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가람은 대답 없이 웨이크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다 다져졌던 그 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달팽이처럼 서로를 찾아 이어져 재생하고 있었다.
저 지경이 되어서도 되살아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름 끼칠 만큼 질긴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가람은 뽀삐의 짐에서 메이스와 기름을 꺼내었다. 피 칠갑을 한 가람이 다가서자 뽀삐가 조금 흠칫해서 눈치를 살폈다.
이미 눈에 이성이 없는 가람은 사납게 기름을 꺼내어 꿈틀거리는 모르드레드의 잔해에 퍼부었다.
그 모든 행동들은 모르드레드의 끊길 듯, 끊기지 않는 가느다란 웃음소리 속에서 진행되었다.
“푸하핫, 꽤 하잖아?”
그것이 가람의 메이스가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내리치기 전 그가 꺼낸 마지막 말이었다.
연신 내리쳐지는 강철 메이스 속에서 모르드레드는 도저히 구조적으로 말을 하거나 웃을 수 없는 몰골이 되었다.
가람은 그 머리도 모아서 기름과 함께 불태웠다. 피어오르는 매운 연기에 사람 태우는 냄새가 섞여 퍼졌다.
그 속에서 모르드레드의 살점들은 끈질기게 재생하려다가 불타고, 재생하려다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재가 되었다.
“이제 다, 끝난 겁니까?”
숨죽이고 있던 웨이크와 뮐러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멍하니 불을 바라보던 가람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느릿하게 향했다.
텅 비어 죽어 있던 그 눈에 반짝, 빛이 돌아온다 싶더니 그녀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앗,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아뇨.”
웨이크가 짧게 대답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힘겨운 모습에 가람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작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핏덩이를 뱉어 냈기 때문이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그만큼 피도 너무 많이 흘렸다. 거의 끊어질 것처럼 숨이 가랑가랑했다.
가람은 급히 두 마리 말을 끌어다가 두 사람을 각자의 말에 올리고 끈을 대어 묶었다. 크페타인 때와 달리 들어 올리기가 수월했다.
매일 틈날 때마다 단련한 근육 덕분이다. 그러나 그녀도 많이 지쳐 있었다. 피라면 가람도 흘리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매듭을 확인한 가람은 뽀삐의 등에 오르려다가 문득, 다 타고 연기를 피워 올리는 모르드레드의 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뽀삐의 짐에서 빈 유리병을 꺼내어 재의 일부분을 쓸어 담았다.
“그건 왜 챙기는, 우욱!”
질문하던 뮐러가 다시 핏덩이를 토해 낸다. 몸이 저 지경인데도 궁금한 건 질문해야 했던 모양이다.
“그냥, 왠지 챙겨야 할 것 같아서요. 어서 가요. 어서!”
가람은 급히 모르드레드의 재가 든 병을 챙기고 말을 재촉했다.
가끔 웨이크의 지시에 따라 지름길로 달려간 덕분에 들어올 때보다 빨리 숲을 벗어날 수 있을 듯싶었다.
게다가 가람과 모르드레드가 싸우며 주변 숲을 초토화시켜 둔 덕분에 말을 타고 달릴 수 있게 되어 더욱 빨랐다.
가람은 길을 안내하던 웨이크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결국 그가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음을 깨달았다. 마음이 금방이라도 조각조각 날 것처럼 급박해졌다.
가람은 달리며 주문처럼 속삭였다. 잠들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돼요. 정신 차려요. 금방 도착해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조금만 버텨요. 잠들지 마요. 눈 감지 말아요. 죽지 마세요. 죽으면 정말로 화낼 거예요. 나 화내면 정말 무섭단 말이에요. 죽으면 안 돼요.
다행히 막아서는 라쿠카나 짐승은 없었다. 워낙 빠르게 달려서 막아설 생각을 못 했을지도 모른다.
가람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 옛 베녹사스의 끝자락에 진입했다.
밤이라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누군가가 임시로 만든 듯한 나무 산장에서는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람은 말을 타고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이닥쳤다. 갑자기 문을 박살 낼 듯 뛰어 들어온 가람 덕분에 그 전까지 제법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을 법한 실내는 썰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실내 벽에는 검과 방패, 망치 같은 무기들이 걸려 있었는데, 사냥꾼이나 용병들의 숙소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가람은 허겁지겁 말에서 내려 절박하게 소리쳤다.
“여기 사람이 다 죽어 가고 있어요! 보수는 얼마든지 줄 테니까, 도와, 도와주세요! 네?”
반응은 없었다. 급해진 가람은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 애걸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 어리둥절하고, 또 냉담한 빛깔이었다.
혼란에 빠져 있는 사람들 사이로 맥주잔을 든 남자 하나가 불쑥 나섰다. 붉은 코와 뺨에는 얼큰한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아가씨, 여기가 무슨 치료소인 줄 알아? 뭐 아가씨가 귀여운 손으로 내 이걸 좀 위로해 주면 못 도와줄 것도 없다만.”
손으로 도와주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가람은 그 말이 조롱인지 무엇인지 구분할 정신이 없을 정도로 급박했다.
“네, 할게요!”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람은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은 패스도 없다. 패스로 치료할 수도 없었다.
가람의 절박한 눈망울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한 남자들은 정신없이 음담패설을 쏟아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사이로, 뮐러와 웨이크를 실은 두 마리 말이 실내로 들어섰다.
“엥, 뭐야. 남자가 있잖아? 갑자기 도와주기 싫어지는데?”
가람은 뮐러와 웨이크를 돌아보았다. 이제 피도 토하지 않는다. 죽은 걸까. 죽은 걸까! 호흡이 가빠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가람은 정말로 이러고 싶지 않았다.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소총을 꺼내어 벽을 향해 주르륵 갈겼다.
쾅쾅 울리는 소음과 함께 벽에 걸려 있던 사냥 용구와 방패 따위가 움푹움푹 패여 든다. 웃음이 일시에 멈췄다.
적막 속에 흩날리는 것은 나무 톱밥과 먼지뿐이었다. 놀란 사람들 틈으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긴 치료소도 아닌데…….”
가람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무덤도 아니겠죠?”
유난히 배가 나오고 체구가 큰 누군가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마에서는 감출 수 없는 식은땀이 흘러내려 턱에 맺히고 있었다.
“하하, 작은 아가씨가 무섭네. 그렇게 위험한 장난을 치는 거……”
그 말을 끊고 가람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벽에 걸려 있던 곰의 머리통이 단숨에 날아가 벽 구석에 처박혔다.
“장난으로 보이세요?”
가람의 눈에는 필사적인 독기와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미 한 사람도 죽여 버렸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주 속이 시원했으니까. 생각했던 것만큼 죄책감 들고 슬프고 최악의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장난으로 보여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만약 이 두 사람이 죽으면.”
목이 멘 가람은 잠시 말을 끊었다.
“다 죽는 거예요.”
새카맣게 가라앉은 그 눈과 얼굴을 배경으로 천둥이 쳤다. 맞춘 듯한 번쩍임에 이어 곧 쿠르릉 하고 하늘이 울더니 시원한 비가 쏟아져 내렸다.
첫 빗물이 땅을 때리는 소리를 시작종 삼아 산장의 남자들은 하나둘 취기에서 깨어나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술이 깬 그들은 의외로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태도로 이 때아닌 날벼락을 맞이했다.
아니, 정체불명의 강력한 마법사를 맞이했다.
* * *
치료는 가람의 날 선 시선 안에서 진행되었다. 남자들의 태도가 고분고분하게 바뀌었다고 해서 가람은 방심하지 않았다.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던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고단했지만 가람은 오직 독기 어린 의지 하나로 감기려는 눈꺼풀에 대항했다.
하지만 역시, 너무나 피곤했다. 피로가 아니라 저주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고단함이 영혼을 내리누른다.
지금 죽는다면 죽음마저 안식일 것 같았다. 그러나 가람은 총부리를 세웠다.
웨이크와 뮐러는 사냥꾼들의 간이 침상에 뉘어졌다.
구멍이 뚫리고 낡은 가죽 하나가 변변찮게 덮고 있는 나무 침상은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상처가 많은 데다 그 색깔마저 가구와 고물의 경계를 오가고 있었지만 일단 눕자 두 사람의 안색이 훨씬 편해졌다.
가람은 침상의 옆에 총대를 세우고 비스듬히 앉아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있는 각도로 자리 잡았다.
나무 집인 주제에 화재가 무섭지도 않은지 유리도 씌우지 않은 초가 대충 놓여 있었지만 개수가 손에 꼽힐 정도라 실내는 그리 밝지 않았다.
빛 반 어둠 반의 그 방 안에서 그림자가 칠해 내는 가람은 마치 공격적인 겨울 가지처럼 보였다.
흉흉하고 성마른 기운을 뿌리는 작은 아가씨에게 남자들은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거기, 지혈제 좀 더 줘. 많이 먹여야겠는데.”
“안 되겠어. 아무리 먹여도 무리야. 치유 마법사라도 오지 않는 이상은. 뱃가죽엔 상처 하나 없는데 피를 계속 토하다니. 안에만 난도질당한 것 같군.”
치료에 재주가 있다고 해도 치료 전문의와 비교할 수는 없다. 남자들은 경험과 실전으로 몸에 익힌 주먹구구식의 의술을 최대한 펼쳐 보였지만 한계는 뚜렷했다.
가람은 그사이 건물 안의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모두 여섯 명. 어딘가 웨이크와 비슷한 분위기의 남자들이다.
“그런데 우리 치유 마법사 있지 않았어? 아인크가 치유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붕대를 들고 오가던 남자 하나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남자가 기겁하고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가람은 그 말을 들었다.
“아인크가 누구죠?”
눈치를 주던 남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옆에서 눈을 굴리던 남자는 가람의 눈매가 점점 차갑게 가라앉자 명줄 끝에 불이라도 붙은 듯 식은땀을 흘려 댔다.
마치 양초라도 된 것처럼 줄줄 땀으로 녹아내리던 남자는 가람이 철컥, 하고 총을 잡아당기자 토해 내듯 말을 늘어놓았다.
“이 산장에 있는 치유 마법사입니다.”
“도와 달라고 해 줘요.”
가람의 말에 눈치를 주던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괴짜요. 당신 마법으로 위협한다고 해도, 잠깐. 당신 마법사가 아니군? 마법사라면 누가 아인크인지 바로 알았을 텐데.”
“맞아요. 하지만 당신들한테는 마법이나 다름없을 거예요. 대책 없이 죽게 될 테니까. 어서 도와 달라고 해요.”
“소용없다니까. 그를 움직이려면 반짝반짝하고 귀하고 값나가는 것이 필요해. 대가 말이지.”
어째서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돈을 밝히는 걸까. 가람은 질리는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로 다행스런 기분도 느꼈다.
그녀는 방 한쪽에 서 있는 뽀삐에게 손짓했다. 좁은 실내에 구겨지듯 앉아 있던 뽀삐가 주춤주춤 걸어오자 그녀는 무거운 돈주머니를 꺼내어 바닥에 좌르륵 쏟아 놓았다.
얼마인지 세지도 않았다. 이제 그냥 다 귀찮았다. 건성건성 한 가람의 동작과는 별개로, 짤랑이는 소리에 방 안의 모든 시선이 확 당겨 온다.
빛을 반사하는 금화들은 필요 이상으로 보물처럼 보였다. 가람은 지친 목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여기 치유 마법사 아인크가 누구죠?”
침묵이 내려앉았다. 부족한가. 가람은 복대 속에서 반지도 하나 꺼내었다. 그리고 마치 돌멩이라도 된 것처럼 금화 더미 위로 툭 던져 놓았다.
반지는 어두운 빛과 흔들리는 촛불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반지가 금화에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누군가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직 없나요? 좋아요. 누군지 말하는 사람에게 방금 던진 저 반지를 드리죠. 저건 드워프제 반지예요. 팔면 10만 골드는 우습게 나올 거예요.”
돈으로 이렇게 사람을 조종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알 게 뭔가. 가람이 달갑거나 달갑지 않거나 한 것은 하등 중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두 남자의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기 직전이라는 것이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도 창백한 두 남자는 사실 시체라고 해도 믿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따지기에 가람은 이미 선을 넘었다. 총으로 사람을 위협한 주제에 돈으로 움직이는 것을 꺼려하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그저 가소로울 만큼 쉽게 얻을 수 있는 돈으로 이런 것이라도 얻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요.”
가람은 군중 속에서 튀어나온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턱짓했다. 치료하세요. 남자는 가타부타 말 없이 일단 금화를 쓸어 담았다. 자원했으므로 반지도 본인의 것이었다.
가람은 마치 대걸레라도 잡는 것처럼 성의 없는 동작으로 총을 잡고 형식적으로 남자를 위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진짜니까 빨리 해요.”
그 상황에서도 반지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던 남자는 가람의 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초에 비추어 작은 사파이어의 투명함을 확인했다.
괴짜기는 괴짜인 모양이었다. 죽으면 다 소용이 없는데 대체 뭘 보고 있는 건지.
어쩌면 가람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가 죽으면 숨이 넘어가려는 웨이크와 뮐러는 누가 치료한단 말인가.
남자는 꽤 실력이 좋았다. 에녹사보다야 약간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베록의 그 마법사와 비슷한 수준은 되어 보였다.
가람은 그가 뮐러와 웨이크의 배를 어루만지는 것을 보다가 문득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실소하고 말았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아니, 아닐수록 더 쉽게 웃게 된다. 웃으려고 하게 된다. 놀이동산에 있는 공포의 집에서 일부러 농담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웃음은 상황을 해결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회피하는 데는 꽤 도움이 되는 약이다. 간혹 해결해 주기도 한다.
“실력 좋네요. 왜 이런 데 있는 거죠?”
가람의 느슨한 질문에 마법사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도시에 있는 녀석들은 재고 따지지만 여기서 당장 팔이 잘린 사람은 뭐든 다 주기 때문이오. 전 재산이든, 스스로의 몸에 실험할 권리이든.”
그렇게 말한 남자는 뮐러와 웨이크의 몸에서 손을 떼어 냈다.
다 되었다는 말은 없었지만 가람은 치료가 끝났음을 깨달았다. 두 남자의 안색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숨도 고르게 쉰다.
“이대로 두면 점점 회복될 거요. 그런데 그쪽은 치료받지 않아도 괜찮소?”
가람의 앞섶은 토해 낸 피로 온통 검붉었다. 가람은 쓴웃음을 짓고 손을 저어 마법사를 내보냈다.
비명을 지르던 뼈마디가 아팠지만, 당장이라도 잠들 것처럼 가물가물한 상황에서는 그저 좋은 각성제일 뿐이다.
가람은 일부러 벽에 머리를 쾅, 부딪혀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귀퉁이에 앉아 있던 뽀삐가 그걸 보고 화들짝 놀라 푸르릉, 투레질을 했다.
“말은 계속 저기 둘 거요?”
의외로 실내가 널찍해서 뽀삐가 있을 자리 정도는 되었다. 두 마리 말은 밖에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가람은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상관하지 말고, 나가요. 그리고 내 말들을 잘 돌봐 주면 목숨뿐만이 아니라 거하게 보상도 할 거라고 전해요. 모두에게.”
“그러지.”
“그리고, 들어오지 마세요. 실수로 죽일지도 모르니까. 살금살금 들어오다가 머리가 날아가도 전 몰라요.”
그 말에 남자는 대답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지친 적막이 내려앉았다. 창도 없는 방 안은 춤추는 촛불로 온통 붉었다.
가람은 멍하니 그 불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던 모르드레드, 재.
적막은 가람의 기억을 꺼내기에 좋은 탁자가 되어 주었다. 가람은 끔찍한 기억의 파편들을 꺼내어 그 위에 늘어놓았다.
머리를 부수고, 뇌수가 튀었고, 소리 지르면서 입 안에 들어가 좀 먹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옷에는 모르드레드의 살 조각이 말라붙어 있었다.
끔찍했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가람은 기억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기억은 달려들어 지친 가람을 유린했다.
가람은 눈도 감지 못하고 스스로 저지른 끔찍한 공포 영화와 잔혹한 영상들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했다.
“……나.”
죽였다. 으깨었다. 괴롭냐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그래서 무서웠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도리어 그것이 더 무서웠다. 이런 모습의 자신은 모른다. 이런 가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가람의 의식이 두 개로 나누어져 서로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누나.”
누군가의 부름에 가람은 빠져든 적 없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드니 언제 다가왔는지 뽀삐가 앞에 있었다.
까맣게 빛나는 말의 눈이 동글동글하게 가람을 올려다보았다.
“응?”
“누나, 저 배고파요.”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거의 먹은 게 없다.
모르드레드가 준 고기는 뜯는 둥 마는 둥 해서 제대로 삼키지도 못했었다. 뽀삐도 그만큼 굶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가람은 길게 뺀 뽀삐의 목을 쓰다듬어 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가서 애들이랑 먹고 와.”
가람은 지친 육신을 일으켜 뽀삐의 등에서 짐까지 내려 주었다. 뽀삐는 가람의 얼굴에 뺨을 스치듯 비비곤 곧 방을 나갔다.
텅 빈 방에 적막과 가람, 끔찍한 기억 셋만이 남았다. 그 속에 시간은 없어서, 뽀삐가 다시 돌아왔을 때 가람은 시간과 시간 사이가 잘려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나.”
가람을 연신 부르던 뽀삐는 가람이 고개를 들자 조심스레 입에 물고 있던 가지를 건네었다.
받아 든 가람은 가지 끝에 열매들이 망울망울 매달려 있음을 발견했다. 마치 살구 같은 열매들이 탐스럽기도 하다.
“먹어요. 맛있어요.”
가람은 숨을 삼켰다. 뜨거운 무언가가 확 치밀어 올라 눈을 통해 뚝뚝 떨어졌다.
흐느낌도 없이 가람이 눈물만 뚝뚝 흘리자, 뽀삐는 안절부절못하며 가람의 두 배는 큰 머리로 이리저리 가람의 안색을 살폈다.
가람의 배에 코끝을 대고 올려다보는 뽀삐의 콧잔등에 눈물이 뚝, 뚝 떨어져 털을 적신다.
“침 묻었을까 봐 그래요? 침 안 묻었어요. 일부러 나뭇가지 힘들게 꺾어서 물고 왔어요. 정말인데.”
뽀삐의 눈까지 덩달아 울망울망하게 변해 가자 가람은 열매가 달린 가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뽀삐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뽀삐는 앉은 채로 머리만 가람에게 안겨서는 숨죽였다.
코를 박은 가람의 옷에는 피와 체액, 흙과 여러 가지 더러운 것들의 냄새가 났지만 뽀삐는 가만히, 가람이 천천히 흐느끼고 다시 그 떨리는 어깨가 진정될 때까지 자신의 머리를 빌려주었다.
“고마워.”
가람은 심호흡을 해서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뽀삐가 가져온 열매를 먹었다. 무슨 맛인지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뽀삐는 가람이 열매를 먹는 것을 확인하고 살포시 일어나 문 앞에 앉았다. 안쪽으로 여는 문이라, 자신이 이렇게 지키고 있으면 열지 못한다.
“누나도 좀 자요. 제가 여기 지킬게요.”
뽀삐의 온기가 아직 무릎에 남아 있었다. 그래, 심각해질 것 없다. 어차피 그놈은 끝났다. 저 병에 재가 되어 담기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한 가람은 미소 지으며 그 재가 담겨 있는 병을 꺼내었다.
죽었고, 그 끈질긴 재생력이 불길해 혹시나 재생할까 봐 재까지 이렇게 챙겨 오지 않았던가. 더 이상 큰 적은 없었다.
이제 그런 일은 더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모르드레드는 이렇게 죽음의 증거까지 남겼으니까.
재가 든 병을 꺼낸 가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동심원이 그려 내는 수면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아 얼어붙은 표정의 가람이 천천히 병을 들어 올린다.
시선이 와들와들 떨리고 눈앞의 세상이 흔들려 무너지는 충격 속에서 가람은 이 일이 환상이나 꾸며 낸 스스로의 광증이 아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병은 텅 비어 있었다. 함께 쓸려 들어갔던 흙가루만 뒹굴고 있을 뿐.
어디에도 모르드레드의 재는 없었다.