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72화 (72/256)

72화

용은 거대한 몸을 바닥에 누이고 쉬고 있는 듯했다.

가람이 발견한 것은 용의 꼬리였다.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 용이 불을 피운 걸까?

가람은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했지만 거대한 용의 위용을 앞에 두고도 대범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조하게 눈을 굴리던 가람은 마침내 결심하고 천천히 나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발뒤꿈치를 들고 발끝만을 사용해 마치 고양이처럼 사뿐사뿐하게 가람은 용에게 접근했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갈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용은 이렇게 쉬는 건가? 숨도 쉬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고?

용의 몸이 워낙 거대했기에 꼬리를 다 지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람은 용기를 내어 깊은 잠이 든 것 같은 용의 거체로 좀 더 접근했다.

천천히 꼬리뼈 끝을 지나고 날개를 피해 마침내 등에서, 가람은 잘린 용의 목을 발견했다.

용은 자는 것이 아니었다. 잠에 빠져든 것이 아니었다. 죽어 있었던 것이다!

가람은 반사적으로 손등을 확인했다. 패스는 여기에 있다. 이 용의 ‘속’에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용은 죽어 있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난 걸까? 가람은 웨이크가 천부적인 사냥꾼의 재능을 발휘해 용을 사냥한 것은 아닌가 상상해 보았다.

어쨌거나 용은 죽었다. 죽은 것이다. 환호하려던 가람은 모닥불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좀 더 걸었다.

걸음에선 긴장이 거의 사라졌다. 웨이크일까? 뮐러일까?

모닥불가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뮐러, 웨이크, 세 마리 말까지 용의 몸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었다.

가람은 기쁨에 가득 차 뛰쳐나가려다가 문득 낯선 사람이 함께 앉아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도 가람을 발견한 듯싶었다. 검은 후드에 가려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가람은 기묘한 익숙함과 불안을 느꼈다.

마침내 그 사람은 머리에 쓴 후드를 젖혀 얼굴을 드러내고 인사해 왔다.

“안녕, 좀 들지 그래?”

모닥불에 용의 고기를 구워 권하는 그 사람은, 가람이 이미 본 바 있는 사람이다.

아니,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 가람은 씹어뱉듯 그 이름을 불렀다.

“모르드레드.”

모닥불이 휘두르는 그림자가 모르드레드의 준수한 얼굴 위에서 어른어른 흔들린다. 도도한 듯 높은 코의 그림자가 비스듬히 한쪽 얼굴을 가렸다.

가람은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도록 긴장해 어둠 속에 있을 나머지 반쪽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거 무서운데? 앉아. 누가 보면 원수라도 진 줄 알겠네.”

모르드레드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모닥불 옆에 놓인 바위를 의자 삼아 권하고 직접 용의 살점을 발라 가람의 손에 들려 주었다.

뜻밖에 친절한 태도였지만 가람은 더욱 긴장해서 이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가람을 반가워하던 웨이크와 뮐러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숨을 죽였다.

“누가 쫓기고 있기에 구해 줬지. 그런데 그게 네 동료라니, 대단한 우연이지? 이게 운명인가? 그런데 왜 앉아만 있어? 먹어, 독 같은 건 다 제거했으니까. 몸에 좋아.”

그렇게 말한 모르드레드는 히죽 웃으며 용의 목살을 거듭 권했다.

가람은 자신이 뭘 먹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의 긴장과 혼란 속에서 기계적으로 손에 든 것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모르드레드를 향해 곤두세운 촉각을 늦추지 않으며 뮐러와 웨이크의 안부를 살폈다.

“괜찮아요?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가람의 심각한 질문에 뮐러가 당혹스러운 태도로 소곤소곤 대답한다.

“바위틈으로 들어가 숨었는데 다라즈녹이 브레스를 쓰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 남자가 놀랄 만큼 강한 마법으로 다라즈녹의 목을 그대로 베어 냈습니다. 다라즈녹도 마법으로 저항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어요.”

모닥불 옆에는 그 일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린 용의 머리가 놓여 있었다. 가람은 그 옆에 서 있는 말들까지 무사히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아주 조금 안도했다.

몹시 겁에 질려 있긴 했지만 심각하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일행의 무사함을 확인한 가람은 다시 문제의 원점에 집중했다.

“패스를 찾으러 온 건가요? 가져요. 가져가세요.”

모르드레드가 단숨에 잘라 놓은 다라즈녹의 머리를 보면서도 패스에 욕심내는 객기를 부릴 만큼 가람은 겁 없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잃을 것도 많다. 부디 모르드레드가 이대로 이번 패스를 갖고 사라져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패스? 하하, 이거 잘 익었네. 먹어.”

모르드레드는 무슨 생각인지 가볍게 웃으며 가람의 말을 흘려버렸다. 패스가 목적이 아닌가? 그럼 뭐가 목적이지?

지금 이 상황에서 모르드레드와 틀어져서 좋을 것이 없지만, 전에 당한 것을 생각하면 목소리가 뾰족하게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치고 긴장으로 곤두서 있는 상태의 가람은 적대감을 감출 여력이 없었다.

“무슨 속셈이죠?”

“속셈이라니?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을 떠는 태도에 갑자기 확 열이 올랐다. 상대는 모르드레드였다.

다라즈녹처럼 말이 안 통하는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 사실은 굉장히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화를 내고 사과받고 사과하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르드레드가 다라즈녹보다 강할지도 모르지만 가람은 그가 다라즈녹보다 덜 무서웠다.

게다가 모르드레드의 친절한 태도가 가람의 겁먹은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당연히 당신이라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을 테니까요.”

가람의 말에 모르드레드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표정은 상냥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가람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차가웠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무슨 속셈을 갖고 있으면 네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가람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물론 자신이 모르드레드보다 약하다는 것이 생소하거나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다. 가람이 반년간 모은 패스는 이제 겨우 120패스다.

단순 산술로 계산해 봤을 때 1년이면 240, 모르드레드는 300년간 패스파인더를 했다.

그가 소유한 패스는 오차가 있겠지만 약 7만 2천 패스. 120과 7만 2천,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 수치다.

다만 저런 대답을 했다는 것은, 역시나 무언가 속셈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가람? 아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까부터 무언가 질문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던 뮐러가 새하얗게 질린 가람을 부축하며 질문했다.

가람은 눈앞이 멀어지는 것 같은 현기증 속에서,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에, 그냥 잠깐 알던 사람이에요.”

“이런, 이거 섭섭한데? 우리 사이가 겨우 그거였어?”

“우리 사이가 뭔데요.”

이를 악문 가람의 말에 모르드레드가 꿀처럼 매혹적으로 웃었다. 당한 것이 없었다면 가람도 그 얼굴에 혹했을 것이다.

“나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생각이 좀 바뀌었어.”

그때, 불길함에 차갑게 식은 가람의 손을 잡아 오는 손이 있었다. 뜨거운 체온은 뮐러와 웨이크의 것이었다. 커다란 손안으로 가람의 작은 손이 폭 감싸인다.

웨이크의 갈색 눈동자와 뮐러의 상냥한 녹색 눈동자가 단단하게 가람을 지탱해 주었다. 가람은 그 온도와 눈빛에 약간의 안정을 되찾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이번 패스는 내 동료들을 살려 줬으니까 보답으로 그냥 줄게요. 갖고 가요. 가시라고요.”

갑자기 모르드레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패스, 패스. 그놈의 패스 몇 십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뭐 원한다면 가져. 내 것도.”

모르드레드가 말한 순간 아무 기척도 없이 용의 뱃가죽이 길게 갈라졌다. 가람과 웨이크, 뮐러가 깜짝 놀라 튀어 오를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들이 놀라 투레질을 하는 소리 사이로 기괴한 철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용의 내장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내장을 다 쏟아 낸 뱃가죽은 마치 카펫처럼 양쪽으로 도르륵 말려 그 안의 척추와 갈비뼈 따위를 모조리 보여 주었다.

핏덩이 속에 떠올라 있는 깨끗한 금색의 빛 두 알까지.

하나는 자신의 것, 하나는 모르드레드의 것이었다.

한 자리에 패스가 두 개나 모일 수 있는 것일까? 가람은 하나의 패스를 두 나침반이 같이 가리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걸까? 가람의 상념을 깨고 모르드레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단한 우연이지 않아? 이렇게 한 장소에 두 패스파인더의 패스가 있다니.”

모르드레드는 킬킬 웃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마치 운명처럼. 뭐, 저 패스는 가져. 네 꼴을 보니 동정심이 다 나는군.”

가람은 모욕적인 말에도 사양하지 않고 후다닥 달려가 용의 뱃가죽 안으로 팔을 들이밀었다.

패스를 흡수한 가람은 손등의 숫자를 서둘러 확인했다. 200패스. 200패스다. 절로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람을 향해 모르드레드가 조소했다.

“게걸스럽기도 하지.”

가람은 일부러 그 말을 못 들은 척 넘겨 버렸다.

“패스는, 고마워요.”

“그럼그럼. 그래서 말인데, 정말 굉장한 우연이지 않아? 내가 계속 생각해 봤는데, 패스파인더가 된 것만으로 기적이 끝난 게 아니야. 널 만난 게 내 두 번째 기적이지.

한 차원에 두 패스파인더가 이렇게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응? 그때부터 나는 계속 생각했지. 진짜야, 너를 계속 생각했다고.

그리고 이렇게 딱 같은 자리에 두 패스가 함께 있는 거야.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별거 아냐. 잘 좀 지내 보자는 거지.”

“당신은 이미 한 번 날 배신했어요. 죽으라고까지 했다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또 꺼낼 수 있죠?”

“그건 왜 또 꺼내는 거야? 계산 끝난 거 아니었어?”

가람은 할 말을 잊었다. 계산? 계산이라고? 사고방식이 너무 달라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가람은 속이 부글부글 끓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꾹 내리눌렀다.

패스를 찾았고, 이제 뮐러와 웨이크를 챙겨서 이 숲을 떠나면 된다. 그러면 끝이었다. 마지막까지 실수 없이 해내면 끝이다. 끝이라고.

“좋아요. 저는 몰랐고, 당신을 진심으로 믿고 따랐지만 당신에게는 그냥 패스 장사나 다름없었다면 믿은 제가 바보라고 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기에 빠진 사람을 그렇게 조롱하는 인간과 동료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음, 그렇구나.”

무어라 이야기할 것 같았던 모르드레드는 오히려 상큼하게 수긍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한 마디가 더 묻었다.

“그동안 다른 인간들이 생겨서 그런 거군? 저런 것들 따위에 위안이라도 받고 있는 거야?”

대체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는 건지 가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르드레드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음을 깨닫자 순간 오싹해졌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그럭저럭 화도 낼 수 있을 것 같고 그가 친절한 척 받아 주기라도 할 것 같은, 인간적이었던 그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감정이 사라진 듯 냉정하고 혐오스러울 만큼 기계적인 모습이었다. 그와 동시에 어중간하게 서 있던 뮐러와 웨이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이 확 패일 정도로 강하게 무릎을 찧은 그 모습은 무언가 강한 힘에 내리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비명 섞인 가람의 외침에 모르드레드는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가람은 불안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처음에는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그 얼굴도 이빨이 다 빠지도록 속 시원하게 두드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가람은 허리춤의 소총을 바짝 잡아당겼다.

“너무 흥분하지 마. 건강에 안 좋아.”

빠드득, 가람은 이를 갈아붙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 개자식에게 호작질이나 당하려고 그 고생을 하며 나날을 버텨 왔던 게 아니었다.

한 달 내내 울고불고하고팠던 슬픔과 충격들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 삐꺽삐꺽 걸어온 게 아니다. 가람의 눈에 새파랗게 독기가 고였다.

“내 동료들에게 무슨 짓이라도 하면…….”

“이야, 이거 무서운데? 뭐, 나는 별짓 안 할 거야. 정확히는 네가 할 거지.”

모르드레드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태도로 빙글빙글 웃었다. 가람은 이 또라이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

“내가 잘못 생각했어. 너무 물렀던 거지. 지금 너는 데리고 다닐 수 없어. 속이 답답할 정도거든. 어느 정도 어울려야지.”

한다는 말이 모조리 개소리라 더 들어 줄 가치가 없다.

가람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대로 돌아서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떠는 뮐러와 차분하지만 비장한 얼굴의 웨이크가 아직 모르드레드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럼 데리고 다니지 마! 그런 거 안 바란다고!”

“그럴 순 없어. 자, 들어 봐. 하나 제의할 것이 있어.”

갑자기 모르드레드가 불쑥 다가섰다. 가람은 바짝 긴장해 자신도 모르게 총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나 갑자기 총구가 불쑥 들려 허공에 떠오르자 깜짝 놀라 총을 내리눌렀다.

“이런, 너무 놀라는데. 꼭 개벼룩 같아. 뭐, 긴장할 거 없어. 간단한 게임을 하자는 거야.”

“하기 싫어.”

모르드레드는 가람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룰은 간단해. 둘 중 하나를 골라서 죽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