팔아서 불행을 살 수도 있고, 스스로를 값싸게 팔아도 한 줌 행복을 손에 쥘 수도 있다.

웨이크에게 계속 여행하길 바라느냐 어쩌느냐 하는 질문을 할 생각은 없었다. 두 남자의 사정도 있지만, 가람 자신의 사정도 있었다.

하지만 함께 여행하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갈수록 위험이 따르는 길에 동행해 달라고 하기가 힘겨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가람은 그 주제에 대해 아예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만약 정말로 베녹사스로 들어간다면, 그리고 다라즈녹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웨이크는 조금 음울하게 경고했다. 가람은 그 경고가 쓸모없는 노파심이기를 부디 바랐다.

하지만 뮐러의 악몽이 예지몽이라는 감투를 쓸 무렵, 가람과 두 남자는 불길한 기분으로 베녹사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베녹사스가 아니었다.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영주 성, 주택, 영지민들의 시름을 달래 줄 술집이나 각종 장인들의 집 같은 건물부터 시작해서 사탕무가 자라는 밭, 닭이 뛰노는 뒷마당, 젖소, 치즈 창고 같은 것들. 그리고 경비대와 성벽 같은 도시의 격을 높여 주는 것들이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베녹사스가 갖춘 것은 고작 영지민이라고 간신히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작자들뿐이었다.

어째서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인가 하면 그 무리들이 산적과 불량배의 중간쯤에 서 있는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허리춤에 커다란 도끼를 차고 있는 모습은 도끼라는 도구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나무꾼이라는 직업과 절대 연관 지을 수 없었다.

“이건,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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