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뮐러의 멍한 말에 웨이크가 이를 악물고 성큼성큼 걸어 베녹사스 안으로 들어섰다.
가람은 그 뒤를 따르며 틀만 남아 있는 아치형 문 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어렴풋하게 베녹사스라고 적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에 녹아서 뒷글자가 완전히 소실된 상태였지만 그럭저럭 추리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문의 양옆에 붙어 문을 문답게 만들어 줘야 했을 성벽들은 가치 없는 돌멩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가람은 발치를 뒹구는 성벽 조각을 발로 툭 쳐 굴려 보았다. 무언가 무거운 것에 눌린 듯 짜부라져 부서진 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여기는 제가 자주, 마을에 올 때마다 들렀던…….”
성큼성큼 걷던 웨이크는 누군가가 잡아당긴 것처럼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치미는 무언가를 참기 위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주먹이 격정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웨이크가 멈춰 선 건물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가람은 잔해 사이에 쓰러져 있는 나무 간판을 발견했다. 많이 부서지긴 했지만 중요한 글자 부분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냥꾼의 집.’
가람은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시는 완벽하게 폐허가 돼 있었다. 불타고 녹은 건물들은 대들보만 남아 그곳에 있었음을 증거할 뿐이었다.
을씨년스럽게 나뒹구는 집의 흔적은 마치 도시의 뼛조각을 보는 것 같았다. 도시의 유골 더미였다.
그리고 그 건물의 유해 사이로 까마귀 같은 강도 무리가 머리를 들이밀고 돈 될 만한 것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황폐한 풍경을 배경으로 눈을 찌를 듯이 푸른 숲이 보인다. 지나칠 만큼 우거진 녹림은 너무나 생생해서 이곳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등의 바늘은 숲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람은 넋이 나가 있는 웨이크를 잡아끌고 천천히 도시 안쪽, 숲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가람의 눈 안으로 회색 풍경이 타성적으로 흘러와 맺혔다.
가람이 생각했던 베녹사스 중 그 어떤 베녹사스도 이렇지는 않았다. 사냥꾼이 많았다기에 그저 춥지 않은 크페타인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생각했던 어떤 것보다 안 좋은 상태였다.
“크핫, 돈주머니 발견이오!”
까마귀 한 마리가 즐거움을 숨기지 않고 소리쳤다. 카카캇 하고 웃는 웃음소리가 정말로 까마귀를 닮아 있었다.
가람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웨이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는 그가 가장 오랜 삶을 보냈던 고향이다.
저런 풍경을 앞에 두고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싸움은 곤란하다. 하지만 다행히 웨이크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끓어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맥이 풀린 듯 차분한 얼굴이었다. 가람은 그 표정에 안도감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저쪽, 숲 쪽으로 가요.”
가람은 주변의 강도들을 완전히 무시하며 그렇게 지시했다. 주인 없이 나뒹구는 물건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들에게 덤빌 강도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말에 돌을 들추어 쇠 그릇을 꺼내던 남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숲으로 간다고?”
가람은 강도와 말을 섞는 일이 달갑지 않았지만 일단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런데요.”
“미쳤군. 소문도 못 들었나? 다라즈녹이 여기까지 다녀간다고. 이 꼴을 보고도 들어갈 마음이 드나 보군?”
그렇다고 여기서 강도 짓을 하는 건 잘하는 짓이고? 남자는 가람의 따가운 시선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오해가 있군. 우린 강도가 아니야. 대부분 옆 마을에서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지. 유령 마을이 되어 버렸다는데 아까운 물건들이 무슨 죈가?”
“소문?”
“다라즈녹인지 뭔지 하는 독룡이 분탕질을 거하게 쳤다는 소문 말일세. 이 근처 사람이 아닌가?”
“아니에요.”
가람의 대답에 남자는 젠체하는 태도로 팔짱을 꼈다.
“그러니 이렇게 소문에 느리군. 다라즈녹이 베녹사스를 아주 박살 내 놨다는 건 이 일대에서 유명하다고. 다행히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나타나지 않으니까 대충 챙겨. 소문 듣고 주변에서 화전민이고 뭐고 다 몰려와서 늦으면 챙길 것도 없어.”
말을 끝낸 남자는 다시 허리를 굽혀 잔해 사이에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람이 그 등을 바라보는데 뮐러가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이 도시 안에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가람은 고개를 젓고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역시 숲입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는 가람의 손끝에 위치한 우거진 숲을 바라보았다.
불길하게 일렁거리는 숲은 너무나 우거져서 검게 보일 정도였다.
“안 가면 안 되나요? 안 되겠죠. 예. 그렇겠죠.”
뮐러가 한숨을 푹 내쉰다. 가람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다시 남자가 끼어들었다.
“진짜 숲으로 갈 셈이군?”
그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 미친 사람 여기 하나 추가요. 댁도 저 숲 안에 어쩌고 하는 미친 사람 중 하나인가? 저기 가 봐. 댁 같은 사람 많으니까.”
미쳤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람은 마찬가지로 그를 강도라고 매도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별로 생산성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남자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멀어서 그런지 잘 보이지 않는다.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과는 다른 쪽이라 조금 망설이는데, 줄곧 말이 없던 웨이크가 나섰다.
“일단 가 보죠.”
그렇게 말한 그는 말릴 새도 없이 말의 고삐를 쥐고 가 버렸다. 가람은 급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따라가고 보니 까마귀가 들끓는 폐허와는 달리 뜨거운 열기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웨이크는 우글우글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눈을 바삐 굴리고 있었다.
“아는 사람을 찾는 걸 겁니다.”
뮐러가 측은하다는 듯 말했다.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웨이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무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후줄근한 차림이었고, 허리춤에 무기 하나 정도는 다 꿰어 차고 있었다. 전부 남자에, 여자나 아이는 없었다.
“없군요. 전부 외지인입니다.”
웨이크는 다소 안타까운 듯 그렇게 말했다. 베녹사스의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도시에서는 시체 한 조각 찾을 수 없었다.
가람이 의아해하는 사이 웨이크가 우글거리는 사람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제안했다.
“우리도 낄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바삐 무언가를 지시하다 눈알만 굴려 웨이크를 바라보았다.
“뭘 하는 건지는 알고 있소?”
“모릅니다. 다만 저희는 저 숲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방향이 같을 때까지만이라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남자는 수염 난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그리 손해나는 제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소란은 피우지 말 것. 다라즈녹은 귀가 아주 밝으니 말이오.”
웨이크는 여세를 몰아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슨 목적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어차피 중간에서 방향이 갈릴 테니 상관하지 말라 하고 싶지만, 그쪽도 불안할 테니 알려 주지. 우리는 다라즈녹의 둥지를 털러 간다오. 놈이 주변 순찰을 돌려고 자리를 비울 때 재빨리 빈집을 터는 거지.”
웨이크는 그 말도 안 되는 작전을 누가 낸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을뿐더러 남자가 갑자기 바락 외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출발이오, 출발!”
그의 외침에 무기를 다듬고 짐을 챙기던 사람들이 일제히 걷기 시작했다. 가람은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어 보았다. 스무 명은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숲으로 들어가면 대단히 시끄러워지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가람에게 웨이크가 다가와 툭 치며 잡아끌었다.
“우리도 갑시다.”
“네? 잠깐만요, 갑자기 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쪽 방향이 아니에요.”
“베녹사스의 숲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일단 저들과 함께하면서 익숙해지는 편이 좋을 겁니다.”
웨이크는 말하면서도 서둘러 그 행렬에 따라붙을 것을 요청했다. 불길하다며 몸을 빼는 뮐러를 잡아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 세 마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 뒤를 경계하듯 나란히 따랐다.
“불길한 숲인데요.”
가람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뮐러의 말을 긍정했다. 이 숲이 위험해 보인다는 것에는 동감이었다.
뮐러는 정말로 꺼림칙한 표정으로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신 입에서 불길하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람은 그 소리가 더 불길하다고 생각되었지만 그에게 면박을 주는 대신 숲을 관찰하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도시에서는 그저 약간 더울 정도였지만 숲으로 들어서자 정말로 무시무시할 만큼 더워졌다. 공기는 끈적끈적하고 해로운 냄새가 났다.
가람은 한증막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몇 발자국 떼지 않았는데도 숲 안쪽과 밖은 완전히 달랐다.
마치 벽처럼 빽빽하게 사방을 막아선 나무들과, 그 사이로 늘어진 덩굴들은 엄청나게 기다란 뱀이 몸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꼭 뱀 같네요.”
가람의 말에 웨이크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뱀입니다.”
“예?”
가람은 그제야 만만치 않은 숲이라는 웨이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무에 걸쳐진 뱀 같다고 생각했던 덩굴들은 실제로 절반 이상이 뱀이었다.
덩굴과 비슷한 무늬와 색을 가진 뱀들은 그렇게 은신하고 있다가 근처로 다가오는 다람쥐나 새 따위를 단숨에 집어삼키곤 했다.
가람은 옆에서 흔들거리는 덩굴 하나를 잡았다가 꿈틀거리는 그 느낌에 기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달콤한 액체가 방울져 흐르는 무릎 높이의 가시나무들, 기묘한 꽃들의 수액은 숲 전체를 묘한 냄새로 뒤덮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냄새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강렬한 냄새였다.
확실히 구분 지어 맡아 보고 싶어 꽃으로 다가가던 가람을 웨이크가 급히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가람이 머리를 빼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 손에 후려 맞았을 것이다.
“왜 그래요?”
“맡으면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가람은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냄새 맡지 않고, 만지지 않고, 오로지 두 발을 이용해 앞으로 걷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이처럼 굳이 뮐러의 꿈이 아니더라도 들어가고 싶은 장소는 아니었다. 기분 탓인지 바닥의 흙까지 끈적끈적하게 발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숲은 들어갈수록 점점 어두워졌다. 우거진 나뭇잎들이 겹겹이 싸여 마치 지붕처럼 햇빛을 가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무 사이로 울리는 기묘한 풀벌레 소리와 새, 짐승들의 기척이 어우러져 사람들의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쯤 되자 일행을 이탈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명 정도였으나 해가 질 무렵에는 어느새 절반이 넘는 숫자가 빠져 버렸다.
일행의 리더는 허탈한 기색이었지만 익히 예상했다는 듯 동요 없이 단조로운 어조로 사람들을 추슬렀다.
그는 해가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선언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소. 밥을 먹으면서 자기소개나 할 예정이니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주시오.”
거기까지 말한 리더는 보릿자루처럼 덩그러니 서서 멀뚱거리는 가람 일행에게도 말했다.
“그쪽도. 함께 앉으시오.”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은 둘러앉았다.
해가 진 베녹사스 숲은 다른 숲보다 더 어두운 듯했다. 우거진 잎사귀들은 방문자들을 가두려는 것처럼 보였다.
가람은 잎사귀 사이로 손톱보다도 작게 보이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도망가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사람이 비게 될 줄이야.”
리더는 씁쓸하게 말하며 구운 토끼 뒷다리를 뜯었다. 가람은 싱거운 스튜를 마시며 남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지만, 공통적으로 우락부락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가람은 괜히 더 움츠러드는 것 같아서 스튜 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저쪽 세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내 이름은 노로안이오.”
사람들은 그 이름을 흘려들었다. 노로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가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일행에서 가장 튀는 사람은 물론 가람이었다.
샌님 같은 뮐러도 물론 돋보이는 존재이긴 했지만, 가람은 그야말로 사자 사이의 병아리처럼 보였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작은 아가씨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따라 들어왔는지 몹시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아, 저는 가람이에요.”
가람의 담백한 소개에 이어 뮐러와 웨이크도 각자의 이름을 밝혔다.
사람들은 조금 기다리다가 그들이 그 이상 이야기할 생각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스튜를 들이켜고, 고기를 뜯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가람은 식사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손등의 바늘을 찾았다.
이번에는 좀 이상했다. 바늘의 방향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이동 중일 때는 몰랐지만 자리에 멈춰서 보니 확실하게 알 수 있을 정도다.
바늘은 동쪽, 북쪽, 다시 도시 쪽을 가리켰다가 제멋대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갈팡질팡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가람은 이제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고뇌하던 가람은 결국 피로 속에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하루 종일 뱀 덩굴과 손에 가시가 박히기만 해도 의식을 잃게 만드는 풀들을 경계하며 걸었더니 몸이 녹아날듯이 피곤했다.
그 상태에서 패스의 바늘까지 신경 쓰는 것은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가람은 오랜만에 퉁퉁 부으려고 드는 다리를 매만졌다. 우거진 숲은 말을 타기 좋은 장소가 아니다.
말의 기다란 몸은 덩굴과 빽빽한 나무 사이를 거닐기에는 너무 컸다. 거기에 자신까지 태우고 걸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겨우 여덟이라니.”
식사하던 누군가가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매부리코를 가진 강퍅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의 말대로 가람 일행을 제외한 노로안의 일행은 결국 여덟밖에 남지 않았다.
노로안도 이렇게나 일행이 줄어들 줄은 몰랐는지, 가람 일행이 계속 함께 가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는 은근슬쩍 웨이크에게 함께 가 준다면 드래곤 둥지에서 얻은 보물을 약간 떼어 주겠다는 제의까지 했다.
웨이크를 리더로 착각한 데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가람은 굳이 그 일을 추궁하지 않았다.
사실 노로안도 잘 모르는 이곳의 기묘한 식물들이나 그 경계법, 걷는 방법, 위험한 길과 위험하지 않은 길을 구분해서 적절하게 일행을 이끄는 웨이크의 모습은 가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가람보다 더 리더처럼 보였다.
사실 암묵적으로 사람들은 노로안보다 웨이크를 안내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노로안 본인조차 길을 가기 전 웨이크의 눈치를 살핀다.
웨이크가 담담한 얼굴이면 안심하고 그 길을 가지만, 꺼림칙한 표정이면 망설임 없이 다가와 방도를 찾곤 했다.
“뮐러, 맛이 없나요?”
가람은 아까부터 스푼을 전혀 움직이지 않는 뮐러가 걱정스러웠다. 뮐러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깊은 숲으로 들어갈수록 뮐러의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려 갔다.
결국 밤이 되자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누군가의 질문에 짧게 대답할 뿐, 쾌활하던 평소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단지 꿈일 뿐이에요.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요.”
가람은 위로하면서도 함께 불안에 빠져들었다. 뮐러의 악몽이 불길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사실 가장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가람이었다. 무섭고, 도망치고 싶고, 이런 곳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다리는 의지의 힘을 받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눈과 머리로는 끔찍한 것을 그리며 상상했지만 오직 몸은 바늘의 끝을 향해 걸었다.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싶고, 싫다며 울부짖거나 거부하고 싶고, 괴로워도 마치 마음과 몸이 따로 이루어진 것처럼 가람은 웃고, 위로하고, 의연한 태도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잠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요.”
물끄러미 가람을 보던 뮐러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웨이크는 손을 휘저어 일행을 조용히 시키는 동시에 천천히 검을 빼어 들었다. 밤의 숲은 시끄럽다.
소리야 원래부터 계속 들리던 것이다. 올빼미나 부엉이의 울음소리에 섞인 야행성 풀벌레 소리, 달맞이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소리 등 숲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번 소리는 매우 가까이서 들린 것이다.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없는 약한 동물들은 모닥불 근처로 절대 다가오는 법이 없다.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면, 그건 위협적인 동물이라는 뜻이다.
웨이크가 검을 잡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제각각 무기를 부여잡았다.
가람도 행상인의 천막에서 샀던 메이스를 꽉 움켜잡았다. 메이스의 가죽 손잡이가 땀에 젖은 손바닥에 달라붙어 왔다.
“뭐죠?”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