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귀를 때리는 것 같은 갑작스러운 말에 가람은 멍해졌다. 방금 뭐라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자 동시에 가람의 얼굴이 와작 소리가 날 정도로 일그러졌다.
“내가 할 거라고 생각해? 이 또라이 새끼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가람은 어지간한 일에는 잘 울지도, 화내지도 않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가람은 분노로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런 가람을 보며 모르드레드가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일 거야. 하나라도 살리고 싶지 않아? 쉬운 게임이야. 네 손으로 하나를 죽이면 하나는 살고, 둘 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둘 다 죽이는 거지. 어때? 아, 나한테 너무 불리한 룰인데.”
미쳤다. 미친놈이다. 하지만 미친놈은 진지해 보였다. 놈이 가람보다 강하기 때문에 가람은 이 미친 짓도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람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자 모르드레드가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태도로 이죽거렸다.
“아, 고민한다. 고민해.”
뮐러와 웨이크는 무언가 금제당한 듯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힘없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가람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마치 포승줄에 묶인 듯한 모습이다.
두 남자는 죄인도 아니고, 오히려 아주 좋은 사람인데. 어떤 고생문에도 함께 뛰어들어 주는 정말로 고마운 사람들인데, 이 미친 새끼가!
가람은 숨을 몰아쉬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흥분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만약에 정말로 최악의 사태가 온다면 아예 방법이 단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대한 말로 어떻게 할 수 없을까.
“넌 미친놈이야. 절대로 너와 같이 다닐 일은 없어.”
가람은 일단 도발해 보기로 했다. 좋은 말로 해도 상대가 좋게 나오지 않는다면 좋게 대해 줄 필요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모르드레드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뭐, 너무한데. 다 널 위해서야.”
“내 동료를 내 손으로 죽이게 만드는 게 날 위해서라고? 이런다고 정말로 내가 너랑 같이 다니게 될 것 같아? 생각해 봐, 차라리 나를 도와주는 게…….”
“이렇게 도와주고 있잖아.”
기가 막힐 만한 대답이었지만 가람은 이제 익숙해져서 이 개소리를 대충 흘려버렸다.
“이런 방법은 틀렸어.”
“아, 감히 날 설득하려고 하나 본데, 소용없는 일이야. 오늘 여기서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하니까.”
그렇게 말한 모르드레드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가람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민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도 이런 자신이 너무나 싫지만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다.
가람은 저울의 한쪽에 200패스를 올렸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에는 두 사람의 목숨을 올려놓았다.
저울은 가람의 갈등에 따라 미친 듯이 기울기가 바뀌며 흔들렸다. 그렇게 생각하던 가람은 문득 깨달았다.
여기서 저놈의 말에 따라 한 사람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저 미친놈이 자신을 고분고분 살려 줄까? 약속했던 대로 나머지 한 사람을 살려 줄까? 그럴 리가.
가람은 이미 충분히 속은 전적이 있다. 미친놈의 말은 믿을 가치도, 들을 가치도 없는 것이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가람은 총신을 들어 올렸다. 모르드레드가 반색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 결정했어? 사실 좀 지루해지고 있어서 시간제한을 만들려던 참이었어.”
가람은 그 뻔뻔한 얼굴에 총구를 겨누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총구의 끝은 모닥불에 반사되어 드물게 붉게 빛났다.
“죽을 사람은 너야. 모르드레드.”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한 명뿐이지 않나. 가람의 독기 품은 총구 속에서 총탄이 노성을 터뜨리며 달려 나왔다.
전에, 모르드레드가 마차에서 결계를 친 적이 있었다. 자신은 결계에 서툴다고 했으니 혹시 방어 마법 같은 것도 서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총탄은 허공에 멈췄다. 그리고 모르드레드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틀렸어. 정답이 아니네.”
동시에 흙바닥에 무릎 꿇은 두 남자의 코와 입에서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나뒹구는 그 모습에 가람은 발밑으로 몸의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잠시나마 패스가 아까워 다른 방법에 기대 봤던 자신을 비난하며 가람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말을 빚어내지 못할 정도로 혼이 빠진 입술이 죽기 직전의 곤충 다리처럼 바르르 떨렸다.
“아, 아직 안 죽었어. 난 착하니까. 딱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그 말에 가람이 후다닥 달려가 확인해 보니 두 사람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가느다란 호흡이 금방 꺼질 것처럼 위태롭다.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핏덩이가 흙에 스며들어 그 자리를 검게 물들인다.
피에 잠겨 사라질 것 같은 그 모습에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더 이상 패스가 아깝지 않았다. 더 이상 무엇도 아쉽지 않았다. 막상 피 흘리는 사람 앞에서 모진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반년, 겨우 6개월인데도 자신의 생각보다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단 한 번.
모르드레드가 말했듯이 단 한 번이다. 온통 찢어진 옷과 성치 않은 몸의 가람은 마치 패잔병 같은 몰골이었지만 그 눈빛은 성성하게 빛났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바다거북과 조우했던 때 능력을 산 경험은 가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영원히 물속에서 숨을 쉬거나 하는 능력보다 약한 능력, 그러니까 한 시간에 한해서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처럼 구입하려는 능력이 약해지면 필요로 하는 패스의 양도 줄어든다.
영원히 불 마법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구입하는 것이 200패스라면, 만약 아주 짧은 시간 마법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저렴하지 않을까.
그 당시에는 그리 매력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가람은 그 생각을 곧 지워 버렸으나, 지금 바로 이 순간 그때 얻었던 영감은 구원의 동아줄이 되고 있었다.
모르드레드와 자신의 힘은 비교조차 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단 1회에 걸친 능력이라면? 단 한 시간, 아니, 단 1분이라도 그보다 강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모르드레드의 영구적인 힘과는 비교가 되지 않고, 단 한 번으로 소진해 버리는 그 방법이 패스를 효율적으로 쓰는 것도 아니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몸 전체가 심장이 된 것처럼 두근거렸다. 가람은 뛰는 것이 심장인지, 혈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혹시나 이 작전을 모르드레드가 눈치챌까 가람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등을 보며 흥정을 시작했다.
‘모르드레드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얻으려면 얼마나 필요하지?’
102,392
토악질이 날 만큼 큰 숫자였다. 가람은 천천히 조건을 달았다.
‘만약 그 힘을 1회에 걸쳐 단 한 시간만 쓴다면?’
6,030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천천히 시간을 줄여 나가던 가람은 결국 질문의 방법을 바꾸었다.
‘200패스를 다 쓴다면 그 힘을 몇 초 동안 쓸 수 있을까?’
12초
짧다. 지나치게 짧았다. 하지만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모르드레드의 패스까지 흡수한 덕분에 적어도 2초나, 4초 같은 시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굳이 가격이 줄어든 비율분의 1인 것은 아니었다.
가람은 천천히 두 남자를 막아서는 위치에 섰다.
“음? 이건 뭘까.”
빙글빙글 웃는 모르드레드의 웃음에 불안이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2초 안에 정말로 죽일 수 있을까. 만약 그 힘이 아슬아슬할 정도라서 그를 이길 수 없다면? 시간만 끌다가 끝나는 건 아닐까.
가람은 상념들에 휘둘리다가 그것들을 모조리 깔아뭉갰다. 어차피, 둘 다 죽는 길이다.
“나랑 해 보려고?”
가람은 대답 대신 패스를 사용했다. 모르드레드가 방심하면 방심했을수록 좋았다. 200패스가 순식간에 가람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가람은 어떤 감각보다도 강렬한 감각의 홍수 속에서 몸을 떨었다.
그것은 실로 달콤한 감각이었다. 손끝부터 마약과도 같이 극상의 쾌감이 몰려와 심장을 장악한다.
쾌락의 이름은 힘이었다.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베녹사스 일대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 힘이다. 고동치는 힘이 기류처럼 몸속에서 휘몰아쳤다.
가람은 구입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손을 뻗었다. 마치 상자 속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느낀 적도, 생각해 본 바도 없었던 세상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것이었다.
“어? 커헉!”
의아해하던 모르드레드는 가람의 가벼운 손짓에 그대로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가해지는 힘에 모르드레드 주변의 나무가 빠직빠직 금이 간다.
모르드레드는 급히 힘을 일으켜 자신을 보호했다. 그와 동시에 강대한 힘으로 가람에게 대항했다.
새카만 기운이 뿜어져 나와 바닥을 녹이며 가람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기운은 막상 가람 앞에서 실바람처럼 흩어져 버렸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가람은 힘을 쓰면서도 자신의 강력함에 놀라고, 모르드레드의 강함에 또 놀랐다. 스스로가 얼마나 강한지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아니, 모르드레드를 죽이려면 얼마나 강해야 하는지 지금에야 알 수 있었다. 그를 죽이려면 이만큼이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람이 모르드레드에게 퍼붓는 힘은 넓게 퍼뜨린다면 베록이나 베녹사스 하나 정도는 통째로 용암 지대로 바꿔 버릴 수도 있는 힘이었다.
계속 쓴다면 바다도 증발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모르드레드는 기습당해 부상당한 몸으로 그것을 받아 내었다. 힘겹게라도 막아 냈다.
가람은 이를 악물고 힘을 더 끌어 올렸다. 시간이 얼마 없다.
허공에 강렬한 빛의 입자가 모여들더니 모르드레드를 향해 폭사되었다. 동시에 거대한 화염이 그를 감쌌다.
어느 것이 공격이고 어느 것이 방어인지 모를 치열한 10초가 정신없이 지났다.
가람은 손을 휘둘러 큰 공격을 퍼부으면서 작은 무한의 공간을 소환해 그의 모든 공격을 빨아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어라?”
모르드레드는 모든 힘을 짜내어 대항하다가 문득 몸 아래가 서늘함을 느꼈다. 동시에 세상이 기울어지더니 머리가 어딘가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리고 데굴데굴 뒤섞이는 시야 속에서 모르드레드는 자신의 몸을 보았다.
모르드레드의 목을 자른 무형의 칼날은 그 뒤의 나무와 바위산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나뭇잎을 우수수 떨어뜨리며 쓰러지는 거목의 비명이 입 가벼운 공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뒤이어 모르드레드의 팔, 다리, 몸통이 차례로 토막 나더니 마치 볶음밥 재료처럼 다져져 바닥에 흩어졌다.
하려면 확실히 해야 한다. 가람은 잔인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해야 살아날 수 없을 거다.
게다가 너무 잘게 다져진 모르드레드의 몸은 햄버거 재료 같아서 징그럽지도 않았다.
가람은 환희했다. 이겼다! 동시에 두 남자가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내었다. 가람은 급히 두 사람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으려 했다.
그러나 다급한 그 걸음 사이로 섬뜩한 웃음소리가 끼어들어 발목을 붙잡았다. 우뚝, 걸음이 멈췄다.
“푸, 하핫!”
바닥에 쓰러진 잘생긴 머리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가람은 소름 끼치는 기분으로 천천히 그 머리를 집어 들었다.
머리카락을 잡고 들어 올려진 모르드레드가 제법 쾌활하게 떠들었다.
“아, 좀 더 위로 들어 줄래? 정면에 네 가슴이 보이거든.”
머리가 잘린 모르드레드는 그대로 다시 킥킥 웃었다. 그 웃음에 가람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그 느낌에 가람은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이성, 도덕심, 관용, 자비 등 상냥함의 범주에 들어가는 모든 감정을 날려 버렸다.
소름 끼치는, 정상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상대하며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스스로의 인간적인 감각들. 가람은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가람은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비스듬하게 들었다. 드러난 목뼈를 따라 척수액과 피가 뒤섞여 맑고도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진다.
가람은 가면같이 감정이 사라진 얼굴로 재차 질문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나는 지금 너 때문에, 모아 둔 패스도 다 쓰고, 내 동료는 심각하게 다쳤고, 막막한 심정으로 힘내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내가 우스워? 아니, 네 꼴이 더 우습다고. 봐, 머리만 남았잖아!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모르드레드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리치는 그 모습에는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가람은 누구에게 외치는지도 모를 지금까지 쌓아 왔던 담장 뒤의 검은 것들을 토해 냈다.
혼란으로 점철된 그 말은 두서도, 앞뒤도 없었지만 가람의 내면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에녹사가 죽던 그곳에서도 쓰지 않았어. 알아? 그 사람은 진짜 좋은 사람이었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얼마나 참아 가면서, 그 손은 정말로 아팠어. 아팠다고. 바닷속에 들어갈 때는 정말로 무서웠어. 매일매일 모든 걸 다 참아 가면서 모은 패스를 너 같은 새끼 때문에!
이 개새끼야! 앞으로 800패스만 더 모으면 집에 갈 수 있었어. 갈 수 있었다고! 너 때문에 다시 0부터 시작해야 하잖아! 그리고, 그리고 사람도 죽여 버렸다고!
그래, 너! 너! 내가 미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무서워서 차라리 미쳐 버리고 싶어도 얼마나 참았는데, 너는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고 있어? 이 미친 새끼야!”
가람은 격렬한 숨을 내쉬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은 그 모습에 뮐러와 웨이크는 고통 속에서 넋을 빼고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모르드레드의 몸이 다져져 있는 나무 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웨이크가 정신을 차렸다.
“가람, 저쪽을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