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용이 있었다.
새의 그것을 닮은 강한 발톱 아래 나무는 수수깡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용은 숲을 짓밟은 채 태양을 등지고 작은 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의 성인 남자만 한 커다란 금녹안 속에서 세로로 찢어진 새카만 동공이 잔인하게 번들거린다.
전신을 뒤덮은 검녹색 비늘들은 용이 숨 쉴 때마다 서로 부딪혀 위협적으로 타닥거렸다.
그것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독액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입이었다. 그리고 그 입에는 벌써 입주자가 있었다.
“꺽, 끅, 커억!”
다라즈녹은 입 안의 노로안을 콰드득 소리가 나도록 씹었다. 독액 묻은 이빨이 내장을 파고들 때마다 노로안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용이 으적으적 씹을 때마다 갈비뼈와 내장이 이 사이로 삐져나와 덜렁거린다.
다라즈녹은 사악한 눈동자로 얼어붙은 작은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빨 사이에 갇힌 노로안은 도저히 구해 낼 수 없어 보였다. 아니, 구한다 해도 이미 살려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가람은 얼어붙은 것 같은 머리로 간신히 하늘을 보라고 외쳤던 사람이 노로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눈치가 빠른 인간이군. 상으로 내가 먹어 주지.
용의 목소리는 기괴했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소리가 중첩되어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 큰 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머리와 고막이 터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주르륵 무언가 흐른다 싶었더니 코피였다. 피. 새빨간 피를 보자 가람은 정신이 확 들었다. 현실이었다.
가람의 정신이 드는 것과 동시에 노로안의 머리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처박힌 머리의 눈꺼풀이 천천히 여닫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뜨이지 않았다.
다라즈녹은 시커먼 혀로 그 머리를 장난하듯 굴리다가 혀를 내밀어 낼름 삼켜 버렸다.
“도망쳐요!”
멍하니 얼어붙은 가람의 손을 잡아챈 것은 웨이크였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마치 벼룩처럼 사방으로 튀어 도망갔다.
다라즈녹은 장난감을 보는 고양이처럼 눈을 샐쭉 휘며 캘캘 웃었다. 용과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잡히면 죽게 되는.
Chapter 10
뜀박질 속에서 나무와 풀, 덩굴 따위가 뒤섞여 스쳐 지나갔다.
가람은 턱까지 찬 숨을 삼키려고 필사적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다.
아니, 도움을 청한다면 누구에게 청한단 말인가? 시시각각으로 부풀어 오르는 검은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람은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용은 조롱하듯 뒤따랐다. 그 커다란 날갯짓이 등 뒤로 선뜩선뜩하게 느껴진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등 뒤의 질량감이 커져 가는 것을 신기할 정도로 잘 느낄 수 있었다.
용이 날개를 펴고 있는지, 얼마나 낮게 날고 있는지,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얼마나 킬킬 웃으며 저를 쫓고 있는지 손에 잡힐 것같이 느껴진다.
거대한 날개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같이 강한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닥쳤다.
용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작은 인간들은 검은 나무들에 부딪히며, 혹은 스치듯 피하며 정신없이 도망쳐야 했다.
달리던 가람은 아직 자신의 손에 총이 잡혀 있음을 자각했다. 탄창도 끼워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쫓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은데 총을 들어서 용을 대적하라는 것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다.
그런 짓을 했다간 두 번째로 용의 알사탕이 되는 것은 가람의 머리가 될지도 모른다.
총은 들고 달리기엔 무거웠다. 가람은 잠시 갈등했다. 버리고 싶다. 하지만 한번 쏘아나 보고 버려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 정도까지 생각한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실제로 소총의 무게가 가람의 뜀박질을 꽤 잡아먹고 있었다. 잡아끄는 웨이크의 손이 아니었다면 벌써 저만치 뒤떨어졌을 것이다.
가람은 잠시 갈등한 후 총과 함께 웨이크의 단단한 손을 더욱 강하게 틀어쥐었다. 만약, 만약이지만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바람이 약해진다 싶어 슬쩍 돌아봤더니 용은 잠시 멈춰 선 상태였다.
용의 앞발에는 누군가의 하반신이 끼어 있었다. 용은 남자를 발톱 사이에 끼우고 허리 부근을 뜯어내어 절단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내장들을 마치 국수라도 먹는 것처럼 후르릅 소리 내며 먹어 치우고 있었다. 토악질이 날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쪽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었더니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뮐러였다.
뮐러는 거대한 고목 속에서 가람에게 손짓했다. 어떻게 찾았는지 숨기에 안성맞춤의 고목이다.
더 뛰면 기절할 것 같았던 가람과 웨이크는 급히 그 안으로 숨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은 더 있었다.
이렇게 숨어 있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쫓아갈 것이다. 아니,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세 사람은 거대한 고목 속에 몸을 숨기고 숨죽였다. 고목 속을 기어 다니는 나무 벌레들이나 축축한 습기, 나무 썩은 냄새 같은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가람은 이마 위로 떨어진 흰 애벌레를 대충 치워 내며 귀를 바짝 세웠다. 용의 광포한 날갯짓 속에서 모든 동물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숲이 이렇게 조용한 적은 처음이다. 그 고요 속에서 오직 용이 움직이는 기척만 느껴졌다.
감각이 이렇게 섬세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청력으로 무언가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가람은 그런 것에 감탄할 여유 따위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풍전등화 같은 목숨 줄뿐이다.
고요 속에서 날갯짓에 공기가 섞이는 소리가 들렸다. 땅에 내려서는지 쿵 하는 땅울림이 이어졌다.
세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는 고목의 구멍으로 발 따위가 내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더욱 안쪽으로 몸을 붙였다.
땅울림이 가까워진다. 쿵, 쿵, 하는 울림이 이제 완전히 근처까지 왔다.
구멍 밖으로 용의 거대한 한쪽 다리가 보이는 순간, 가람은 숨을 삼키며 오물 묻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씩씩거리는 숨소리까지 틀어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눌러 막았다.
눈앞이 부들부들 떨리며 흔들리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눈매를 따라 눈물이 묻어 나온다.
용이 주변을 배회한다. 쥐나, 승냥이 따위가 아니었다. 용이다. 검고 잔인한 자비 없는 짐승이 움직일 때마다 비늘이 부딪치는 기묘한 소리가 뒤따랐다.
그 짐승의 발이 지금 바로 앞에 있었다. 용은 가람 일행이 숨어 있는 고목 앞에서 오랫동안 배회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 속에서 가람은 비명과 울음을 삼키며 차오르는 숨조차 내뱉지 못하고 자신을 반쯤 죽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목의 구멍 앞에서 용의 발이 사라졌다.
세 사람은 조금 더 숨을 죽이다가 용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싶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 것 같죠?”
뮐러가 어울리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억지로 웃는 기색이 확연했다.
“예. 하지만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여길 떠납시다.”
웨이크가 그렇게 말하며 가람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가람은 일어나는 대신 고목 속으로 더욱 몸을 파묻었다.
“왜 그러십니까?”
가람은 웨이크의 의아한 시선을 피했다. 알고 있다. 여기 계속 있으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밖으로 나가기는 두려웠다.
계속 이렇게 숨어 있으면 안 되는 걸까? 아직, 아직 밖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돌아다니다가 마주칠지도 모르고. 적어도 고목 안에 있으면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아직 밖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가람은 웨이크의 다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머리 위로 강한 파열음이 들렸다. 무언가가 부서지고 박살 나는 소리.
그것에 이어 어두운 고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휑하게 날아가 버린 고목 위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설마.
― 찾았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가람은 칭찬을 받아야 한다. 심장이 떨어지는 경악 속에서 가람은 반사적으로 소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아직 자동으로 놓여 있었던 덕분에 연사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탄창 속의 모든 총탄이 발사되었다. 총탄은 정확히 용의 턱을 내갈겼다.
하지만 튼튼한 비늘이 마치 그 충격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비스듬하게 세워지더니 총탄을 모조리 흘려 버렸다.
― 소용없다.
용의 말이 없더라도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웨이크는 잠시 가람에게 걸었던 희망을 접고 그녀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뮐러는 벌써 발 빠르게 고목 밖으로 나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람은 소총을 내팽개치고 고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와 거의 동시에 용의 발이 고목을 으깨며 내디뎌졌다. 가람은 웨이크의 손을 놓치며 충격 속에서 넘어졌다.
그러나 마지막에 몸을 날린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고목에 깔리지는 않을 수 있었다.
“가람!”
가람은 두 남자의 목소리가 멀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웨이크는 순식간에 휑하게 비어 버린 손을 가람에게 뻗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빠르게 뮐러가 그의 반대편 손을 잡아 끌어냈다.
뮐러가 끌어내기가 무섭게 웨이크가 있던 자리에 용의 반대편 발이 무겁게 내리찍혔다.
“늦었습니다!”
가람은 뮐러의 말을 이해했다. 용이 어째서 이렇게 가까이 보이는 건가 했더니 자신이 용의 발밑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용은 단번에 가람을 으스러뜨리는 대신 적당히 무게를 주며 두 남자가 갈팡질팡하는 것을 킬킬 웃으며 지켜보았다.
살릴 수 있을 것처럼, 구해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여 주며 그 양심을 조각내고 죄책감을 부채질해서 결국 저 멍청하고 작은 것들이 덫 안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 한번 해 볼 테냐? 이기면 이걸 살려 주지.
용은 말하는 동시에 발밑의 ‘이것’에 약간의 무게를 실었다.
무게를 버텨 내는 가람의 갈비뼈가 부러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으직으직 소리 낸다.
척추와 연결된 관절 따위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느끼며 가람은 왈칵 피를 토했다.
말도 안 되는 싸움이다. 차라리 63빌딩을 손도끼로 철거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아래에서 봐서 그런지 용은 정말로 거대했다. 진심으로 무게를 싣는 순간 자신은 두부보다도 부드럽게 으깨어질 것이다.
용은 지금 노느라 시간을 주고 있었다. 도망가려면 지금뿐이다. 가람은 용의 그 오만이 고마웠다.
“가, 세요!”
용의 거대한 동공이 더욱 가늘어졌다. 더욱 무게가 더해진다. 가람은 피를 토하며 아직도 망설이는 두 남자를 향해 절규했다. 마지막 숨을 다 짜내어.
“가!”
그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등을 떠밀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용의 눈이 재미없다는 듯 가늘게 뜨인다. 마지막 숨을 뱉고 쪼그라든 폐 덕분에 가람은 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용이 힘을 주는 것과 동시에 등 뒤로 차원 문을 열었다.
가람은 사라졌다. 갑자기 땅속으로 사라져 버린 가람 덕분에 다라즈녹은 대단히 당황했다. 용은 잠시 그 자리를 맴돌다가 곧 하늘로 높게 날아올랐다.
거대한 몸체와 무엇이라도 막아 내는 비늘, 강력한 육신은 용이 갖고 있는 마법을 제하고라도 이 세상에 적수가 없는 생물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다라즈녹은 잠시 하늘을 선회하다가 다른 사냥감을 쫓아 활강했다.
그 시간, 가람은 차원 문 안에서 씹어 뱉어지듯 튀어나와 마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차가운 바닥의 타일에 가람은 한없이 눌어붙었다.
두 사람은 도망쳤을까? 뽀삐와 다른 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충분히 시간을 끌어 줬어야 했는데, 좀 더 시간을 끌었어야 했는데. 왈칵, 다시 피를 토한다.
가람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수습해 몸을 일으켰다. 자꾸만 몸이 바닥에 누우려고 들었다.
자신이 토한 피 웅덩이를 짚고 일어난 그녀는 벽에 기대어 몸을 끌듯이 움직였다. 가람이 향하고 있는 곳은 마트에 있는 화장실이었다.
걸레짝 같은 꼴이 된 옷으로 짐작했지만 거울을 보니 몰골이 이만저만 엉망이 아니다.
겉보다 속이 더 심각한 상태였다. 목구멍으로 비릿한 것이 치밀었다.
가람은 세면대 위에 쓰러지듯 걸쳐져 피를 토했다. 간간이 피가 아닌 살점 조각이 함께 올라오기도 했다.
용 발바닥에 한 번 밟힌 것치고는 거한 상처다 싶어 가람은 입술에 피 칠갑을 하고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손과 얼굴을 씻은 뒤 잠시 흐르는 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기절했다. 가람이 의식을 잃어버리자 흐르던 물줄기도 뚝 멈춰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가람은 모든 것이 꿈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몰골은 여전히 엉망이었고, 몸 상태도 최악이었다.
가람은 기절하기 전보다 약간 나아진 몸으로 주춤주춤 걸어 진통제와 항생제 따위를 찾아 먹었다.
동시에 먹어서는 안 되는 약을 함께 먹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신경 쓰일 때는 지났다.
마트를 나와 경찰서로 가서 다시 총을 챙기며 가람은 스스로가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챙겨서 어쩌려고? 돌아가려고? 그리고 총도 통하지 않는 용과 싸우려고? 이성이든 본능이든 둘 중 하나가 고장 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가야 한다. 용의 발에 깔린 순간, 가람은 봐 버렸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걸 볼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가람은 손등의 바늘이 정확히 점의 형태가 된 것을 보았다.
계속 움직이던 그 바늘이, 용의 발바닥에 깔린 순간 정확히 점의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솔직히 그걸 보지 않았어도 이렇게 바로 돌아가려고 들었을지 가람은 확신할 수 없었다.
두 남자, 뽀삐 등도 소중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람 자신이었다. 살아야 무엇이든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그런 자신에 구역질이 났다.
가람은 다시 풋, 하고 웃어 버렸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웃지 않으면 고함을 지르든, 울든 어쨌거나 미친 짓을 할 것 같았으니까.
살아야 한다. 살아야 패스도 모으고, 그토록 염원하는 원래 삶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원래 삶. 하지만 지금 가람이 살고 있는 것도 삶이다. 지금 이 삶은? 그 원래 삶을 위하여 이건 없는 셈 치는 건가? 그것참, 편한 방식이다.
그래서 지금 살려고 하는 짓이 총도 안 통하는 용에게 총을 들고 돌아가려는 건가? 가람은 자신을 비웃었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즐거우려고 웃는 웃음이다. 하지만 전혀 즐거워지지 않았다.
이제 스스로도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살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죽으려고 이러는지조차 모르겠다.
이 바늘이 용암 속을 가리킨다면 주저 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어야 하나?
그러면 깔끔하게 다 끝나 버릴 테니 좋겠구나. 죽으면 어차피 다 끝이다.
그래서 이렇게, 끝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나 무서운데도.
무섭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무슨 영웅이라도 된다고, 간다고 해서 짠 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무서운 게 당연하다.
믿을 것은 어디에서든 열 수 있는 차원 문과 약간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패스뿐이다.
그나마도 이제 하나는 쓸 수 없다. 가람은 아주 잠시 생각했다.
용이 지칠 때까지 베이스캠프에서 며칠이고 기다리다가 적당히 숲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어떨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용에게 죽을 테지만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다.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웨이크도, 강아지 당근을 먹는 것이 낙인 뽀삐도, 이 계약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소소하게 살아 보고 싶다던 뮐러도 모두 죽을 테지만, 죽어 버리겠지만.
여동생은 웨이크를 영영 만나지 못하겠지. 야수들판의 동물들도 뽀삐가 어디 갔냐고 물어볼 거다. 뮐러의 고향에 있는 부모님은 다시는 아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다음 패스를 찾지 못하게 될 테고, 원래 세상을 되찾을 수 없게 되겠지.
“혼자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패스를 쓰면 혼자 살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람은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혼자서는 안 된다.
가람은 부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를 바라며 차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문 안쪽은 이미 밤이었다.
그 어둠을 보며 가람은 나머지 사람들의 안위를 낙관할 수 없었다. 어두운 숲을 걸으며 가람은 침잠하는 기분으로 최악의 상황을 반쯤 각오했다.
가람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려다 뜨끔하는 통증에 급히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격렬한 기침이 피와 함께 터져 나왔다.
한참 동안 쿨럭이던 가람은 결국 캑캑거리며 핏덩이 하나를 토하고 안정을 되찾았다.
지금 있는 패스를 전부 쓴다면 용을 죽일 수 있다. 바다거북을 상대하며 처음 능력을 샀을 때부터 머릿속에 자리했던 잔꾀였다.
이 방법을 쓴다면 확실히 용을 처리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모든 패스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므로써 바로 새로운 패스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
되도록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가람은 숨죽여 밤의 숲을 걷다가 문득 전혀 숨죽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패스는 용이 갖고 있다. 한 번쯤은 만나야 했다.
가람은 가슴을 펴고 일부러 마른 풀 따위를 밟아 소란을 일으키며 걷기 시작했다. 나무와 나무, 그림자와 그림자의 사이를 건넌다.
각오를 했음에도 어둠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가람은 자꾸 굳어지려는 몸을 풀기 위해 의식적으로 크게 움직였다.
걷던 가람은 흠칫 멈춰 섰다. 멀리서 무언가가 보인다.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빛처럼, 마치 모닥불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가람은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걸음을 바삐 놀렸다.
내딛는 걸음의 간격이 점점 짧아진다. 어느새 가람은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닥불가에 도착했을 때, 가람은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용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